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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의 어제와 오늘
6.25한국전쟁 이전의 광화문과 1963년 시멘트로 복원한 광화문을 헐고 옛모습을 되 찾은 새롭게 복원된 광화문의 모습입니다.
광화문은 지었을 당시 문의 이름이 없이 오문으로 불렀는데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오문의 의미에 대해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가장 큰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고 합니다.
(최근 광화문 월대를 옛모습으로 복원한 사진을 새로 담았습니다.)
광화문 안쪽으로 동수문장청과 서수문장청이 보입니다.
광화문 안쪽으로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있습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4년인 1395년 9월 경복궁의 중요한 건물들인 정전(근정전과 사정전)과 침전(강녕전, 경성전, 연생전)등을 지어 궁궐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궁성을 쌓았는데 궁성은 1398년(태조7)에 동쪽, 남쪽, 서쪽이 조성되었으며 이때 궁성문인 건춘문, 광화문, 영추문도 세워졌으며 이후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신무문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화문은 원래 관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지어 졌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제는 광화문의 각도를 틀어 남산을 바라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현저동으로 옮긴 국사당이 남산 팔각정 앞에 있었는데 국사당에는 단군을 비롯해 여러 신을 모셨던 곳인데 국사당을 강제로 옮기고 그곳에 일본건국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와 메이지 천황을 받드는 신사를 짓고 조선 제1 궁궐이 신사를 바라보게하였으며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경복궁 복원 20개년 계획에 의해 2006년 광화문을 제자리에 복원하기위해 광화문 권역에 대해 전면적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 당시 있었던 자리 앞 세종로 차도 아스팔트 30cm 아래에서 고종이 중건 할 때 터가 발견되었고 다시 그 아래로 70cm 지점에서 태조 이성계 때 지어졌던 최초의 광화문의 유구가 완벽한 모습으로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세종로 100cm 아래가 원래 도로의 표면이었다는 것으로 오랜 세월 도로가 돋구어지며 높아졌다는 얘기인데 논란이 있얶는데 결국은 태조 당시의 광화문 유구는 땅속에 묻고 고종 때 광화문 터를 복원하여 현재의 광화문이 세워진 것입니다.
<현재와 옛날과의 비교>
1900년경 사진으로오랫동안 비워두었는지 광화문 안의 넓은 광장에 잡초가 무성합니다.
경복궁의 정문으로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었고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춘 광화문은 처음에는 남쪽에 있다하여 별다른 이름 없이 오문(午門)이라 불리다가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불렸다가 세종 8년(1426)에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5년(고종 2)에 재건했는데 1927년 일제 총독부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지금의 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축소 이전시켰는데 그나마 그 문도 6·25전쟁 때 소실되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석축 일부를 수리하고 문루를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고 원래의 위치를 찾지 못해 원래의 위치에서 동북 방향으로 뒤로 후퇴되어 지었으므로 원래의 모습과 원래의 위치로 이전하기위해 2007년부터 철거작업을 하기 시작하여 2010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념하는 뜻으로 공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화문은 3문의 홍예문으로 만들어 졌으며 가운데 문은 왕이 이용하였고 신하들은 좌우 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임금이 다니는 가운데 문에는 화려한 주작이 그려져 있습니다.>
각각의 방위를 상징하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 중 하나로 이들은 각각의 방위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관장하기도 하는데 주작은 남쪽을 수호하며 오행 중에는 불(火)의 속성이 있
는데 주작의 모습은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으로 봉황과 동일 시 되는 경우도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위의 다른 사신들과 함께 고구려와 고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경우가 있습니다.
