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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23> 성탄절, 나사렛 예수, 이방의 갈릴리, 스불론과 납달리,흑암과 그늘에 앉은 자들의 사망의 땅, 말 구유, 동방박사, 애굽으로의 피난, 마음의 빈방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셔야 했는가?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재창조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을 구원하여 안식을 주고자 함입니다. 어떤 세상입니까?
[예레미야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타락한 세상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의 세상 모습이기도 합니다(창 1:2).
▶ 진리의 길을 모르고 혼돈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에수님께서는 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 물을 먹고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그들에게 생명의 생수로 채워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창 1:2, 렘 4:23).
빛이 없는 죄악의 어둠 속에 있는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요 8:12, 9:5,11:9)
→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 이제는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 5:27).
■ 또 한가지 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구원하시고자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두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다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장로교 교단에서는 선택된 백성만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 애굽으로의 피난과 귀환, 나사렛에서의 자라나심과 사역 등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호적하라는 영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호적하기 위하여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베들레헴으로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갔던 것입니다.
자기 족속이 속한 지역에서 호적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외지에서 사람들도 많이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 여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벌써 여관은 다 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구간(외양간)에 들어가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는 말, 소들이 출산하는 곳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누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차서 아기를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아기 예수님인 것입니다.
700년 전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상고(히, 케뎀, 고대에, 오래 전에, 태초에),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이다”
▶ 예수님의 사역기간 중에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알고 메시야가 아니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베들레헴 탄생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 육신의 눈만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알아 보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로 육신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 어렵고 구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구원 받고자 하면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분명히 성경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히, 베트+레헴)은 원어적으로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 자기의 살을 십자가에서 찢기심으로 우리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이 태어나실 장소가 됨을 예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 6:35, 48).
→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 애굽으로의 피난, 자라신 곳과 사역 장소가 모두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모든 것이 우연이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과정이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태어난 때도, 장소도, 관계도, 경력도 하나님 안에서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강보에 사서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 구유(히, 파트네)는 구유와 같은 여물통도 될 수 있고, 확대된 의미로 외양간, 마구간도 됩니다.
→ 예수님이 탄생한 계절은 목동들이 양를 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겨울이 아닌 9~10월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눅 2:8-10). 그래서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누일 정도로 그렇게 춥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초막과 같은 곳에서 태어나심으로 초막절(양력 10월)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편 118편, 다윗이 고난 중에 지은 시, 초막절에 부르는 즐거운 노래, 구원의 노래- 예수아), 출애굽 시절 고난을 생각하면서 초막에 거하는 것입니다. 마구간과 같은 예수님의 탄생 장소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 우리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초라한 마구간, 초막과 같은 곳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예언적인 탄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친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로 사셨고, 모친 마리아도 세상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사람일 것입니다 (눅 1:48- 마리아의 찬가, 비천한 여종이라 고백)
물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요셉도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마 1:19), 마리아도 남자를 알지 못하는 정결한 처녀로서 (눅 1:34), 주의 말씀대로 메시야가 오시기를 사모하며 (눅 1:38, 45), 주를 찬양하는 자로 의로운 사람임은 틀림이 없습니다다(눅 1:46)
■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흙수저 가정에서, 마구간과 같은 흙수저 장소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흙수저 출신과 같은 자들과 함께 살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 그러니 교만한 자들, 높은 자들, 부자들에게는 그런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의 눈과 귀가 열린 자들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정결예식을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을 때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시므온(눅 2:25), 안나(눅 2:36)처럼 말입니다.
3) 왜,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흙수저와 같이 태어났을까요?
3가지로 살펴봅니다.
① 가난하고,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아이와 같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부자나 지위가 높은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면 그들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과 같은 힘이 있고,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동안 항상 예수님을 공격할 빌미만 찾았습니다.
▶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졌다고, 명예가 있다고, 지식이 있다고,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예수님 자신을 숨기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작은 자요, 낮은 자요, 가난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사 61:1, 눅 4:18, 7:22)
→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 교만하여 예수님 없어도 산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구원이 안되는 것입니다.
