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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 평택구간의 문화유산 (강의시간 : 3시간)
1.삼남길 평택구간의 원형
1)조선전기 평택지역 삼남로
오산시 원동 역말(청호역) → 평택시 진위면 갈곶2리(이방원) → 진위면 견산리 산직촌 →( 진위천을 건너) 진위면 신리(장호원) → 독곡동 오리골 → 송북동 동막(백현원) → 대백치(큰 흰치고개) → 칠원1동(갈원) → 소사1동(소초원) → (안성천을 건너) 천안시 성환읍 가룡리 → 성환읍 대홍리(홍경원)
2)삼남로의 변화와 현재 위치
오산신점 → 이방원(진위면 갈곶2리 갈곶초등학교 부근) → 개실주막(진위면 가곡리 가곡삼거리) → 밖술막(진위면 견산4리 산직촌) → 봉남주막(진위면 봉남리) → 봉남목교 → 새둑거리(진위면 마산2리) → 소백치(염봉, 진위면 마산2리~송북동 동막마을 사이 고개) → 백현원(송북동 동막마을 서북쪽 산기슭) → 큰 흰치고개(송북동 동막마을 ~ 도일동 사이 고개) → 감주거리(도일동 사거리 부근 예뜰식당 옆) → 도일천 돌다리 → 도일동 원도일 마을 → 서낭고개(원도일 ~ 칠원1동 사이) → 갈원(칠원)주막 (칠원1동 주막거리-충청수영로 제1 분기점) →칠원3동 쇠물뿌리마을 → 통복천 돌다리 → 가내주막(죽백3동 통복천 변) → 칠원3동 재빼기마을 → 대문재(칠원3동 ~ 배다리 사이) → 배다리( 비전동 배다리방죽) → 다릿개마을(폐동됨-현 외기노조아파트 부근) → 소사원(소사주막, 소사1동-충청수영로 제2분기점) →소사벌 → 양성유천 마을(유천1동) → 아교(안성천 애구다리) → 충청도 홍경원
3)충청수영로와 현재위치
①충청수영로 제1구간 : 소사원(소사동)→소사교→소사벌→양성유천(유천1동)→아교(안성천)→가룡(천안시 성환읍 안궁리)→신가리→맹간교(성환천)→와룡리→노와1리 동면→추팔1리 역말→객사1리→남산1리→대사1리→석근1리(석다리)→독천→아산시 둔포면→온양....... 충남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
②충청수영로 제2구간 : 갈원→당재(동삭동 상서재-서재마을 산신당이 있음)→징검다리(통복천)→통복점(통복동 삼성아파트 부근)→군물포(평택시 군문1동 군문교 아래) →원봉나루(19세기 후반에는 신궁리 하궁마을 뱃터로 옮김)→팽성읍 신호1리→근내리→객사리→남산1리→대사1리(대삿골)→석근2리(석다리)→석다리(옛날에는 흙다리였음)→아산시 둔포읍→음봉 요로원→온양행궁→신창→광천→충남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
2.삼남길 평택구간의 마을
①가곡리
가곡리는 조선후기 진위군 이북면 지역이다. 이북면은 구가곡, 신가곡, 신북, 후북, 하북, 신리, 산직촌, 견산 등 8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가곡리, 견산리, 하북리로 통합되었다. 삼남로가 지나는 가곡1리는 신가곡, 가곡2리는 개실(가야실, 가오실, 구가곡)이다. 개실은 30여 호로 가곡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안동 권씨가 대성(大姓)이며 안성 이(李)씨도 많다. 신가곡은 약 50호 규모로 본래 경주 이씨의 사패지였다. 경주 이씨 가운데서도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가계가 번성했는데 1910년 양자로 들어온 이석영과 그의 동생 이회영 등 6형제 모두가 서간도 삼원포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경주 이씨 재산을 인수한 고씨가 토호로 부상하였다.
