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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에서
선교장까지 걸어서 가기에는 조금은 벅차다. 잰걸음으로 걸으면 10분-15분 소요되는 거리다.
지금 신작로가 나기전에는 선교장 앞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경포호수 옆으로 시원하게
길을 열었다. 그리고 오붓하고 동네 마실 가는 마음으로 찾을 수 있었던 선교장 모습이
이제는 아니었다. 역사적 사물을 접하려면 흔히 대하는 통과의례인 매표소에 들러 표를사고
입구에 서 있는 안내간판을 읽고 매점에 들러 선물을 사고 기념관을 들러 전시물을 견학하는
그런 형태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차를 선교장 코 앞에 주차시키고 매표소로 갔다.
경포대는 이른 시간 때문에 공짜였는데..... 선교장은
이른 시간임에도 관리인이 계셨다. 화장거울을 열심히 들여다 보시다
표를 건네 준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江陵 船橋裝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효령대군 10대손 이경 이내번이 18세기 초 지은 건물이다.
안채,사랑채,행랑채,동별당과 정자를 갖추고 있다. 선교장이란 이름은 이곳의 옛지명인
배다리마을이란 지명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안 채는 ㄹ자 형태로 동별당과 연결되었으며
사랑채는 사랑마을 북쪽에 있다. 사랑채는 순조15년 이내번의 손 오은처사 이 후가 건립하였다.
열화당 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중 열친척지정화에서 따왔다고 전 해 진다.
서별당과 행랑채 일부는 소멸되었으나 1996년 다시 복원하였다. 바같마당 남쪽으로는 넓은
연당이 있고 연당위에 ㄱ자 형태의 활래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 역시 순조 16년이 후 중손인
이 근후가 증축한 것이다. 활래정이란 이름은 주자의 시 이유원두활수래에서 땄다고 한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품에 안고 너그럽게 자리 잡은 선교장이 아름답다는 말로 안내를 끝내고
있다.(요약함)
매표소를 지나 좌측으로 가면
전국에서 수집해 온 것 같은 여러형태의 장승이 손님을 맞이 한다.
어느 동네를가나 늘 동구밖에서서 원주민들이 들고 날 때 지켜주고 처음 찾는 길손을 반기던
장승은 천하 대장군과 지하 여장군으로 구분된다. 음과양의 구분도 있지만 남녀의 유별에
대하여 그리고 남녀 신분에 대하여 엄함을 구분하는 상징도 담겨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신하들과 왕께서 세상 돌아가는 일과 사람 사는 세습에 대하여 논하는 자리가
있었다. 대화는 남녀 성 적 한계에 대하여 화제에 올랐고 왕은 장난끼가 동하여 이런 문제를
신하들에게 던졌다. " 여봐라 짐이 자네들에게 묻겠다. 만약 말이다. 아주 깊은 심심산골에
아버지와 과년한 딸을 들여 보내 십여년을 살게 한다면 불륜이 생기겠는가? 아니겠는가?"
신하들은 두패로 갈렸다. 그렇다와 아니다의 두 공방은 밤을 세워도 멈추지 않았다.
이 때 왕은 다시 지궂은 제안을 한다. " 우리가 이럴께 아니라 실험을 해 보자. 학식과 덕망이
높은사람을 추천하여 금강산에 보내고 10년 후 불러 내어 확인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양쪽 다 찬성이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 부녀를 불러내자 인륜을 거부한 사태가 발생 한
것이다. 왕과 대신들은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왕이 직접 나서서 친국을 강행하였다.
갖은 고문과 고초를 통하여 자백한 부녀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탄식을하며 대신들에게 명한다.
이 일을 거울삼아 고을의 어귀 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을 세워 백성들을 일깨우
는 귀감으로 삼아라 하였다.분별력과 각자 지닌 형편에 대하여 배우라는 뜻이었다.
