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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은 오늘의 중앙동 4가 39-51번지에 있습니다.
40계단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뚜렷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중앙동「새마당」이 생겼던 때가 1908년 8월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뒤로 동광동 5가로 통하는 언덕 윗길에서「새마당」으로 내려서는 계단길로 마련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40계단이 아주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부산으로 찾아들어 피난살이하고 있던 피난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40계단 일대에는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어 밀집해서 살고 있었으며, 이 곳에서 시중에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파는 장터를 벌렸었습니다. 이 구호물자는 부둣길 주변에서 판자촌을 이루고 있던 피난민들이 바로 앞 부두에서 홍수로 쏟아져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훔쳐서 40계단 구호물자 장터로 내다 팔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얌생이 몬다"는 유행어까지 생겼었습니다. 따라서 40계단 일대 구호물자 장터는 국제시장이 들어서기 이전의 '돗대기시장'과 마찬가지로 이름난 '돗대기시장'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꼬치집'들이 많았던 곳으로도 이름나서 술꾼들이 즐겨 찾아 들었던 40계단은 한국전쟁 이후로 암달러상들이 줄을 지어 판치고 있던 곳으로 더더욱 이름나 있었습니다.
40계단이 더욱이 널리 이름난 곳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40계단 층층대에 기대앉은 나그네………"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대중가요가 나돌고 널리 불리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이 노래는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읊은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40계단에서 영도다리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더러 40계단에 기대고 앉아 낮에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달랬었고 밤에는 부산항 북항에 정박해 있는 숱한 배들이 휘황찬란하게 밝히고 있는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향수를 달랬었습니다.
이와 같은 피난살이 설움이 40계단을 배경으로 해서 대중가요로 표현됐던 것입니다.
■ 40계단 기념관
40계단 기념관은 한국전쟁 당시 이산가족들의 상봉장소였던 40계단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일깨워 주는 곳입니다.
기념관은 중구 동광동 5가 44번지에 지상 6층 규모로 건물 5층과 6층에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부산의 시대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5층에는 피난민이 넘치던 한국전쟁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요. 검정고무신과 양철물동이, 그리고 석탄난로 위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알루미늄 도시락통, 물지게와 풀빵기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게다가 40계단에 얽힌 향수와 애환을 지역원로와 문화예술인들이 목소리로 들려주는 옛날 전화기까지 있어 그 느낌은 더욱 생생합니다.
그리고, 6층으로 올라가면 이 지역에 거주했던 옛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희귀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옛날 겨울나기 모습을 점토로 재연한 미니어쳐 앞에서는 행복한 추억에도 잠기게 됩니다.
또 '국제영화제의 산실, 중구의 극장'라는 특별전시 코너를 마련해 백 년 전부터 시작된 영화와 부산의 특별한 인연을 확인시키고 있으며, 실물의 영사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3, 4층에는 복합문화시설 공간으로 다양한 문화시설로 꾸며져 있어, 도서와 DVD 등 문화정보자료와 50여석 규모의 영상시설을 갖춘 관람실 등 최첨단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전시회와 세미나를 열 수 있는 다목적실과 문화창작실, 그리고 주부 이용객들을 위한 어린이 놀이방까지 갖추고 있어 문화사랑방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자갈치시장과 용두산공원 그리고 부산근대역사관, 민주항쟁기념관, 백산기념관 등과 함께 부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게 될 것입니다.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절기(11월~2월)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 40계단 테마거리
40계단 인근에는 테마거리를 지하철 중앙동역에서 시작, 40계단 앞 도로를 지나 디귿자로 감싸면서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 끝나는 500여m 도보거리를 말합니다.
테마거리는 기찻길과 바닷길을 소재로 각종 이색 볼거리로 채워지며, 기찻길 거리는 보도에 레일과 침목을 깔아 피난길 분위기를 조성하고 바닷길은 푸른 보도블록을 이용, 부산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이습니다.
