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 나들이 사흘간의 어중이떠중이 생각들
이홍식
1. (첫날)
2007년 5월 29일 화요일. 맑음.
어제까지 바람에 휩쓸려 요동치던 바다가 호수같이 잔잔하다. 행정동우회 회원 36명이 뭍 나들이를 나가기 위해서 아침 완도행 배에 올랐다.
배는 오전 8시 20분에 산지항을 출발했다. 잔잔한 아침바다 위에 흰 포말의 긴 꼬리를 발자취로 남기며 고요히 미끄러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뱃고동소리를 울리고 이별의 손수건을 흔드는 낭만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관광이란 가는 곳을 미리 정하고 갈 곳의 인정(人情), 역사, 풍광 등을 미리 듣거나 책으로 보고 사전 지식을 머릿속에 넣고 떠나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데 이번 일정은 부두에 나와서야 갈 곳을 알았으니 눈요기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11시 40분에 완도항에 내려 대기한 관광버스로 뭍 나들이 관광이 시작되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종점인 여수. 세월은 까마득히 흘렀지만 오래전에 이곳에 와서 오동도에 들려 구경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여수의 명물인 진남관(鎭南館)에 올랐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었다고 한다. 후일 전라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이름 짓고 수군의 본영으로 사용하였다. 1716년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과 제장들의 천둥소리 같은 호령소리에 따라 장졸들의 벼락같은 기압소리와 지축을 흔드는 발 구르는 소리가 한데 어울려 가슴을 울리는데, 부-웅하는 날카롭지만 긴 뱃고동 소리와 빵-빵 거리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파묻혀 사라진다. 세월의 흐름 속에 옛 영웅들의 꿈은 저 멀리 지는 낙조를 타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가물가물 사라진지도 오랬으리라.
위풍당당했던 진남관. 앞을 가리는 높은 집들로 바닷가의 조련장과 배를 부리던 넓은 바다와 세차게 굽이도는 물살을 볼 수 없어 옛날의 위용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고 아쉽다. 또 늦은 시간도 아닌데 구경꾼마저 없으니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 한낱 전설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크고 웅장한 진남관을 지을 때 백성들의 노고는 무엇으로 위안 받았을까.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 전의 막간을 이용 오동도 입구까지 걸었다. 세월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고 하지만, 오동도는 옛 이름 그대로인데 앞에 있는 바다를 매립하였는지 아니면 해안가에 들어선 집들이 고층화되어 배경을 차단해서 그런지 아니면 내 기억 속 그림이 잘못 그려졌는지 넓게 보이던 항구도 한 눈에 들어오는 호수로 느껴진다. 혹 장시간 배와 차를 타며 달린 노독(路毒)으로 생긴 착시현상인가.
2. (이틀 째)
2007년 5월 30일 수요일. 맑음.
한려수도 유람선 관광이다. 쾌속선에 몸을 싣고 한 시간여의 거리인 향일암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다.
향일암은 우리나라의 4대 관음성지 중 한 곳이다. 관음 4대 성지란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북쪽으로 올라가 낙산사가 잿더미가 될 때도 화마를 피한 양양의 낙산사 홍련암과 이곳 향일암이다. 이들 모두가 바닷가에 있다.
항일암을 배를 타고 구경하는 목적은 해변에 절벽을 이룬 경승만을 보는 관광에 뜻을 둔 것만은 아닐 것이고 관음성지를 둘러보며 자신의 본성인 자아를 찾는 오묘한 뜻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지를 멀리서 보면서도 성스럽다는 마음의 느낌을 받는 것보다도 관광이라는 말 그대로 바닷가 절벽의 경관과 넓은 바다에 한가로이 떠있는 고깃배와 물새 등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름답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아마 제주에서 태어나 아름답고 시원한 바다를 늘 접하고 살다보니 제주의 아름다움이 표준잣대가 되어 마음속에 굳어졌는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름답다는 명승도 눈에 차지 않는 것일까. 차귀섬 주변이나 서귀항 주변을 관람시키는 유람선을 두거나 중문관광단지에서 마라도까지 유람선을 두고 타는 것이 이보다야 윗자리에 놓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찾아든 곳이 청학동이다. TV에 자주 소개되는 청학동은 상투를 튼 훈장이 코흘리개 학동을 모아놓고 ‘하늘 천 따 지’하며 한문을 가르치는 옛 조선시대의 풍속이 살아 있는 곳으로만 내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던 곳이다.
