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8.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3)
(대니산 5대 서원)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앞서 우리는 대니산 자락 여러 문중 문화 교류의 장인 현풍향교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현풍향교와 더불어 대니산 자락 문중 문화 교류의 장으로 중요한 서원에 대해 알아보자. ‘대니산 반경 10리’에는 ‘도동·이양·암곡·화산·송담’ 다섯 개 서원이 있다. 도동서원은 명실상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이다. 이양·암곡·화산 세 서원은 현풍 곽씨 문중 서원이며, 송담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임란 의병장인 대암 박성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소학동자(小學童子) 한훤당 김굉필,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은 대니산 북서쪽에 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된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주향(主享),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보물과 사적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도동서원은 이름이 몇 번 바꿨는데 ‘쌍계(雙溪) → 보로동(甫老洞)’을 거쳐 도동서원이 됐다. 처음 창건은 1568년(선조 1)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풍영대(諷詠臺) 인근 초곡천변에 ‘쌍계서원’으로 건립, 1573년(선조 6) 사액을 받았다. 이후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됐고, 1604년(선조 37) 한훤당 선생 묘소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보로동서원’이라 이름했다. 보로동은 당시 마을 이름 보로동에서 취한 것이며, ‘도동’은 1607년(선조 40) 사액서원이 될 때 얻은 이름이다.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위계성’, ‘대칭성’, ‘소박성’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위계성은 서원 터와 건축물의 위계가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문→동·서재→강당→사당]. 대칭성은 서원 공간의 앞뒤를 잇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 공간이 닮은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박성은 건축물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는 것이다.
도동서원 건축의 또 다른 특징은 ‘파격(破格)’이다. 도동서원 교문인 환주문(喚主門)은 높이가 170cm가 안 되고, 폭도 1m 남짓이며, 바닥 중앙에 연꽃봉우리를 조각한 커다란 돌이 하나 박혀 있다. 그래서 환주문을 출입하려면 옷자락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펴야 통과가 가능하다. 이는 서원에 들어올 때 공경을 표하라는 의미이다. 도동서원 강당 기단을 보면 사용된 돌의 재질·색깔·모양이 각양각색이다. 4각·6각·8각·10각 심지어 12각형 돌도 3개나 있다. 또 기단부에 꽂혀 있는 네 개의 용머리와 두 개의 세호[細虎·작은 호랑이], 기단부 아래 뜰 경계석 중앙에 박혀 있는 자라 머리 등도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이다. 강당 뒤편도 마찬가지다. 땅바닥에 붙여 낮게 설치한 두 개의 굴뚝과 내삼문의 문은 세 개인데 문으로 연결된 계단은 두 개뿐이다. 또 계단 기둥 돌에 조각된 연꽃봉우리, 태극 문양과 만(卍)자 문양, 그 아래에 숨겨둔 작은 샘, 내삼문 앞 중앙 계단에 박혀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동물 머리와 그 뒤편 바닥 돌에 새겨진 미스터리한 꽃잎 문양. 이뿐만이 아니다. 땅바닥이 아닌 사당 담벼락에 구멍을 내 설치한 감[坎·축문 등을 태우는 곳]도 특별하다. 앞서 언급한 용머리 등은 한 때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은 것들이다. 하지만 내삼문 계단 좌우 난간석에 있었던 한 쌍의 상서로운 동물 조각은 아직도 되찾지 못했다.
도동서원의 대략적인 모습을 보면 서원 앞쪽에 도동서원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뒤로 도동서원이 있고, 좌우로 고직사(庫直舍)와 한훤당 선생 신도비각이 있다. 도동서원 출입문은 외삼문에 해당하는 수월루(水月樓)와 1칸 규모의 작은 환주문(喚主門)이다. 환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 중정당(中正堂)이 있고, 좌우에 기숙사인 서재 거의재(居義齋)와 동재 거인재(居仁齋)가 있다. 중정당 왼쪽에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중정당 뒤 높은 지대에 사당이 있다. 사당 한쪽에는 다시 별도 문을 내고 담장을 두른 증반소(蒸飯所)[제수를 준비하는 부엌]가 있다. 참고로 도동서원에는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건물이 두 동 있다. 고을의 훌륭한 인물을 제향했던 별묘(別廟) 향현사(鄕賢祠)와 아이들을 교육하는 공간인 양몽재(養蒙齋)다. 한훤당 선생 묘소는 서원 뒤편 대니산에 있는데 서원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다.
소례곽씨 파조 청백리 곽안방, ‘이양서원(尼陽書院)’
이양서원은 대니산 남쪽 소례마을에 있다. 이양은 대니산 남쪽이란 의미다. 현풍곽씨 청백리공파를 대표하는 이양서원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인 1707년(숙종 33) 창건됐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강당·외삼문·관리사만 남기고 모두 훼철됐다. 이후 1954년에 사당, 1982년 동·서재를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이양서원에는 곽안방을 주향으로 연일당(燕日堂) 곽지운(郭之雲), 만심재(晩竹+尋齋) 곽규(郭赳), 탁청헌(濯淸軒) 곽황(郭趪)을 배향하고 있다.