<서측에 있는 문에는 한 쌍의 현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측에 있는 문에는 한 쌍의 천마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3문의 천장에는 화려한 색채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왕이 이용했던 가운데 문 천장에는 한 쌍의 주작이 그려져 있으며 동쪽의 문 천장에는 천마 한 쌍이 그리고 서쪽의 문 천장에는 한 쌍의 영귀(靈龜)가 그려져 있는데 주작과 천마 그리고 현무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광화문 2층 양쪽에도 땅에 있는 해치보다 작은 해치석상이 있습니다.>
<광화문앞의 해치는 오랫동안 경복궁의 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해치는 동아시아 고대 전설 속에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로 선한사람과 악한사람을 구분하는 속성 때문에 재판과 관련지어 졌으며 후세에는 해치의 모습이 재판관 옷에 그려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의 상징으로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해치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국회의사당 정문과 검찰청 정문에도 해치의 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해치처럼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경계하며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하며 또한 해치는 화재를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져 경복궁 앞에 한 쌍의 해치를 세웠는가 하면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경복궁은 궁궐로 더 좋은 곳이긴 하지만 불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는데 이는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는 관악산의 화가 강하므로 이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한쌍의 해치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치는 2008년5월13일 서울시에 위해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비틀55님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광화문 바깥쪽 홍예 이맛돌에 새겨 있는 오조룡
---사악한 무리를 막아주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있다고 합니다.>
광화문 앞 월대
광화문앞의 월대입니다.
옛 월대는 장대석을 4단으로 쌓고 월대 난간석주가 17개가 세워졌었는데 현재는 2개로 형식만 취했습니다.
광화문의 잡상
광화문의 현판
『천자나 군주에 의한 덕화』를 의미한다는 광화문(光化門)의 현판은 한국전쟁 때 걸려있던 현판을 디지털로 복원한 것으로 1865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당시 훈련대장이며 중건 공사를 총 지휘하였던 임태영이 썼습니다.
이 현판을 복원하여 걸 때 찬반의 논란이 많었는데 국회의장을 지낸 김형오는 이에 대해 이러한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최근 발생한 광화문 현판 균열과 관련, "문패 격인 현판을 한글로 하느냐 한자로 하느냐는 자존심과 정체성이 걸린 문제"라며 한글 복원을 주장했다.그는 복원된 현판이 한자로 제작된 것과 관련, "광화문의 복원 전 현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쓴 한글 휘호였다는 이유로 굳이 새 현판에 한자를 썼다면 역사의식이 모자란 것"이라며 "그 시대에 한글 현판이라니 얼마나 신선한 파격인가. 그것만으로도 나는 직전 현판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이어 "박 전 대통령의 휘호 현판을 내리더라도 한자보다는 한글 현판을 달았어야 했다"며 "지금의 현판은 몇 백 년 세월이 깃든 유물도, 당대의 명필이나 역사적 인물이 쓴 것도 아닌 1867년 광화문 중건 당시 공사 감독관이자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이 쓴 한자 글씨를 디지털 복원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김 전 의장은 "광화문 광장에는 세종대왕 동상과 한글 이야기관이 자리해 있다"며 서울의 관문에 한자 '光化門'이 아닌 한글 '광화문' 현판이 걸려 있다면 세종께서도 좋아하시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건춘문(健春門)
<건춘문 안쪽>
경복궁의 동문으로 서쪽의 영추문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음양오행에서 동쪽은 봄을 상징하기에 건춘문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건춘문 옆에 동궁전이 있었으므로 이문은 왕실 종친과 동궁 영역 궐내각사에 근무하는 관리 그리고 상궁이나 궁녀 들이 출입하였습니다.
<1칸으로 이뤄진 홍예문 천장에는 한쌍의 청룡과 황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실록에 의하면 건춘문은 세종8년인 1426년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여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건춘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868년 고종 때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1층 홍예문 천장에는 좌 청룡 우백호의 풍수지리에 의해 발톱이5개를 가진 오조룡으로 동쪽에는 청룡을 서쪽에는 황용을 그렸는데 이는 여의주를 얻었으니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의미이고 오조룡은 제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현판은 경복궁 중건 때 훈련대장을 맡았던 이경하가 썼는데 이경하는 대원군 이하응의 신임을 받았던 무관입니다.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으로 동쪽의 건춘문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음양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상징하기에 영추문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이문은 주로 문무백관들이 출입하였는데 이는 궐내각사들이 영추문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 하여 지금의 영추문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었던 영추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무너졌던 것을 1975년에 재건하였습니다.
