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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옥은 실로 오랫만에 자리에 편안히 누워 있을 수 있었다. 문밖은 밀어닥친 병사들로 와글거리고 있었다. 양켠 옆방에서는 소름끼치도록 여자들의 괴로운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분은 누굴까? 나에게 그렇게 친절을 베푸신 그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키각 크고 인자하게 생긴 그 조선 출신 학도병이 여간 고맙지가 않았다. 이름이 장하림이라고 하는 것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최대치와의 이별이 안겨준 상처로 독실한 신자였던 그녀는 신을 저주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렸고, 뱃속의 아이를 저주한 나머지 그것이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저주와는 아랑곳없이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이제는 꿈틀거리는 것이 제법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판에 대치 이상으로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학도병이 그녀앞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 그녀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하여 하림의 친절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의 친절이 오히려 귀찮기만 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그의 정서에 그녀는 차츰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처음으로 그의 성난 질타를 받고 그가 얼마나 진실된 남자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말라 붙은 입술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처럼 그녀의 목을 감미롭게 축여 주고 있었다. 열병에 온몸이 녹아버리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선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옆방에서는 어린 여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것 외에도 파도 소리, 새울음 소리, 그리고 대지의 거대한 울음이 은은히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자연의 속삭임이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녀는 한손을 꽉 움켜쥐고 다른 한손으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대치의 얼굴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크게 확대되어 왔다. 모두가 보고 싶었다. 보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하림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대치에 대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대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녀는 하림을 다만 하나의 훌륭한 인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런 인물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녀에게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분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분은 고마운 분이다. 왜 내가 지금까지 그 분을 몰라봤을까. 하림이 다시 나타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여옥은 그의 얼굴이 팅팅 부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 웬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직 서먹서먹한 기분이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하림은 잠자코 여옥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엉덩이에 주사를 놓고 사흘 분의 약을 내놓았다. 일이 끝나자 그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그대로 나가버렸다. 여옥은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도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나가버렸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의 따뜻한 손길은 그대로 그녀의 가슴속에 훈훈히 적셔주고 있었다. 왜 그분은 얼굴이 그렇게 다치셨을까. 아마 상관한테 맞은 모양이지. 혹시 나때문에 맞은 게 아닐까.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여옥은 눈을 떴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머릿속은 아까보다 좀 맑은 기분이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았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헌병 하나가 신을 신은 채 안으로 들엇ㅆ다. "넌 뭐하는 거냐? 불을 꺼!" 헌병은 그녀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여옥은 허둥지둥 불을 껐다. "등화관제니까 지금부터 불을 켜서는 안 돼. 살고 싶으면 빨리빨리 짐을 싸!" 헌병은 밖으로 나가면서 호각을 불었다. 그리고 "집합!"하고 소리쳤다. 올 것이 왔다고 직감한 여옥은 대충 보따리르 하나 꾸려 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에는 이미 위안부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말게 갠 하늘에 별빛만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을 뿐 주위는 불빛 하나 없이 온통 어둠이었다. 바다에 새카맣게 떠 있는 미군배들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잘 들어 둬! 너희들한테 주의를 줄 게 있다." 헌병이 어둠 속에서 기침을 했다. "곧 전투가 시작될 테니까 지금부터 너희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피신한다.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양키놈들에게 붙잡히거나 항복해서는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천황폐하에 대한 모독이니까 항복할 바에는 차라리 자결을 하라! 알겠나?" "네에......" 여자들은 두 서너 명만이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꼭 모기새끼들 같구나. 좀더 큰 소리로 대답 못해? 알겠나 모르겠나?" "알겠습니다." "적들은 여자를 잡으면 어떻게 죽이는 줄 알아? 눈깔을 빼내고 코와 귀를 잘라버린다. 그리고 오줌구멍에다 말뚝을 박아넣지. 이래도 항복하겠어?" 여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 출발! 큰 길로 나가면 민간인들이 많이 가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따라가. 안내원이 적당한 곳으로 안내해 줄 거다. 나는 너희들을 돌볼 틈이 없다." 헌병이 가버리자 위안부들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착출되어 온 위안부들로 모두 이십여 명쯤 되었는데 하나같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군인들에게 시달렸으니 다리가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했다. 