흥남 부두를 떠나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40계단을 올라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곧 고향에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벌써 50년이 흘러 나이 많은 실향민들은 가슴에 한을 삭이며 하나둘 스러져 갔습니다.
중구청에서는 내년 테마거리 조성에 맞추어 실향민 수기공모, 음악제등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자녀와 함께 40계단 문화관을 찾아 궁핍했던 그 시절을 함께 생각해 보고 오래된 맛집이 즐비한 40계단 거리에서 외식을 하며 가족의 정을 느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동란의 비극을 대표해 주는 “40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
라는 노래까지 유행시켰던 동광동 옛 국제극장 앞의 40계단.
지금 이 계단은 1미터 폭으로 줄어들었고 본래 계단의 남쪽으로 25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을 40계단이라 부르고 있다.
부산 명물(釜山名物)로 등장한 영도 대교(影島大橋)
부산항 항만 기능 확충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부쩍 늘어난 것은 무역 거래 실적 뿐만이 아니었다. 부산항 기능이 확충되고 정비되자 그 매축지(埋築地)에 따른 오늘의 중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가 크게 모습을 탈바꿈하고 도로가 시원하게 정비됨으로써 부산으로 몰려 들어 정착하는 일본인 인구마저 덩달아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용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부산에서 정착 생활을 하고 있던 일본인 인구는 이 지역의 인구 집중 현상을 빚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지역에서 벗어나 어쩔 수 없이 그 인근 지역으로 분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 사람들이 새로운 정착지로 분산해 나갔던 지역으로서 가장 가까운 곳은 영도였다. 오늘의 중구 지역에서 벗어나 영도 지역으로 옮겨 정착해 나가는 일본인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교통난(交通難) 해결 수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오늘의 중구 지역 뭍과 영도를 잇는 대교 가설(大橋架設)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졌던 것이다.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쳤던 영도 대교 건설계획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생겨 부산의 명물(名物)로 등장했던 도개식(跳開式) 다리인 영도 대교는 그 건설 계획부터 반대 여론에 부딪쳤었다.
부산부(釜山府)가 밤에는 운행할 수 없는 불편한 나룻배 뱃길을 폐지하고 뭍과 영도를 잇는 영도대교(影島大橋) 건설 계획을 발표하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던 사람들은 해운업자들이었다.
이들이 들고 나온 반대 이유는 다리를 놓기 위해서 바다를 메우게 되므로 물길이 좁아지고 따라서 물살이 세어지기 때문에 작은 배들은 까딱하면 그 교각(橋脚)에 부딪치는 사고가 일어나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또 부산 북항에서 남해안과 서해안 방면으로 나가는 1천t급 이상의 큰 배들이 이 물목을 빠져 나갈 수 없게 됨으로써 오륙도 앞을 거쳐 영도 남쪽을 멀리 돌아 다니게 되기 때문에 적어도 1시간의 항정(航程)이 더 걸리게 되어 해운업계 발전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부산항 자체의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운업자들은 들고 일어났다.
그러던 해운업자들은 영도 대교 건설 반대에 따른 대안(代案)으로서 뭍과 영도를 잇는 해저(海底) 터널을 뚫는 것이 옳다고 들고 나왔다.
그러나 부산부 당국은 해저 터널 건설이 엄청난 예산 출혈(出血)을 가져 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경제성(經濟性)이 없다는 까닭을 들어 그와 같은 해운업자들의 반대나 대안을 묵살(默殺)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영도 대교 건설에 따른 설계상(設計上) 변경이 이루어졌다.
영도 대교 일부분을 열어 젖힐 수 있게 설계를 고침으로써 영도 대교 건설 계획을 둘러싼 해운업자들의 거센 반발을 달래려고 들었다.
