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3년 향기로운 불교 송년회 1. 서울 은평 황금절 수국사(守國寺)를 찾아서
오랫동안 카페 모임을 못 해온 터에 한 해가 저물어가니 법우님들을 보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년말에는 늘 잦은 모임이 많은 법이라 과연 많이 만날 수 있을까? 염려가 많았습니다. 가을에 정수님께서 수필집을 내셨다고 알려 오시고 또 책도 보내 주셔서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필집을 공지하고 글도 하나 올려서 많은 분들의 공감을 받았습니다. '신싸롱 칠공주'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의 수필집이라 호기심 또한 많아서 기대가 되었기에 이 참에 송년회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정수님께 우선 스케줄에 대해서 문의했던 바 22일에 시간이 나신다고 하셔서 22일로 잡았는데, 그와 동시에 미소님으로부터 송년회 안 하는냐는 문의가 왔습니다. 그래서 22일로 잡은 사연을 말씀 드리니 그날이 바로 동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뿔사! 깜빡 동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난감했지만 이왕 잡은 것이라 다른 날이 또 없으니 그대로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우선 전화 메세지를 띄우니 동참 법우님들이 많아서 크게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원찰에 가시는 분들은 원찰 법회에 가셨다가 오시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날짜는 잡았으나 동짓날이니 어떻게 해야 팥죽도 먹고 송년회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사찰로 가면 좋지만 팥죽 후의 다담이 문제였습니다. 늘 가던 종로 채식집에서 하고 그앞 찻집에서 하자니 인원에 비해 장소가 협소해서 이리저리 고민하던 차 제작년부터 조계종 적폐청산운동에서 만나 뵌 원만 스님이 그간 인도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던 중 희귀난치병 악성급성 갑상선 미분화암(역형성암에 걸려 귀국하여 병원에 계시다는 말씀을 전해 준 조계종 포교사이자 수국사 어린이법회 법사인 무구님과 만나 병원을 찾아 문병하던 중에 은근히 수국사에 송년회할 만한 장소가 없느냐고 하니 바로 "있다"고 하여 크게 안심하였습니다. 절에 찻집이 있어서 넉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병이 끝나고 답사도 다녀왔는데 공간도 좋고 찻값도 저렴해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동지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오후 1시쯤이면 대중들도 물러난다며 문제가 없다고 해서 크게 안도했습니다.
정수님 수필집을 우리가 많이 구입해야 서점에서도 선호도가 높아질 것 같아 구입하려 했으나 정수님은 펄쩍 뛰시며 보시하시겠다고 나서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올 기해년은 뜻 깊은 해이고 카페도 10주년이니 책 보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책이 좋을까 고민하던 중 카페에 연재를 마친 바 있는 <입보리행론>이 좋을 것 같아 구입해 두었고, 달력 또한 구비해 두고 송년회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동짓날이 밝았습니다. 날씨는 그다지 맑지는 않았지만 기온은 그리 춥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른 아침 일정을 마치고 만남의 집결지인 불광역으로 가고자 차비를 하고 있었는데 벌써 불광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포천의 길상님과 부천의 각현님. 시계를 보니 만남의 시간 40여분 전... 불광역 2번 출구의 만남은 10시 30분까지였는데 말입니다. 먼 곳에서 출발하신 분들이 제일 먼저 도착하신 것입니다. 지체없이 비니초님과 불광역으로 나가니 불광역 2번 출구 주변은 등산객으로 붐볐습니다. 각현님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지하철역사로 내려가니 실로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 길상님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만나고 보니 길상님의 선배라는 분이 동참한다고 해서 뜻하지 않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습니다. 정한 시간이 다가와 출구 밖으로 나오니 양주의 민제님이 와 계셔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가까워오자 문자가 날아오는데... 기대했던 청송님과 관음심님이 사정이 생겨 못 오신다고 하고 청안님은 다소 늦는다는... 그런가 하면 문산의 정수님은 이미 수국사에 와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오전 10시 30분. 묘법님과 여원만님, 염화ㆍ미소님은 각기 원찰에서 용무를 마치고 나중에 오신다고 하셨으니 올 분은 다 왔다 싶어 세검정 방면의 정류장에서 시내버스 7022번을 타고 가는데, 막 도착하신 정파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뿔사! 이 일을 어쩌나? 그래서 버스 타는 법을 일러 드렸더니 바로 버스를 타셨는데 바로 뒷차였습니다. 그래서 종점에서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버스는 역촌동을 경유하여 서오능 방면으로 향해 구산동 종점에서 하차하였습니다. 종점에서 정파님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수국사로 향했습니다. 종점에서 수국사까지는 지척지간에 있습니다.