다리가 찢겨나갈 정도로 고통을 주고 나서 이제 살려주겠다고 산속으로 피신하라고 하니 생각할수록 저주스러운 일이었으나 여자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여옥은 새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하림의 출현으로 하여 삶에 대해 일말의 희망이나마 품어보았던 그녀는 전보다 더 무서운 공포와 절망이 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산속으로 소개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조그만 섬은 그야말로 처절을 극한 싸움터가 될 것이 뻔했다. 그 분은 지금 어디 있을까. 다시는 못 만나겠지. 여옥은 솟구치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길은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과 긴박감으로 하여 거리는 온통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긴박감에 부채질을 더하고 있었다. 달구지 소리, 짐승의 울음 소리, 가족을 찾는 외침 등으로 거리는 더욱 열기를 띠고 있었다. 요소요소에서 헌병들이 호각을 불어댔다. 창문을 모두 막고 필요한 전등만을 몇개 켜놓았기 때문에 병원 내부는 어둠침침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만은 깊은 적막에 쌓여 있었다. 사이판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전 두대중에 현재 이동을 멈추고 있는 곳은 이 군병원뿐이었다.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병원을 산속으로 고스란히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위에 폭탄이 퍼붓는 한이 있더라도 병원을 옮길 수 없는 일이었고 병원을 떠날 수도 없었다. 병원이 파괴될 경우에만 자리를 떠라 --- 이것이 군의관 및 위생병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하림은 좀더 특별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미다 대위로 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것으로 미군의 사이판 점령이 확실시 되는 경우 즉시 세균작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전에는 자리를 뜨지 말고 평상시처럼 병원 일을 해야 했다. 이런 특별한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병원은 흡사 시체실처럼 적막에 쌓여 있어서 더욱 긴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환자는 물론 간호원, 위생병, 군의관까지도 불안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하림은 하강균이 들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드러누워 있는 환자들은 없었다. 모두가 일어나 앉아 밖에다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림이 지나치면서 눈짓을 하자 허강균이 따라나왔다. 그들은 병원 뒷문으로 나갔다. "부탁이 있어. 폭약을 만질 줄 알지?" 하림은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허강균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느껴졌다. "일이 급하게 됐어.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 "무슨 일입니까?" "그건 알 필요 없어 폭약을 만질 줄 아나 모르나?" "전문이 아니라서 잘은 모릅니다만......" 허강균은 겁이 나는지 머뭇거렸다. 하림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교량 폭파 같은 것은 해보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진지 구축하느라고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가 들리던데......" 허강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어. 난 자네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대강 뜻은 알겠읍니다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위험에 처해 있어. 자넨 죽기 싫어도 옥쇄명령이 내리면 어차피 개죽음을 면할 수 없어. 그럴 바에 차라리 무엇인가 해보는 게 좋지 않겠나? 죽음에 의미라도 있게 말이야."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폭파대상은 무엇입니까?" 허강균이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자 하림은 그에게 무든 것을 털어놓을 결심을 했다. "이건 극비에 속한 일인데...... 이 병원 지하실에는 세균이 배양 되고 있어. 개와 쥐까지 사육되고 있어. 이건 이 사이판도를 세균으로 오염시키기 위해 계획된 세균작전이야. 미군이 이 섬을 점령할 경우 섬 전체는 즉시 세균으로 뒤덮이지. 옥쇄를 거부하고 도망을 친다 해도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아." "무서운 일이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허강균은 두려운 듯 병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나는 세균작전을 수행할 요원으로 오래 전부터 훈련을 받아왔어. 그래서 이 작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어. 이처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작전은 없지. 원래 짐승같은 놈들이긴 하지만......" 하림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아마 세계건사상 길이 그 악명이 남을 거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수행한 악마들 중의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르지. 나는......내 양심상 도저히 이 작전에 참가할 수가 없어. 참가하지 않으면 명령위반으로 처단되겠지. 그럴 바에는 차리리 선수를 써서 이 병원 지하실을 폭파시켜 버리겠어. 그래서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허이등병은 역시 두려운 듯이 물었다. "가능하니까 시도해 보는 거야. 나는 지하실 출입을 할 수가 있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쉽게 출입할 수가 있어. 우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동족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터놓고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자네한테 부탁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야." 허강균은 선뜻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하겠다고 빼지도 않았다.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강요하진 않겠어. 내가 자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더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거지. 일본군을 위해서, 처노항을 위해서 죽느니 차라리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자는 거야. 아, 답답하군." 하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 새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다. 