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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 제가 평신도 증언한 내용입니다. 원고들을 정리하다 보니 나왔어요... 그때도 시간의 제약상 한달이상의 기간을 두고 두번에 걸쳐서 했더니(1,2편으로) 몇 몇 분들이 앞뒤 내용의 연관에 대해 이해가 안되는 면이 있다고 물어왔던 기억이 나서요.. 여기에 전편을 다시 정리해서 올려요
본문: 마태복음 25:24~30, 31~40
주제: 세 번째 종의 진실
오늘 본문의 달란트비유는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주신 은사를 충성스럽게 잘 활용하는 신실한 종이 되라는.
하지만 읽을 때 마다 마음 한 켠이 찜찜해옵니다. 특히 마지막부분. “가진 사람한테는 더 주어 넘치게 하고 갖지못한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29절)라는 말씀을 보세요. 이 말대로라면 가난한 자 더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게 됩니다. 이게 무슨 하늘나라인가요?(14절에 보면 이 비유는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거라고 되있어요) 꼭 우리사회를 보는 거 같지 않나요?.
또 한가지. 주인이 세 번째 종을 책망하면서 왜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냐고. 이자까지 붙여서 찾았을 거(27절)라고 합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 보면 “가난한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이자를 받지마라(출애굽22:25)”고 되있어요. 단순히 안된다는 게 아니라 돈놀이나 이자를 받는 거는 죽을 죄에 해당한다고까지 나옵니다.
돈놀이를 하거나, 이자를 받거나 하면 그가 살 수 있겠느냐? 절대로 살지못할 것이니, 이 모든 역겨운 일을 하였으므로 죽을 수 밖에 없다. 자기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이다(에스겔18:13)
그런데 주인은 이자를 스스럼없이 챙기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정말 나쁜 사람인 거죠. 천벌받을 사람. 그사람들 가치체계에서는 용납이 안되는 일이예요. 왜냐? 어렸을 때부터 이런 율법의 말씀을 우리가 자장가 듣듯이 귀에 못딱지가 앉도록 들었거든요. 반면에 우리에게는 이자받는 건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일이잖아요. 많이 다릅니다. 이게 중요해요.
다음으로는 세 번째 종인데요. 주인한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야단맞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이 사람 별로 잘못한 기색이 없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항의하는 분위기입니다. 본문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이제까지 주인하고 첫 번째, 두 번째 종하고 잘했다 충성된 종아, 내가 많은 것으로 보상해 주겠다하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일시에 쏴 해지면서 긴장감 조성되는 걸 볼 수 있어요.
이제까지 세 번째 종은 무시당했어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첫 번째 종이나 두 번째 종이 주인하고 대화를 나눈 것보다 세 번째 종이 대화를 나눈 내용이 훨씬 많아요. 오히려 달란트 비유 후반부의 주인과 종들의 대화에서 메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 번째 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 증언의 제목을 “세번째 종의 진실”이라고 잡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뭘해서 돈을 버나요? 장사해서 벌죠.
장사를 해서 각각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씩을 더 번다. 100% 이윤을 남긴 셈입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이 나려면 달란트라는 화폐가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갖고있는 성경책에 본문 아래 각주에 보면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치 품값’이라고 나와있어요. 요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인력시장에서 일하는 일용노동자들의 일당이 7만원이에요. 15년이면 3억이에요. 두달란트면 6억이고 다섯달란트면 15억이다. 무슨 장사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건 한달 뼈빠지게 일해 근근히 먹고사는 우리같은 서민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고대사회에서 폭리를 취하는 방법은 딱 2가지. 남의 걸 빼앗거나 고리대의 이자를 물게해서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그 재산을 몰수하는 거죠. 두 종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벌었나에 대한 모종의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부자되는 거에 대한 인식입니다. 요즘이야 돈은 많이 벌면 벌수록 좋은 거지만 (오죽하면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말까지 생겨났겠어요?) 그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부를 축적하는 걸 수치로. 아니 범죄로 여깁니다. 고대사회는 재화가 한정된 사회에요. 말하자면 전체파이가 딱 정해져 있는 겁니다. 내가 가져야 될 몫 이상을 가져가면 다른 누군가는 틀림없이 못 가져가게 된다. 필요이상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게 부의 축적이죠- 남의 걸 도둑질 하는 거라고 여깁니다. .
