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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성 치는 ‘손’
미국 일리노이에서 제임 애덤스가 태어나던 1860년은 신생국가였던 미국이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1년 후인 1861년 피로 얼룩진 내전(남북전쟁)을 했고 내전이 끝나자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도시의 빈민층은 늘어 났다.
하지만 제인 애덤스는 시카고의 대부호의 딸로 태어나 사회 중산층으로 살았기 때문에 미국의 혼란기와는 상관없이 평탄하게 지냈다. 다른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문제는 ‘척추 결핵’이었다. 굽은 등에 안짱다리를 하고 머리는 한쪽으로 치우쳐 걸어야 했던 그는 자신의 건강 때문에 항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의과대학에 진학 후에도 계속 척추가 말썽을 부려 학교 공부를 중단했던 애덤스에게 의사는 유럽에 가서 2년간 요양하며 쉴 것을 권유했다.
오랜 병치레로 정신과 육체가 소진되어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기력만 유지한 채 영국에서 쉬고 있던 중, 애덤스는 인생에서 가장 참담한 모습을 보게 된다. 다 썩어가는 배추를 사들고서는 배추를 게걸스럽게 먹는 극빈자의 모습이다.
“내 머릿속에 기억되는 것은 남루한 옷차림도 창백한 얼굴도 아니었다. 수많은 손, 그것도일을 많이 해 거칠어진 손, 먹기에 적당하지 않은 음식을 얻으려고 뻗은 손들이었다. 사람 손만큼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손을 사용함으로써 사람은 야만 상태에서 현재의 상태로 옮겨왔고 끊임없이 손으로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당시 보았던 손은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분노를 느끼게 했다. ”
애덤스는 그 이후로도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다니며 비참한 현장을 목격했고, 그들이 그토록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세상이 평소와 다름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애덤스는 그 동안 자신이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 가난이나 사회적 불균형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참혹한 고통의 현장을 보게 되면서 그 동안 자신이 교육받은 것이 모두 쓸모 없는 것이었으며, 자신 또한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애덤스는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빈민촌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영국 최초로 설립된 사회복지기관인 토인비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빈민구제 사업 모습을 꼼꼼히 살핀 후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확신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하루하루의 봉사 활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인생에 수많은 난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수동적인 학습만 하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파악해내었다.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도 ‘인생을 준비하는 일’에 계속 매달릴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금,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애덤스는 시카고의 웨스트사이드 빈민가에 있는 허름한 건물로 북아메리카 최초의 사회복지관인 ‘헐하우스(Hull-House)’를 시작했다. 큰일을 도모하기보다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헐 하우스를 통해 애덤스가 한 첫 번째 활동은 빈민자들을 위해 빵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점차 활동 범위를 넓히며 탁아소, 유치원, 음악 학교를 비롯해 취업에 필요한 프로그램과 레크리에이션 및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바느질, 요리, 직물교실을 운영했다.
애덤스는 빈민자들을 위해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보다 헐하우스에서 그들의 직접적인 필요를 채워주며 삶을 질을 높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소외되어 있는 시카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고 직업 상담과 진찰, 조언을 제공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인근 동네의 흑인들을 돕기 위해서 웬들 피립스 정착촌을 세웠고 ‘국내 유색인 여성 연합’ 회합에 참석했다.
헐 하우스는 확장을 거듭했고 1907년에는 13채의 건물을 보유하여 광범위한 사회, 정치 사업을 성장했다.
도덕적 역량의 한계는 무한대
1910년이 되자 미국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회개혁가들이 헐하우스로 집결하게 됐다. 그들은 미국이 산업발전을 위해 지나치게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고 이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아동노동 폐지, 노동시간 및 여성노동 조건 법제화, 청소년 관련 법률의 개혁, 여성참정권 운동 등에 관여하며 미국의 성장지향적 가치에 제동을 걸어 미국사회의 근본적인 변모를 가져왔다. 그 변모는 너무 근본적인 것이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의 물결이 미국 땅에 일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다.
