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시민 중에서 1억원 이상 기부한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한 사람이 현재 3명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개신교 원로 목사 한 분이 자신의 모교인 언양초등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주고 거액의 장학금을 기증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리고 가끔씩 불우이웃을 돕거나 장학사업을 하는 분들에 대한 보도도 보게 된다. 이러한 기부와 나눔은 울산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울산에는 이런 일들을 실천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이런 선행을 조명하여 적극 소개할 필요가 있다.
남구 태화로터리에서 태화교를 건너면 길가에 작은 비석 한 기가 서있다. 그것은 참봉 이만령(李萬齡)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이만령의 업적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세운 비석이다.
비문을 보면, 이만령(1708~1784년)은 지금의 태화교 북쪽 부근의 물이 합류되는 곳에 무지개 모양의 다리인 홍교(虹橋)를 만들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했다. 다음으로, 군사적 요충지인 울산에는 많은 관리들이 다녀가고, 군사들이 머무는데 따른 비용 지출이 많았다. 이에 그는 돈을 내어 이자를 불려 제공하여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울산 객사(客舍, 학성관)가 불에 탄 뒤, 이것을 재건할 때 팔백 냥을 출연하여 건립을 도왔다. 그는 울산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돌아갈지 모르는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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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공립울산도서관으로 활용된 태화루. |
1860년(함풍 10년) 10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비면이 흐릿해 지고 읽을 수 없어 1866년(동치 5년) 9월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비문의 주석(註釋)은 <남구문화> 제6집(2008년)에 실린 김송태 선생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이만령의 선행은 <울산읍지(蔚山邑誌)>(1934년)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는 선행을 한 사람들을 기록하기 위해 ‘선적(善蹟)’편을 편성했고, 이어서 ‘자선(慈善)’편을 붙여 놓았다. ‘선적’편에 수록된 인물로는 이만령을 비롯하여 이의립(李義立) 최석해(崔錫海) 신성웅(辛聖雄) 김지현(金志賢) 유택주(兪宅柱) 김진수(金振守) 김홍조(金弘祚) 김좌성(金佐性)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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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세빈 |
이들은 주로 객사나 향교 같은 공공시설물을 수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 학자금을 제공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데 적극 나섰다. 대(代)를 이어 향교 시설 보수에 도움을 준 경우도 있었다. 최석해는 숙종 31년(1705년)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할 때 기와 수백 장을 제공했으며, 영조 28년(1752년) 명륜당(明倫堂)을 중수할 때 돈과 물품을 제공했다. 그의 손자 최준문(崔俊文)도 1800년 향교를 수리할 때 논을 헌납하여 도움을 주었다.
김좌성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했고, 유지(有志)들을 알선하여 거액을 내어 현재 울산초등학교 앞에 있던 태화루를 중수했고, 도서관을 설치하여 많은 서적을 사 주었다고 한다. 1923년 2월 24일자 동아일보에는 태화루에 향교재산으로 경영중이던 울산도서관이 본월 11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공개되었다고 하며, 팔백여 종의 도서가 비치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21일자 동아일보에는 울산도서관이 점차 열람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독지가의 기부가 있었다고 하며, 관사를 수리하는 동시에 도서도 다수 비치할 계획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 내용이 바로 김좌성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울산 최초의 공립도서관이 김좌성과 같은 지역 유지들의 성원과 지원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울산읍지> ‘자선’편에는 김제유(金濟瑜) 정도헌(鄭道憲) 박의택(朴義宅) 노순권(盧恂權) 이규의(李圭儀) 박연택(朴鍊宅) 이상민(李相旼) 이훈영(李壎榮) 이규중(李圭中) 박윤환(朴允煥) 이시영(李時榮) 최성귀(崔聖貴) 김상로(金相魯) 박선동(朴善東) 박관주(朴寬珠)의 선행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제공하여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요컨대 이들은 조선 후기와 근대에 기부와 나눔을 통해 지역사회에 귀감(龜鑑)이 되었기 때문에 <울산읍지>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한편, 울산에는 일제시기 항일(抗日)운동을 위해 재산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먼저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년) 의사는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왕산 허위(許蔿, 1855~1908년)선생에게 수학했으며, 양정의숙에 진학하여 법률과 경제를 공부했다. 일제 강제병합 전에 판사 등용시험에 합격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12년 대구에 곡물상인 ‘상덕태’ 상회를 만들어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용했다. 1915년에는 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이 되어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경주로 모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피체되어, 1921년 8월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상진은 양반 가문의 대지주 출신이었으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바쳤다. 박 의사 이후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성세빈(成世斌, 1893~1938년)은 동구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우신고등학교 이현호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그는 1922년 5월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지역 유지의 후원을 받아 일산동에 보성(普成)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스스로 학교 터를 정하고 건물을 지어 학교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는 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교육활동에 일제는 온갖 방해를 했으며, 결국 1929년 3월 학교는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주민들은 성세빈의 노력과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표창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후 성세빈은 신간회 울산지회 검사위원장 겸 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이렇게 박상진과 성세빈의 기부는 독립운동과 교육활동을 위해 전 재산을 헌납한 사례이다. 박상진에 대해서는 그동안 울산청년회의소와 기념사업회의 활동, 그리고 울산시의 노력에 의해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성세빈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울산 시민에게 큰 자긍심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이들의 크고 깊었던 민족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된다.
자기 재산을 아깝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크고 작은 기부와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이들이 바로 울산을 아름다운 고장으로 만들어 왔던 주역이었다.
고헌 박상진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