②봉남리
봉남리(鳳南里)는 무봉산의 남쪽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봉남리라는 지명은 없었고 읍내면 또는 군내면이라고 불렀다. 읍내면과 군내면에는 주막, 만촌, 서문, 옥거리, 아곡, 신당골, 교촌과 같은 자연마을이 있었다. 봉남리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만들어졌다. 봉남리는 조선시대 진위현의 읍치(邑治)였다. 그래서 관아와 공공시설이 밀집되었다. 서남쪽으론 삼남로가 지났으며, 읍내장과 진위주막이 있었다. 봉남리가 쇠락한 것은 1905년 경부철도가 고을의 서쪽 하북리로 지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진위역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효성이 적자 폐역(廢驛)되었고 근대 신작로 가설에서도 소외되면서 정치, 행정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후진적 마을이 되었다.
③마산리 와곡과 수촌
마산리는 1리 오룡동, 2리 수촌(숲안말), 3리 와곡(왜골), 4리 내곡(안골)으로 이뤄졌다. 이 가운데 삼남로가 지나가는 마을은 3리 와곡과 2리 수촌이다. 마산3리 와곡은 왜골로도 불린다. 왜골이라는 지명은 기와를 굽던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안골 입구에는 새둑거리마을이 있다. 새둑거리는 조선후기 간척과정에서 새로 둑을 쌓았기 때문에 형성되었는데, 둑이 쌓이면서 장호원(신리)과 건지미로 넘어가던 삼남대로가 이 길로 바뀌고 주막거리가 만들어졌다. 마산2리 수촌은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다학산과 염봉에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마을 동쪽으로 삼남로가 확장되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마을규모는 40호 남짓이며 옛날에는 경주 이씨가 대성(大姓)을 이뤘다.
④도일동
도일동은 덕암산 남쪽에 자리 잡았다. 이 마을은 크게 원도일, 상리, 내리, 하리로 구분되며 각 마을마다 십 수 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다. 삼남대로는 도일동 하리와 장안동 경계를 지난다. 하리는 조선시대 진위현 여방면과 양성현의 경계여서 도일천을 중심으로 ‘여좌동’과 ‘여우동’으로 구분되었다. 1896년 이것을 합쳐 여의실(여우실)이라고 불렀다. 서쪽 경계에는 서낭당이 있으며, 서낭당 서남쪽에는 감주거리주막이 있었다.
④칠원1동
칠원1동에는 조선시대 ‘갈원’이라는 역원이 있었다. 역원이 설치된 원촌(院村)은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며 성씨도 각성이었고 국역(國役)도 무거웠다. 또 전쟁이나 변란이 있을 때 침탈을 당하였는데, 왜란과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해방 후 가재리농민폭동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 예이다. 갈원은 조선 후기 ‘칠원’으로 지명이 바뀌었으며,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대표적인 시범마을로 활약했다.
⑤죽백3동
죽백3동은 재빼기와 가내다. 가내는 통복천 냇가에 마을이 위치하여 유래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가내주막이 있었다. 재빼기는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어 유래되었다. 여러 성씨가 섞여 살았으며 경제적으로도 빈한하였다.
⑥소사1동
소사1동은 삼남대로와 충청대로가 분기하는 지점이며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관문이었다. 그래서 소사원이 설치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소사장도 있었다. 마을 앞에는 소사천이 흘렀는데 이곳에는 소사교라는 목교가 가설되었다. 소사원 옆에는 김육의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세워졌는데, 근대 이후 교통로가 바뀌면서 크게 쇠락하였다.