장승 옆으로 전시실이 있지만 복식에 대한 민의(民衣),관의(官衣),상의(喪衣)만 진열되어
있을 뿐이 다른 자료는 없다. 오히려 대관령 옛길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이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다시 돌아 나오면 커다란 연당이 있고 연당 한쪽으로 활래정이 보인다. ㄱ자 형태의
정자가 주변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석 주 위에 반듯하게 서 있는 정자 추녀끝이 아낙내들의
버선 코 처럼 날렵하면서도 매끄럽다. 정자 뒤 산 흐르는 선과 알맞게 겸양되는 모습이 발
길을 잡는다. 현판 글씨가 호쾌하고 주련에 적어 놓은 글들이 환경과 안성맞춤이다.
여름날 장관을 이룰 연당 그 위에 서 있는 활래정으로 드나 드는 사잇문이 따로 있는데 그
문 이름이 운치가 있다. 월하문(月下門) 이라 ! 달 아래 문이라 얼마나 운치가 있는가!
월하문을 지나면 활래정에 들 수가 있고 이 정자에서 연당못을 보며 나는 새와 물고기와
사람과 세죽 잎이 떠는 바람소리를 함게 하며 사람과 맞남은 얼마나 행복하였겠는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 보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세죽에 바람 일 듯이. 은한은삼경인데..
달빛은 시상을 준다. 특히 기러기와 더불어 구 만리 떨어진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기가 딱 좋은
가을 날 나는 이 문을 오가며 시 한수를 연당에 던지겠다고 마음써 본다.
목판글씨와 주련에 새겨진 글을 깨닫고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조급하다. 다시 시간을 내야지
욕심이 아니고 현실이기를 기원하며 자리를 안 채로 옮겼다.
안 채에서는 목공들의 발 걸음이 바쁘다
내일 황진이 드라마 촬영이 있어 셋트를 꾸민다고 난리법석이다. 아들이 혀를 찬다.
황진이는 이조 초기 사람이고 이 가옥들은 이조 후기 가옥인데 고증이 언바런스다.
그래 한번 살펴 봐야겠다고 응답했다. 사람이 사는 건물도 유행은 있었으나 의관처럼 라이프
싸이클이 빠르지 않았을 것 이라는 추측이 들지만 그래도 한번 짚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다. 안 채 대문에 서자 대문 안 가로막이 눈에 뛴다. 대문에서 내실이 직접 보이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랑채는 개방형 주택이라면 안채는 여성들이 거처하는 밀실이기 때문에
택한 방편이라 생각하니 격세지감이다. 지금이야 노출의 시절이니...... 그리고 그 자체가
미덕이고 예술의 한 경지로 치부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보일듯 말듯하는 안개빛 아련함이
아닐까? 나만의 독선일까? 그래도 나는 그빛을 좋아하련다. 청자의 빛이 좋은 이유는 뭘까?
표면은 매끄롭지만 그 안에 담긴 우유빛 같은 푸르름이 낮설지 않기에 우리는 마음에 담는
것이다. 수채화 같은 안개빛 푸르름이 오히려 신비감을 주기 때문에 곁에 잡아두고 싶은
것이 아닐까? 대문을 열어도 금새 보이지 않는 안채, 찾는 손님의 기척이 가림막을 한번 지나는
사이 황급하지 않게 그리고 조신하게 맞을 준비를 할 찰나의 여유로움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는 그 아름다움을 가림막 앞에서서 발견하고 미소 지으며 지나쳤다. 정이 가는 장소다.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남북으로 회랑같은 길이 나 있고
그 위쪽 즉 동쪽 산밑으로 거처가 들어 서 있다. 우측으로 한번 더 돌아서야 좌측 맨 위로
마님들의 거처인 내실이 비로서 보인다. 아홉구비를 넘어야 볼 수 있었다는 아녀자들의 처소
입구에는 늘 사랑채가 존재 한다. 어쩌보면 그것은 남정네들이 안채의 드나드는 것들에
대한 감시탑(?) 역활이었다. 사람과 물자 그리고 기타 드나드는 동태를 한 눈에 파악하려고 한
이유와 보호 본능이었다. 지금 그런 처세를 부리면 치졸하고 안위가 위태하기 딱이지만
당시에는 당연한 법도였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방향의 기준은 늘 오른쪽이 중심이 된다.