애덤스의 삶을 보면 인간의 도덕적 역량이란 어떤 한계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상적인 목표가 생기면 인간의 역량은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진다. 그의 작고 초라한 헐하우스 시작이 미국 사회복지의 틀을 만들었다. 한 명의 도덕적인 자각이 도덕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191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할머니 영향을 받아 기독교적인 신앙심을 바탕으로 ‘평생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경성의전에 입학한 그는 당시 국내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박사의 제자가 되어 경성의전 외과에서 근무했고, 1940년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인 연구> 논문을 통해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해방 직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대(김일성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며 의사로서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가족은 흩어졌고 장 박사와 아들만 월남해 부산으로 오게 됐다. 피난민이 되어 부산에 있던 장 박사는 우연히 같은 고향 출신을 만나게 되면서 제 3육군병원에서 다시 의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부산은 전쟁으로 피해 온 피난민으로 들끓었다. 전쟁 때문에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목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 재산을 털어도 수술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고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며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웬만한 병은 병 취급도 안 하는 바람에 작은 병도 치료의 때를 놓쳐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전영창은 한국의 처참한 소식을 듣고 급하게 기금을 마련, 모인 5천 달러를 쥐고 한국으로 달려왔다. 서로 모르던 사이였지만 처참한 한국을 도와야겠다는 전영창과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길 원했던 장 박사가 만나면서 무료진료소 설립에 뜻이 모아졌다. 장 박사는 바로 육군병원을 그만 뒀고 전영창은 5천 달러로 의료장비를 마련했다. 이들이 교회 창고를 빌려 급하게 만든 무료 진료소 이름은 ‘복음 병원’이라고 지었다.
월급은 항상 마이너스
1951년 부산 영도구 남한동의 제 3교회 창고에서 시작한 복음병원의 시작은 초라함의 극치였다. 20평 남짓의 창고에 진찰실과 약국, 주사실을 겸한 수술실을 천막으로 구분 지어 놓았고 수술실에 놓을 침대조차 없어 나무로 장 박사가 손수 밤을 세며 만들기도 했다.
무료진료소가 문을 열자 환자의 수는 단 며칠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의사가 온화하고 친절한데다가 치료비조차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환자가 밀려들자 장 박사는 정신 없이 바빠졌다.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1분 1초도 쉴 틈 없이 환자를 돌봐야 했다. 많은 경우, 환자들이 병을 오래 방치해 수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병원이 작아 수술 하고 나서 수술환자들이 입원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에는 일했던 곳은 그래도 군 병원이어서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이 없었지만 무료진료소에서 일하다 보니 당장 입에 풀칠할 거리도 없었다.
장 박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장 박사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루에 50인분의 약을 지원해주던 유엔 민사원조처는 병원 장소로 넓은 천막을 지원해줬고, 장 박사의 헌신적인 노력을 알게 된 미국의 종교 단체들은 복음병원에 매달 500달러를 원조해줌으로써 직원들의 월급을 포함하여 병원 운영을 해결 할 수 있게 했다. 몰려드는 환자 때문에 혼자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를 보는 장 박사를 보고 감동한 전휘종 박사는 자신도 복음병원에서 함께 일하겠다며 자청했다.
올바른 뜻을 세우자 주위에서 스스로 힘을 보태며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후 복음병원을 고려신학교가 함께 하며 ‘고신의료원’으로 확장해 제대로 된 병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국 의료보험의 뿌리가 되다
장 박사는 환자가 돈이 없다고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납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 월급은 항상 가불처리 되었다.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역임했지만 그에게는 서민아파트 한 채, 죽은 후 묻힐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 박사는 또한 민간 의료보험이 되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조합은 국가의료보험의 바탕이 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장기려 박사는 1995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그가 처음 의사가 되고자 했던 결심 그대로 한국의 수많은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한 잡지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학도가 되려고 지원할 때 치료비가 없어서 의사의 진찰을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죽는 환자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그러한 환자를 위하여 의사일을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한 책임감이 커질 뿐 그것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처음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사명을 자각하고 어떤 경우에서도 그 결심을 변치 않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포부가 남다른 스포츠 정치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는 1920년 바르셀로나에서 자수성가한 집안의 부유한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포부는 커서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랑코의 독재정권 밑으로 들어가 꾸준히 자신의 지위를 높였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빠른 시간 안에 체육 차관보에 맞먹는 IOC위원이 됐다.