그는 그 달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가쯔꼬 생각이 났다. "좋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허강균의 낮으나 힘찬 목소리가 하림의 생각을 뚝 끊어놓았다. 하림은 불쑥 상대의 두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감사하네."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인데......" 여자처럼 생긴 것과는 달이 어쩌면 그에게는 강한 데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림은 생각했다. "그럼 바로 세부적인 계획으로 들어가지." "네, 좋습니다." "성능이 강한 폭탄이 있어야겠는데, 구할 수 있을까?" "병원을 날려버릴만한 폭탄은 없습니다. 그 대신 다이나마이트나 티엔티(TNT)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폭탄을 만들 수 없을까? 시한폭탄을 말이야." "그건 불가능합니다. 재료가 없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있다고 해도 제조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발각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난 폭탄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니......" "시한폭탄이 아니니 경우에는 이쪽도 다치기 때문에 사용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 같아서는 다니나마이트와 티엔티를 함께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선 티엔티로 고성능 폭탄을 두어 개 만들어 지하실에 숨겨 둡니다. 이것은 진동이 있을 경우에만 터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다이나마이트에 줄을 길게 이어 역시 지하실에 던져넣고 줄 끝에 불을 붙입니다. 그 줄이 다 타들어 갈때까지 몇 초의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그때 몸을 피하시면 됩니다. 줄이 모두 타면 다이나마치트가 터지고, 그 진동때문에 티엔티 폭탄이 폭발합니다. 그 정도면 이 병원을 가로루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 정말 훌륭하군, 자네가 이렇게 전문가인 줄은 몰랐는데......"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 정도는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이나마이트와 테엔티를 어떻게 끌어내느냐 하는 건데 소량으면 몰라도 많은 양을 훔쳐 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렵지만 어떻게 좀 해봐. 쉬운 일이라면야 모험이 필요하겠나?" "이왕 이렇게 된거.... 한번 해보겠습니다." 허강균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장 필요해. 지금 바로 퇴원수속을 해서 부대로 돌아가 준비해 주게." "바로 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며칠 여유를 주십시오." "안 돼. 그럴 시간이 없어. 늦어도 내일밤까지는 병원을 폭파 시켜야 해." "무립니다. 부대네서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가면서 폭탄을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그렇지만 사태가 급하지 않나." "아무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연락을 어떻게 할까요?" "밤에 만나는게 좋겠지. 지금 거리는 온통 수라장이나까 그 틈새에 끼어다니면 오히려 안전할 거야. 오늘밤쯤 전투가 시작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부대에서 나한테 전화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지요. 준비가 되면 제가 일단 전화를 걸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을 타러오는 척하면서 병원으로 오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그렇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될 거야. 어수선할 때일수록 조심하는 게 좋아." "네, 알겠습니다." "고맙네." 그들은 악수했다. 하림은 상대의 손을 힘차게 움켜쥐었다. "군의관한테 이제 괜찮으니까 나가서 근무하겠다고 하면 바로 퇴원시켜 줄 거야. 기특하다고 하면서 말이야. 정말 그만하기 다행이야." 하림은 병실 쪽으로 걸어가는 허강균의 뒷모습이 어둠에 묻혀 버릴 때까지 바라보았다. 조심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는 불길한 감정을 떨쳐버리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그는 가슴이 뿌듯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몇번 심호흡을 하다 담배를 기분 좋게 빨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돌리자 바다 위에 섬광이 번쩍했다. 이어 바다가 온통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바다를 메우고 있던 미군 함정들이 일제히 불을 뿜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렀다. 고막이 찢기는 것 같아 하림은 두 손으로 귀를 싸쥐고 주저않았다. 이쪽 포대에서도 가끔씩 콰앙 콰앙 하고 포를 쏘애댔지만 소나기처럼 퍼붓는 미군이 함포사격에 밀려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와르르 들려왔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병원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군인들이 총을 쏘면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림은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가 떨려서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전선에 끌려나온 이래 이처럼 포탄세례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폭발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비로서 깨달았다. 웬만한 것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엄청난 파괴력 앞에 자신의 육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그는 순간적으로나마 깊이 절감했다. 쾅 쾅 쾅. 흙덩이가 바로 머리 위에서 쏟아져내렸다. 하림은 눈을 질끔감고 땅 위에 엎드렸다. 가슴으로는 땅의 울림이 쿵쿵쿵하고 전해져 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결국 사이판도에서 죽고마는가. 아니다, 죽을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지 살아야 한다. 정말 죽기는 싫다. 하림은 다리를 버티고 일어서려다가 쾅 하는 충격을 받고 도로 쓰러져 버렸다. 바로 병원 뒤쪽에 포탄이 떨어졌는지 진동이 크게 있었고, 병원 유리창문들이 와르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는 한동안 몽롱한 의식 속을 헤매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몸의 여기저기를 만져보았지만 다친 데는 없었다. 그는 기다시피 하면서 병원으로 다가갔다. 병원 앞에는 벌써 부상자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는 포탄 소리에 덮여 들리지도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