3.삼남길 평택구간의 유적과 유물
1)삼남길의 역원(驛院)유적
삼남로 평택구간에는 청호역과 이방원, 백현원, 장호원, 갈원, 소사원 등 모두 6개의 역원이 있었다. 역원은 시대와 지형의 변화에 따라 약간의 부침이 있었다.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 수원부 읍지에는 역참으로 동화역과 함께 청호역이 기록되었다. 또 원(院)으로는 이방원, 장호원, 백현원, 갈원이 수록되었다. 이것은 18세기 중엽까지 삼남로 평택구간에는 청호역과 이방원, 장호원, 백현원, 갈원 그리고 양성현의 소사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99년 진위군 읍지가 편찬될 때에는 삼남로가 진위면 봉남리 진위주막-마산리 신제점-소백치-대백치-갈원 노선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19세기 진위면 봉남리 남쪽의 장호들의 개간, 마산2리 왜골 앞에 제언(새둑)이 축조되면서 새로운 길이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18세기 말까지 삼남로에 존재하였던 국영 역원(驛院)들은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대부분 폐지되었다. 1843년 편찬된 진위현 읍지에는 이방원, 장호원, 백현원, 갈원, 소사원은 ‘승람에는 실려 있으나 없어진지 오래되어 터만 남았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폐원(廢院)되었다는 말은 주막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국영주막은 폐지된 대신 민영주막(점막)이 성업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1899년에 편찬된 ‘진위군지’에는 청호점, 견산점, 신제점, 우곡점, 갈원점, 통복점과 같은 민영주막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주막은 대부분 약 10리마다 있었다. 하지만 이들 민영주막 외에도 감주거리 주막이나 가내주막, 개실주막처럼 간단한 술과 안주만을 파는 간이주막도 많았다. 그러면 이들 역원과 주막유적들의 현재 위치를 살펴보자.
▷ 청호역 : 오산시 대원동 역말
▷ 이방원 : 진위면 갈곶2리 갈곶초등학교 부근
▷ 장호원 : 진위면 신리 원터
▷ 백현원 : 송북동 동막 서북쪽 소백치 기슭
▷ 갈원 : 칠원1동
▷ 소사원 : 소사1동
▷ 19세기의 민영주막
청호점(대원동 역말), 개실주막(진위면 가곡1리 가곡삼거리), 견산점(진위면 견산4리 산직촌), 진위주막(진위면 봉남리 주막거리), 신제점(진위면 마산3리 새둑거리), 우곡점(송북동 동막마을 입구), 감주거리주막(도일동과 장안동 경계-예뜰식당 앞), 갈원점(칠원1동), 가내주막(통복천 칠원3동 구간 건너), 소사주막(소사1동)
2)삼남길의 문화유산
1.춘향이가 걸어간 삼남대로
●구간 : 진위면 갈곶리(이방원)-진위면 봉남리-송북동 동막(백현원)-큰 흰치고개-칠원1동(갈원)-비전1동(배다리)-소사1동(소사원)-안성천(아교)
조선후기 한글소설 춘향전에도 삼남대로가 나온다. 한양으로 올라갔던 이몽룡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갔다가, 사랑하는 춘향이를 구하여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삼남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평택지역의 민중들은 이 대목을 읽고 삼남대로 평택구간에 ‘춘향이 길’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진위면 봉남리 봉남교, 죽백3동 재빼기, 소사동 소사교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이 풍광을 즐기고 사랑을 나누며 노닐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다음은 춘향전의 삼남대로 대목이다.
