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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안경알 백두산 아래 마을에서 갈아 끼우다
용정중학교 윤동주 시인 詩碑
용정 혜란강과 벌판(민족에 한이 서린....)
용정 일송정
부제 : (春子狗肉館 -춘자개장집)
동토의 땅 연해주를 거쳐 훈춘에 도착하니 매서운 찬
바람은 길 떠난 나그네의 처량함을 위로라도 하는 듯
꼬리를 내리고 있었건만 눈앞에 다가 온 두만강이
민족이라는 이름과 보잘 것 없는 변방의 한겨울 추위를
앞세워 내 가슴을 압박해 왔다.
90년대에 본 두만강 저편이나 세기를 넘긴 눈앞의 지금
풍경이 그다지 변하지 않음에 내 동포의 아픔과 굶주림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저 놈의 땅은 여름과 겨울의 색깔과
소리가 변하질 않아…. 온 산야가 벌거벗은 채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너무 창피해, 그래도 타인들 앞에서는 걸친 척 시늉이라도
해야지, 먹고 살기 어렵다고 걸친 옷가지도 팔아 치우니…..
여기가 어디야 그래도 국경지대가 아닌가 ?
언제 우리가 이렇게 옷 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낭인이 되어버렸나 !
주책없이 버스를 세운 중국기사는 두만강이 아마 남조선
인민들에게 한낱 관광코스로만 여겨지는 듯 어린 눈망울에
맺힌 아들 놈의 표정은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장백산 내려오는
날에는 아주 상세하게 더 보여주겠단다.
연길(옌지)은 연변조선족 자치주 주도(州都)로 길림성 동북부에
위치하며 면적이 남한의 절반 정도이고 220여만 명의
인구 중에 100만 정도의 우리 조선족이 살고 있다.
조선말기부터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하던 연변은 한반도와 역사를 같이 했다고 본다.
훈춘은 만주어로 변경(邊境)을 뜻하는데 연변의 6개 도시중 하나로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의 접경도시로 우리에겐 애환의 도시이자
이 부근은 항시 만남과 이별이 상존하는 얼굴 없는 우리의 혼이
곳곳에 서려 있는 듯 했다.
권하대교 하류의 두만강변에서 나는 또 하나의 아픔과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안 중근 의사 의거지 참배에서 나는 추운 들녘
언덕배기 모퉁이 떠있는 보름달을 껴안고 흐느낄 수 밖에 없었다.
민족의 영웅인 안의사님의 의거지 초가지붕에 간신히 매달린 나무판자
굴뚝과 멍석장판 그리고 먼지 뒤 덮인 좁은 방이며 글자마저 바랜
입구 안내판이 교사들의 얼굴을 하늘로 세우고 있었고 좁은 빙판
골목길 나오며 엉덩방아 찍은 예쁜 여학생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아니하고 오던 길 말없이 돌아 오더이다 !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와 한치 앞을 못보고 살아 온 우리의
삶이 부끄러울 따름이어서 자녀들의 발을 재촉하여 버스의
난방으로 몸을 피해서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외진 타국의 땅 언저리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는 결심을 하면서 고국과 민족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1세기 후의 의거지 초막의 모습도 분명 그렸을 것이다.
아직 펴 보지 못한 안의사님의 옥중 저술서 “동양 평화론”의
진한 먹물 냄새를 기약하며 나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온통 눈밭인 훈춘시내 춘자구육관(春子狗肉館)에 당도를 하고
보니 성애 낀 유리창 너머로 진한 육수 냄새가 어둠과 추위와
한패가 되어 취기를 당기고 있었다.
일행 중 절반은 인근 불고기식당으로 택했지만 우리 가족은
보무도 당당하게 일행보다 먼저 코를 둥근 테이블로 내밀었다.
아들녀석은 아예 백주(紅旗河)잔을 연신 비우는 노장테이블에
자리를 함께하고 선생님들의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갈비살로
배를 채울 작정을 단단히 한 모습이 초연하기조차 했다.
숫기가 부족한 놈이지만 한국에서도 어지간히 가족이 함께한
보신탕집 문턱을 넘나들기는 했지만 수육은 배불리 먹은 적이
없는지라 더구나 아비가 셈을 전부하지 않음을 용케도 눈치채고
살점이 제법 붙은 갈비도 버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강둑 저편을 못 본채하고 귀한 안주로 배를 불리는
아들녀석이 밉거나 체면을 구긴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는 것이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
내친김에 춘자구육관에 대하여 한 마디 더 아니하고는 지나칠 수가
없을 것 같다. 위치는 훈춘시 신객운점 서편으로 조선족(재중동포)이
운영하는 보신탕 전문점이다. 지배인은
성황리에 영업중이며 최근엔 한국관광객들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듯 하였고 가격은 한국의 1/4-1/5 수준이나 국물이 옛 시골
그대로이고 양념 된 갈비살로는 배를 채운 사람이 없을 성 싶었다.
