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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역의 역사,문화적 성격
우리나라 역사 전개과정에서 호남지역의 중심지역은 익산과 전주로 대표된다. 지리적으로 이 일대지역은 익산의 미륵산을 기점으로 전주의 모악산까지 연결되는 산줄기로 포괄되며 그 사이에 만경강이 흘러가는 일종의 분지형태의 지역이다. 이같은 모습은 산과 강 그리고 사람이 사는 지역중심의 독특한 지도인 대동여지도에 뚜렷하게 잘 나타나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진행된 다양한 역사내용을 정리해보면 이곳은 한국고대문명의 요람지역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한국역사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우리 역사속에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곳은 금마지역부터이다. 즉,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로 이곳이 역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고조선은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뉘어 존재하였는 데, 이른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기원전 198년경 위만(衛滿)이 일으킨 정변으로 쫓겨난 후 망명한 곳을 “고려사” 지리지 이후 모든 전통지리지들이 현재의 금마지역으로 기록하고있다.
이 지역에서 무관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고려말 우왕때 전북지역에 침입한 왜구 소탕을 위해 남원 운봉 지역에 급파되었고 이 때 황산(荒山)지역에서 대승리를 거두어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황산대첩을 거둔 이성계는 자신의 본관도시인 전주에 개선하였고 이때 전주이씨 종친들이 현재의 오목대에서 승리 축하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그런데 연회에서 이성계가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를 읊어 새로운 왕조탄생에 대한 의중을 드러내어 새로운 왕조 탄생의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전한다. 이같은 인연은 이후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이 마련되고 조선왕조실록을 모신 사고가 설치되어 조선왕조의 출발과 역사를 담보한 도시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며 다른 지역에 모셨던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타고 망실된 것에 비해 오직 전주지역만이 이들 어진과 실록을 안전하게 수호함으로서 역사수호의 도시로서의 성격을 갖게 하였다. 이때 어진과 실록이 보존되지 못하였다면 조선왕조 전반기의 역사는 모두 사라지게 되는 끔직한 상황이 발생할 뻔 했지만 전주지역민들의 노력으로 이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역할만으로 라도 전주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또한 전주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서 조선왕조의 근간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으며 집강소(執綱所)통치를 진행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민본주의와 지역민에 의한 자치를 실행한 곳이었다.
호남제일문
전주 인터체인지를 지나 전주 초입에 들어서면 호남제일문이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일주문인 호남제일문의 현판은 강암 송성용선생의 글씨로 전주의 과거에 대한 자존심과 미래에 대한 포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견훤왕궁지
900년에 견훤에 의해 이곳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 왕궁 터로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견훤의 출생설화]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그 딸이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 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 딸에게 태기가 있고 후에 아들을 낳았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현 전주)에 도읍을 정했다.
풍남문
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한다.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전주를 상징하고 있는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전주의 남문은 조선 5백년의 역사 명맥을 잇는 수도 한성부의 상징적인 숭례문인 남대문과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건축양태는 조선 후기의 문루 형식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으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1문루는 2층의 팔각지붕인데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윗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한옥마을
예향 전주의 풍류와 멋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한옥마을은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걸쳐 있다. 특히 오목대에 서서 보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곳에 위치한 학인당은 전통 기와집의 화려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전통문화센터, 한옥생활체험관, 전통술박물관, 공예품전시관, 명품관 등의 시설이 있으며 인근에는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전동성당과 초록바위 등 천주교 성지가 많다.
전주 객사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명나라와 통하는 지방에는 우리 사신을 비롯해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적 제288호. 건축면적 약 624 m2.
전동성당
원래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던 자리이며,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평지의 성당으로는 대구 계산동(桂山洞)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이용해 지은 건물은 겉모습이 서울의 명동성당과 비슷하며,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경기전
태조의 영정(보물 931)을 봉안한 경기전과 그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당초의 전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한 것이다. 1771년(영조 47)에는 조경묘를 세워 이한 부부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내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 때에 그 서쪽을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인 수상소학교를 세움으로써 경기전 절반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으며, 부속된 건물은 이때 거의 철거되었다.