전라도로 내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 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지나, 동자개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 올라서 참나무정이를 얼른 지나 교구정 돌아들어, 팔달문 내달아 상류천, 하류천,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칠원, 소새비들, 천안삼거리, 김제역 말 갈아타고, 덕정, 원터, 광정, 활원, 모로원, 새술막, 공주 금강 휘뜩 지나... 여산관 숙소하고, 삼례역졸 분부하고... 전주 들러 한벽루 구경하고... 임실... 남원
2.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신가곡마을
●구간 : 진위면 야막리 -진위면 가곡1리(신가곡) - 진위면 봉남리
평택시 진위면 무봉산 일대는 경주 이시의 터전이다. 무봉산 일대가 경주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조선 전기 이연손, 이성무 때지만 처음 입향한 것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수종부터다. 그 뒤로 박문수의 외조부인 이세필이 입향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봉남리, 가곡리, 동천리, 마산리, 송북동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 가운데 가곡1리 신가곡은 만주 무장투쟁을 이끈 이회영 형제들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신가곡 일대가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석영은 양부에게서 상속받은 신가곡 일대의 땅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다섯 형제들은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을 아버지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직계 후손들에서만 문과 급제자 31명, 정승 6명, 대제학 2명) 그의 가계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조(吏曹)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손꼽히는 소론 명문가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에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일강제합병 이후에는 때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6형제 50여 가족이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만주 이주 후 서간도 삼원포 지역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고, 경학사와 부민단 등 자치조직을 건설하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였다. 1920년대 초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축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며,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1920, 30년대 독립전쟁의 중심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덕분에 경주 이씨 가문은 독립투쟁에 헌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이석영은 상해에서 굶어죽었고, 이회영, 이호영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만주 이주 초기 50여 명의 가족 가운데 해방 후 이시영이 임정요인으로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 신가곡에는 경주 이씨가 살고 있지 않다. 다만 이유원의 아버지 이계조의 묘와 위로 5대조인 이정좌의 묘, 경주 이씨 재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경주이씨천’ 표석뿐이다.
●평택지역 경주 이씨 계보(系譜)
•시조 :이알평(李謁平) : 알천, 아찬
•17세 :이 과(李 薖) : 상서-상서공파의 파조
•20세 :이연손(李延孫) : 공조참판
•22세 :이성무(李成茂):안동판관, 아들-①인신(仁臣) ②의신(義臣) ③예신(禮臣) ④지신(智臣)
•23세 : 이성무의 3남 이예신(李禮臣)
•24세 :이예신의 2남 이몽량(李夢亮) - 우참찬, 정헌공
◉25세 :이몽량의 4남 이항복(李恒福) - 영의정, 문충공, 권율의 사위
•26세 :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李星男) -이조판서
•29세 : 이성남의 증손자 이광좌(李光佐) - 대제학, 영의정, 문충공
◉26세 :이항복의 2남 이정남(李井男) - 이조판서
•28세 :이정남의 손자 이세필(李世弼)-형조참판-①태좌(台佐) ②정좌(鼎佐) ③형좌(衡佐)
◉29세 : 이세필의 큰아들 이태좌(李台佐) - 좌의정, 충정공
•30세 : 이태좌의 큰아들 이종성(李宗城) - 영의정, 문충공
•34세 : 이유승(李裕承) -우찬성 -①건영(健榮) ②석영(石榮, 이유원에게 출계) ③철영(哲榮) ④회영(會榮) ⑤시영(始榮) ⑥호영(頀榮)
◉29세 :이세필의 2남 이정좌(李鼎佐) -증 영의정
•33세 : 이계조(李啓朝) - 이조판서, 문정공
•34세 :이유원(李裕元) - 영의정, 충문공
•35세 :이석영(李石榮) - 생부 이유승
3.경주 이씨와 어사 박문수(1691∼1756)
●구간 : 진위면 가곡1리(신가곡)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진위면사무소
박문수는 천안시 병천이 고향으로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기은(耆隱)이다.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향한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외가인 진위면 봉남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외삼촌 이태좌에게 학문을 수학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면서 다시 등용되었으며,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그 뒤로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지냈고,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암행어사에서 돌아온 뒤 예조참판, 호조참판,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사신의 일행으로 여러 차례 청나라에도 다녀왔으며, 함경도관찰사, 어영대장(御營大將)도 지냈다.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갔을 때에는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饑民)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 뒤로도 ≪각전각궁공상정례≫, ≪국혼정례≫ 등 다양한 편찬사업을 주도하였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은 박문수의 외가이며 탄생지다. 박문수는 외조부 이세필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학문을 수련했던 곳이기도 하다.
