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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으로 가는 길에 회족 보호구역을 지났다. 중국에는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한족 이외에 55개의 소수 민족이 있는데, 회족도 그 중의 하나로
외모로는 한족과 쉽게 구별할 수 없으나 종교와 습속이 다르다. 특히 이들은
회교 계율상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회족과 결혼하려는 한족은 결혼
3일 전부터 잿물을 먹고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 내야 한다는데,이는
이제까지 먹은 돼지고기와의 인연을 끊으려는 습속으로 생각된다.
천진 근교 향촌을 지나면서 고속도로가 시작된다. 도로벽에 보이는
논밭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봄기운을 입어 푸릇푸릇하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이 이어진다. 인민들의 집은 주로 벽돌로 지어졌는데 창틀과
문설주에 울긋불긋 단청이 치장되어 있어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절같이
보인다. 북경이 점점 가까워 오면서 농촌의 집들도 모양이 제법 단정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도시 근교 농촌 인민들의 소득이 높기
때문이란다.
천진을 떠난 지 약 3시간만에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북경의 장안로에
들어섰다. 장안로는 천안문 앞을 지나는 북경의 주거리로서 그 길이가
55킬로미터에 이른다. 현재의 북경 위치에는 춘추 전국 시대 (B.C. 475 -
221)부터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으니 주나라 때에는 이를 연경이라 하다가
후에 중도 - 대도 - 북평 - 등으로 불렸으며, 명나라(1421년) 때부터 현재의
이름인 북경으로 개명되었는데 1928년 공산당 정권이 수도로 정하면서
북경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모 정권은 새로운 도시 계획을
수립하면서 많은 고적을 헐어 버렸으나 13세기에 쌓은 원나라 때의 성벽이며
명 - 청 시대의 고궁 등은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버스가 유서 깊은 북경 호텔을 지나는가 했더니 금방 천안문 앞에 이르러
말로만 듣던 자금성이며 인민대회당, 모주석 기념관, 천안문 광장 등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천안문은 중국공산당의 상징적인 건물로 모택동이
1949년 10월 1일에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유서 깊은 곳이다.
빠듯한 공무 일정에 쫓기다 주말에는 중국 관광의 대명사인 자금성,
만리장성, 하궁, 명 13능을 한꺼번에 마라톤 하다시피 구경하였다. 북경의
중심부에 잇는 자금성은 명나라 3대 황제 주강이 남경으로부터 1421년
천도한 이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까지 24대의 황제가 500여 년간
거처하던 궁성이다. 사대문의 높고 붉은 담장 안에는 황색 지붕으로 된 크고
작은 궁전들이 즐비하게 있는데 방의 수가 무려 999개에 이르며, 이 중
주궁전은 태화전, 중황전, 보화전 으로 청대 역사상 중요한 행사들이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 한다. 태화전을 비롯한 주요 궁전의 내부 기둥은 전부
금장 기둥으로 황제의 상징인 용이 새겨져 있으며 옥좌, 병풍 등이 모두가
휘황찬란한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옥좌 좌우에는 만수의 상징인 실물
크기의 칠보 학이 시립하고 있으며, 천장에는 여의주를 물고 용트림하는
황금 용들이 조각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보화전 뒤쪽 계단의 거대한
운용대석(가로 3.07m, 세로 16.57m, 두께 1.7m)으로 이단일석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큰 돌을 어떻게 운반해 왔는지
불가사의하다. 이 밖에도 아홉 마리의 용을 쌔긴 용벽과 홍루몽을 주제로 열
개의 거대한 벽화를 그려 놓은 장춘궁, 포석정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모양이
못한 유배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과 유적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너무 밀집해 잇고 자연과의 조화가 부족해 우리 나라의
창덕궁이나 비원보다는 아담한 맛이 적어 보였다.
