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쯤 전에 나는 성당 옆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하인리히를 만났다. 그가 나를 본 건 볼프강이 엄마의 장례식 장면을 찍은 홈 비디오를 통해서였다. 하인리히는 나에 대해 자주 물었다 한다.
이름은 이인희, 서른일곱 살. 백화점 관리부서에서 일했는데, 엄마의 당뇨병이 깊어지자 휴직을 했어요. 실은 결혼을 한 번 했었어요. 이혼했죠. 하인리히가 말했다. 이인희, 나와 이름이 비슷하네요.
화면에서 인희를 봤을 때, 어디선가 야구공이 날아와 제 가슴의 창문을 깨어버린 기분이었어요. 인희를 만나게 해주세요. 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직접 보이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 때문에 가슴의 창문이 깨지지요?
“거긴 벌써 덥지?”
“요 며칠 이상고온이야.”
“여긴 서늘해. 꼭 비가 샤워시키듯 뿌리고 지나가.”
반지에 부딪친 빛이 부서지며 무지개색으로 튀어 올라 천장과 벽과 방문 위에 흩어졌다.
“별일 없으면 피서 오지 않을래?”
나는 미온적인 태도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눈을 찌푸리고 창 아래를 살펴보았다. 축대 아래 암벽 바닥엔 굵고 푸른 호박 넝쿨들이 뒤엉켜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내 물건들이 보였다. 느릿느릿 집을 나와 혹시나 하고 길을 살펴보았다. 좁은 틈에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사다리는 뿌지직 뿌직, 하는 소리를 냈다. 못이 헐거워 삐걱거리고 녹은 철사 줄이 얼기설기 묶여 있기도 했다. 등줄기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왕 내려섰으니, 흰 날개를 단 여자처럼, 몸안에 부력이라도 있는 듯 시치미를 떼고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다리는 끝까지 버텨주었다. 사다리에서 내려선 뒤에는 암벽 사이 길을 내려가야 했다.
호박잎 사이를 더듬으며 물건들을 하나씩 줍는 동안 누가 보는 것 같아 뒷목이 뻣뻣해졌다. 물건들을 한 데 모은 뒤 식칼로 흙을 팠다. 식칼을 가장 먼저 넣고 흰색 찻잔, 달력과 담배와 라이터와 함께 두 자루 과도를 넣고 팔 년째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뽑아 넣었다. 주술을 완성하듯 위에다 성냥을 그어 옷가지를 태웠다. 재 위에 흙을 덮었다.
떠날 수가 없었다.
체념하듯, 흙과 재를 파고 반지를 찾아냈다.
모경을 본 곳은 늦겨울 고궁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섰을 때 엄마가 뭔가로 웅웅거렸다.
“저게 고궁이지?”
나는 거기 고궁이 있는 것을 몰랐던 사람처럼 의아하게 긴 고궁 담과 홍화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더 볕들기 전에 저런 곳에 가보고 싶었는데..”
나는 표를 사고 엄마를 부축해 홍화문을 들어갔다. 바깥엔 세상 풍진이 혼탁한데도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간이 낯선 공간 속으로 유입되어 진공 속으로 함몰하는 적요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궁이 좋은 것은, 실은 시간도 공간도 텅 비어있어서가 아닐까.
나무 사이로 관천대가 보였다. 하얀 식물원과 그 앞의 주물 분수가 모경과 동시에 떠올랐다. 모경과의 추억 중에서 나들이를 한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그곳이었다. 라일락 향이 천지에 흩날리고 갖은 색의 연산홍이 다투어 피던 무렵, 모경은 아무도 모르게 영춘헌으로 나를 이끌고 들어가 입을 맞추었다. 그가 위반을 즐길 때마다 나는 심장의 피가 거꾸로 뛰는 듯 흥분되고 숨이 멎을 듯 괴로웠다.
“아이고, 또 어디로 가냐?”
“식물원에 가려는 거야.”
춘당지 가의 벤치에 엄마를 앉히자 다리를 뻗은 엄마는 긴 숨을 잇달아 내쉬었다.
“난 여기서 쉴 테니 너는 갔다 와. 햇빛도 좋으니 천천히 갔다 와.”
2월이었지만 따뜻한 날이었다.
“꼼짝하지 마.”
“알았다.”
식물원의 전시 주제는 남쪽 지방의 들꽃이었다. 나는 들꽃을 보다 말고 수로를 세 바퀴나 돌았다. 식물원을 나오자 별안간 엄마가 걱정되어 뛰다시피 춘당지에 이르렀다. 엄마가 앉아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걸음이 방향도 모른 채 빨라졌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끄는 노인을 못 보았는지 물었다.
“화장실로 가보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경이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휴게소 뒤쪽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니 엄마가 있었다. 사람들이 화장실로 들고 나는데 여고생 둘이 엄마를 화장실 가운데 세워둔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요의가 없다더니 내가 떠나자마자 일이 시작된 것 같았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여학생들을 다독여 내보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켜요”
모경은 나를 밀어내고 어기적거리는 노인을 답삭 업고 달렸다. 홍화문 밖으로 나온 모경은 명령했다.
“택시를 잡아.”