수국사에 도착하니 무구님이 와 계셨고, 정수님과도 모두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일단 가지고 온 짐을 정수님 차에 옮겨 싣고 무구님이 이끄는 대로 문화센터 2층으로 향했습니다.
전각배치도
황금절로 불리는 수국사(守國寺)는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314번지(서오릉로 23길 8-5)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서울 서북부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사찰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수국사(守國寺)는 조선조 7대 세조대왕(世祖大王) 5년(1459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의 극락왕생을 위해 경릉(敬陵) 동쪽에 정인사(正因寺)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 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성종2년(1471년) 덕종(德宗)의 부인이 되는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히 지어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하여 판내시부사 이효지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해 2월에 불사를 착공하여 10월에 낙성하였는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푸니 인근의 승려 수만여명이 절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하였다고 한다. 새로 중창한 절의 규모는 총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덕종, 예종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이는 『성종실록(成宗實錄)』 22년 10월 27일자 기사에 "호조에 전교하여 정인사에 봉선사의 예에 의하여 쌀 30섬과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하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 등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일기(燕山君日記)』 10년 9월 24일자 기사에는 정인사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니 "능침(陵寢)에 가까운 절이라 하여 즉시 경기감사 안윤덕과 형조참판 박열을 불러 금표로부터 바로 가서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들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수국사는 한 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광무 1년(1897년) 3월 당시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스님이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스님은 진관사 대웅전 구석에 봉안되어있는 아미타좌상 앞에 하나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진관사의 스님이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풍우(風雨)를 면치 못하여 가까운 우리 절에 모신 것이나 차나 향을 공양하지 못했다."고 하자 월초 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불상 앞에 불공을 드리고 수국사를 중창하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한다.
광무 4년(1900년)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다급한 고종은 월초 스님에게 세자의 쾌차를 빌도록 명하였다. 이에 스님은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에서 백일 나반존자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드린 지 80여일만에 세자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아픈가?" 하며 금침을 한 번 놓는 사이 세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이 월초 스님에게 소원을 물으니 스님은 아무 소원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허면 스님에게 벼슬과 녹봉을 내리면 어떻냐?"로 물으니 이에 스님은 "출가한 자가 국가의 녹을 받으면 외람된다."고 사양하고 다만 서오릉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어진 것이 애석하니 원컨대 근교에다 정사(精舍)를 내리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다며 수국사의 중창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종은 "효심과 신심은 본래 하나[孝心信心元無二]"라 하고 어명을 내려 수국사를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6.25동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역대 주지스님들이 계속하여 중창불사를 거듭해 오고 있으며, 2005년에 수국사 주지로 부임하였던 토진스님께서 부임 당시 있었던 크고 작은 갈등과 종단에서 조차 파악하지 못한 부채 등 난마처럼 얽힌 사찰의 문제를 풀기 위해 수국사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도와 수행공간으로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시켰으며, 2007년 12월 전 조계사 주지셨던 원담 스님께서 새로이 부임해서 사찰의 합리적 운영을 통해 수행과 포교 . 교육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시민과 모든 신도들에게 항상 열려져 있는 공간으로 늘 가까이 다가서고 있으며, 다양한 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서울 서북부 지역의 대표적 사찰이다.」
-수국사 홈피에서-
문화센터
이곳은 다용도 공간으로 종무소, 어린이 법회, 합창단 연습실, 템플스테이, 불교용품, 공양간, 찻집 등 다양한 문화공간입니다. 외벽을 노랗게 칠한 것은 황금법당 대웅보전과 보조를 맞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층으로 오르면 편백나무 향기가 가득한 법당에 이르게 됩니다. 일단 무구님께서 목탁을 들고 부처님 전에 삼배의 예를 올리고 둥글게 앉았습니다.
문화센터 2층 강당에서 환담
이곳에서 잠시 둘러 앉아 다리도 쉬고 자기소개도 할 겸 해서 환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우님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오랜만에 모였기에 할 말도 많습니다.
각자 돌아가면서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입니다.
청안님이 좀 늦게 도착하여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12시 정도를 헤아리기에 전각을 둘러보고자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황금절은 인구에 회자 되었지만 처음 오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동지 팥죽을 먹고 전각을 둘러보고자 했으나 공양간에 인파가 많아 먼저 전각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무구님이 앞장서서 황금법당으로 안내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염화미소전(拈華微笑殿)
황금절의 옆 모습이 위용?을 드러냅니다.
대웅보전의 편액이 붙어 있지만 정면이 아닙니다. 측면입니다. 아니 정면인가? 산과는 직각으로 놓여 대웅보전의 웅장한 모습이 감춰져 있어 아쉽습니다. 우리가 딱 바라보았을 때 안정된 웅장한 모습은 아니지 싶습니다. 어떤 지리적 사정이나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용왕전(龍王殿)
용(龍 Nāga)은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신입니다. 나가(那伽)라고 음역됩니다. 불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의 하나입니다.
