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 : 6 - 10절
“부르신 줄로 인정함”
사람은 쉽게 변하지를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나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나 생각, 어렸을 때부터 지녀 왔던 습관… 이런 것들은 쉽게 변하지를 않습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밀착 교육과 훈련을 받았던 가룟유다도 쉽게 변화되지 못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변화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는 훌륭한 어머니 중 한 분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그녀도 자녀 중 행실이 바르지 못한 딸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고집불통인 딸은 못된 친구들과 계속 어울려 지냈습니다. 어느 날 수잔나는 검정 숯을 한 다발 가져와 딸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딸아, 이 숯을 한번 안아보렴. 뜨겁지 않단다." 그러자 딸이 기겁했습니다. "뜨겁지는 않지만, 손과 몸이 더러워지잖아요." 그때 수잔나가 딸을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란다. 바르지 못한 행실은 화상을 입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을 더럽힌단다." 딸은 그제야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어머니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고 현명한 어머니의 사랑과 인내가 딸을 바뀌게 한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아주 큰일이 일어나거나 큰 깨달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쉽게 변하는 것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화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는데 물이 포도주로 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물을 준비해서 퍼 다가 항아리에 부었다면 속임수를 썼다고 의심을 하겠지만 예수님은 입으로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속임수의 가능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대충 물을 탄 포도주가 아니라 이미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맛을 보고 나서는 훌륭한 맛에 감탄을 할 정도로 최상급 포도주로 변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평생 뱃사람으로 일을 했던 제자들도 기겁을 할 정도의 거친 파도가 밀려 왔는데 그 파도가 잔잔해지는 변화가 일어났었고, 바디매오 같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된 변화도 엄청난 변화이지만 예수님의 편에서 보면 너무도 일상적인 변화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실 이런 변화들을 맛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맛이 날 것 같은데 우리 자신도 쉽게 변하지 않고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때문에 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나 상황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전히 변화를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우리의 고집 때문에 제자리걸음을 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어 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변화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사실 우리를 보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어서 항상 변화해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능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고집, 과거의 습관들, 이미 지금까지 해 왔던 쉽게 바꿀 수 없는 생활의 패턴들, 굳어진 생각들,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던 인생의 계획들….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변화가 되어서 이제는 예수의 꿈을 꾸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해서 이런 일들이 멈추어 있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쓴 이용규 선교사님의 그 결단과 내려놓음은 도전이 되고 귀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해 왔던 전공과 모든 수고와 업적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에서 지식인의 대우를 받으면서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혀 관계도 없는 몽골의 선교사로 누가 갈 생각을 하겠습니까? 바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고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이라면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런 생각을 한 번 즈음 가진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실천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이 본문 말씀에도 보면 바울 사도가 자신의 계획, 자신의 목표,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갑자기 큰 사고가 발생을 하거나 큰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런 사건들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이 본문 말씀에 보면 전혀 그런 상황이지가 않습니다. 단지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에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우라”고 하니까 그 환상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향하게 되는 그런 변화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봤지만 사도 바울은 유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나바조차도 버릴 정도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못하는 단호한 사람이고 철두철미한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분명한 자신의 뜻과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고 확신이 있어서 떠난 2차 전도 여행에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이유와 또 그런 가운데 보여 주셨던 환상 때문에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 주시니까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인정해서 온전히 따르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100명이나 1,000명이나 10,000명 정도가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손짓을 했더니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순종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말씀이 10절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10절을 다같이 다시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실 우리가 변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를 잘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일단 변화가 일어나려면 먼저 마음속에, 생각 속에 인정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해서 변화의 맛을 못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살이 찌던 사람이 왜 갑자기 살을 빼기로 결심을 합니까? “자신이 뚱뚱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고 그런 몸을 가지고 살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불리하고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살을 빼야겠다는 변화에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변화를 보면 그 안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새롭게 인정을 했기 때문에 그런 변화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인정하지 않고 하는 변화는 작심삼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왜 십자가도 지고 좁은 문으로 걸어가고 때로는 환란과 핍박을 받아 가면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갑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았을 때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변화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이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런 변화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중단을 하게 되냐면 이런 인정함이 먼저 있어야 우리의 본질로부터 변화가 일어나서 모든 것이 변화되는 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인데 인정하는 마음 없이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 겉모습만 따라하다가 결국 지치고 힘들어서 그 복된 길을 마다하고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하나님만 모든 영광을 받으실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인정하는 마음 없이 와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인처럼 예배는 드렸는지 거절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육체의 정욕에 따라, 안목의 정욕에 따라, 이생에 자랑에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고, 참된 복을 받는 비결이고,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최고의 방법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과 양다리를 거치면서 우왕좌왕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영적 호흡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영적으로 질식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기도할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도도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유이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을 허락하신 목적인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법대로, 습관대로, 방향대로 변하지 않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죽이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다는 이 진리만 인정을 해도 우리의 삶은 개과천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인정을 해도 그 사람의 변화는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고 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뛰어난 예화가 들어가 있고 철학적으로 분석한 강해 설교를 들었던 사람이지 않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이 진리만 듣고서 그 진리를 인정했기 때문에 엄청난 변화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서 부르신 대로, 이끄시는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허락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레마의 말씀인 것을 인정을 하게 되면 세상의 온갖 방해가 있고 걱정과 염려로 우리의 변화를 막아도 우리는 바울이 변했던 것처럼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를 자녀로 구별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날 때는 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