쬰득하지도 허물하지도 않는 것이 입안에서 녹아 내리며 그 놈의
상태는 백주 비우느라 제법 오래 두어도 처음과 같은 느낌이더라…
양념은 마늘 생강과도 거리를 두면서도 그 본래의 맛이
참으로 신비스럽기까지 했으며 뒤이어 나온 수육의 양념은 간장에
연한 무엇들이 들어가서 초장과 들깨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의 그 것과는 품격이 달랐다.
갈비살에 너무 취해서인지 그 놈의 맛을 지금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수 없고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진기한 맛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일구어 둔 것 하나 제대로 없지만 나 또한
맛을 추구하는 사람이거늘, 내 평생 그 맛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옆 좌석에 자리한 아내와 딸의 눈홀김이 예사롭지 않아서 백주의
추가 주문을 멈추었지만 달포가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혓바닥과 어금니가 바쁘게 요동을 치며 군침이 절로 나온다.
그 집 간판에는 춘자국육관이란 한자글씨 밑에 “춘자개장집”
이라고 친절하게 토를 달아 두었으니 우리 친구들 꼭 한번
들러 들 보시게나,
요즈음은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프로그램에 따라 길림성
모든 상가의 간판에는 반드시 한자와 한글을 병행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으니 낯선 한글과 재미있는 문구 앞에서 울어야 하지
웃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조선족 모두가 간판의 상단에 한글을 먼저 쓰고 그 밑에
한자를 쓰고 있으니 그 마음이 갸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러한 관행을 용인하는 중국정부에게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과분한 요기에 취기가 더하니 애틋함 사라졌지만
일행과 함께 중국식 나이트클럽에 갈 용기는 없었고 단지
내일의 여정과 백두산 등정을 위하여 가족이 모두 “대우족도안마”에
들러 넷이 나란히 길다란 침대에 누워 발마사지를 청했다.
중국 물가에 비하여 다소 비싼 듯 했지만 가족 모두가
기뻐하고 아들 녀석과 나는 예쁜 처녀들이 정성을 다 해주니
이 또한 즐거움이 넘치고 여독이 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눈보라 속의 백산호텔에서는 따스함과 포만감으로 잔뜩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고자 멋을 부렸건만 아들 녀석과 딸내미는
끝내 자기네들 방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엄마 옆에서
온갖 어리광을 부린다.
그 모습이 밉기도 했지만 언제 또 어미와 타국의 땅에서
뒹굴 날이 있으랴….. 그래도 비싼 호텔인데 방 하나는
비워둘 수 없지, 나는 옆 방문을 열고 슬그머니 자리에 들었다.
천지에 오르는 설레임을 가슴에 안고 잠시 눈을 붙이는 가 싶더니
무엇하나 변변한 등산장구 없었지만 개인 소지품 챙기기에 인색한
자식 놈들 동상 걱정에 1시간을 소비하고 당부를 거듭하기를
수십 번 그래도 미덥지가 않아서 얼차려도 해 보았지만 그 놈들
아빠의 잔소리에 치를 뜬다.
만두와 숭늉을 곁들인 중국식 아침을 물리고 호텔 마당에 서니
매캐한 냄새가 진동한다. 새벽 추위에 온 시가지는 연탄가루와
매연으로 추위를 죽이고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모아산을 거쳐 비암산 자락으로 향했다.
주위는 온통 사과배 과수원 일색이다. 아주 오래 전 북한에서
사과나무 6그루를 조선족이 가지고 와서 연변 토산 돌배와
교접시켜 “사과배”를 만든 것이 겨울에 먹는 “언배”이며 이곳
농가의 주요 수입원이고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처럼 규모가
대단하다. 당도가 뛰어나고 모양은 배를 더 닮았다.
굵기도 만만찮아 깨물어도 반쪽이 항상 남아 있었다.
용정농업대학에서 운영하는 곰 농장에 들러 웅담,쓸개 즙을
몇 잔 받아 들고 보니 매번 오는 길이지만 마셔야 그리고
구입해야 할지를 고민만 하다가 이번에도 독한 술기운을 빌어
재빠르게 버스로 몸을 피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든 해란강 다리를 넘으며 마음은 다급했다.
이번 여행 길에는 다시 보는 대성중학교의 모습이 궁금했고
비암산을 올라 일송정에 걸터앉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일송정 푸른 물은…. 노래가사를 수도 없이 불렀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여기에 오를 줄이야 !
비암산 가파른 등산로는 미끄러운 눈이 단단히 길목을 지키고 있어서
혹시 누구라도 넘어지면 여기서 백두산 등정은 끝난다는 걱정이
앞서서 아내와 딸의 허리를 꼭 껴안고 정상의 일송정에
올라보니 해란강의 넓은 벌판과 구비치는 강바닥에 조상들의
발자취가 완연히 남아 있었다. 그 때 그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는
간 데 없고 작은 소나무와 일송정이 바위 위에 덩그러니
앉아서 우리를 반겨주고 그 앞 작은 고지 위에는 “비암산진달래”
시비가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남한의 독지가들이 주변을 단장하고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가 일송정을 부르며 하산을 재촉했다
낯선 땅에서 설움을 떨치고 독립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곤 하던 광복군의 긴 총검과 함성이
해란벌과 오버랩 되면서 비암산에서
용정의 대성중학으로 가는 차창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5년 만에 다시 보는 대성중학은 남한 경제를 등에 업은 방문객들
덕분인지 잘 단장이 되어 있었고 건물에도 제법 윤기가 돌았으며
짧은 햇살을 아끼며 축구에 열중하는 학생들과 방학중임에도
교정에는 변방의 중국인보다 세련된 학생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1946년에 은지, 대성, 광명등 6개 학교를 통합하여 만든 대성중학이
오늘의 용정중학이다.
