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밀레니엄 축제의 열기
지난 연말 연초에 우리는 엄청난 양의 소위 새 천년 맞이 행사에 우리의 눈과 귀를 필두로 한 온 몸과 마음을 쏟았다. 아니 쏟았다는 말보다는 빼앗겼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런던에서는 14개 테마파크의 문을 열어 유럽 밀레니엄 축제의 분화구 역할을 하였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폭죽을 2만발이나 쏴서 축제의 분위기를 돋구며 에펠탑 전체를 전구로 밝혔으며,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참여하는 밀레니엄 축제. ……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축제가 열렸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갖가지 행사를 열었다. 정동진, 강릉 경포대, 토함산…… 등 해가 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모든 곳과 서울 시내 한 복판 세종로에서 새천년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열 두 대문 축제, 그리고 불국사. 내소사, 조계사의 축제에 이르기까지 축제가 열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AFP보도에 의하면 미국 국민중에서 밀레니엄 파티를 계획조차 않했던 사람이 72%나 되고, 캐나다 역시 70%, 영국은 50%, 네덜란드나 폴란드 등 유럽인들은 75% 이상이 새 천년 행사를 안 할 것이라고 지난 연말에 대답했고, 이슬람교도가 많이 사는 중동지역과 중국·일본 등지에서도 그렇게 요란한 행사는 없었다. 물론, 우리 형제들이 살고 있는 북녘에서도 밀레니엄 행사는 없었고 남한의 국민들도 과연 얼마나 그 대열에 합류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대다수가 그날이 그날이라는 심정으로 조용히 일상스럽게 맞이했을 것이다. 특이할만한 것은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새 천년 맞이 행사를 벌인 나라가 바로 자랑스러운(?) 우리 나라라는 것이다.
새천년 새해맞이 행사에 1,500만명이 움직였다고 언론에서는 열띤 보도를 했지만 지리산에 간분들 빼고는 일기 때문에 새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새해는 마음속의 해를 품는데 그친 것이다.
2) 밀레니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밀레니엄(Millennium)이란 무엇인가? 밀레니엄이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가? 아니 세계를 고민하게 하는가? 밀레니엄은 1,000을 뜻하는 라틴어 mill와 연(年)을 나타내는 ennium의 합성어로 예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서력(西曆)인 AD(Anno Domini)에 바탕을 둔 단어다. BC라는 말은 '예수크리스트 탄생이전’이라는 말이며, AD는 물론 예수 탄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우리들의 구세주(가 활동하는)연대’라는 의미이다.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구약성서의 요한 계시록 20장 1절에서 7절까지이며, 그 내용에 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을 통치한다는 신성한 천년왕국(千年王國)을 뜻하는 날이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 이후 좌우 이념간의 대립적 표면 평화의 양상인 냉전구조가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깨지자 급속도로 자본주의 권에서는 1민족 다 국가의 통합 현상이 벌어지고, 공산주의 권에서는 다민족 1국가의 민족별 분국 현상이 늘어났으며 이 변화의 과정과 정보화의 세계 표정을 글로벌라이제이션 즉 세계화라고 부르며, 이제는 의미도 모르고 있던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의 이름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것으로 이 어령씨 등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밀레니엄이라는 것은 서구의 2대 사조인 헤브라이즘의 핵심 사고로서, 역사관(歷史觀)으로 보면 우리 동양의 순환사관(巡還史觀)에 단절을 가져다주는 직선사관(直線史觀)으로, 세상 만물과 세계의 여러 구조적 단체들의 과거·현재·미래가 웅축된 현재적 삶을 부정하는 결과가 됨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3) 불교에서 바라보는 시간
시간은 우주 삼라만상의 마음과 함께 복잡미묘한 동선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의 방정식으로 풀이하기에는 복잡한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동양의 사상계 특히 불교의 고학 체계에서는 중도적·중층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시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선사 덕산(德山)스님의 오도(悟道)하게된 계기가 되는 하나의 사건에도 시간을 보는 불교의 관점이 들어 있다. 달마대사의 후예임을 자칭하는 선사들이 중국 남방의 불교계를 강타하자 본방의 교학적 불교계를 이끌어 가던 당시의 학승인 덕산스님은 발끈했다. 해서 무식한 남쪽 오랑캐들의 코빼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심산으로 불교의 심오한 철리(哲理)가 담겨 있어 승속간에 인기가 높은 금강경(金剛經) 해설서를 바랑에 담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다.