4.진위지역의 예인(藝人)들
평택지역에는 판소리, 무속음악, 노동요, 두레풍물 등 다양한 분야의 예인들이 활동하였다. 판소리의 대가로 평택과 관련 있는 인물은 모흥갑과 이동백이다. 그 가운데 모흥갑은 진위출신으로 알려졌다. 모흥갑은 19세기 전기 8명창 가운데서도 가왕(歌王)으로 일컬어졌던 송홍록과 비견될 만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고동상성이라고 할 만큼 목청이 우렁차고 뛰어나서 판소리 적벽가와 춘향가에서는 당대에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모흥갑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린 사건은 조선 헌종 때 평양 연광정에서 올린 판소리 한마당이었다. 평양감사의 초청을 받아 무대에 오른 모흥갑은 예의 고동상성으로 춘항가를 불렀는데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을 정도로 장쾌하여 좌중을 놀라게 하였다. 모흥갑은 태어난 곳은 진위고을이었지만 젊어서는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말년에는 전주 귀동에 은거하였다. 헌종 때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여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모동지라고 높여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진위지역에는 근대전후 ‘진위패’라는 걸립패가 활동하였다고 한다. 진위패는 진위관아의 아전이었던 유OO가 솥전을 운영하며 농악의 기계에 뛰어난 사람을 종업원으로 불러모아 걸립패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고종4년(1867) 경복궁 중건에도 차출되어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都大房旗)’라는 농기와 3색의 어깨띠를 하사받았으며, 상쇠 김덕일은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또 유OO의 아들 유세기(1893~1983)는 안성경찰서 경부로 일하면서 일제 말 걸립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안성에서만큼은 걸립패와 사당패같은 전문연희패들의 놀이를 허용하여 전국의 놀이패들이 안성장에 집중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5.진위관아와 진위주막
●구간 : 진위면 가곡1리(신가곡) -진위면 봉남리 진위면사무소(진위현 읍치) -진위향교
진위면 봉남리는 조선시대 진위현의 읍치(邑治)다. 진위현은 조선 초기에 충청도에 속하였다가 태조7년(1398) 경기도로 옮겼다. 처음에는 진위면과 서탄면 일부에 불과했던 작은 고을이었지만 세종 6년(1424) 중앙동, 이충동 일대의 송장부곡(松莊部曲), 서탄면의 천장부곡(川莊部曲), 오산경계의 청호역과 부산을 통합하고, 세종 15년(1433)에는 원평동, 신평동, 통복동, 비전동, 고덕면 일대를 지배하였던 영신현(永新縣)을 통합하면서 고을의 규모가 커졌다. 갑오, 을미개혁 때 진위군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으로 통합 진위군의 중심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부선 평택역을 중심으로 근대도시가 발달하고 군청(郡廳)이 평택역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쇠퇴하였고 1938년 10월 진위군의 명칭이 ‘평택군’으로 바뀌면서 평택군 북면 면소재지가 되었다. 1949년에는 평택지역 대표마을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북면을 진위면으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른다. 봉남리의 진위관아 터는 진위면사무소와 진위초등학교 동쪽 부지다. 관아의 동쪽에는 객사가 있었고, 동쪽 1천 미터 밖에는 진위향교가 있었다. 또 관아의 남쪽에는 진위읍내장과 주막거리가 있었다. ‘진위주막’은 삼남대로의 요지이고 수원에서 한나절 거리여서 많은 여행자들이 쉬어갔다.
6.심순택 고택과 묘 그리고 금릉학원 터
●구간 : 진위면사무소(진위현 읍치) -심순택 고택과 묘 그리고 금릉학원 터- 진위향교
봉남리 동부마을에는 조선말~대한제국 시기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沈舜澤 1824~1906)과 사립교육기관인 ‘금릉학원’을 세운 정경부인(貞敬夫人) 능성 구씨(具澤喜)의 자취가 남아있다. 심순택은 노론의 명문 청송 심씨 가문의 인물로 과거에 급제한 뒤 1884년 우의정에 올랐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에는 온건개화파의 중심인물로 사대당(事大黨) 내각의 영의정을 맡는 등 개항기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 무효의 상소를 올렸으며 기울어가는 국운과 함께 하다가 이듬해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봉남리에는 심순택의 묘와 신도비가 있으며, 동부마을 위쪽에는 심순택이 말년에 기거했던 고택이 남아있다.
