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를 기복에서 깨달음의 종교로 전환
불교 위시한 다른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
힌두이즘으로 ‘공’ 가르친 불교인 비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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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카라는 인도전역을 종횡으로 누비며 베단타 사상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용수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의 이름으로 불교의 공사상을 가르친 불교인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
샹카라(Śankara, 기원후 788~820년경)가 인도 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위대하고 심오한 사상가일 뿐 아니라, 자기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널리 주유천하하기도 하고, 불교를 논박하는데 앞장서기도 하고, 승단을 창설하거나 승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실천적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최대의 공헌은 이른바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라는 학파를 공고한 터전 위에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드바이타’란 ‘불이(不二)’라는 뜻으로 영어로 ‘non-dual’이라 번역한다.
그는 인도 남쪽 케랄라(Kerala)의 칼라디(Kalady)에서 태어났다.
출생 및 사망 연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8세기에서 9세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고 있다.
부모가 아이가 없어 애를 태우다가 오랜 기도 끝에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샹카라는 5세에 ‘학생의 삶’을 시작, 8세에 베다경에 통달했다고 한다.
인도 남쪽 케랄라 갈라디 출생
어릴 때부터 출가 수행자가 되려는 성향을 보였지만 어머니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허가를 받자 구루를 찾으려 북쪽으로 떠났다.
나르마다 강기슭에서 가우다파다(Gaudapada)의 제자 고빈다 바가밧파다를 만났다.
그가 샹카라에게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묻자 즉석에서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에 기초한 대답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이에 깊이 감명 받은 고빈다 바가밧파다는 그를 제자로 삼았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날로 더해 갔다.
바가밧파다는 샹카라에게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널리 전하라고 지시했다.
샹카라는 『브라흐마 수트라 Brahma Sutras』 뿐 아니라 열편의 『우파니샤드 Upanishads』 및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에 대한 주석서도 썼는데, 이것이 아드바이타 베단타 학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삼론(三論)’이 되었다.
샹카라는 또 아드바이타 베단타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인도 전역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불교를 위시하여 자기 생각에 이설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논박하였다.
아드바이타 베단타 사상의 뼈대는 샹카라 이전 가우다파다에 의해 제시된 것이지만, 이처럼 샹카라가 이를 체계화하고 널리 전파하였기에 그를 실제적인 창시자라 여긴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기원전 9~7세기에 나타난 『우파니샤드』라는 문헌에 기초하고 있다.
기원전 15세기 경 지금의 이란에서 인도로 들어온 아리아 족에서 유래된 인도 최초의 경전인 『베다경』이 인드라 신을 비롯하여 여러 신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복을 비는 ‘기도’를 중요시하고, 기원전 10세기경에 나타난 『브라마나스』라는 문헌이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강조한 데 반하여 『우파니샤드』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인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우주의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을 깨달으라고 한다.
브라흐만은 ‘네티 네티’라고 한다.
‘이것이라 할 수도 없고 저것이라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실재이므로 ‘이것’이나 ‘저것’으로 한정지을 수 없고, 우리의 제약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세계 종교들의 심층차원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한편, 이 절대적인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은 단순히 추상적인 원리만이 아니라 각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적이며 참된 ‘자아(아트만)’이기도 하다.
‘참나’는 브라흐만의 구체화된 상태로서,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곧 브라흐만이다”라는 진리가 성립된다고 한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tat tvam asi(That art thou)’라고 하는데, “그대는 바로 그것(브라흐만)”이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이렇게 내가 바로 브라흐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곧 무명(無明)이요, 이를 몸소 체득하여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라고 하였다.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사상은 이와 같은 『우파니샤드』의 기본 가르침에 따라 성립된 것이다.
‘베단타’라는 말 자체가 ‘베다의 끝’이라는 뜻으로 그 기본 사상이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아드바이타’라는 말도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에 따른 것이다.
힌두교 중흥에 절대적 공헌
샹카라에 따르면 “브라흐만 만이 참 실재요, 시공의 세계는 허상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브라흐만과 개인적 자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궁극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은 결국 아무런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 브라흐만을 ‘니르구나 브라흐만(nirguna Brahman)’이라 한다.
너무나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특성도 브라흐만에는 해당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굳이 뭐라고라도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삿 칫 아난다’ 곧 ‘순수 존재, 순수 의식, 순수 기쁨’이라고나 할 수 있다.