청학동은 오지 중에 오지로 도인이나 도를 닦는 학인(學人)들의 거처였지 않나 생각이 들던 곳이다. 또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를 남사고(南師古)가 풀이하여 지적한 무주의 무풍(茂豊) 등 십승지 가운데 한곳에 들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오지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주변에는 민박과 음식점이 들어섰으니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자연을 손보려는지. 더욱 환웅과 단군을 모신다는 핑계로 거창한 건물을 짓고 입구까지 포장하면서 넓은 주차장까지 마련하여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도를 닦던 옛 도인들이 있어 다시 찾아 잠시 들렸다면 기절초풍을 하고 한숨을 푹-욱 푹 내쉬며 멀리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화개장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의 줄기를 따라 5일마다 서는 화개장터, 동서의 인물과 물건이 어울리던 곳이다. ‘화개장터’라는 노랫소리에 반해 한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손바닥만 할까 참새 둥우리만 하다고나 할까. 장날이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르되 파는 물건이라야 고작 산나물 등속과 산에서 나는 식물의 잎과 뿌리를 말린 이름만 그럴듯한 둥굴레차 등 전통차 몇 종류, 구수하게 흐르는 타령소리 대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소리에 찌든 동동주집 몇 군데가 고작이다. 파는 물건이나 풍물이 겨우 이 정도에 그칠진대 한 번 지나간 관광객이면 다시 찾을까 의문이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도 이럴진대 옛 오일장이란 머지않은 장래에 그 이름마저 우리들 주변과 뇌리에서 슬그머니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 같다.
오늘의 숙소인 전남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온천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도 온천관광지로 개발된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데 나대지라고 불리는 빈터가 반 이상을 차지했고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자동차가 뜸한 것으로 보아 문전성시를 이루기는 요원한 것 같다.
첩첩 산중에 온천마을을 개발한다고 마구 파헤쳐놓기는 했으나 투자유치에는 실패를 한 것 아닐까. 근래 국가나 지자체의 장들이 임기 내 실적을 올려 후세에 자기 이름을 남기려는지 마구잡이 개발을 자행하니 자연은 쉼 없이 훼손되며 몸살을 앓고 있다. 금수강산이라는 땅덩어리가 온전히 남아날 것인가?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갈 것인지.
3. (사흘 째)
2007년 5월 31일 목요일. 맑음
2박 3일의 일정 중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첫 코스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옛절 대화엄사(大華嚴寺)다.
대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존자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다는 고찰(古刹)이다. 연기존자는 모친인 비구니 스님을 모시고 이곳 황둔골에 오셨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몇 차례 증수를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을 테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에 돌을 까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 자재를 보니 대리석인데 그 넓이와 크기가 멍석 하나씩 됨직하다. 수도를 하는 도량인데 이렇게 사치스럽게 꾸밀 필요가 있을까. 1천4백 년 전 험한 바닷길과 육로를 통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백제까지 와서 인파로 벅적거리는 도시도 아닌 산골에서 기거하며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전파하려던 존자께서 오늘에 되살아난다면 어떤 생각에 빠질까?
춘향의 고향인 남원. 그리고 춘향전의 무대가 된 광한루, 늘그막에 광한루에 올라 이 도령이 된 기분에 빠져본다. 오작교 건너 머지않은 저편에서 춘향이가 그네를 타고 허공을 박차며 추켜올릴 때 치맛자락에서 이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내가 춘향전 속의 이 도령이나 된 듯 마음속으로
“방자야! 저기 오락가락하는 것이 무엇인고?”하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의뭉스럽게 묻는 자신을 생각하니 눈과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감돈다.
광한루에는 옛 시인 묵객의 많은 글이 목각되어 걸려있었고 이 글씨를 영인하고 알기 쉽게 해설을 곁들여 전시하고 있었다. 서예를 하시는 모씨에게
“이거 봅서.”
“무슨 거 말이라.”
“이 글들(글씨)마심.”
“뭐 볼거 있어?”
요즘 뭘 좀 한다고 하면 제가 최고인양 뻐기는 분들이 많은데, 이분 역시 제 잘난 체 하는 ‘쳇병’에 걸린 모양인지 아니면 한문이라 몰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만약 앞 경우라면 이곳에 있는 옛 선비들의 글과 글씨들이 형편없이 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분이 전문적으로 한학을 하지 않아 한문에 능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한시는 짓더라도 서툴 것이다. 또 그간 서예공부를 부지런히 했다고 가정해도 오랜 습작기간을 거치지 않아 옛 명필이 남긴 글씨체본에 얽매여 지내고 있을 것인데….
광한루에서 내려와 춘향관으로 가는데 먼저 돌아보고 나오는 선배 한분이
“춘향이가 정절(貞節)을 지켰다는 설명문을 읽었는데, 현대의 중국인이나 외국인이 볼 때 웃을 거 아니라?”하고 옆 사람에게 동조를 구하는 투로 묻는 말이 들려온다. 현대에 사는 중국인이나 서양인들은 정조관념이 없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남녀 간의 풍속과 문화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정조관념도 있을 것이 아닌가. 공직에 몸담았던 세월이 까마득하게 흘렀다지만 고급공무원까지 지낸 분의 사고가 이 정도이니 한심스런 감을 감출 수 없는 내 생각이 잘못인가?
광주 비행장, 이곳에서 일정은 모두 끝났다. 일행들 모두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먼저 떠났고 나는 당초 계획대로 홀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에서 집사람을 만나 막내네 집으로 가면서 다음 일정이나 의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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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수기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