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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법정 스님을 추모하는 조문객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법정 스님은 입적 전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며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스님은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고, 승복 입은 채 다비해주고, 사리도 찾으려 하지 말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무소유의 철학으로, 올곧은 수행자로, 영혼을 깨우는 문장가로, 종교의 벽을 깨는 관용으로, 일반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스님은 이렇게 다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스님의 삶은 한순간도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번뇌하는 사바 세계 대중에게 영혼의 울림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유산으로 남겼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1954년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송광사, 쌍계사, 해인사 등에서 참선수행했다. 스님은 70년대 한때 민주화 운동에 나선 적도 있지만, 1975년부터 17년 간 송광사 뒷산 불일암에서 홀로 살았으며, 1992년부터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속세를 멀리 하고 지낸 수행자였다. 그러면서도 불일암 시절인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놓았고,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길상사를 개원한 후 매년 봄과 가을 대중법회를 여는 등 대중과 끊임없이 교감했다. 대표 산문집 '무소유'는 179쇄를 거듭한 우리 시대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될 정도로 스님의 탁월한 글솜씨와 맑고 향기로운 글 내용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님은 불교계의 스타이자 큰어른이었지만 천주교나 개신교, 원불교 등 이웃 종교에 대해서도 담을 쌓지 않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길상사 개원 법회에 초대하는가 하면, 천주교 신문에 성탄메시지를 기고하고, 명동성당에서 강연을 했다. 스님은 천주교 신문 성탄메시지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끝에 '아멘'이라고 적어 화해와 소통의 정신을 몸소 보여줬다. 그래서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이 나란히 있는 생전의 사진은 우리 사회를 정신적으로 받쳐주는 두 어른의 상실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 절감하게 한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길을 내달려온 한국 사회는 돈과 물질, 성공을 좇아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양보 없이 싸워 사회 갈등이 극심하고, 사람들의 영혼은 황폐해져가고 있다. 사찰 주지 한 번 하지 않고, 무소유의 삶을 산 법정 스님의 빈소에 추모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스님이 가졌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다 버리고 떠났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맑고 깨끗한 무소유의 정신을 남겼다. "세상을 하직할 때 무엇이 남겠나. 집, 재산, 자동차, 명예, 다 헛것이다. 이웃과의 나눔, 알게 모르게 쌓은 음덕, 이것만이 내 생애의 잔고로 남는다"는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올곧은 수행자로, 영혼 깨우는 문장가로 '비움의 삶' 큰 울림
맑고 향기롭게. 청빈한 삶과 수행 정신의 사표였던 법정 스님이 11일 열반에 들었다. 병석의 법정 스님이 마지막까지 곁에 뒀던 책들은 스님의 뜻에 따라 병원에서 신문을 배달해준 사람에게 전해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탐욕의 시대… 청빈의 삶 실천한 '영혼의 스승'
강원도 산골서 혼자 살며 '영롱한 글'로 대중과 소통
"내 것이라고 남은 게 있으면 맑은 사회 구현에 써달라"
◆삶과 죽음을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나서다=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한다.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54년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그는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하며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박완일 법사와 함께 공부했다. 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승인 효봉 스님은 법정 스님을 “천생 중”이라고 하며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스님은 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과 자책을 느낀 후 걸망을 짊어지며 본래 수행승의 자리로 돌아간다.
스님은 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76년 발간된 저서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산문집 ‘무소유’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의 등쌀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그곳은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오두막에서 전파한 진정한 부와 행복에 이르는 법=병세가 나빠 지난해 겨울 제주도에서 요양했던 법정 스님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최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조문하는 불자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법구가 안치된 서울 성북동 길상사 설법전 분향소에 불자들의 조문이 밤새 이어졌다.
이제원 기자
은둔자의 삶을 살며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청빈을 실천했던 스님은 주옥 같은 산문으로 맑은 정신을 풀어내며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다. 마지막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2008)에서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라고 말한 스님은 “늘 모자랄까봐 미리 준비해 쌓아 두는 마음이 곧 결핍”이라고 일깨웠다.