경기전에 봉안된 어용은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년(1442년)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보물 제931호이며 푸른 옷을 입고 있다. 왕은 보통 붉은 옷을 입고 있으나 새로운 왕조를 연 뜻을 기리기 위해 시작을 의미하는 파란색 곤룡포를 입은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태조의 영정은 환갑 때 그려진 것이며 다리의 꺾여진 각도에 따라 키를 짐작하는데 무인답게 아주 건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존하는 어진은 모두 여섯 분으로 영조와 정조, 철종, 고종, 순종, 태조의 어진이 있으며 스스로 황제를 자청한 고종은 황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며 다른 임금은 붉은 옷을 입었다. 경기전 안의 양쪽 회랑에는 세종과 정조, 영조, 고종, 철종의 영정이 마련되어있는데 세종대왕은 위대한 업적을 기려 상상하여 그린 것이며 철종은 무인의 옷을 입고 있어 특이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내장산에 피난하였다가 정읍, 태인, 익산, 용안, 임천, 은산, 정산, 온양, 아산을 거친 다음 강화도, 안주를 경유하여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되었다.
그 후 어용은 여러 번의 수난을 겪었는데,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으며, 고종 31년(1894년)에는 동학군의 전주입성으로 한때 위봉산성에 피난하기도 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은 고종 9년(1872년) 9월에 개화한 것이다.
경기전에 인접한 북쪽에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패를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
전주사고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이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넓은 정원이 잘 어울리는 이곳에는 마당 한가운데에 '조선왕조실록보전기념비'와 석등이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 건물이 바로 전주사고이다. 전주사고는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그리고 성주사고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세종 때 설치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와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내장산으로 옮겨져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사고는 그 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실록각의 2층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아래층은 통풍을 고려해 기둥만 세워 습기를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울창한 대나무 숲은 두 가지 의미로 심어졌다고 한다. 하나는 대나무의 곧고 바른 성품처럼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항상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다른 하나는 대나무의 늘 푸른 성품처럼 왕과 그 후손의 영원한 번창함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예종대왕 태실 - 민속자료 제26호 (1986년 9월 8일 지정
예종대왕 태실은 원래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 경기전 경내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태실은 사각의 두툼한 하대석 위에 항아리 모양의 몸돌을 놓고 그 위에 평면 팔각의 살찐 지붕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주위로는 여덟 개의 각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연잎을 돋을새김한 동자주를 놓고 그 위에 팔모의 난간석을 연결하여 장식과 보호를 겸한 난간을 둘렀습니다. 한변의 길이가 170㎝의 팔각형 석난간 내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부도형 돌을 얹은 다음 옥개석을 덮었다.
오목대와 이성계 이야기
1380년(우왕6) 8월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금강어귀)에 침입하였던 왜구는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연안지역에서 갖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당시 왜구의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날쌔고 용맹했는데, 이성계가 활을 쏘아 그 투구끈을 맞혀 투구가 떨어진 사이 이두란이 화살을 날려 이마를 맞춰 사살했다고 한다. 왜구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귀경 길에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에 들려 오목대에서 일가친지를 불러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에서 술이 거나해진 이성계가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으며, 그 시가 남고산성 만경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첫댓글 운영자 방에 올려주신 장수영 선생님의 글을 바탕으로 답사가 이루어질 곳을 선정하여 사진을 덧붙여올렸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좋은 여행이 되리라 생각 됩니다.
수고 많으셨어염~~이번에도 좋은 답사 되시길..
사진이 배꼽만 보여요내 컴에 문제가있나
저도 사진은 배꼽만 보이네여!!
나도 배꼽은 보이는데....ㅋㅋㅋ 수고가 많으시네여. 그때가 출장이 잡혀있어서 ~~일본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