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가상 화폐? 블록체인 가능성 중 빙산의 일각”
언제나 해가 바뀌면 전 세계 유수 경제·IT 전문 매체가 ‘올해를 지배할 신기술’ 얘기에 열을 올린다. 지난해 화두에 오른 기술은 단연 인공지능, 그리고 사물인터넷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부쩍 ‘낯익은 듯 낯선’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하고 있다. BIoT가 그것이다. BIoT는 블록체인을 구성하는 첫 번째 알파벳 ‘B’와 사물인터넷을 뜻하는 IoT의 합성어. 사실 블록체인은 지난해 6월 14일 스페셜 리포트(블록체인, 당신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낯선 생태계’)에서도 한 차례 다룬 적이 있다. 그리고 2018년 1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가상 화폐 비트코인을 탄생시킨 기술이기도 하다.
블록체인이 가상 화폐에만 관련된 기술인 건 아니다. 블록체인을 스마트폰이라고 가정하면 비트코인은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애플리케이션에 비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이 응용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실제로 블록체인 응용 가능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당장 전문가들이 언급하는 것만 해도 △헬스케어 △주식 투자 △저작권료 확보 △온·오프라인 상거래 △기업 회계 관리·감사 △부동산 △특허 △사물인터넷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은 “블록체인 기술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에 쓰일 수 있으며, 잘만 활용되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비용이 절감될 뿐 아니라 위험성도 줄어든다”고 입을 모은다. 혹자는 블록체인에 대해 “인터넷과 맞먹을 정도로 세상을 바꿀 힘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학계와 정부에서 제한적으로 쓰이던 인터넷이 대중화된 건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선언 이후부터였다. 이후 25년간 인터넷은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으로 세상을 바꿔놓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블록체인 역시 짧으면 10년 후, 길면 20년 후 현대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을 바꾸리란 예측이 무성하다. 이쯤 해서 질문 하나. 그렇게 중요한 기술이 왜 개발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걸까?
2018년 1월 현재 세계 유일의 ‘IT 보안 전공 박사 학위 소지 변호사’이면서 이 문제와 관련, 30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는 호주 출신 변호사 아드리안 맥컬러(Adrian McCullagh)씨는 지난해 10월 유튜브 기반 독립 매체 ‘콜드퓨전 TV(Cold Fusion TV)’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너무 새로운 패러다임이어서 처음 접하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게 첫 번째, “인공지능처럼 환상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가 아니어서 대중적 인기를 끌기가 쉽지 않다”는 게 두 번째였다. 하지만 그는 이 방송에서 “블록체인은 인공지능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중요한 기술이며, 인공지능이나 사물인터넷과 결합하면 폭발적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분산형 회계장부’와 개념 유사
블록체인은 한마디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분산형 회계장부’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데이터를 어느 한 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거기 참여하는 컴퓨터 전체에 모든 거래 정보를 똑같이 공유시킨다. 이때 거래 당사자 성명은 네트워크 ID로 대치되므로 네트워크 참여자는 해당 인물의 신상을 파악할 수 없다. 둘째, 일단 발생한 거래상의 데이터는 어느 누구도 수정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다. 이전까지의 금전 거래는 사람이 직접 만나 주고받는 게 아니라면 반드시 은행 같은 중개 기관을 통해 이뤄졌다. 대부분의 거래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은행을 거쳐 오가는 금액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추세다. 통상 이런 거래에선 모든 정보가 중앙에 위치한 금융 ‘센터’에 집결된다. 말하자면 ‘중앙집중형 거래’다.
이 같은 경제 체계에서 은행에 모인 거래 정보는 오로지 당사자만 열람할 수 있다. 아니, 당사자조차도 은행에서 보여주는 대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전체 내용을 알 수 있는 건 은행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일부 전문가뿐이다. 전 세계에서 생산된 가치가 돈으로 환산된 후 몇몇 전문가 집단에 오롯이 맡겨지는 셈이다.
전문가 매개 구조를 제대로 만들려면 은행과 그 종사자에 대한 보상 체계 정립, 그리고 필요한 장비를 갖추기 위한 예산 투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울러 (‘거의 실시간으로 완료되는’ 단순 온라인 송금은 예외이지만) 일부 거래는 그 성격에 따라 여러 중개자를 거쳐야 한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과정에서 쓰이는 돈과 시간은 전부 (전문가에게 매개 행동을 부탁하는) 소비자가 지출해야 한다.
이런 시스템은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우선 전문가 중 일부가 ‘검은 마음’을 품는다면 얼마든지 자료 조작이 가능하다. 특히 온라인 거래가 일반화된 오늘날, 은행 전산 시스템을 해킹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각종 중개 전문가와 관련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과 시간도 만만찮다. 이런 문제들을 떠올릴 때 블록체인은 최적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무슨 말이냐고?