심순택의 고택은 큰며느리가 일찍 죽어 만기사에 모셔진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 그 뒤 심순택의 부인 능성 구씨와 정계에서 물러난 심순택이 내려와 기거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뒤 능성 구씨(구택희)는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 힘쓰는 한 편 1912년 고택 아래에 ‘구씨학원’을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씨학원은 나중에 ‘금릉학원’으로 개명하였으며 해방될 때까지 근대교육의 명맥을 이었다.
7.진위고을 선비들의 요람 진위향교
●구간 : 진위면 봉남리 - 진위향교 - 진위천
향교는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진위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병자호란(1636) 때 불에 탔다. 병자호란 뒤에는 초가집을 지어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위패(位牌)만 모셔두고 제향만 올리다가, 1644년(인조 22) 현령 남두극이 대성전을 중수하면서 격을 갖췄다. 1660년(현종 1) 현령 송박이 대청을 다시 지었으며, 1839(헌종 5)에는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889년(고종 26)에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하였고, 1987년 동, 서재를 중건하였으며, 2007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진위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27명의 성현의 위패를 모셨다. 그밖에도 명륜당과 동서재, 내․외삼문이 갖춰졌다. 지금도 유림에서 1일과 15일마다 분향을 하며, 음력 8월에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
8.백현원과 맹사성의 공당문답
●구간 : 진위면 마산3리 신제점(샛뚝거리 주막) - 송북동 동막마을 백현원 - 동막점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가장 큰 험로(險路)는 대백치(큰흰치고개)와 소백치(작은흰치고개) 구간이었다. 수원에서 출발하여 진위면 봉남리 진위주막에서 점심을 먹은 여행자가 샛뚝거리 주막에서 목을 축인 뒤 힘겹게 소백치(작은흰치고개)를 넘으면 송북동 동막마을 근처 백현원에 다다랐다. 여행자는 이곳에서 동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대백치(큰 흰치고개)를 넘었다. 대백치를 긴 능선을 넘고 나면 등줄기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장안동과 도일동의 경계에는 허겁지겁 대백치를 넘어온 여행자의 갈증을 풀어주는 감주거리 주막이 있었다. 술맛이 감주처럼 달았던 감주거리주막을 지나면 갈원인데 이곳에서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가 갈라졌다. 충청수영로는 평택현(팽성읍)을 지나 아산을 거쳐 온양과 신창방면으로 나아갔다. 아산의 배방면이 고향이었던 세종 때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도 충청수영로를 따라 고향을 오갔다. 맹사성이 고향에서 출발하면 갈원쯤에서 점심을 먹고, 백현원에서 다리쉼을 하였다. 그래서 백현원에는 맹사성이 젊은 녹사를 훈계하였다는 공당문답과, 독곡동 오리골 마을 단양 우씨 집안과의 갈등으로 마산리 오룡동길을 개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9.소골마을과 풀무골 전설
●구간 : 동막점 - 대백치(큰 흰치고개) - 덕암산
소골은 동막점에서 우측길로 500미터쯤 내려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진주 소씨들이 살아서 소골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지명이 한자로 바뀌면서 우곡(牛谷)으로 바뀌었다. 진주 소씨들은 무신 난(1728)에 가담했다가 멸문을 당하였다. 소골마을 뒤쪽 풀무골에는 소싸 가문의 멸문과 관련된 ‘풀무골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공민왕은 친원파와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신돈을 앞세워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나중에는 정치가 문란해졌다. 그러자 소골에 살았던 소(蘇) 정승은 신돈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풀무골에 대장간을 짓고 칼과 창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켰다. 소정승이 출정준비를 모두 마치고 가족들에게 알리자, 총명한 며느리가 이르기를 ‘벼 한 말을 찧어 쌀 한 말이 나올 때에 출병하여야 성공한다’고 건의하였다. 며느리의 총명함을 알고 있었던 소정승은 하인을 시켜 벼 한 말을 찧도록 하였다. 하지만 잘 익은 곡식을 찧어도 9되 7홉밖에 나오지 않자 화가 난 소정승은 며느리를 꾸짖고는 출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소 정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관군의 기습으로 수주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소(蘇)씨 가문은 멸문을 당하였다.”