법정 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특히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1999년 별세) 할머니로부터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 터 7000여평을 시주받아 97년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했다. 그리고 스님은 2003년까지 길상사의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주며 시대의 잘못을 꾸짖고 고단한 대중들을 위로했다.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94년부터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환경보호와 생명사랑 운동을 이끌었다.
◆마지막 길까지 놓지 않은 ‘무소유’ 정신=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에서 스님의 평생의 삶이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라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향기로운 글을 남겼다.
산문집은 물론 수많은 법문집과 경전 번역서, 여행서 등을 저술한 스님은 대중을 위한 산문과 수행자를 위한 법문 사이의 경계를 없애며 탐욕의 시대, 마음의 등불을 밝혔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겸손해 했다.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은 생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스님의 유지에 따라 송광사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기로 했다.
스님의 저서로는 ‘무소유’ 이외에도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버리고 떠나기’, ‘홀로 사는 즐거움’, ‘오두막 편지’ 등 산문집과 법문집 등 50여권이 있다.
김은진 기자
■법정 스님 주요 연표 | |
1932년10월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출가 |
1959년 3월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
1959년 4월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졸업 |
1972년 |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
1976년 |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
1984∼1987년 | 송광사 수련원 원장 |
1992년 |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
1993년10월10일 |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
1994년 1월1일 |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
2003년12월 |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
2010년 3월11일 |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
[추모 인터뷰] 이해인 수녀, 스님을 말하다
법정스님이 남긴 어록
법정 스님은 많은 저서와 법문을 통해 세상이 지쳐 있을 때는 용기를 북돋아 주고, 흥청거릴 때는 따끔한 질책을 했다. 늘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강조했던 스님이 남긴 어록을 모았다.
◆소유에 대하여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에 비로소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무소유(無所有)의 또 다른 의미이다."(〈무소유〉 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흔히 마음을 맑히라고, 비우라고 한다. 마음이란 말이나 관념으로 맑혀지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선행을 실천했을 때 마음은 맑아진다. 선행(善行)이란 다름 아닌 나누는 일이다. 내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던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1994년 강연)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올려 있지 않는 빈 과반(菓盤)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라보는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다."(〈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먼 길을 가려면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버리기는 아깝고 지니기에는 짐이 되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2005년 10월 운문사)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인생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집? 예금? 명예? 아닙니다. 몸뚱이도 두고 가는데, 죽고 난 후라도 덕(德)이 내 인생의 잔고(殘高)로 남습니다."(2008년 11월 17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수행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만큼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기도는 하루를 여는 열쇠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의 빗장이다."(〈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생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2003년 하안거 결제)
"어떤 특정한 날에만 부처님이 오신다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부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정토(淨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2003년 부처님 오신 날)
◆나와 이웃은 하나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2003년 12월 길상사 창건 기념)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라는 것을 마음에 거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이 지구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 역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2004년 하안거 결제)
"용서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남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나 자신이 용서받게 됩니다."(2004년 10월)
"우리에게는 그립고 아쉬운 삶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움이 고인 다음에 친구를 만나야 우정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2007년 4월)
"내 안의 샘에서 아름다움이 솟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남과 나누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을 수시로 가꾸어야 합니다."(2007년 10월)
"50년을 밥이며 집이며 옷이며 공짜로 얻어 쓰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타고 다니면서 많은 빚을 졌습니다. 내가 세상을 위해서 한 일보다는 받은 것이 더 많구나,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이것을 기억하고 은혜 갚는 일에 좀 더 노력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습니다."(2008년 8월 하안거 해제)
◆자연에 따르라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산방한담〉 중에서)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합니다. 곡선은 여유와 인정과 운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곡선(曲線)의 묘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2005년 10월)
"추울 때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더위가 되어야 합니다."(2008년 동안거 결제 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