그래서 제롬이라는 1세기의 유명한 철학자는 “부자는 다 도둑놈”이라고 자기 책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뿐 아니에요. 플루타크는 (여러분, 플루타크 영웅전 아시죠? 그 영웅전을 쓴 이죠) “장사해서 폭리를 취하는 건 악마와 거래하는 거”다 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책들은 다 성서와 같은 시대에 쓰여졌는데, 이런 데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건 당시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그리고 그런 인식이 얼마나 폭넓게 퍼져있었나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예수님의 이 비유이야기를 듣고있는 청중들은 누구였을까요? 대부분 농부였을 겁니다. 예수님의 주 활동지는 갈릴리였는데 이 갈릴리는 유다의 곡창지대입니다. 로마로부터 집중적인 수탈을 당했어요. 농사를 지으면 거의 4할이상을 세금으로 뜯깁니다. 그뿐인가요? 예루살렘 당국에 성전세 명목으로 1할을 또 내야했어요. 도저히 먹고살 수가 없어 사람들이 야반도주를 하거나, 몰락해 남의 종이 되거나 합니다. 참다 참다 못한 이들은 납세거부운동을 일으킵니다. 로마가 가만히 있나요? 군대를 보내 진압하고 잔인하게 학살합니다. 그러면 좀 잠잠해졌다가... 못 견디게 되면 또 민란이 일어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시대였습니다. 왜 예수님의 비유에 종이나 품꾼이 많이 등장하느냐. 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청중)이 첫번째, 두 번째 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자기시대에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네를 뜯어먹는 부자들, 권력자들 행태를 떠올렸겠죠. 속으로 욕을 해대면서..
그런데 여기서 더 이상한 건 주인의 태도에요. 주인은 엄청난 폭리를 취한 두 종을 칭찬하고, 돈놀이에 이자까지 챙깁니다. 주인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주인을 하나님으로 설정하면 하나님은 폭리를 취한 사람들을 칭찬하고 고리대를 챙기는 이상한 분이 됩니다. 이게 무슨 하나님 나라인가. 예수당시 민중들이 매일같이 당하는 강도짓이고 현실아닌가.
또 달란트 비유 몇 장 앞에 마태 19장을 보면 부자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진 걸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날 따라라.” 청년의 반응은? “가진 게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고 말합니다. 부자에 대해 이렇게 혹독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몇 장 뒤 25장에 와서는 폭리를 취한 사람들 상주고, 돈놀이를 한다고요? 예수님이 정신병자인가요? 이랬다 저랬다 하시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항상 약자들, 가난한 자들의 편이었어요.
반면 세 번째 종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장사를 해서 폭리를 취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세 번째 종은 아무것도 안했다고, 게으르다고 욕먹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안한 게 아니다. 돈을 땅에 파묻었어요. 이게 무슨 의미? 첫 번째, 두 번째 종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폭리를 취했다. 자기는 그런 연결고리를 끊은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게 옳지않다고 생각한 겁니다.
과연 그의 앞날이 순탄할까요?
아마도 이 장면에서 청중들은 한숨과 울분을 터뜨렸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번째 종의 용기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불이익을 각오한 신념있는 행동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현실은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30절) 추방과 투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하는 말.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시는 분...(24)
이라고 합니다. 억지를 써서 우격다짐으로 뺏어간다는 말이죠. 주인에 대한 도발이고 폭로입니다. 이제까지 “잘하였다...니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큰 상을 주겠다”고 자애롭게 말했던 주인의 가면이 벗겨지는 느낌이다. 여기서 “거둔다(24절)”는 말은 그리스어로 “쎄리조”인데, 이 말은 당시 세금징수하는 데 쓰이던 말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마의 가혹한 세금징수, 그리고 거기에 반발해 일어난 납세거부운동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어요. 만약 진짜 자기가 잘못했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말할까요?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요”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세 번째 종의 말에는 전혀 그런 기색 안느껴진다. 주인의 착취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 민중들이 하고 싶었던 말 대신하고 있는 거죠.
그럼 예수님은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해 뭘 얘기하시려고 한 걸까요? 비유가 놓여있는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 입성후 하신 얘기입니다. 21장부터 보면 고난받고 죽을거(수난예고)라는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이 달란트비유가 나오고 바로 뒤 26장에 보면 예수를 죽일려는 살인모의를 꾸미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즈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속임수로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였다(26:3,4)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예수는 세 번째 종을 통해 자기애길 하고 싶었어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는, 추방당하고 투옥당하는 세 번째 종의 최후가 예루살렘 입성후, 로마당국에 넘겨져서 투옥당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당하는 예수의 운명과 겹쳐지지 않습니까? 이 세 번째 종은 달란트비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최후심판 비유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더욱 명료하게 그 모습이 파악됩니다.