10.덕암산과 부락산
●구간 : 대백치(큰 흰치고개) - 덕암산 -도일동 내리 최경 묘
평택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서쪽 가장 낮은 지형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산이 낮고 평야가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무봉산. 덕암산, 백운산, 팔용산, 태봉산, 부락산, 오봉산, 고등산, 마안산, 자미산, 비파산, 무성산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진위면 동천리의 무봉산(208.6m)이며, 백운산(192m)과 덕암산(해발 164.5m)이 뒤를 잇는다. 덕암산은 무봉산자락과 함께 조선시대 진위고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었다. 그래서 진주 소씨, 원주 원씨, 봉화 정씨의 동족마을, 삼봉 정도전 유적, 원릉군 원균 유적, 최경 묘와 같은 다양한 문화유산이 숨어 있다.
부락산(負樂山, 148m)은 송탄지역의 주봉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락산(負樂山), 조락산(鳥落山), 불악산(佛樂山), 요악산(仸樂山)으로 불려졌다. 부락산 아래 동령마을은 고려시대 송장부곡의 중심마을이고, 이충마을에는 정암 조광조와 추담 오달제의 유허가 남아 있었다. ‘이충(二忠)’이라는 지명도 두 명의 충신이 살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현재 추담로 길옆에는 두 충신의 유허비를 간직한 ‘충의각’이 있다.
11.원릉군 원균 묘 및 사당
●구간 : 최경 묘 - 원릉군 원균 사당 및 묘 - 칠원1동 갈원
임진왜란의 영웅 원균(元均, 1540~1597)은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이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워 젊은 나이에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침임이 예상되면서 군사적 요충이었던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경상좌수영이 궤멸되고 군졸들이 흩어지는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으며, 전라좌․우수사 이순신,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구축하여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승전의 장계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다가 충청병사, 전라병사로 전임되었으며, 1597년 이순신이 왕과 조정의 명령을 능멸한 죄로 백의종군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뒤 부산포를 공격하다가 가덕도와 칠천량(漆川梁)에서 크게 패하여 동생 원전,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하였다. 왜란 뒤 논공행상에서 이순신, 권율과 선무1등공신에 녹훈되고 원릉군에 봉해졌다. 도일동 내리에는 원균장군의 묘와 사당이 있으며, 묘(墓) 아래에는 원균의 유품을 입에 물고 천리길을 달려온 뒤 죽었다는 애마(愛馬)의 묘가 있고, 건너편에는 생가 터였던 ‘울음밭’이 있다. 선무공신교서는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12.갈원(葛院)과 옥관자정
●구간 : 원릉군 원균 사당 및 묘 - 칠원1동 갈원 - 칠원3동 쇠물뿌리 마을
칠원1동 갈원(葛院)은 조선시대 평택지역의 대표적인 역원(驛院)이었다. 갈원 주막거리 옆에는 옥관자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옥관자정은 본래 ‘옥수정’으로 삼남대로를 여행하던 사람들의 식수였다. 옥수정이 ‘옥관자정’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 때문이다.