인도 신화에서 뱀을 신격화한 동물로서 인면사미(人面蛇尾)의 신입니다. 용에 대한 신앙은 아리안족의 침입 이전 고대 인도의 나가족 사이에 행해지고 있던 뱀 숭배에서 기원하는데, 나가족이 불교에 귀의하였기에 용(나가)이 신앙의 대상으로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용은 큰 바다에 살면서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경전에는 용에 대한 설화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용왕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나 특히 불법을 수호하는 8대 용왕들은 석존께서 법화경을 설할 때의 회중으로 열거 되어 있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난다용왕(難陀龍王). ② 발난다용왕(跋難陀龍王). ③ 사갈라용왕(沙竭羅龍王). ④ 화수길용왕(和修吉龍王). ⑤ 덕차가용왕(德叉迦龍王). ⑥ 아나바달다용왕(阿那婆達多龍王). ⑦ 마나사용왕(摩那斯龍王). ⑧ 우발라용왕(憂鉢羅龍王).
그리고 용왕(龍王)은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함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협시(脇侍)하는 신입니다. 용왕(龍王)은 산신(山神)과 더불어 인간과 가장 가까이 계시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고 건강과 질병을 고쳐 주며 비를 내려 오곡을 성취시키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용의 몸에는 눈부신 오색채운의 광채를 두르고 있으며 오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개금법당
개인이 금종이를 마련하여 직접 옷을 입혀 보는 곳입니다. "부처님께 옷(개금) 공양을 직접 입혀 드리세요."라는 권유문이 보입니다.
대웅보전 가는 길
대웅보전의 모습입니다.
대웅보전을 이렇게 보니 제대로 보입니다. 법당 안에는 오여래와 협시 보살상이 안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좌향이 이상한 터라 다른 절과는 좀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1992년에 한자용 스님이 수국사로 부임하면서 일본 교토의 금각사(金閣寺)를 보고 난 후 수국사를 한국을 대표하는 황금사원으로 만들겠다는 발원을 하여 낡은 대웅전을 대신할 큰 대웅전을 새로이 착공하여 낙성을 하게 되었는데 언제 착공하고 낙성되었는지 정보가 없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낙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국사의 황금보전 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 외9포, 내15포, 108평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청기와로 된 전통목조법당이며 법당 안밖을 기와 이외에는 100% 순금으로 개금불사하여 장엄한 도량이라 합니다. 순금 33kg 20억원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웅전에 금을 입힌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수국사측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법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는 부처님을 상징한다. 때문에 법당을 금으로 입히는 것은 부처님께 황금옷을 입혀 드리는 것이 된다. 또한 금은 매우 순수한 물질이어서 변치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금을 입히면 이 황금이 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불자들에게는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황금을 입히지 않은 절은 악한 기운을 막을 수 없고 불자들이 믿음 또한 약한 것일까? 저는 늘 생각합니다. 악한 기운을 물질로 막으려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히 하면 도량 또한 깨끗하고 불자들 또한 금강 같은 신심이 생길 것입니다. 도량에 상주하는 스님과 대중이 지계청정하고 수행 전법에 힘쓴다면 저절로 서기가 가득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 말입니다.
대웅보전 편액 정유년(丁酉年. 불기 2561. 2017) 정수(正修) 스님 글씨
법당의 모습
불단엔 오여래(五如來)를 중심으로 사이사이 아미타불과 문수보살ㆍ보현보살ㆍ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기둥 때문에 가려져 있습니다.
중안엔 삼신불(三身佛)이 모셔져 있습니다.
삼신불(三身佛)이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과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과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을 말합니다.
중앙의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계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사이의 작은 아미타불상
비로자나불 왼쪽의 설법인(說法印)을 하신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
제일 왼쪽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신 구품도사 아미타불(九品導師 阿彌陀佛)
노사나불과 아미타불 사이의 문수보살(文殊菩薩)
비로자나불 우측 옆의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사이에 모셔진 보현보살(普賢菩薩)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 사이에 모셔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제일 오른쪽 약기인(藥器印)의 동방만월세계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천장의 아름다운 연등 모습
수국사는 장엄등이 멋있습니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장엄등을 다는데 다른 절에서 잘 볼 수 없는 장엄등입니다. 몇 년 전에 염화님과 미소님, 그리고 비니초님과 이 법당에 앉아 이런 연등을 접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곳을 정면이라 해야 하나 측면이라 해야 하나
'이곳을 정면이라 해야 하나 측면이라 해야 하나' 하는 것은 제생각입니다. 저 문을 열면 바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니 정면인데, 전각의 구조상 측면에 해당하니 측면이라 할 수 있는데 이곳은 측면이 곧 정면인 구조이니 고정관념을 깬 전각인가 아리송합니다. ^^ 그래서 이곳에 또 하나의 편액을 마련한 듯합니다.