간신히 빈 택시를 잡고 양해를 구하려 하는데 모경이 뒷문을 열고 엄마를 밀어 넣었다.
“당신들, 뭐요?”
“환자요. 빨리 출발해요.”
운전기사는 인상을 확 구긴 채 차창을 모두 내리고 급출발했다. 경황이 없는 데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다.
스물아홉 살까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곧 무슨 일인가 일어날 예감은 늘 느꼈다. 모경을 만났을 때, 내 삶은 가파르게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장모가 병중이어서 아내와 아이들은 두고 혼자 올라와 일에 몰두해서 지냈고 주변에 무관심해보였다. 나는 이따금 그를 쳐다보곤 했다. 3개월이 흐르는 동안 모경도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경은 한결같은 태도로 업무에 대해 이야기했고 모호하게 행동했다. 그에 비해 내 의사는 명확해, 회식 끝자리에서 술 취한 모경을 부축해 혼자 사는 집에 데리고 와 재운 장본인도 나였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 데이트가 시작되고 일 년이 지난 뒤에 모경은 이혼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모경과 결혼했다.
신혼은 끝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직장을 구하려고 하면, 모경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남자들을 만나려는 핑계라고 억지를 부리고 집에 있기를 요구하고 감시했다. 그의 인식 속에서 나는, 아무 남자나 유혹하는 요부이자 남편을 수무 번도 더 속일 부정한 아내이며 여자였다. 네 얼굴에 천사가 떠오르고 있어. 모경은 속삭였다.
사소한 실마리를 잡히면 내 몸에 멍이 들었다. 마침내 나는 아무런 생각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절벽 끝에서 뛰어내리듯이, 오직 잠만 자고 싶었다. 친정으로 돌아와 이혼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다시 이 년이었다. 이혼 사유는 무덤 같은 피로, 타버린 재 같은 피로였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떫은 풀 냄새가 짙푸른 멍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재색 구름이 몰려와 눈앞에 그늘이 지고 바람이 불고 숲의 나무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구름에 쫓겨 집으로 돌아오니 비가 쏟아졌다. 점심을 먹는 동안 비는 하늘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뜨거운 카밀렌 차를 두 잔이나 마셨다. 뜨거운 비의 맛이 몸에 스몄다. 설거지를 하고 돌아서자 비는 갑자기 뚝 그쳤다. 딱히 할 일이 없기에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려 평생이 다 지나가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모경이 자꾸 찾아왔다. 그는 재결합을 원했고 나는 경찰을 부르거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내던졌다. 내 육체의 일부 같은 사물들이 집밖에서 이슬을 맞는 밤에는 잠들지 못하고 도시를 바라보았다. 식탁 의자를 들어 올려 내 스스로 액자의 유리들과 거울, 집안의 모든 창을 깬 날, 나는 유리들을 모경이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그 유리조각은 남김없이 내 것. 분명 일생에 단 한 번뿐일 내 사랑의 피투성이 잔해들이었다. 유리 조각을 가득 담은 박스를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유리 조각들은 마치 내가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뱃속에서 쨍그렁 소리를 내며 서로를 찔러댔다.
내일은 하인리히를 만나기로 한 토요일이다. 직장 생활 같은 결혼일 거야. 언니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옷가지를 뒤적이다 뒤 지퍼가 찢어진 흰색 블라우스를 찾아냈다. 엄마 장례식이 끝난 날 찾아온 모경이 나를 끌어들이고 서둘러 옷을 벗기느라 찢어진 자리였다. 여행 바느질함을 열어보니 흰색 실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붉은색 실을 풀어 어스름 속에서 바늘을 끼웠다. 흰 블라우스에 첫 바늘을 찔러 실을 뽑아 올리니 핏방울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얇은 흰색 천에 붉은 실 자국이 삐뚤삐뚤 박혔다. 바느질하는 사이 방안은 차차 어두워졌다. 찢어진 지퍼부분을 다 박은 뒤에도 나는 계속 기웠다. 몸판의 앞뒤가 붙어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뱃속에서 유리 조각들이 쨍그렁 쨍그렁 소리를 낸다.
몸이 아득히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점으로 빨려드는 순간 바늘이 왼쪽 엄지 끝을 깊숙이 찔렀다. 블라우스가 피투성이였다. 하늘에서 드르르드르르 소리가 들리더니 꽈쾅, 하고 천둥이 치자 다시 손가락을 찔렸다. 블라우스 위로 핏방울이 번졌다. 천둥, 벼락이 내리더니 갑자기 캄캄해지며 자욱한 습기가 몰려왔다. 비가 퍼붓기 시작할 때,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내 양손 끝에 반딧불 같은 빛의 방울들이 점점이 모여들었다.
팔을 천천히 벌리고 손안의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손가락들을 펴보았다. 손 안엔 아무것도 없지만, 나의 정면에 있는 장식장 위에 모경이 준 반지가 놓여 있었다. 빛 방울들은 반지로부터 스스로 발광하듯 와글와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몸을 뚫고 방 안 가득 보이지 않는 광파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워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내 손에서 떠난 빛방울들은 하나, 둘 꺼져 갔다. 귓속에 빗물이 가득 차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