“조선 후기 반란이 일어나 한양이 점령당하자 임금은 공주로 피난을 내려가게 되었다. 한양에서 공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갈원을 지나야했다. 반란군에게 쫓겨 허겁지겁 큰흰치고개를 넘은 무척 목이 말랐다. 갈원에 도착하자 임금은 가까이 있는 관원을 불러 어서 물을 떠오라고 명령하니 옥수정의 물을 떠서 올렸다. 옥수정의 시원한 물은 임금의 타는 듯한 갈증을 단번에 해갈시켜주었다. 물맛에 감동한 임금은 옥수정에 정3품 당상관이 패용하는 둥근 옥관자를 하사하였다. 그 뒤로 옥수정은 ‘옥관자정’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갈원(葛院) 도중에 짓다
시골 객점 하나가 갈림길에 임해 있고 / 野店臨岐路
집 주위에 푸른 산이 띠처럼 둘렸어라 / 靑山繞屋連
마을 주변엔 세버들이 휘휘 늘어지고 / 村邊垂柳細
언덕 위엔 이름 모를 꽃들이 산뜻해라 / 原上雜花鮮
처처에서 타고 가던 말을 좀 쉬게 하며 / 處處休征馬
집집마다 밥 짓는 저녁연기를 보노매라 / 家家起夕煙
나그넷길에도 흥치가 없진 않은데 / 客行還有興
다만 유감은 술 살 돈이 없는 것 / 沽酒恨無 (포저집 제1권/조익)
13.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와 소사동 미륵
소사1동은 조선시대 소사원이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소사원 터와 김육(金堉, 1580~1658)의 대동법시행기념비 그리고 소사동미륵이 있다.
소사동 미륵은 옛 소사원 터 옆 직사각형의 돌방에 모셔져 있는데, 높이 1미터 50센티 정도로 작은 규모지만 소박한 미소가 정겹다. 소사동 미륵은 할아버지 당신(堂神)과 함께 오랫동안 할머니 당신(堂神)으로 모셔졌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당제가 중단되면서 근처의 무속인들이나 신자들에 의해 신앙되고 있다.
소사벌은 정유재란(1597) 육전3대첩 가운데 하나인 소사벌대첩이 전개되었던 곳이다. 일본군은 정유년 141,500명으로 재침하였다. 7월초 일본군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를 총사령관으로 부대를 좌․우군으로 편성하여 하삼도(下三道) 일대를 공격하였다.
전라도 남원과 전주 일대를 공략한 우군은 삼남대로를 따라 충청도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우군은 9월 초 충청도방어사 박명헌 부대로부터 여산, 은진, 진산에서 공격을 받았으며, 회덕에서는 이시언 부대에게, 고령과 황석산성에서는 정기룡과 조종석 부대의 저항에 부딪쳤지만 이를 물리치고 빠르게 북상하였다. 일본군이 북상하자 명나라 군대는 해생, 우백영(牛伯英), 양등산(楊登山), 파귀(頗貴)에게 기병과 보병 4,000명으로 왜군의 북상을 막도록 명령하였다. 두 나라의 군대는 소사천을 중심으로 여섯 차례 대회전을 하여 원숭이를 이용한 전법을 사용한 명군이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고, 기병 2천으로 추격하여 직산방면의 일본군까지 격퇴하였다. 이를 소사벌대첩이라고 부른다. 소사벌대첩으로 일본군은 북상을 중단하였고, 며칠 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에게 크게 패하면서 수군의 진격까지 막히자 경상도로 퇴각하였다. 이밖에도 소사벌은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난, 청일전쟁(1894), 한국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소사원의 모정에서[素沙院茅亭]
이른 새벽에 진창길을 건너가니 / 凌晨渡泥潦띠집이 평평한 들을 눌러 있는데 / 茅宇壓平原기러기 오리는 하늘 멀리 날고 / 雁鶩兼天遠물쑥들은 땅을 파랗게 덮고 있네 / 蔞蒿蓋地繁분분히 달리는 건 삼도의 역말이요 / 紛紛三道馹띄엄띄엄 있는 건 두어 집 마을일세 / 點點數家村남주의 나그네 머리 돌려 생각하니 / 回首南州客그 회포를 쉽게 논하지 못하겠네 / 情懷未易論 (점필제집 시집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