25,000여명의 졸업생과 70여명의 항일열사를 배출하였고
과거 우리가 아는 지도자들도 꽤 이 학교 출신이다.
특히
역사가 잘 정돈되어 있다.
아들 녀석은 기념관 전시물 보다 평양어투로 설명하는
처녀선생님에게 넋을 팔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 곳의
여성들은 피부가 뽀얗고 천상유수 같은 언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아들녀석과 처녀선생님이 함께 한 사진은 언제 보아도
청순함과 정감이 물씬 풍겨서 좋다.
백두산 나비 채집 첩 대여섯 개를 기념품으로 구입하고
크다란 방명록에 가족 넷이 모두가 주소와 이름을 적으며
미리 준비해 간 성금 봉투를 내놓는 순간 그나마 한민족으로서
좀은 위안이 되었다.
용정중학을 나서는 기분은 교정의 학생들 만큼이나 상큼했다.
이제 드디어 백두산으로 향한다는 분위기가 일행의
발길을 한결 가볍게 하였고 시내 거룡우호공원(거제-용정 자매결연)의
용정시 우물 기원지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는 동안 용정 제일의
신화서점으로 애들이 줄달음 쳤다.
어디서 귀동냥은 했나 보다 해외여행 길에는 잠시나마
서점을 들러서 그 나라의 문화와 민도를 느껴보아라는 조언을
말이다. 떠나는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타는 애들을 보며 장시간
버스이동을 위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한데로 딸 녀석의 한쪽 안경알은 버스
바닥의 제 어미 발 아래에서 이미 박살이 나 있었고
아들녀석의 귀마개도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것이 아빠 얘기를 잔소리로 치부한 녀석들의 부주의 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추위와 안개시야로 고생 좀 해 봐라 하며
고소해 했지만 귀마개야 이 놈들 성격을 잘 아는 아비로서
안주머니에 있는 예비품을 주면 될 것이지만
안경알까지 여분을 준비한 것은 아닌지라 참으로
난감했다. 다 큰 녀석이 깨진 안경알 대신에 손수건을 가리고
외눈으로 차장 밖을 보는 처량한 모습이 아비를
가시방석에 앉게 했다.
용정에서 안도현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60년대 고향 그대로이다.
늦은 햇살을 받아 산야의 눈과 햇살이 조화를 이루고
그 사이로 조용히 피어 오르는 굴뚝의 연기와 햇빛을
조금이라도 마시려는 꺼칠한 누렁 송아지의 여유를
그리고 집집마다 가득 쌓아 둔 장작개비 넘으로 알뜰함도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거늘 자식들의 시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자신마저 밉기 시작했다.
연길방향에서 백두산을 가노라면 반드시
주로 하는 촌락이며 조선족과 한족이 어울려 사는 곳이다.
집 모양을 보면 바로 구분할 수가 있어서 우리 민족의
분포를 쉽게 짐작케 하며 그 들의 부지런함이 금방 눈에 띈다.
동포를 위하여 남한의 뜻 있는 분들이 아예 이곳에
정착해 가면서 탈북자를 돕고 지역 조선족들 중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노약자 고아를 위하여 눈물겨운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니 일행 모두가 숙연해지는 분위기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버스는 체인도 없이 눈길을 잘도 달렸다.
길가 노점상에게 싼 언배(사과배) 맛 또한 일품이었다.
서너 시간을 달려 장백산 휴게소에 도착하니 지역 골동품이
가득했고 가격도 크게 비싸지는 않았지만 중국정부의
문화재 반출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세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말에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기름개구리와 장뇌삼이 유명한 마을을 지나고 보니
고도는 높아만 지고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는가 했더니만
모든 가옥이 중국 농촌식으로 바뀌었다.
여기가 바로 이도백하구나 ! 하는 순간 송풍현월 미인송이
앞을 가로막고 송화강인지 압록강인지 지류가 여기 저기
눈에 띄고 있었다.
한겨울의 백두산 신성한 밤공기를 길게 한 모금 들어 마시고
나는 이내 이도백하 시장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딸내미 안경알을 찾을 요량으로 낯선 시장통을 어설픈 중국어
몇 마디로 온통 백설에 뒤덮힌 백두산을 조금이라도 가깝고
또렷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끈질긴 부정(父情)을 발휘하고
있었다.
내 오늘 한 알의 안경알에 천금을 주더라도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는 심정은 “자식이 뭔지 !….” 하는 탄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