여름 궁전으로 보다 잘 알려진 이화원은 청나라 황제의 별장으로서 19세기
후반 광서제와 서태후는 주로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한다. 이화원이 여름
궁전으로 불리는 것은 북경의 여름 날씨가 더운데다가 자금성은 바닥이 전부
돌로 되어 있어 태양열에 달구어지면 로스구이 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역대 황제들이 여름이면 항상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태후는 특히 기질이 방탕하여 광서제 사후에는 이곳에서
질탕하게 지내다가 부의 에게 권력을 물려준 후 죽어 자칭 용이 되었다
한다. 궁전에서 호수로 나가는 긴 복도와 복도 벽에 새겨진 각양각색의
그림이며, 돌배로 유명한 석방과 호수를 판 흙으로 만든 인공 산 위의
불향가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이 북경 근교 팔달영의 만리장성을 찾았다.
말이 만리장성이지 압록강변에서부터 험한 산맥과 초원, 사막을 지나 눈
덮인 천산 산맥까지 뻗어 잇는 정성은 실제 길이가 7300킬로미터에 이르며,
인공 위성에서 지구를 볼 때 유일하게 보이는 인공 구조물이라니 그 위용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라 짐작하기 힘들 정도다. 중국 역사상 춘추 전국
시대 이래 20개 왕조가 2000년간 건설한 성벽을 모두 합하면 5만 킬로미터가
넘는다 하며, 투입된 재료로 폭 5미터, 두께 35미터의 고속 도로를 건설할
경우 지구를 30 - 40 바퀴 돌릴 수 있다 하니 실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물
중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 주석도 일찍이 (장성에 가
보지 못한 남자는 진정한 장부가 아니다)라고 한바 있다.
중국 사람들이 당초 장성을 쌓게 된 이유는 북방 흉노족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로 장성을 건설한 것으로는 B.C. 9세기경 주나라
선왕 때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봉화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보다 본격적인 것은 서기 221년 진시황이 대장 몽윤에게 병력
30만 명을 주어 요동에서 임조에 이르기까지 만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게 한
것이다. 장성은 이후 북제 시대 (555년)에 다시 18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연장 보수되었으며, 명나라 태조 주원장 때 대장군 서달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7300킬로미터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지키기 위해 9개 변과, 11개 진에 100만 군사를
나누어 주둔시켰는데, 진에는 진수가 있어 사령관 역할을 하였고, 그
아래에는 분수, 수비, 협수 등의 계급이 있어 엄격한 군율로써 이들을
다스렸다 한다.
당시의 군사적 용도로 볼 때 장성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나 오늘날에는 한낱
관광지에 불과하니 역사는 무상하다 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줄 것이니 백성이 땀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다 할 것인가? 만리장성에 올라 북방을 바라보던 장수들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
돌아오는 길에 명 13능에 들렀다. 이 중 이미 발굴된 정릉은 명 13대
신종, 주익균의 무덤으로 익균의 생전인 1584년부터 6년간 매일 3만 명이
동원되어 건설되었고, 사후(1620년)에 먼저 죽은 효정 황후와 합장되었다.
원래 이 지하궁 내에는 신하들의 방도 따로 있어 그들도 사후에 합장되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나 잦은 개봉으로 인한 도굴을 우려해서인지 실제로는
묻히지 않았다.
궁전은 가로 87미터, 세로 47미터 넓이의 공자형 지하묘로서 건축 당시
중국의 1년 국민 총생산(GNP)이 은 400만 냥이었던 것에 비해 공사비가 은
800만 냥 들었다 하니 가히 그 규모와 민생의 도탄을 집착할 만하다.
무엇보다 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웅장한 돌문과
빗장들이 인상적이었으며, 죽어서도 황제가 되어 백성들 앞에 군림하려 했던
대리석 옥좌를 바라보니 신종은 지금 어디에 가있고 새로 만든 그의 나무
관만이 쓸쓸히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는지?
