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 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
올해(2025년) 진주고등학교, 진주여자고등학교, 진주중학교, 진주여중학교가 나란히 100주년을 맞았다.
진주를 대표하는 이들 학교의 뿌리는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적인 운동으로 승화된 3·1만세운동은 진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계기로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손으로 만든 중등 교육기관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 조선인 인재 성장의 길 막은 일제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통치에 필요한 조선인 하급 관리를 양성하는 기초적인 교육만 시행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3·1만세운동에 깜짝 놀란 일제는 종래의 강압적인 정치에서 탈피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제한적으로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일제는 3개 면을 묶어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1곳을 설치하겠다는 정치를 발표했지만, 실상은 1개 면에 한 학교가 있어도 부족한 현실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일제는 중등 과정의 학교는 좀처럼 허가하지 않았다. 사립 인문계의 경우 진주 지역에는 그때까지 한 곳도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해 서부 경남 일원에서는 보통학교를 졸업해도 진학할 학교가 마땅치지 않았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3·1운동을 경험한 진주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됐다. 그런 상황에서 시작된 사립 중등학교 설립 운동은 주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 진주 유지들 뜻모은 중등교육 ‘도전’
1919년 말부터 진주의 대표적인 유지였던 허만정, 하영진, 허선구 선생 등이 앞장서 설립에 필요한 자본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서부 경남 지역의 이름난 유지들도 동참했다 특히 허만정의 부친 허준 선생은 취지에 공감하면서 쌀 5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토지를 기부했다. 그렇게 1920년 3월 사립 일신 고등보통학교 기성회(하명 일신재단)가 결성된다. 이들은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을 줄기차게 찾아가 사립 중등학교 설립을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일제는 1922년 3월 학교 법인의 재산 기준을 30만 엔에서 50만 엔 으로 상향하는 등 좀처럼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진척을 보이지 못하던 중등학교 설립 문제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으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이 부산 이전이 또다시 수면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청 이전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1910년대부터 계속해서 거론됐지만, 그때마다 진주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됐다. 1920년대 들어 일제는 다시 내부적으로 도청 이전을 결정하고, 사전에 진주 민심을 달랠 목적으로 1923년 11월 진주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결정을 통보한다.
대신 일제는 단서를 달았는데, 일신재단이 마련한 학교 부지 1만 3000평 부지와 자본금 13만 엔을 먼저 헌납하고, 남자학교는 사립이 아니라 공립으로 설립하는 대신 새롭게 여자학교를 사립으로 설립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남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운동가를 배출할 것을 우려해 통제가 쉬운 공립으로 설립하고, 여학교는 사립으로 신설할 수 있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애초 진주 중등학교로 여자보통고등학교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일제의 교육 제한을 두고 일신재단은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결국 수용을 결정했다.
◇ 도청 이전 대가로 사립학교 설립 허가
그렇게 1925년 4월 1일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가고 24일 공립 진주고등보통학교, 25일에는 사립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게 된다. 두 학교의 개교는 진주에 남녀 인문계 중등교육이 시작됐다는 큰 의미가 있다.
강호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민족 중등교육을 시키겠다는 지역의 의지가 3·1운동 이후 절실했는데,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지역 유지들이 일치 단결해서 진주고보, 일신여고보 개교로 이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공립 진주고등보통학교는 교원 7명에 1학년 50명을 모집하며 개교를 알렸다. 비록 사립 남자학교의 설립은 무산됐지만 일신재단은 현 갤러리아 백화점 자리에 벽돌 건물을 짓기로 하고 하루 뒤인 25일 공립사범학교 옛 교사를 빌려 일신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개교했다.
일신여고보는 1938년 봉산 고등여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가 1939년에는 조선인 2학급, 일본인 1학급을 보유한 조선 최초의 민족 혼용학교로 전환했다. 일제가 일본인 자녀도 입학하게 하려고 사립에서 진주공립고등여학교로 강제 전환한 것이다. 일본인 졸업생들은 1981년에 모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1945년 3월 현재의 상봉동으로 교사를 옮기고 광복 후 진주 공립여자중학교(6년제)로 교명을 바꾸었다가 1951년 진주여자중학교(3년제)와 분리돼 진주여자고등학교(3년제)로 개편했다.
허만정 선생이 설립을 주도한 진주여고는 아들 허완구 승산그룹 회장이 1988년 효주기념관, 1995년 교사동 3동과 체육관인 일신관도 준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 항일 학생 운동 중심지로 민족 정신 키워
진주고보와 일신여고보는 일제강점기 학생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식을 지켜나갔다.
대표적으로 1930년 1월 17일 광주학생의거에 자극을 받은 진주고보 3학년 학생들이 주축이 돼 전교생이 거리에 뛰쳐나와 만세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거리에서 일신여고보, 사범학교, 진주 농업학교 학생들과 합류시키려 했지만 일경의 원천 봉쇄로 실패했다. 이때 학생들이 외친 구호가 ‘노예교육 폐지’, ‘경찰 학내 침입 금지’, ‘광주학생 석방’ 등이다.
진주고보는 개교 이후 1938년 진주공립중학교(5년제)로 교명을 변경한다. 해방 이후 1950년 4월에는 진주중학교(6년제)로 다시 개칭하고, 1951년 9월 교육법 개정에 따라 중·고등학교 각각 3년제로 분리됐다. 이때 진주중학교가 진주고등학교와 분리됐고, 진주에서는 진주남중학교가 진주농림고등학교와 분리됐다.
진주고등학교는 ‘한강 이남에는 진주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학 입시에서 두각을 보였다. 1958년 제28회 졸업생이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이후 1980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50회 졸업생이 자연계 전국 수석을 차지하는 등 명문의 전통이 이어갔다.
◇ 진주 인근 인재들 모여드는 구심점 돼
1981년 졸업생은 서울대에 150명이 입학했고 이듬해 제52회 졸업생의 경우 전국의 고등학교 중 가장 많은 졸업생 29%인 171명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들은 고입 선발시험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1975년에는 진주고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가 개교해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시민들에게 고교 교육과정을 이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진주여고는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를 배출하는 등 진주를 대표하는 명문으로서의 위상을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다.
조헌국 전 진주교육장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자본으로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진주고와 진주여고 설립으로 이어졌다”라면서 “중등학교가 설립되면서 다른 지역의 인재들이 진주에 유입되는 계기로 작용해 오늘날 교육의 도시로서 진주시의 입지가 형성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