마치 불교에서 궁극 실재는 언설을 이(離)한다는 뜻에서 공(空)이라 하지만 그 공마저도 공하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그러나 브라흐만을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추상적이라 한정된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어떤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일종의 차선책이라 할까, 양보라고 할까, 브라흐만에 모든 아름다운 특성을 다 붙여서 생각해도 좋다고 한다.
이런 면의 브라흐만을 ‘싸구나 브라흐만(saguna Brahman)’이라 한다.
베단타 철학의 삼론 저술
그런데 아름다움, 위대함, 능력있음 등의 특성을 부여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특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 특성’이다.
따라서 아직도 이 허상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브라흐만을 ‘주님(이슈바라)’라고 부르고 인격신으로 경배해도 좋다고 한다.
샹카라 자신도 시바나 비슈누 신을 위한 찬송시를 지었다.
스스로도 시바 신을 경배하였다.
그러나 샹카라에 의하면 이렇게 인격신으로 섬긴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허상의 세계에서만 허용되는 일종의 방편에 불과한 것일 뿐, 우리가 취해야 할 궁극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궁극 목표는 물론 니르구나 브라흐만을 체득해서 그로 인해 해탈을 얻는 것이다.
브라흐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적 궁극 실재라고 하는 주장은 동시에 브라흐만만이 참 실재이고 다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마야’(illusion)에 의해 나타난 허상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허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만 아니라는 사실이다.
허상도 브라흐만에서 나온 것이므로 브라흐만은 일종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마술사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영적 눈을 뜰 수 있다면 마야의 허상을 통해 브라흐만을 볼 수도 있다.
“어두움이 태양의 광채 속에서 녹아 없어지듯 만물도 영원한 실재 속에서 녹아 없어진다.” 여기에서 샹카라의 생각이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汎神論)과 반대된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샹카라에게 있어서 현상 세계는 브라흐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우리가 그 영원한 실재와 하나가 되면 신기루 같은 이 현상 세계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사상을 확대해서 삶과 죽음과 다시 태어남, 몸부림과 고통, 선과 악, 속박과 해방 등도 결국은 허상이라고 했다.
“묶임도 그 묶임에서 벗어남도 모두 신기루 같은 것... 제한도 놓음도, 묶임도 성공도 없고, 자유를 찾는 이도, 자유스러운 이도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궁극 진리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마야의 세계에 속한 허상일 뿐이라고 한다.
깨친 이들만이 자기의 참 자아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고 즐기는’ 자기의 개인적 자아에서 자기의 참 자아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반야심경』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절대적인 궁극 실재는 꿈이 없는 수면(dreamless sleep) 상태에서 체득될 수 있다고 한다.
꿈이 없는 수면 상태란 편안한 즐거움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상태에서 궁극 실재에 대한 계시가 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샹카라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아누바바(anubhava)’, 곧 궁극 실재에 대한 직관이다.
이것이야 말로 ‘완전한 앎’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직관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우주적 정신과 하나라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의 개별적 자아 인식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샹카라는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도 해탈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살아서 정신적 해방을 경험하는 것을 ‘지반묵티(jivanmukti)’라고 하고, 이렇게 해방된 사람을 지반묵타(jivanmukta), 혹은 마하트마(mahatma)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되 꿈에서 본 땅에 사는 것처럼’ 살고, ‘이 몸이 계속되는 동안 그것을 그림자처럼’ 여긴다.
이렇게 살다가 이 몸이 끝나는 날 개별적 존재로서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의 찬연한 광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용수에 영향 …“모든 것은 공”
샹카라는 힌두교의 이름으로 불교의 공사상을 가르친 ‘숨은 불교인(crypto-Buddhist)’이 아니었는가 하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느 면에서 일리 있는 관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이들의 말에 의하면 불교가 기본적으로 인간 경험에 대한 관찰에서 공사상을 전개해 나간 데 반하여 샹카라는 처음부터 유일무이한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적 실재를 전재로 하고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그의 사상을 구성했다고 하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그 출발점이 어떠하든, 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면에서 중관론의 창시자 나가르주나의 영향이 컸던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라 볼 수 있다.
샹카라는 힌두교를 중흥시키는데 절대적으로 공헌한 인물이다.
서양에서 힌두교나 인도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우파니샤드와 샹카라의 사상에 관심을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서 세계 종교의 심층에 흐르는 기본적 가르침의 전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