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 초기 교회의 큰 기둥이었으며 103위 성인 中 평신도 대표 성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삶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760년 경기도 광주군 마재 에서 태어난 복자는 진주 목사 정 재원의 유명한 네아들 약현,약전,약종,약용중 셋째로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 성호 이익 선생을 사사 하였고 곧은 성격과 명석한 두뇌로 연구심이 남달리 뛰어나 일찍부터 삶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과거 공부는 뒷전으로 한 체 철학과 윤리에 대한
연구에 몰두 하였으며,한 때는 도교에도 심취하였고 또한 의학을 깊이 익혀
유명하기도 하였다.
1784년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 승훈 베드로로부터 이 벽,
권일신,정 약전,약용 형제들이 세례를 받을 때 복자는 좀더 진지하게 교리를 탐독 연구하면서 입교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참 진리를 깊이 깨달은 2년 후인 1786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입교에 대한
망설임이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비슷하다고 여겨 이 위대한 학자를 주보로
모시고 드디어 세례를 받았는데 입교 이후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험난한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걸어갔습니다.
1789년 교회의 제사금지로 선각자 들이었던 양반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을
때도 뒤 이은 1791년 윤 지충의 폐제분주 사건 곧 진산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도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지들의 천주교를 버리고 교회를
떠나라는 부단한 강요와 핍박이 있었지만 항구한 인내심으로 이를 참아
받으며 신앙의 본분을 지켜나가는 치열한 삶의 자세를 보였습니다.
복자는 1794년 조선에 입국한 첫 선교사제 주 문모 신부를 충실히 보좌하며 평신도 교리연구 및 선교 단체인 “명도회”가 창설되자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동안 연구한 교리를 바탕으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하”2권을 저술하여 누구나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하며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양반 학자로서 한문에 능통하였음에도 양민, 평민, 상민등 일반 대중을 위해 그 시대에 언문이라고 불리던 한글로 교리서를 저술하였음은 성서에서 깨달은 평등의식을 사회 공동체의 생활면에까지 실천한 활동하는 지식인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가장 먼저 체포 명단에 올랐고 극심한 고문과
문초에도 신앙을 부정하는 말이나 교회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어떠한 말도 발설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 받았으며 서소문 네거리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고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죽기를 원한 그는 1801년 4월8일 영원한 천상교향을
바라보며 마흔 한 살의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용기와 신앙적인 모범은 아내와 아들 딸에게
그대로 이어져 실천되었으니 1801년 신유박해에 한달 후 같은 곳에서 순교한 큰 아들
철상 가롤로는 아버지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고1839년 기해박해 때
에는 극심한 매질에 옥사한 아내 유 소사 체칠리아,나이 어려 화를 면했던
하상 바오로,딸 정혜 엘리사벳이 아버지와 형이 순교한 38년 전의 바로
그 자리 서소문 밖형장에서 순교의 화관을 받아 세분 모두 103위 성인의
반열에 오르니 일가족 모두가 성인,복자품에 오른 화려한 순교자의 집안으로 빛나고 있어
신앙의 후손인 저희들에게 길이 길이 귀감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성인 복자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