(최후심판 비유)
마지막 때에 최후 심판이 있습니다. 인자가 와서 사람들을 전부 불러모아 두 무리로 갈라놓고 한쪽에는 천국을 다른쪽에는 지옥을 선포합니다. 근데 그 기준은? 단하나입니다. 지극히 작은자에게 잘 대해줬느냐 아니냐입니다. 여기에 어떤 신앙적 행태도 언급되지 않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얼마나 교회출석, 헌금, 성경읽고 기도생활 잘했나? 이런 얘기 하나도 안나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40절)라면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전 도대체 이들이 어떤 이들이었기에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먼저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에 대한 단서는 최후심판 이야기 자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들(35,36절)이라고 나옵니다. 한마디로 가난한 민중들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그냥 가난한 이는 아니었던 거 같애요. “나그네로 있을 때에(35)”라는 말과 “감옥에 갇혔을 때에(36)”라는 말때문. 이들은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였고 투옥의 경험을 가진 이들이었어요. 이들이 뭔가 당국의 의지에 반하는 삶을 살았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생각해보라. 아무런 활동없이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자를 잡아가두는 법은 없습니다.
이들의 흔적을 마태복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 4번이나 나옵니다. 이 단어가 쓰인 곳에(5, 10, 23, 24장 등) 이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설명도 같이 나와요.
대표적인 몇 구절만 소개하면,
이 작은 사람들은 법정에 넘겨지고, 매질당하고, 권력자들에게 끌려가고,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든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었다(10:17~22)
…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23:34)
이들은 투옥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뭔가에 쫓겨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였어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는. 추방당한 자들 이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가진 추방과 투옥의 경험은 바로 달란트비유에서 세 번째 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서로 연결되는 거예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기는. 추방과 투옥 말입니다.
달란트비유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공동체의 상황이 투영되어 있어요. 따라서 세 번째 종도 그냥 막연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당시 교회공동체의 어떤 그룹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인제부터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주후 80~90년경 쓰여졌어요. 유대-로마전쟁이 끝난 직후입니다. 세계최강 로마제국에 끝끝내 저항했던 유대인들. 로마제국을 열받게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시범케이스로 혹독한 보복을 합니다. 다시는 딴 민족들이 이런 엄두를 못내게끔. 로마군단이 와서 다 쓸어버리고 마을을 불태웠다. 교회공동체도 극심한 박해를 경험합니다.
고난이 극심해지면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죠. 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도 있잖아요. 로마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마태공동체는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 강대한 로마권력을 현실로 인정하고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자는 측과 끝까지 저항하자는 측으로. 우리나라 신사참배 때 생각하면 됩니다. 그때 어땠습니까?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렇게 개죽음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교회를 지켜야 할 거 아니냐 하고 신사참배를 합니다. 반면에, 무슨 소리냐. 어떻게 하나님 외에 딴 우상을 섬길 수 있단 말이냐. 하면서 끝내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당연히 이들은 극소수였죠.
마태공동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당국과 타협하기로 한 자들은 처음엔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점점 로마의 힘과 부앞에 압도당하면서 적극적으로 부역하게 됩니다. 이들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기득권이 손해보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가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버렸다(마태23장)
고 신랄하게 꾸짖습니다.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뭔가요? 바로 오경말씀의 핵심입니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토라의 핵심은 이들에게 부담스럽습니다. 로마당국으로부터 핍박을 자초할 수 있는 불온한 사상이죠. 형식적으로 율법지키고 십일조에만 힘쓰게 됩니다. 요즘 교회들이 술담배, 헌금, 기도만 강조하고 사회정의는 외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종의 길입니다. 이들은 장사를 하면서 폭리를 취해 부자가 됐습니다. 이대로 가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예수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또 한 그룹.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저항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려고. 죽을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살기위해서라도 로마권력을 실체로 인정하고 일정부분 수용하자는 게 아마도 교회내 대다수의 의견이었을 겁니다. 당연하잖아요.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왜 그렇게 힘들게 신앙생활하려 하냐”고. 공동체 내부에서 더 반대가 심했을 지도. 동료들로부터 외면당합니다.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종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날이 가까워지면서 걱정도 됐겠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동료들의 냉소와 따돌림.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 진영에서 떠났고, 숫적으로도 소수. 현실적인 영향력도 약해졌을 겁니다.
이들의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원래 예수님이 비유를 선포하신 뜻도 뒤틀리게 됩니다. 아니, 죽을 걸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가는 이들 작은 무리들의 존재는 교회를 못견디게 불편하게 했습니다. 로마와 타협해 권력과 부를 걸머지려는 교권주의자들에게 이들은 눈의 가시였어요. 우리의 맘을 불편하게 하는 이 비유도 왜곡됩니다. 원래 메시지는 뭔가요? 제국의 억압적 체제를 폭로하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고난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부담스러워요?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해 충성스러운 종이 되라는 다분히 현실수용적이고, 순응적인 교훈으로 바뀌게 됩니다. 로마제국에 타협하지 않고, 용기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세 번째 종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않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폄하되고 맙니다. 오히려 주인의 명을 쫓아 가난한 사람을 착취했던 첫 번째, 두 번째 종이 충성스런 종으로 칭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 번째 종이 걸어간 길은 또한 비유를 말하는 예수님 자신이 예감하고 있었던 길이었습니다. 추방과 투옥, 동료(제자)들로부터의 따돌림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야만 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좁혀오는 추적의 손길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을 쳐야하는 수배자의 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는 결코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단편적으로 비유나, 스쳐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편적인 기사를 통해 그들의 뜨겁고 순수한 삶의 족적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이요, 고갱이었습니다.