때로는 왼손잡이와 좌타자가 각광 받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기준은 오른쪽인 것이다.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은 가옥 형태에서도 오른족에 배치하는 것이 보편적인 성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배치는 해당 된다. 선교장 역시 오른쪽에 가정의 중요시설을 배치
하였다. 안 채와 사랑 채 그리고 집안의 중심이 되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도 오른쪽 끝 산에
배치되어 있다. 나는 사당앞 계단에 섰다. 선교장이 한 눈에 들어서는 위치다.
그리고 소나무 그늘이 좋고 풍광이 빼어나다. 각 가정마다 소유하고 있던 사당은 그 집안의
뼈대였으며 고고하게 흐르는 가풍이 서린 장소였다. 가정의 길흉사 시 그 즐거움을 나누고
슬픔을 해결하고 미래의 안녕을 각별한 마음으로 조상님께 빌었던 장소 사당!
나는그 사당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내 마음의 사당은 과연 무엇이 들어 있으며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보통 조상을 모시는행위를 차례(茶禮)라 부른다.
지금이야 제상에 많은 제물을 쌓아 놓고 禮을 올리지만 초기에 조상에 대한 차례는 이슬내린
옹달샘에서 길어 온 물로 끓인 향기 좋은 차(茶)를 끓여 올리는 것으로 족하였다.
이로 부터 우리는 제사행위를 차례 올린다고 쓰기 시작 한 것이다. 그리고 한 여인이 다른 집안
으로 시집 갈 때 허리춤에 주머니를 달고 갔다. 그 주머니에는 아주 질 좋은 차가 들어 있었다.
이 차 이름을 封茶(봉다)라 하였고 시집에 들자 마자 새색씨는 이 봉다를 꺼내 잘다려서 사당에
올려 지아비 조상께 인사를드렸다. 이 행위를 봉다례(封茶禮) 한다. 이런 연유는 다음과 같다.
친정집 엄마가 묵시적으로 닥쳐 올 험한 인생사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삶이란?
좋을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긴 여로에는 단맛,쓴맛,매운맛.신맛,떫은맛 즉 오미가
존재한다. 다섯가지 맛을 겪으면서 人輪를 쌓다 다시 오던길로 가는 것이다. 이 삶의 五味를
잘 견디며 살겠다는 약속이 봉다례인 것이다. 그리고 차나무는 移植(이식)하면 곧 죽는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그 집 귀신이 되라는 지엄한 어머니의 당부가 봉다속에 담긴
삶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아낙네들은 늘 그런 마음으로 새벽에 차를 끓여 사당에 올렸었다.
세월이 흘르자 변화여 나중에는 정한수로 대신하였고 때를 맞춰 지내는 제사가 지금의 제물로
변 한 것이다. 뿌리의 의미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 갈 근본적인 교훈이었다. 삶의 뿌리....
나는 선교장사당 언덕에서 그것을 바라 본 것이다. 대관령 마루에 백륜(白輪)이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우리의 인생의 시간처럼 그렇게 쉼 없이 돌고 있었다.
안채에서 다시 북문을 이용하여 나서자
아담한 초가가 보인다. 분명 행랑아범이 살던 그리고 머슴들이 살던 집이 였을것이다.
지금은 공방을 만들어 이것 저것 박물을 팔고 있다. 그리고 솟대를 만들어 손님을 반긴다.