대웅보전 편액 정유년(丁酉年. 불기 2561. 2017) 정수(正修) 스님 글씨
그동안 문짝의 금옷은 벗겨지고 퇴색했네요.
용면(龍面) 모습
이 모습을 혹자는 귀면(鬼面)이라 알고 있는 분이 있는데 이는 용의 얼굴입니다. 이 용은 팔부신중의 한 신장으로만 알고 있지만, 용은 곧 여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용(龍)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미륵전(彌勒殿) 모습입니다.
예전엔 부처님 앞에 유리각이 설치되었는데 말끔히 치워 버렸네요. 멀리서 예를 표하고 나중에 예를 올리고자 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끝내 뵙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염화미소전
염화미소(拈華微笑)는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꽃을 집어서[拈華] 대중에게 보이셨는데 대중은 아무도 이 뜻을 알지 못하였으나 가섭존자(迦葉尊者)가 홀로 미소(微笑) 지음에 이른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전하노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각이 선(禪)과 관련한 전각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부처님 제자인 아라한을 모신 이른바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을 모신 전각은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흔히 나한전(羅漢殿) 또는 응진전(應眞殿), 영산전(靈山殿)이라고도 하는데 염화미소전이라 하니 특이하고 새롭습니다. 이 전각은 근래에 신축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들어가 보시지요?
여원만님과 청안님
이제 전각 안으로
염화미소전의 모습
석가삼존(釋迦三尊)의 모습
보통 응진전에는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라 해서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습니다. 현세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보처에 미래의 미륵불(彌勒佛)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우보처에는 과거세의 부처님인 정광불(錠光佛)을 보살화한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을 말합니다.
또는 좌보처로 가섭존자(迦葉尊者), 우보처로 아난존자(阿難尊者)를 모시기도 합니다. 혹은 좌보처로 문수보살(文殊菩薩), 우보처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시기도 하는데, 이 곳의 협시보살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삼계도사 사생자부(三界導師 四生慈父)이신 석가삼존(釋迦牟尼佛)
중국풍이 나는 좌우협시보살의 정체는 아직 모호합니다.
보살상에서 이런 자세와 수인은 처음봅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수정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불단을 중심으로 왼쪽의 아라한 성중
불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아라한 성중
길상님과 비니초님 무엇을 보시는지요?
아마도 아라한 성자들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에 빠진 듯합니다.
천장을 수놓은 봉축등
밖으로 나온 모습
무슨 내용일까?
단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무구님, 민제님, 별그린 길상님, 정수님, 비니초님, 여원만님, 청안님, 각현님, 정파님, 그리고 정묵님입니다.
무구님과 교대해서
과객에게 부탁해서 다시 한번
이렇게 해서 염화미소전을 물러나왔는데 염화님괴 미소님이 이곳을 찾으시면 미소가 저절로 흐르지 않을까 생각하니 저도 저절로 미소가 나옵니다.
다음은 초전법륜상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다음에 소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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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긍절 수국사의 유래와 법우님들이 함께 둘러보는 수국사의 미모저모 잘 봤습니다. _()_
예전에 함께 순례했을 때와는 많이 변모했더군요. 미륵전의 유리각이 없어졌고,성각인 성여락전도 생기고... 감사합니다. _()_ _(())_
염화미소전도 생기고,
예전에 수국사를 백우님께서 카페에 소개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ㆍ송년회를 빌러 직접 보게 되었네요ㆍ감사합니다ㆍ
예, 그렇지요. 그때와는 또 변모하고 있더군요. _()_ _(())_
지금도 변화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수국사의 위상이 상당히 커져 있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청정한 스님들이 정말 수행과 전법에만 힘쓸 뿐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은평구에 그런 절이 있다니 언제 한번 가보야 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_()_ _(())_
서울에 사시면 송년회에 권유하고 싶었는데 부산으로 파견 되셔서 아쉽게 되었습니다.
언제 가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수국사와 지근한 거리에 있는 서오능도 가 볼만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_()_
오랜만에 뵙게 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_()_ _(())_
먼 길에 마음 내시기 어려운 일인데 마음을 내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2.30대가 주류로 활동할 때에 60대 70대 혹은 80대의 거사님과 보살님들과 활동한 적이 많았습니다.
법의 모임에는 나이를 초월해 어울려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송년회 만남의 장소로 수국사 딱 좋네요.
감사합니다._()_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여전히 밝으신 모습이 좋네요. _()_ _(())_
처음에 장소문제로 고민도 많았습니다. 다행히 수국사의 법사를 알게 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일요일 경우 찻집은 한산하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