<1975년 영추문이 복원 준공을 앞두고 당시 신문의 내용입니다.>
본 사설 사진은 싸이월드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영추문 복원 공사는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을 냈으며 천장에는 풍수지리에 의한 서쪽을 지켜준다는 백호 2마라가 서로 고개를 돌려 마주보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음양을 상징하여 만물의 생성이치를 형상화한 삼태극의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1칸으로 이뤄진 홍예문 천장에는 한쌍의 백호가 그려져 있습니다.>
호랑이는 하늘의 사방을 지키는 사신(四神: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서 서쪽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신물로 사신 중 유일하게 실존하는 동물을 모델로 삼을 만큼 그 존재가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조정에서 무관들의 관복에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수놓은 흉배를 가슴과 등에 달았는데3풍이상인 당상관은 상호흉배를 그리고 당하관은 단호흉배를 달았다고 합니다.
<1975년2월22일 영추문 복원 기공식 사진에 등장하는 현판이 걸린 영추문>
1975년 현재의 문이 복원되기 이전에는 이 자리에는 1층으로 된(경희궁 정문 같은) 한옥문이 있었는데 이문은 1967년까지 운니동 운현궁 옆에 있던 국립국악원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국립국악원이 장충동 국립극장 자리로 이전하며 경복궁으로 이전하면서 영추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가 1975년에 현 영추문과 자리바꿈을 했다는데 원래 이문은 을지로에 있던 원각사 정문이었는데 1961년 국립국악원 정문으로 이전하였고 이후 경복궁 영추문으로 대신하다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이 글과 사진은 동아일보기사를 인용한 문화유산에게 소심하게 말 걸기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옛 영추문의 모습이 담긴 사진>
<원각사에 있던 이 문을 국립국악원 정문으로 이전 작업하는 것 같습니다.>
위 2장의 사진은 싸이월드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또한 영추문에는 세종대왕이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냈던 일화가 있으니세종 22년(1440), 궁 밖에 살던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 이유가 온몸에 부스럼 병이 걸렸는데 병이 심해져 위독해지자 걱정이 된 세종은 영추문을 밤새 열어 놓고 사람을 보내 병세를 살폈다고 하는데 아픈 아들 곁에 함께 하진 못하지만 영추문을 통해 건너오는 소식을 기다리며 걱정했던 아비 세종의 자상하고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영추문의 현판은 중건당시 영건도감 제조를 지냈던 허계가 썼다고 합니다.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담장은 동쪽, 남쪽, 서쪽, 순으로 쌓았으며 담장을 쌓으며 함께 건춘문, 광화문, 영추문도 만들어졌는데 북쪽의 담장과 문은 광화문보다 38년이나 늦은 세종 15년(1433)에 창건되었는데 처음에는 문의 이름도 없다가 문을 만든 지 142년이 지난 성종 6년(1475)에 예문관 대제학 서거정의 건의로 신무문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 또는 신령스러운 현무』라는 의미의 신무문은 오행에서 북쪽의 어둠, 죽음, 살상 등을 북쪽을 상징하는 상상 속 신수가 현무라고 합니다.
<1칸으로 이뤄진 홍예문 천장에는 한쌍의 현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청와대 입구와 마주보고 있어 긴 세월 손해를 많이 본 신무문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소실되어 고종 2년(1865) 9월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함께 재건되었는데 높이가 12m에 이르고 1층에는 무지개 모양의 교각인 홍예문이 있고 그 천장에는 북쪽 방위를 관장하는 상상의 동물인 현무가, 거북과 뱀이 뒤엉킨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인적이 드물었던 신무문은 기록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닫아두었다가, 국왕이 후원에서 소요逍遙하거나 열무閱武, 관농觀農을 위해 행차할 때와 국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받는 모임인 회맹제에 참석할 때 이 문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영조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신무문 잡상>
<신무문 현판>
태조가 건국한 이후 한양으로 천도하고 다시 정종이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옮기고 태종에서 세종으로 왕위가 이어지면서 경복궁은 궁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세종15년 북문인 신무문을 건립하므로 궁성의 체계를 갖추고 동, 서, 남, 북, 4문의 체게를 완전히 확립할 수 있다는데에 신무문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무문은 경복궁 후원과 함께 해방이후 일반에 공개되었다가 5.16군사혁명 이후 다시 출입제한구역으로 묶였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2006년 9월 29일에 경복궁 후원을 포함하여 45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나 경복궁과 청와대의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해 신무문의 빗장을 풀고 마침내 열게 되었습니다.