이양서원 공간배치는 일반적인 서원 공간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가 아닌 좌묘우학(左廟右學)다. 외삼문은 작은 규모의 2층 누문 형태를 하고 있다. 앞쪽은 준도문(遵道門), 뒤쪽은 읍청루(揖淸樓) 편액을 달고 있다. 준도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 경렴당(景廉堂)이 있고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사당은 강당 오른쪽 조금 높은 곳에 있는데 청백사(淸白祠)라 편액 되어 있다. 이양서원은 건물에 준도문·읍청루·경렴당·청백사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청렴결백(淸廉潔白)’을 높이는 서원임을 표방하고 있다.
이양서원에 주향되어 있은 곽안방은 자(字)가 여주(汝柱), 호는 창곡(滄谷)이며 현풍곽씨 시조 곽경(郭鏡)의 13세손이다. 세종 때 해남 현감으로 있으면서 고을민에게 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단종 때 무과에 급제했으나 세조에 의해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익산 군사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후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올랐으며, 청렴결백한 선비로 이름이 나 세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현풍곽씨 시조 곽경 이하 5위, ‘암곡서원(巖谷書院)’
암곡서원은 대니산 동쪽 원당(院塘) 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현풍곽씨 목사공파 서원인 암곡서원은 현풍곽씨 시조인 정의공(靖懿公) 암곡(巖谷) 곽경(郭鏡)을 주향으로 5세 정간공(靖簡公) 곽기정(郭基正), 5세 포산군(苞山君) 곽한정(郭漢正), 6세 곽자의(郭子儀), 13세 목사공 곽순종(郭順宗)을 배향한 서원이다.
암곡서원은 1960년 창건된 ‘포산사(苞山祠)’라는 사우에서 시작됐다. 2009년 포산사가 암곡서원으로 승격됐는데, 이때 옛 포산사는 그대로 두고 그 뒤편에 새 건물을 지어 암곡서원이라 이름했다. 서원 외삼문인 제성문(齊盛門)을 열고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 정일당(精一堂)이 있고, 좌우에 서재 경의재(敬義齋), 동재 의인재(依仁齋)가 있다. 강당 뒤쪽에 내삼문 숙연문(肅然門)이 있고 그 안쪽에 사당 포산사가 있다. 서원 이름 암곡은 현풍곽씨 시조 곽경의 호다. 곽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인물임에도 그의 인적사항이 전해진다. 이는 1930년대에 도굴로 출토된 그의 지석(誌石)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곽양수재(金郭兩秀才)’로 불린 곽승화, ‘화산서원(花山書院)’
화산서원은 대니산 남서쪽 구지 대구국가산업단지 내 옛 화산마을에 있다. 화산서원은 현풍곽씨 진사공파 문중 서원으로 청백리 곽안방의 3자 중 2자인 진사공(進士公) 규헌(葵軒) 곽승화(郭承華)를 주향으로 죽재(竹齋) 곽간(郭趕), 예곡(禮谷) 곽율(郭走+日),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을 배향하고 있다. 화산서원의 전신은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던 화산재(花山齋)다. 1950년 6·25 전쟁 때 화산재는 대문채만 남기고 소실되었다가 1968년, 1975년 두 차례 중건됐다. 이후 1990년 화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국가산단 조성으로 201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한 것이 현 화산서원이다. 솟을 외삼문인 상지문(尙志門)을 들어서면 앞쪽에 강당이 있고, 좌우에 서재 유래재(牖來齋), 동재 창덕재(彰德齋)가 있다. 강당 뒤편에 내삼문 준례문(遵禮門)이 있고 그 안쪽에 사당 경덕사(景德祠)가 있다.
곽승화는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김곽양수재’로 불렸으며, 사후 도동서원 별사(別祠) 향현사(鄕賢祠)에도 제향됐다. 이 일대가 국가산단에 모두 편입됐음에도 화산서원과 화산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서원이 자리한 화산에 곽승화를 비롯한 현풍곽씨 진사공파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진퇴가 분명했던 선비 대암 박성, ‘송담서원(松潭書院)’
송담서원은 대니산 북서쪽 도동2리, 송림(松林)이라 불리는 마을 제일 위쪽에 있다. 송담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대암(大庵) 박성(朴惺·1549-1606)을 제향한 서원이다. 1634년(인조 12) 현풍 쌍계리에 처음 세워졌으나, 위패 봉안 전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1693년(숙종 19)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복원하고, 1694년(숙종 20) 위패를 봉안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또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서원이 아닌 ‘송담서당’으로 유지되다가, 1994년 사당과 동·서재 없이 강당만 갖춘 지금의 송담서원으로 복원됐다. 서원 입구에 수령 300년 은행나무와 관리사가 있으며, 서원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좌측으로 60m 거리에 선생의 묘비(각)이 있다. 비각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인근 달성군 구지면 창리에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