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기행
조원석 (천안지회 지회장)
이미 알려진 양평기행은 그 시작이 자못 오랜 준비 끝에 맛본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천안에서 공부하는 여섯 젊은이들에게 이 땅 이곳 저곳에 살고있는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생활 속에 살아있는 우리 언어를 몸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소망과, 한국대회 준비를 위해 애쓴다고 천안지회 회원들을 위로해 주고픈 몇몇 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만나, 때론 열정으로, 때론 진지한 토론으로 밤을 지샌 잊기 힘든 추억 쌓기 여행이었습니다. 양평에서 매달 열리는 ‘우리동네 음악회’에서 ‘볼쇼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없을 소중한 체험이자, 이번 여행을 한단계 더 풍요롭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늦은 저녁을 위해 장을 보고, 숙소에 도착하여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에스페란토계에 들어와 처음 선보이는 저의 메뉴는 비빔국수와 돼지고기주물럭이 겻들여진 소면이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열다섯 명의 식구들이 모두들 맛있게 먹으니 주방장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술과 음악, 열띤 토론과 열정의 발산, 이 모든 것은 기획되어지지 않은 즉흥적인 것이었지만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민정진 님의 무대는 황홀할 지경이었고, 안준모 님이 준비한 LP판 음악감상(째즈와 트롯…) 은 지난 날을 추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노래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이 많아 보컬팀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같이 자리했던 천안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코드를 찾아 방을 옮기고, 큰 방의 덜 젊은 분들은 먼동이 트고 사위가 훤해질 때까지 웃음과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이 시간에는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어지는 연대의 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sperantujo에 있음을 말이죠.
졸린 눈을 비비며 그 많던 설겆이를 하는 우리 천안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제 입가엔 희망의 미소가, 가슴엔 뿌듯한 만족감이 일었습니다.
처음 에스페란토계에 들어올 때 가슴에 있던 그 것, 좋은이들과 함께하는 삶! 말입니다.
약속대로 미리 준비해간 자전거 두대로 저는 젊은 친구 한 명과 자전거를 타며 대화 했습니다.
산촌의 맑은 아침 공기는 부족한 잠을 이기기에 충분했습니다. 대화하며 저는 다시 희망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에서 희망과 함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젊은이들이 우리 에스페란토계의 희망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생각과 요구사항에는 부지런하지 않았던 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잡았으니 제겐 화두기행인 셈이었지요.
저녁은 국수로, 아침은 라면으로 때우는 부실한 식사도 맛있게들 먹으니 게으른 주방장 행복감에만 도취한 채, 준비없음을 돌아보지 못했으니 벌써 화두를 놓친 채 여행은 망친걸까요?
아쉽게도 안양 분들 먼저 집으로 가시고, 예정된 도예체험을 위해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어서 잠깐 드라이브하는 정취도 맛 보았습니다.
도요에서 그릇을 만들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한국대회 때 도자기 전시를 위해 애쓰신 분들이 겪었을 수고로움을 말입니다.
몇 달을 먼거리 차로 다니며 흙을 만졌던 그 분들,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그 분들의 노고가 지금 단지 체험만을 위해 신나 하는 우리들이 느낄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이었을거란 생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시는 많은 분들의 노력이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이 마당을 지탱하는 원동력임을 다시 일깨웠습니다.
그릇이 잘 안되어 저는 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제법 작품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어요. 한국대회 때 선 보이고 싶네요.
민정진 님 남편께서 짓고 계시는 펜션을 찾아 떠나는 길은 깊고 깊은 산 속, 군대있을 때 말고는 그런 산골을 들어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윽했습니다.
나중에 그 곳에서 제2의 양평기행을 하자는 꿈을 갖게 하더군요.
이번 양평여행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추억일 테고, 바람직한 소모임의 전형이 될테고, 천안에 ludema들이 많음을 들킨 사건이 될테지만, 젊은이들이 긍정적으로, 소중한 체험으로 받아들이고, 에스페란토를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더욱 더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민정진 님께 감사하고, 항상 바쁘신 협회장님의 동행에 감사하고, 한 걸음 뒤에서 저를 도와주시고 한국대회를 후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에스페란토에 감사합니다.
다음엔 천안의 광덕산에서 잊지못할 여름 밤을 만들고 싶습니다.
벌써 기대되는군요!
많이들 오세요!
첫댓글 위의 글은 협회 기관지 2003년 7월 호에 실린 천안 Vintro(조원석)님의 글을 옮겨 왔습니다.
Vintro님의 본명이 조원석 님이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karesnomo가 가끔 방해가 될 때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