도중에 힘도 들고 배도 고프고 해서 요기나 할 생각으로 길가에서 떡을 팔고 있는 노파에게 다가가 떡을 청했다. 그런데, 노파는 떡 팔 생각은 하지 않고 덕산에게 바랑에 들어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내용을 이야기하자 묘한 말을 했다. 자기가 질문을 해서 맞추면 떡을 그냥 주지만 못 맞추면 돈을 내더라도 떡을 줄 수 없다는 거였다. 별명이 ‘주금강(周金剛)’일 정도로 금강경에 능통한 그가 당연히 웃음으로 받아들이자 노파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금강경 일체동관분 제18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했는데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먹을 거냐는 것이었다. 의외의 어려운 질문을 받고 끙끙거리며 대답을 못하던 덕산은 노파의 충고대로 용담(龍潭)스님을 찾아가 도를 깨치고 평생 선을 닦고 지도했다. 덕산의 오시(悟時)일화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동산스님은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다리가 흐른다(橋流水不流)’했고, 아인슈타인 박사는 관찰자의 상태 즉 심리(心理)와 운동(運動)에 따라 피관찰물의 운동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2000년 1월 1일은 1999년간 떠오르고 졌던 그 태양이 아닌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2천년 전에 떠올랐던 그 태양이 솟으며, 2000년 1월1일은 1999년 12월 31일의 다음 날이라는 것이 시간을 바로 보는 시각이다.
대승불교의 거장이며 8종(八宗)의 종조(宗主)로 일컬어지는 용수(龍樹)보살의 저서인 중론(中論)의 관시품(觀時品)에는 바로 우리 불자들이 가져야할 시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중론에서 줄곧 주장하는 것처럼 시간(時間)이라는 것도 절대주체(絶對主體)의 개념이나 상대객체(相對客體)의 편협한 개념이 아닌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보고 살아야만 시간과 내가 하나로 될 수 있으며 그 삶이 바로 중도적 살이며 깨달음의 삶이라는 것이다.
4) 역법의 차이
여기서 우리는 시간과 역법에 관해서 고민해야 한다. 알다시피 올해는 서력으로 2000년이지만, 불기로는 2544년, 단기로는 4333년이고(중국은 4636년, 비잔틴은 7508년, 이슬람은 1420년, 유대력은 5760년이다. 역법은 태음력(太陰曆, 태양력(太陽曆),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등이 많아 매우 복잡한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중에서 흔히 양력이라고 하는 것이 태양력이고, 음력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태음태양력으로 음력의 요소에 24절기의 양력 요소를 절충한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양력은 그레고리우스력인데 1582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1태양년의 길이(=365.24219일)가 실제 1년과 거의 같도록 윤년의 횟수를 조정했는데 이는 부활절의 제날짜를 찾기 위함이었다. 부활절이 춘분 뒤 첫 보름을 지낸 첫 일요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줄리어스 시저가 만든 율리우스(=줄리어스의 이태리식 발음)력은 춘분이 실제보다 10일이나 앞당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1582년 10월 4일 목요일을 10월 15일 금요일로 변경시키는 역사적(?)인 일을 감행했다. 그래서 1582년 10월 5일부터 15일이 역사에서 없어져 버리고, 그를 따르는 서양의 모든 달력과 우리 나라도 고종 황제의 조칙에 의해 음력 1895년 11월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쓰면서 11월 18일부터 12월 31일까지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일이 든 달의 날짜 수를 관계없는 2월에서 빼 내온 시저와 아우구스투수 때문에 2월은 턱없이 작고 7월(시저의 생일), 8월(아우구스투수의 생일)은 연속해서 크게 됨으로써 자연의 변화를 알기 위한 역법의 미기를 상실한 채로 쓰고 있는 것이 오늘의 양력인 것을 알아야 한다.
5) 밀레니엄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
이제 다시 논의의 첫 초점인 밀레니엄 문제로 돌아가 보자. 구약 요한 계시록 20장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1.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2. 용을 잡으니 곧 뱀, 마귀, 사탄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다가 그 후에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않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리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7. 천년이 차며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니,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燒滅)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 내용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뒤 사탄의 시기(=예수없는 시기=플라네세= =길을 잃지, 방황하지 의 뜻으로 하나님 즉 여호와를 믿지 않는 시기가 천 년이라는 뜻)를 보내고 ①예수의 증거, ②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인 자, ③우상 경배 않는 자들이 예수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한다는 구절을 들어 여기에 맞는 라틴어 밀레니엄을 새 천년 왕국으로 해석하며 천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또 그 뒤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부활의 시기를 지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는 사탄의 무리들이 들고일어나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워 없앤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정확한 내용이 아닌 해석을 근거로 해서 예수와 여호와를 믿는 이들이 밀레니엄이라는 말을 불태워 없애질 것으로 표기되는 불신자들인 불자(佛子)가 굳이 써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불문가지다. 또한, 시간은 길이, 면적, 무게처럼 직접적인 인간의 5근(五根:눈, 귀, 코, 혀, 몸)으로 느끼기보다 제6근(六根:뜻)으로 인식하는 심리적 가치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은 절대적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상대적 약속이 있을 뿐이다. 시, 분, 초의 개념 자체가 인간들이 맺은 약속의 길이 일 따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수행할 때 나날이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