사마린치는 IOC위원이 되고 얼마 안 되서 IOC위원장에 욕심이 났다. 하지만 당시 IOC위원장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전 IOC위원장인 칼라닌은 ‘정치적으로나 재무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러 다들 올림픽 폐지를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1972년 올림픽에서는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뮌헨에서 살해당했고 1976년 몬트리올 경기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는 재정난과 정치적인 불참운동에 시달리면서 IOC 자원이 고갈되고 사기가 꺾였다. 올림픽은 냉전의 희생물이 되어 IOC 은행 잔고에는 50만 달러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올림픽 정신 무너뜨린 부패
IOC의 위기 속에서 IOC위원장에 취임한 사마란치는 올림픽에 대한 새로운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먼저 올림픽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국가들이 올림픽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설득 덕분에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그전의 어떤 올림픽보다 가장 많은 나라들(167개국)이 참가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는 또한 주요 조직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IOC의 정치, 재무적인 힘을 강화시켰다. 상주 기구를 설립해 보다 힘있는 이사회를 운영했으며 어떤 선수가 올림픽에 적합한지 결정하는 권한을 각 스포츠 연맹에 양도함으로써 전문 선수들의 진출 기회를 열었다.
올림픽 역사가인 존 루카스는 사마란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마란치가 임기 초에 일으킨 변화들은 역대 IOC위원장들의 성과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실질적이고 건설적이다.”
하지만 시간이 나가면서 IOC는 거대한 사업체로 완전히 변형되며 본래의 올림픽 정신이 퇴색되기 시작했다. 사마란치는 재정 확장에만 신경 쓴 나머지 상업주의와 부패 행위를 부추기는 사건을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아니, 상업주의 정신을 높이고 부패를 즐긴 것은 IOC위원장인 사마란치 그 자신이었다.
사마란치는 올림픽에서의 시상을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와 부도덕한 독재자인 루마니아의 니콜라이 차우세우크와 같은 권력자들에게 맡겼다. 그 외에도 ‘인간 진공청소기’라고 불렸던 콩고공화국의 장 클로드 강가, 우간다의 프란시스 응양웨소 등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들을 IOC위원으로 추대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뛰어난 외교 수완과 좋은 선물에 응하며 새로운 IOC위원을 받아들여 2000년까지 사마란치 재임기간에 들어온 IOC위원이 전체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또한 지역 올림픽 위원들은 경기를 각자의 도시에 유치하고 싶어 개인적으로 사마란치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매우 즐기며 자신의 권력을 누렸다. 그는 여객기 1등석도 싫어해 전용 제트기비행기를 애용했고 60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로잔에서 제네바까지도 항상 헬리콥터를 타고 다녔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최고급 호텔과 승용차로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길 원했다.
나가노올림픽위원회는 사마란치가 나가노에 오자 1998년 동계 올림픽 경기를 유치하기 위해 최고의 사치를 누리게 해줬다. 그가 한 달 동안 나가노에 머물렀던 비용만 총 7만 5천 달러 이상이었다. 그를 따라 IOC위원들도 유치를 원하는 도시들이 제공하는 뇌물과 향응을 최대로 누렸다.
반 쪽짜리 성공만 거두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돼있다. 솔트레이크 올림픽 위원이 아프리카 IOC위원 딸의 수업료를 보내는 사건이 터지면서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IOC위원의 비리 의혹이 곳곳에서 터지게 됐다. 이와 관련된 IOC위원 9명은 축출 통보를 받거나 사임해야 했다. IOC의 부패 사건이 공공연하게 터지면 세계 유력언론들은 사마란치를 ‘올림픽 독재자’라고 하며 그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게 됐다. 그는 자신의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2001년까지 자신의 임기를 채웠다.
IOC위원장을 마친 그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올림픽을 성공시킨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시킨 인물이다. 그의 뛰어난 사업적 수단으로 세계의 축재로 불리는 올림픽은 재건되었다. 하지만 그의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못해 그의 성공은 반 쪽짜리 성공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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