북경은 중국의 수도인 만큼 요리 또한 다양하고 유명하다 중국의 4대
요리인 북경채, 사천채, 산동채, 광동채 등 진짜 중국 요리를 어디서나 맛볼
수 있고 티베트와 몽고 음식도 즐길 수 있으며, 물론 한국 요리, 즉
조선채도 맛볼 수 있다. 한국 요리점으로는 수 없이 많으며 진로주가
단고기(개고기), 평양냉면 등도 즐길 수 있어 입맛에 따라 여러 가지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요리에 곁들여 대개 분주나 오량액 등 독주를 마시는데,
도수가 보통 50 - 60도이다. 닉슨과 모택동의 건배주로 사용해 유명해진
마오타이는 소득 수준으로 봤을 때 비싼편이다. 북경에서의 쇼핑
상품으로는 중국 비단이나 비취석, 조각, 동인당 약품 등이 유명하나,
유리창 문화가에 들러 붓이며 벼루 - 중국 그림 - 병풍 - 액자 등을
살펴보면서 조선 시대 우리 사신들이 이런 것을 사 갔겠구나 하며 음미해
보기도 하였다.
그림설명: 팔달문의 만리장성 / 모택동은 만리장성에 올라 보지 못한
남자는 진정한 사나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임시정부가 있던 도시 상해
3월 11일 아침 11시 상해 공항에 도착하였더니 그곳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상해는 과연 한때 세계 인구 제1의 도시답게
광활하게 퍼져 있었으며, 양자강 하구의 황포강을 끼고 높고 낮은 빌딩들이
대도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날씨도 따사롭고 공항 주변 잔디밭에는 눈에 익은 민들레가 소담하게 피어
마치 조용한 시골 마을에 온 기분이었지만 차창 밖으로 비치는 상해의
풍경은 이제까지 보아 온 중국이 아닌 대만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우선 번듯한 거리며 즐비한 빌딩과 면모를 갖춘 상가의 간판,
그리고 화려한 인민들의 옷차림이 국방색 외투에 인민모를 쓴 천진 이나
북경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상해 사람들은
내의 등 빨래감과 깨끗하지 못한 이불을 대로변이며 창밖, 담장 등 아무데나
너절하게 널어놓고 있었는데, 이는 나폴리 사람들의 습성과 비슷해 그곳
빨래가 (나폴리의 깃발 Napolian flag)이라 불리는 것을 생각나게 했다.
상해는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방된 도시라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분위기가 밝고 사람들이 개방적이며, 이 때문에 자유화의 물결
또한 가장 빨리 온 곳이다. 하지만 주거난이 극심하여 방 한두
개에 공동 화장실과 부엌을 쓰는 아파트를 구하는 데 몇 년씩 차례를
기다려야 한단다. 따라서 결혼 후에도 자연히 부모들과 작은 집에 서나마
같이 살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부부나 연인들은
주로 공원을 이용해 사랑을 나누는데, 상해의 경우 황포 강변이나 노신 공원
등이 유명한 데이트 장소로 꼽힌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생활이 보편화되어
있어 서로 낯뜨거운 장면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유(?) 있는 생활도 도회지 이야기이고, 내지인 티베트,
신강성 등에 사는 인민들의 생활은 몹시 궁핍하여 사람과 돼지의 생활의
다른 점이 밥그릇뿐이라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따라서 자연히 대다수의
인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와 성으로 이주하고자 하기 대문에, 사천성 같이
기후가 좋고 문물이 풍부한 곳은 큰 국가의 인구에 달하는 1억 1천만 명이나
몰려 살고 잇다. 심지어는 호구가 없으면 자유로이 거주 이전을 못하기
때문에 대도시 호구에는 프리미엄마저 붙어 잇다는 웃지 못할 일이 대륙에서
실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실 때문에 상해의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젊고 교양
있다는 여성들은 중국 청년과는 결혼하려 들지 않는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늘 꿈꾸는 깨끗한 옷과 포근한 침대 등은 결혼하는 날부터 그림의
떡이 되고, 더러운 단칸방 하나 얻는 데도 몇 년을 기다려야 하니 그야말로
인생에 망조가 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제일 선호하는
신랑감은 미국인이다. 미국인들과 데이트하여 운이 좋아 미국으로 시집을
가거나,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모아 미국
유학을 가서 그곳에 정착하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상해에도 밤 술집이 잇다 해 호기심에 가 봤더니 정말 사회주의 국가에도
이런 룸살롱과 디스코텍 그리고 화려한 복장의 호스티스들이 잇나 싶어
놀랐고, 또 이들이 모두 다 젊고 예쁘다는 데 놀랐으며, 또 만나자마자 (돈,
돈)하면서 돈 달라는 얘기만 하는 데 다시 한 번 놀랐다. 대개 이들도
앞에서 말한 부류에 속하는 대외 지향적(?)인 아르바이트 생들인데, 잠깐
옆에 앉아 얘기하고 춤 한번 춰주다 도망가는데
호기심에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상해 잡기단(서커스)에 가서
팬더의 재롱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못하다.