■ 1980년대 연극 “빈방 있습니까?” 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빈방이 없어서 요셉과 마리아가 방을 구하러 다니는데, 극중 연기자가 그런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빈방이 있다”고 소리치는 내용입니다.
마음의 빈방을 가진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마음속에도 다른 것들로 가득차서 예수님이 들어오실 방이 없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고 가득차 있고, 욕심으로 가득차 있고, 영적인 여우, 새, 마귀들로 가득차 있어서 말입니다. 이제 이들을 내어 보내고 주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빈방이 되는 것이요, 마음이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방에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이 지금까지 여러차례 설교한 주님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② 또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다가오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다가 오는 자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눅 5:3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이런 자들을 단절시키고 분리시켰습니다.
■ 눅 18장 9-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해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였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는 바리새인이 의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까지도 정죄하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5:30]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인간이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똑 같은 죄인들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롬 3:10)
우리들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나아가면 우리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주님은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1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③ 또 예수님은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고 고쳐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 내주시고 각색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육적인 병 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 영적인 병자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들은 고침을 받은 38년된 중풍병자도 있고, 손 마른 자들도 있고, 장님도 있고, 귀머거리, 벙어리, 문둥병자도 있는 것입니다.
답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 상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마음이 아픕니까? 몸이 아픕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시면 됩니다. 안 고쳐 주셔도 나아가야 합니다. 그 영혼의 병은 최소한 낫게 되는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과 항상 함게 하셨고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이런 자들이 있는 곳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화려한 곳, 왕궁, 부자들이 있는 곳, 지식이 풍성한 곳에 가면 예수님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병든 자, 주린 자, 목마른 자, 옥에 갇힌 자들이 있는 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이런 자들을 보살피는 것이 또한 주님께 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시고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누가복음 두 성경 모두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사시기는 갈릴리 나사렛, 가버나움 동네에서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23, 마 4:13, 눅 1:26), 그래서 사복음서 모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① 나사렛 예수(헬, 나자레노스, 히, 나자렛) 라는 별칭은 존경스러워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의 작은 마을로서 유대인들은 이방 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 사람들을 결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요 1:46, 7:41,52)
예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까지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나사렛을 무시햇습니다 (요 1:46)
물론 유대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 인간적인 눈으로는 메시야, 그리스도,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사시고 사역을 하셨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나사렛 동네에서 사시고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사역하셨는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먼저 이것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도참조>
▶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예수님이 사역을 주로 하셨던 갈릴리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씀하시고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이 있는 갈릴리 지역은 가나안 정복 후 납달리 지파에게 주어졌지만 (수 20:7, 왕하 15:29) 정복 후에도 아모리, 히위족속 등 가나안 원주민들이 잔존했습니다 (삿 1:30-33), 그리고 이방지역과 인접해 있으므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혼재되어 있어 혼혈된 사람들도 있으며, 언어도 이방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처럼 무시를 당하는 지역이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금도 갈릴리 지역은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 47%)
이사야는 그들이 이방지역 사람들로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되신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곳이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땅이 생명의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나사렛이 있는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을 한 것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사야 9:1-2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 상황도 스불론 땅, 납달리 땅 곧 이방의 갈릴리와 같은 영적으로 흑암의 땅입니다. 사망의 땅입니다. 그늘진 땅이요 이방의 땅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입니다.
영적으로도 죄로 인하여 흑암이 덮은 세상이요, 온갖 죄가 가득하여 사망의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천국은 빛의 나라입니다. 이곳에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사는 것입니다. 빛되신 예수님께 회개하고 나아가기만 하면 어둠이 떠나고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입니다. 빛입니다.
[마태복음 5: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누가복음 2: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요한복음 1: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② 예수님은 결코 이방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방인인 우리들에게도 복음이 온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우선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 이것이 제사장 나라 역할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짐승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부정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 대한 구약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이방종교에 대한 경계를 위하여 많은 계명을 주셨지만, 그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적이 없습니다.
■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초막절을 지키러 나오는 그런 하나님의 비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가랴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여기서도 초막절이 나옵니다. 초막에 사는 것과 같이 겸손한 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꿈을 이루도록 이방지역과 같은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게 하셨고, 나사렛, 가버나움과 같은 곳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③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유대인들에게 관심이 많으시지만 이방 땅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언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18).