‘작업검증’ 알고리즘 덕에 장부 조작 원천적으로 불가능
블록체인은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벽돌(block)이 사슬(chain)처럼 연결되는 구조’란 뜻을 지닌다. 여기서 블록 한 개는 한 건의 거래를 나타내며 △해당 블록에 담기는 데이터 △블록별 ID와 같은 역할을 하는 꼬리표, 일명 ‘해시(hash)’ △이전 기록의 해시 등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아래 도표 참조>.
위 도표에서처럼 최초 데이터를 제외한 모든 데이터가 이전 데이터 표시를 알고 있다. 따라서 한 건의 데이터에서 변동이 일어나면 그 다음 블록들이 이전 해시와 맞지 않단 사실을 감지, 해당 데이터의 정당성을 부인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블록 17의 데이터를 조작하려 하면 그는 열여덟 번째 데이터부터 시작해 그 이후 생성된 데이터 일체를 고쳐야 한다. 그와 동시에 변동 사항을 네트워크 내 수백 대, 아니 수만 대의 컴퓨터에 보내 수정되도록 해야 한다.
백 번 양보해 ‘요즘 컴퓨터는 계산 속도가 워낙 빠르니 어떻게든 알고리즘을 만들어 그런 작업쯤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고 치자. 그럴 경우에 대비해 블록체인에선 ‘작업검증(proof-of-work)’이란 요소를 통합해 넣어뒀다. 작업검증은 새로운 데이터를 생성하는 데 10분이 걸리도록 하는 알고리즘이다. 이 때문에 흑심을 품은 누군가가 데이터를 수정하려 하면 해당 데이터 이후 모든 데이터의 해시를 수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길게는 ‘해당 해시 수 곱하기 10분’만큼의 시간이 걸린단 것이다. 그런 다음, 그 결과물을 네트워크 내 모든 컴퓨터에 보내야 한다. 그 사이 새로운 거래가 생성되면 새로운 블록은 이전 해시에 뭔가 이상이 생겼단 사실을 감지하고 데이터 승인 거부 신호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블록체인 구조에서의 데이터 수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시스템에서 장부 조작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관련 전문가 집단이나 시설도 불필요하다. 여러모로 현행 금융 체제의 대안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블록체인은 ‘혁명’이란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단 의미다. 그로 인한 패러다임 변화는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의미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나온 ‘블록체인 백서’, 우연일까?
인류는 무슨 용도로 문자를 만들었을까? 시를 쓰기 위해서? 역사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둘 다 아니다. 현존하는 흔적으로 봐선 ‘회계 장부를 기록하려고’ 만들었단 가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인류 최고(最古) 문자는 기원전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사용된 걸로 보이는 쐐기문자(cuneiform)다. 갈대 줄기를 잘라낸 후 그 뾰족한 끝을 점토판에 눌러 박아 글씨 쓰고 불에 구우면 글씨 모양이 변형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다. 그중 초기 문서(점토판)의 내용은 주로 창고에 곡식이 얼마나 보관돼 있는지, 그 지분 관계는 어떤지 하는 것이었다.
▲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상형문자인 '쐐기문자' (출처: 위키미디어)
자산 배분 원칙을 문자 기록으로 남기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록을 적당히 왜곡시키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 하나둘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연히 기록을 지키는 건 사회 질서 유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그에 따라 문서보관소와 그걸 지키는 병력이 생겨났다. 문서보관소 관련 병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해당 내용을 좌우할 영향력도 함께 지녔다. 브리태니커 사전을 비롯, 수많은 사회과학 저술이 “자원 분배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라고 명기하는 이유다.
그 즈음, 노동이나 기타 가치 생산 업무에 종사하지 않아도 회계 기록을 다루고 대중이 그걸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중개해주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대 사회로 접어들며 일부에선 그런 집단을 가리켜 ‘금융계’란 명칭을 붙였다. 장장 5000년 이상 금융 전문가들은 인류가 생산한 가치 질서를 성실히 유지해왔다. 하지만 금융 거래 기록을 문자로 담는 게 장부의 속성인 이상 그 질서는 언제든 교란될 수 있었다. 더욱이 최근 ‘디지털’과 ‘글로벌’이 지구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며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전 세계를 상대로, 단기간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됐다.
실제로 2007년부터 1년여 동안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금융 위기는 그런 우려가 현실화된 사례였다. 문제 발생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지만 그와 무관하게 당시 무수한 대중이 자신의 소중한 자산을 한순간에 잃었다. 어떤 검은 손이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개입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금융 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08년 말,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별안간 한 편의 백서가 떠돌기 시작했다. 발표자는 사토시 나카모토. 백서의 내용은 “블록체인이란 기술을 이용해 가상 화폐, 즉 비트코인을 만드는 법”이었다. 기술 자체는 1991년 이미 발표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해당 기술의 실제 적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건 나카모토의 글이 처음이었다.
이후 상황은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대로다. 블록체인 기술이 생성시킨 에너지는 향후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블록체인과 사물인터넷의 결합은 대체 뭘 의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