(유성기업 노조 이야기)
제가 엊그제 양재동에 있는 현대기아 자동차 본사앞에 갔다왔습니다. 거기서 유성기업 노조가 농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갔다오신 분이 계시겠지만. 유성기업이 어떤 뎁니까? 혹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지 몰라 간단히 설명드리면, 이들은 현대차의 협력업체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농성현장에 용역깡패들이 봉고차를 몰고 와 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그대로 돌진해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만듭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6년전 일입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파괴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이 현대차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파업이 해를 넘기길 몇 해, 회사측에서는 노조원들을 손배소 혐의로 고소하고, 해고시키는 등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온갖 악랄한 짓거리들을 해왔습니다. 회사측의 해고와 고소로 생계가 막막해진 ‘한광호’란 노동자가 자살을 했습니다. 제가 갔던 날은 이들 노조원들이 302일째 농성하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노조탄압 중단하고, 해직자 복직시키라는 노조의 요구에 회사는 들은 척도 안합니다. 더군다나 법원은 이미 회사가 불법적으로 직장폐쇄를 하고 노동자들을 해고시켰다고 이들을 다 복직시키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마지못해 이들을 복직시킨 회사는 얼마 안가 2차로 이들을 또 잘라버렸습니다. 힘없는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요? 모여서 농성하는 겁니다.
넘 추운 날이었어요. 바람이 세서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예배를 봤습니다. 이들에게서 와서 기도회를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거든요. ‘우린 잠깐 이렇게 와서 예배드리는 데도 이렇게 추운데, 여기서 300일이 넘게 농성하는 저들은...’ 하는 생각.
예배중에 한 노동자가 일어나 이야기합니다. 알고봤더니 죽은 한광호노동자의 형이었습니다. 죽은 동생이 자길 많이 원망했다고 그래요. 장남인데 집안은 안 돌보고 맨날 서울가서 데모만 한다고. 그러던 동생이 갑작스럽게 먼저 간 겁니다. 남아있는 이들 심한 생활고를 겪고있고. 넘 힘들다고 합니다. 많은 노조원들이 탈퇴하고 투쟁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왜 나만 구태여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되나 하는 자괴감이 힘들게 합니다. 그치만 이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억울하게 먼저간 동생과 동지들에게 면이 안선다고. 울먹이면서 말합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퍼뜩 든 생각이 있습니다. 아! 이들은 모르고 있다. 질기게 힘겹게 이어가는 이 싸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하여 예수님앞에 섰을 때 물어보겠구나. 우리가 언제 그런 선한 행위를 했냐고. 우린 다만 너무 아프고 억울해서 외쳤을 뿐이라고.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선 안되겠기에 외친 것이라고. 하지만 주님 말씀. 바로 너희의 그런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는 그 맘 때문에 너희는 부지불식간에 나를 영접한 것이라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게 내게 한 것이라고. 나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너희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내 맘속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니구나. 너무나 리얼한, 실제로 일어날 일을 얘기하는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이들은 작은예수로 저 자리에. 굶주리고, 쫓기고, 헐벗고, 갇히면서 있는 겁니다. 이들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자기 온 몸을 태워 새 세상의 도래를 알리고 있습니다. 새시대는, 새세상은 이미 왔다고 자신의 온 몸으로 외치는 겁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불의한 세상, 무관심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 됩니다. 퇴근시간이 되어서인지 그 농성장 예배드리는 곁을 힐끗힐끗 보면서 행인들이 제갈길을 서둘러 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들은 신자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종교적 행위했냐 안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심판의 기준, 결정적 가늠자 역할을 할 것이다.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단지 한 중소기업의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하는 싸움은 우리사회의 온갖 모순과 억압이 집약된 싸움입니다. 교회가 안하니깐. 이들이 대신하는 겁니다. 감당하기 너무 버겁지만 우리시대의 죄악 온 몸에 짊어지고 고난당하는 겁니다. 이들이 구원받아야 비로소 우리도 구원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성기업뿐 입니까? 재능, 쌍용자동차, 세월호 등. 도처에 이 시대의 작은예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현장을 찾아다니며, 힘써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어야 할 이유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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