안을 들어다 보자 공방쟁이가 반갑게 맞는다. 청소 중이라 금 새 밖으로 나와 뒤켠으로 가
보았다. 나무 굴뚝이 정겹고 추녀에 메 달아 놓은 메주와 시래기들이 초가의 운치를더 해줘
기분이 좋다. 초로 엮은 지붕 아래에서 산다고 민초(民草)라 불렀던가? 아니면 풀뿌리 처럼
모질게 사는 백성이라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초가지붕은 꼭 백성의 마음과 같다.
45도 곡선은 우리민족의 심성이며 삶의 訓이다. 45도 곡선이 아름다운 초가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다시 45도 곡선인풀 덮힌 墓(무덤)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길, 저고리의 깃이 두루마기의
깃이 45도며 버선코와 신발의 선도 45도 심지어 가족들이 모여 행사 후 사진을 찍을 때 살짝
45도로 비켜서 찍는다. 그 안정된 여유로움이 초가지붕과 우리심성에 묻어 나는데 현실은 각박
하기만하다. 여유와 여운속에 내재된 사랑과 기쁨이 바로 행복의 소산이거늘....
우리는 쓸 때 없는 아집과 이기심의 경쟁 때문에 이 아름다울 세상을 우리 스스로 초라하게
변질 시키고 세상 재미없다 떠든다. 정말 재미없는 세상이다.
초가를 돌아 흙길을 걸어 나올 때
마음에 드는 창이 보였다. 초가나 한옥이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 매력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바로 여백인 것이다. 45도에 남는 여유 즉 여백이 항상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것이다.
서양화 보다 동양화가 더 기쁨을 주고 안도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수묵이 주는농도와
그 사이 여백이 마음을 한가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한옥 그리고 초가의 벽체에도 가로지른
나무목과 그 사이의 흰 공간이 우리를 편하게 해 준다. 절제 된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바로 자연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창이 좋아 다가가다 밭 고랑이
앞에 있어 더 좋아 보이는 초가가 있어 한 참 서 있다 샷다를 눌렀다. 눈이 온 후 그리고 빛이
쨍 드는날 와서 찍어 놓으면 좋은그림이 될것 같은 포인트다. 혹시 그 앞에 누군가 물동이나
지게를 지고 간다면 금상첨화... 낚시꾼에게 포인트가 있듯이 삶의 한순간에도 늘 포인트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출렁거리다 그리고 온유하다 성급하다가 포인트를 맞나면 잠시
마음의 외유를 통하여 쉬어 보는 것이다. 파란 풀밭을 청명한 하늘을 풋풋하고 은혜와
겸손과 인내가 가득한 숲의 풍광을 찾아 쉬어 보는것이다. 청산에 안겨 맑은 숨을 내시며
노래를 불러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본질이다. 마음의 이탈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가
아닌 본성의 자아를 발견 해 보는 것이다. 문전옥답은 생명의 근간이었을..... 조그마한
땅덩어리 소유 때문에 얼머나 많은 민초들이 고단하게 살았는가 ! 우리의 역사에는 그 고단함
짙게 베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경제 논리로도 빈부의 격차는 해결 될 수 없다.
인류는 숱한 방법으로 실험했지만 그 때마다 새로운 체제내의 빈부는 또 생겼다.
이 모순을 고칠수 있는 것은 사랑이며. 그리고 자비심이다. 우리가 삶의 교훈으로 모시고
섬기는석가,예수,마호멧,공자께서도 그 점을 강조하고 계신다. 나는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서
불합리한 세상을 말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성인은 다섯이다. 상대는 그 후
이야기에 대하여 무척 궁금해 했다. 바로 너 였다. 상대를 섬기고 산다면 분쟁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너는 자주 바뀐다 개망나니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식을 끈임없이 섬기고 사랑으로
대 한다면 그 아이는 제자리로 분명히 찾아 온다. 만약 그렇치 않으면 나를 벌하라!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예정된 시간표처럼 떠나야 한다. 카타리나가 마지막 열차를 타고 떠나는 것 처럼
떠나야 한다. 우리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현재 오전 10시30분 아직도 식 전이다.