상해에는 북경과 같이 굵직한 관광지는 많지 않으나 오밀조밀하고 볼 만한
곳이 많이 있다. 북경에는 이화원이 유명하듯이 여기에는 예원이 유명하다.
예원은 원래 사천성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퇴직 관리가 1559년 건설한
명대의 정원이다. 넓이가 6만여 평 정도에 비취전 등 4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며 기암괴석, 동굴 등이 꽉 들어차 있고 수양버들과 연못들이 잘
조화를 이룬 중국식 정원으로 현재는 국가 중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중국인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이곳은 1842년 아편 전쟁 때
영국군이 진주하여 사령부로 사용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예원을 방문하면 꼭 주위의 (옛 상해 old Shanghai)를 한번 들러 보는
것이 좋다. 아편 전쟁 이전부터 주민들이 살았던 이곳은 원래 아편과 범죄의
소굴이었으며 복작거리는 인민들의 진솔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기 대문에 크고 작은 기념품
가게들이 산재해 있으며 만두, 찐빵 등 우리 입맛에 익은 값싼 음식을 파는
음식점들도 즐비하게 있어 큰돈들이지 않고도 쇼핑과 식도락을 즐길 수
있다.
또 상해는 중국 공산당의 발상지인 만큼 그와 관련된 유적도 많다. 중국
공산당의 최초 의사당이었던 가정집이며, 손문 선생의 옛 집, 송경령 여사가
노후를 보낸 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고, 주은래 수상이 1920년대에 거주했던
주공관도 있다.
내가 손문 선생의 집을 찾아간 날은 공교롭게도 휴관하는 날이라
주공관만을 찾아봤다 조그마한 정원이 딸린 세멘트조 3층 양옥집인
주공관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 주은래가 상해에 잠시 거주하면서 공산당
운동을 할 때 살던 집이다. 1층에는 회의실과 사무실이 있고, 2층
집무실에는 낡은 책상과 양복 한 벌 및 그가 즐겨 쓰던 중절모자가 옷걸이에
그대로 걸려 있으며 옆방에는 그가 잠을 자던 소박한 나무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3층에 올라가면 비서관들이 쓰던 나무 침대 3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방에는 동필무 내외와 이이들이 쓰던 작은 방 1개가 있는데, 그
안에는 넓은 집으로 옮기라는 권유를 뿌리친 동동지가 이 작은 방에서
식구들과 함께 고생스럽게 살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해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임시정부와 홍구 공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건물은 상해 마당로 306-4번지에 위치해 있는
낡은 3층 연립 주택 중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초라하였다. 이곳에서
김구 주석이며 우리의 애국 열사들이 밤낮없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 이 집은 개인 명의로 되어 있었는데, 상해
시가 이 집을 대폭 수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로 보존할 계획이라니
매우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홍구 공원은 현재 노신 공원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의 지시로 일본의 상해 주둔군 사령관 백전대장 등을 죽이고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그 자리에는 이름 모를 난이며 목련과 민들레가
활짝 피어 있었고, 봄동산에는 지금은 은퇴한 중국 노인들이 포커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청 직원의 말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
독립사에도 한 대목 알려져 있으며, 요즈음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고 있어 공원 기념관에는 조선족 안내원 한 사람이 배치되어 있다 한다.
외국 관광을 와서도 흥미거리만 찾지 않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거대한 대륙 중국을 떠나는 날엔 비가 내렸다. 비행기에 올라 나는 우리
선조들의 얼이 스며 있는 이곳 상해에 언젠가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오리라는 생각을 하며 젊은 열 하루 동안의 여행을 음미해 보았다.
첫댓글 고루 고루 순례 하셨네요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