동십자각과 서십자각
<1930년 전 후 사진으로 안쪽에서 본 모습으로 우측은 한국일보사 맞은편 쪽으로
궁장(궁담)이 이미 헐린 상태이지만 좌측은 건춘문으로 이어지는궁장은 보존되어 있습니다>
옛날 사진에는 동십자 잡상이 7개인데 현재의 잡상은 5개로 줄어 들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옛 사진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수정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서십자각으로 1923년 헐렸으므로 1920년무렵사진이며 위 도로가운데가 있던 자리입니다>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角樓)로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는데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누각인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 지금은 청와대로 들어서는 4거리의 중
앙으로 현장 부근에 안내문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니 또 때가 바뀌고 누가 어느 때 고증을 거쳐 이 자리에 옛 모습의 서십자각을 다시 세울지 두고 볼 일입니다.
계무문(癸武門)
<계무문 안쪽으로 앞쪽에는 지금은 없는 용무당 터이며 동측으로는 건청궁이 있습니다>
신무문의 오른쪽 궁궐 담장에 난 문으로 벽돌을 쌓아 둥근 아치형을 이루도록 만든 월문 형태의 암문이며 이 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없어진 용무당과 건천궁으로 들어서는 무청문(武淸門)이 나오며 1868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들어 진 문으로 계무(癸武)란 『북쪽의 현무』를 뜻하며 ‘계(癸)’는 천간(天干)의 마지막이며 방위로는 ‘북쪽’에 해당하고 ‘무(武)’는 북쪽을 상징하는 동물인 ‘현무(玄武)’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문 이름을 단 석판의 서체는 전서체(篆書體)이며 돌에 새긴 금석문인데 특히 ‘癸(계)’자는 소전(小篆))으로 써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계무문은 신무문에서 청와대 앞길을 따라 삼청동쪽을 70~80m 가다보면 우측 담장에 나있는데 문을 만들 당시는 도로와 같은 높이로 만들었을 것이나 지금은 도로에 아스팔트를 입히고 인도를 차도보다 높게 설치해서 인도와 수평이 맞지 않아 보기가 흉하게 변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광무문(廣武門)
<광무문 안쪽, 건청궁 동북 녹산에 있어 청와대 보안상 접근을 할 수 없어 멀리서 찍었습니다.>
계무문에서 궁담을 따라 동쪽으로 70~80m 가다보면 오른쪽 궁궐 담장에 난 문으로 벽돌을 쌓아 둥근 아치형을 이루도록 만든 월문 형태의 암문이며 건립기록에 대해 명확치 않다고 되어 있으나 계무문과 같은 모양과 형태로 1868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계무문과 함께 만들어 진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광무(廣武)란 『무용(武勇)을 넓힌다』는 뜻으로 ‘광(廣)’은 ‘넓히다’,‘무(武)’는 ‘무용’과북쪽을 상징하는 동물인 ‘현무(玄武)’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문 이름을 단 석판의 서체는 전서체(篆書體)이며 돌에 새긴 금석문으로 계무문과 같으며 광무문도 계무문과 같이 문을 만들 당시는 도로와 같은 높이로 만들었을 것이나 지금은 도로에 아스팔트를 입히고 인도를 차도보다 높게 설치해서 인도와 수평이 맞지 않아 보기가 흉하게 변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