부산부가 영도 대교를 이른바 도개식(跳開式) 다리로 만들려고 든 설계 변경을 들고 나오자 이번에는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당시 부산부의회 의원(釜山府議會議員)들까지 그 가능성에 의심을 품고 나섰고, 신문지상에까지 오르내리는 여론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부산부의회 의원들은 영도대교 설계자를 직접 불러 들여 도개식 영도 대교 건설의 가능성을 따져 물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다리 일부분을 열었던 것으로서는 압록강교(鴨綠江橋)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다리의 상판(上板) 일부분을 옆으로 비껴 여는 회전식(回轉式)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다리의 상판(上板) 일부분을 하늘로 꺼떡 치켜 들게 하는 도개식에 대한 기술을 믿으려고 들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영도 대교 설계자는 부산부의회 의원들이 보는 자리에서 미리 만들어 갖고 온 도개식 영도 대교(跳開式影島大橋)의 모형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해 보이며 설득하는 데에 진땀을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영도 대교 개통식(影島大橋開通式) 말썽과 반발 그리고 숱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은 끝에 마침내 1932년 3월 8일 부산부에서는 영도 대교 가설 대역사(架設大役事)를 착공하기에 이르렀고, 그 뒤 2년 8개월 남짓이 지난 1934년 11월 23일 떡 벌어지게 개통식을 벌이고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
영도 대교는 전체 길이 214.63m 가운데서 뭍쪽의 31.30m 가 되는 도개부(跳開部)를 전동식(電動式)으로 들어 올림으로써 그 밑으로 1천t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리고 해수면(海水面)에서부터 영도 대교 상판(上板) 밑바닥까지의 높이는 밀물 때 7.51m가 되게 설계함으로써 50t급 이하 선박은 언제라도 마음대로 다리 밑을 드나들 수 있게 해놓았다.
이와 같은 영도 대교를 가설하는 데에는 3백60만원이라는 엄청난 부산부 예산이 들여졌던 것이다.
한편 부산 우편국과 영도 우편소에서는 영도 대교 개통을 기념하여 그 개통식이 열린 11월 23일부터 25 일까지 사흘 동안에 걸쳐 「부산 도진교 준공 기념 (釜山渡津橋竣工記念)」이라는 글자와 도개부(跳開部)를 하늘로 치켜 든 그림이 새겨진 특별 우편소인(特別郵便消印)을 모든 발수신(發受信) 우편물에 찍어 넣었다.
그런데 영도대교가 개통됐던 1934년 11월 23일은 오늘의 중구 지역 뭍쪽과 영도쪽 다릿목 뭍쪽에 6만여명이나 되는 구경꾼이 몰려 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든 것은 그 무렵의 부산에서는 처음 있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구경꾼 가운데는 동래, 구포, 수영, 해운대, 김해, 양산 등지는 말할 나위가 없고 멀리 밀양, 창원 등지에서도 찾아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개통식이 시작된 바로 그날 상오 10시 개통 테이프를 오늘의 중구 지역 다릿목에서 끊은 사람은 김해에 살고 있던 여든 살인 복 많은 노인 내외간과 일본인 부산부윤(釜山府尹 : 오늘의 부산시장에 해당)인 쓰찌야(土室傳作)였다.
굳이 김해에 살고 있던 노인 내외간을 모셔 개통 테이프를 끊게 한 것은 아들딸과 손자·녀를 비롯한 그 집안 식구가 모두 살아 있는 복 많은 노인을 골랐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도 대교를 가장 먼저 건넜던 사람도 이 김해 노인 내외였다.
그 뒤로 다릿목에 구름 떼처럼 몰려 있던 사람들이 따라 건넜다.
영도대교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던 것은 비단 개통식이 베풀어졌던 날 뿐만이 아니었다. 영도 대교가 개통됐던 날 도개부(跳開部)를 들어 올리는 시운전(試運轉)을 눈 여겨 보았던 사람들은 사뭇 놀라고 하도 신기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탄성(嘆聲)을 질렀다.
이런 광경을 지켜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 소식이 전해지자 그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부산에 들릴 일이 있는 사람들은 바쁜 겨를에도 잊지 않고 영도 대교로 발걸음을 돌려 다리가 번쩍 들어 올려지는 신기한 모습을 지켜 보아야만 직성이 풀렸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