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錦江)
- 신동엽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 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랜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正午)가 되면 그 하늘 아래도 오포(午砲)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 …… 하고,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 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 다니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그 일을 그분들은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눈보라치는 동짓달
콩강개 묻힌 아랫목에서
숨막히는 삼복(三伏) 순이 엄마 목매었던
그 정자나무 근처에서 부채로 메밋소리
날리며 조심조심 이야기했던 걸까.
배꼽 내놓고
아랫배 긁는
그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2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天竺)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다.
없었다.
바깥 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 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이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이하 생략)
(서사시 금강, 1967)
<감상의 길잡이>
전쟁의 생채기를 꽃의 핏빛 이미지로 보여 준 <진달래 산천>(1959)에 이어 격동의 60년대 초반을 지나온 신동엽은 4․19를 돌아보는 화자의 서정적 정서를 드러낸 <산에 언덕에>(1963)를 통해 그리운 사람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이 시를 통해 60년대 대표적 참여 시인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격동기를 겪으면서 역사의 허구성을 목격하게 됨으로써 권력의 폭력성을 배격하는 목소리를 지니게 된다. 민중․민족․민주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낸 <껍데기는 가라>(1967)를 발표하여 우리 시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그는 <종로 5가>(1967)를 거쳐 마침내 자신의 문학적 역량이 하나로 집약된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함으로써 민족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이 땅에 깊이 새겨 놓고 1969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갔다.
이 시는 2장씩 전․후시를 포함하여 총 30장 4800여 행의 장편 서사시로서 실존 인물인 전봉준과 가공 인물인 신하늬로 대표되는 인물군(人物群)들을 등장시켜 동학 혁명을 형상화하고 있다. 동학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시화(詩化)를 통해서 민중적 세계관과 반외세에 대한 시인의 인식 태도를 보여 주는 이 시는 여러 인물들 사이에 얽힌 사건들이 교직(交織)될 뿐 아니라, 시간의 넘나듦을 통해 재구성되고 있다. 특히, 기존에 발표했던 <종로 5가>, <산사> 등의 여러 서정시를 삽입하여 형상화하는 특징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의 대체적인 사건 진행은 기이하게 태어난 후 초혼에 실패했다가 진아를 만나는 신하늬와, 동학에 입교하였다가 조병갑의 학정에 아버지를 잃은 전봉준과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만남은 동학 혁명으로 시작되며, 혁명의 실패로 끝난다. 즉, 혁명이 실패하자 신하늬는 아들을 낳은 후 죽음에 이르고, 전봉준은 체포 구금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런 운명적인 만남을 통하여 역사의 유구함을 화자 자신으로 추정할 수 있는 신하늬의 아들에게서 확인하고 있다.
신동엽은 현실 인식의 뿌리를 민족사를 관통하고 있는 사건들인 동학 혁명, 한국 전쟁, 4․19 등에서 찾아 이를 정당하게 해석하고자 한 시인이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민중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보여 줌으로써 이 나라에 새로운 문학적 전망을 열어 놓았다. 나아가서는 70년대 민중 민족 문학의 튼튼한 뿌리를 참여시라는 형태로 선도함으로써 자신의 시사적 위치를 더욱 값진 것으로 한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