강릉 땅 여류시인을 보고 싶으나 갈 길이 염려된다. 우리는 1시전 힁성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치 않고는 길에서 여간 고생이 아니다. 봉평으로 가자! 물래방아 허생원 사연과
동이의 슬픈 태생적 사연을 철 지난 메밀밭에서 물어 보자 은한삼경 때에 메밀밭을 걸어 볼
시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이효석이란 인물이 먹여 살리는 봉평을 현대 나귀를
타고 나의 동이를 데리고 내가 즐겨 찾는 현대식당에 가서 조반으로 메밀막국수와 메밀전병,
쌈을 먹고 봉평을 휘휘 돌아 태기산 넘어 서울로 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도시인의 탈을
뒤 집어 쓰고 살아야 한다. 아무 내색없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다
오염이 목에 차면 다시 태백줄기 따라 숨어들어 다시 씻어내고.... 그래 가자 봉평으로
우리는그렇게 봉평으로 갔다. 영동고속도로 타고 가다 장평IC에서 벗어나 다시 금당계곡
반대 방향에 있는 봉평으로 입성했다. 장평을 지나며 평창 가는 길에 있는 대화가 생각났다.
나의 주신께서 계시는 곳 대화성당 시골교당치고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성모님 석상이
아름답고 교당내부가 아름다운 성당이다. 서울의 큰 성당에서 도움을 받아 지어진 성당이다.
대화성당을 지나쳤다. 서울 갈 길이 그렇게 빠쁜 것이다. 나의 이기심은 성탄 전 고해성사로
풀어야 할 숙제다. 현대막국수 집 벌써 손님이 가득하다. 집 단장을 새로 했다. 어색했다.
등을 꾸부리고 들어섰던 일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가수 이문세씨도 아내와 함께
식사 중이다. 광화문 연가가 생각이 났다. 언젠가는 배워 연회 시 부르고 싶은 곡이다.
언덕위 조그만 예배당이라는 가시가 까까머리 학생 시절 정동 길을 연상시켜 준다.
나의 추억과 일치되는 가사가 좋은 모양이다. 이래서 음악은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신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다. 아이가 반갑게 인사한다. 누구나 그랬던 것 처럼 심야 래디오
음악방송 청취자였던 아들은 특히 이문세씨를 좋아했다. 나의 그 시절이 그립다.
눈을 감으면 그 때 감미로운 노래가 들린다.
생가는 종전 보다 많이 퇴락 되어 있었다.
나의 동이가 또 불만이다. 영국에 어학연수 갔을 때들러 보았던 섹스피어 출생 도시는
온 통 섹스피어기념관 이었는데 봉평은 이효석이란 소설가가 먹여 살리는 촌 동네면서
이렇게 초라하게 대 할 수 있냐고 따진다. 바로 옆에 고래등같은 한옥 식당이 들어서니
더욱 더 초라할 수 밖에 근시안 적인 사람들 추악한 자본주의다. 천민적 자본주의 사상
나는 늘 소설가의 고향을 찾을 때 마다 안타가움을 느끼게 된다. 이 주변도 메밀밭으로
조성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침김에 나도 생가 마루 빌려 국수장사나 할까
여행후반에 김이 샜다. 그리고 나는 바로 떠났다. 태기산 정상 부근에 아름다운 설화가
여행의 고단함과 기쁨으로 동시에 안아준다. 산을 넘어 서울로 가는 고을을 하나 하나 지나
오후 3시경 도착했다. 나의 동이는 태기산 넘자 오수를 즐긴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브레이크 폐달을 밟는 것을 삼가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우리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 왔다.
아! 일단은 개운하다. 즐겁다. 함께 해 준 아들이 든든했고 사랑스러웠다.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아들이 도착하여 따라주는 커피에 한마디 덪 붙인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서해로 가자 석화와 새우구이 먹으로 황해로
가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