예루살렘 도시에만 있지 말고 그들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이 바라보는 것, 주님의 발이 머무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다들 잘 가지 않고자 하는 낮은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방인 지역과 같이 구원의 기회가 없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소외된 자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런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롯처럼 물이 넉넉한 요단들에서 점점 화려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로 옮겨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태어나자 마자 헤롯 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도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사역 대상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이라면, 이 부분은 세상나라에서 종 노릇 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동방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헤롯왕궁은 난리가 났습니다.
[마태복은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동방 박사들도 당연히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는 왕궁에서 태어나실 줄 안 것입니다. 동방은 페르시아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 (히, 마고스)는 마술가, 점성가, 마법사, 박수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헤롯대왕이 어떻게 왕권을 취득했는데,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고 하니 소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수많은 베들레헴 지경에 사는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탄의 역사입니다.
2) 그래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하라고 지시합니다.
[마태복음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참고로, 동방박사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선물로 바친 것은 예수님의 기름부으심이 왕, 제사장, 선지자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요셉 부부에게 애굽에서 살 수 있는 여비까지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창 22:14)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님께 황금, 유황, 몰약을 드리면 여호와의 이레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왕, 제사장, 선지자의 기름부으심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어 우리들에게도 왕적 기름부으심(유황), 제사장적 기름부으심(유황), 선지자적 기름부으심(몰약)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마 10:41)
[마태복음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① 아무튼 요셉과 미라아, 아기 예수님은 헤롯대왕이 죽기까지 애굽에서 살게 됩니다.
→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메시야의 탄생은 그들의 멸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예수가 태어나자 마자 아이를 삼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도리어 구원의 길을 여시는 계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사탄이 따라가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적으로 마리아 같은 처녀, 신부인 우리들 속에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도 죽이고자 마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적으로 마리아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여 태어나게 하셨지만, 우리들은 이미 태어난 상태에서 성령이 임하시므로 예수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들 속에 잉태하여 품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예수의 잉태와 탄생인 것입니다.
이 예수를 마귀는 빼앗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게, 다른 영을 잉태하여 따르게 말입니다. 죄를 짓게 하여 성령을 떠나시게 하든지, 역사하게 못하시게 하든지, 근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셨다면 금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 9:15)
②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께서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은 영적으로 우리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것을 마태는 호세아서 11:1절을 인용하여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의 말씀 성취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세아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 노릇하는데서 불러내었다는 내용즉,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애굽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애굽과 같은 세상 나라에서 종 노릇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는 예수님 사역을 예언적으로 미리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애굽이라는 나라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세상 나라에서 번성하여 한 국민이 되기까지 그곳에서 종으로 살았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 나라에서 번성하며 종과 같이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 애굽에서, 세상 왕 바로에게서 출애굽하여 나와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그 세상 나라에서 나와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또 다른 출애굽을 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 세상 임금 바로나 헤롯왕에게 지배를 당하며 살다가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출애굽 사건과 아기 예수님 애굽 피난 사건은 모델이 똑같습니다.
두 사건 모두 요셉이 등장합니다. 마리아도 있습니다.
출애굽할 때에는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 (BC 2082, 아브라함 84세)에 따라서 BC 1446년 언약 체결 637년 만에 마치 요셉이 살아있는 것처럼 4대만에 가나안 땅으로 요셉의 유골도 함께 나옵니다(출 13:19). 유골로 나오지만 창세기는 마치 살았는 요셉이 4대만에 나오는 것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15:16).
이 모습이 예수의 부친 요셉이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오는 것을 모형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여자요, 예수는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③ 오늘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고 우리들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 땅, 바벨론 땅에서 세상 왕들을 섬기고 사는 그들을 가나안 땅, 천국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이 사명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지만 또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흙수저 출신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빈방을 가진 자입니다. 영육간에 병들어 있어 살기 위해 주님께 나아온 자들입니다. 죄로 인하여 그 죄의 문제 때문에 고통 가운데 몸부림 치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영광이며, 우리들에게는 평화인 것입니다 (눅 2:14).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런 예수님을 모두 만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