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생애가 독립운동에만 조명되다보니 교육구국운동이나 서우학회(西友學會) 또는 국채보상운동, 회사운영 등에 대해서는 덜 알려진 상태이다.
안중근은 망명하기 전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서북지역 인사들의 계몽단체인 서우학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는 1906년 정운복(회장), 김영준(부회장), 박은식, 노백린, 안병찬, 안창호, 이갑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이다. 안중근은 1907년 봄, 제 8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서우학회는 "생존경쟁과 우승열패의 진화론을 적극 수용하여 '자보자전지책(自保自全之策)'을 강구하려던 동포와 청년의 교육을 계도면려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중지(衆智)를 계발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시킬 수 있다."(주석 13)는 취지를 내걸고 동포들의 계몽과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우학회의 등장으로 기호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국민교육회 등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병탄에 반대투쟁을 벌였다.
서북학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서북지역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사회적인 명사들이었다. 안중근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당대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봄에는 아버지 친구 김진사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가 몇 개월동안 지내면서 안창호, 이동휘, 김종한 등과 사귀었다.
그는 1907년 5월, 안창호, 이갑, 유동열, 노백린, 이동휘, 이종호 등과 함께 서울 동문밖 삼선평(三仙坪)에서 열린 서우학회 친목회에 참석했고, 진남포에서 안창호의 구국연설을 듣고 그에게 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러시아망명 전에는 그와 함께 수차 '배일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앙에서 활약중인 계몽주의 계열의 민족운동가들과 단기간의 교유를 통하여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동아정세와 세계대세를 파악하는 동시에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급진적 의열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음을 물론, 이전에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을 통하여 막연하게 구상하고 있던 동양평화론에 대한 논리를 체계화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주석 14)
안중근이 교육구국운동과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할 때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1904년 이른바 고문정치를 실시한 이래 한국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왔다. 도입된 차관은 침략을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과 일본 거류민 시설 확충에 투입하는 등 통감부에 의해 마음대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외채가 갑자기 엄청나게 불어나서 정부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다. 국채를 갚지 않고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자각이 민중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어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회를 발기하여 국민대회를 여는 등 활동을 시작하였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호응하여 적극 참여함으로써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담배를 끊고 돈을 낸 사람, 금은패물을 모아 바친 사람, 심지어 기생들까지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의연금을 모았다.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평안도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안중근은 먼저 자기 부인에게 장신구 전부를 헌납케 하고, 이를 계기로 일반 민중들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평양에서는 선비 1천여 명을 명륜당에 집합시켜 취지를 설명하고 성금을 모았다. "안중근이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뜻 있는 선비 천여 명을 모으고 의연금을 크게 거두었으니 이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이니라."(주석 15)라는 기록도 전한다.
안중근의 국채보상운동은 자신과 가족은 물론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34원 60전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냈다고 보도하였다. 안중근은 뒷날 <자서전>에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일반 한인이 발기한 국채보상회는 앞을 다투어 돈을 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을 본 일본 형사 한 명이 와서 그 형편을 알아보고 묻기를,
"회원은 몇이나 되며 재정은 얼마나 모았는가?"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회원은 2천만 명이고 재정은 1천 3백만 원을 모은 다음에 보상하려 한다"고 했다.
"한인들은 하등한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부채라는 것은 갚아야 하는 것이요 급채라는 것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같은 시샘을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그 일본인은 화가 나서 나를 쳤다. 내가 이르기를,
"이처럼 까닭없이 욕을 본다면 2천만의 겨레들이 더 많은 압제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마주쳤더니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가운데 들어 화해를 시켜 서로 헤어졌다.
학교를 운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재산이 거의 바닥이 났다.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경비를 마련하고자 이 해 7월 한재호, 송병운 등과 평양에서 미곡상 운영과 삼합의(三合義)라는 무연탄 판매회사를 차렸다. '삼합의'란 3인이 설립한 공동체라는 뜻을 담았지만, 3인간의 불화와 일본의 방해로 석탄 판매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수천 원의 재산상의 손해를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그무렵 나는 재정을 마련해 볼 계획으로 평양으로 가서 석탄광을 캐었는데 일본인의 방해로 인하여 좋은 돈 수천 원이나 손해를 보았다."라고 썼다.
안중근의 '삼합의 실패'와 관련하여 일본측의 정보자료에는 간도 망명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하고자 회사를 처분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어느 것이거나, 안중근은 일제의 간섭으로 이제 국내에서 사업이나 활동이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망명을 앞당기기로 했다.
주석
13 - <대한매일신보>, 1906년 10월 16일자, <본회취지서>
14 - 오영섭, 앞의 글, 33쪽.
15 - 계봉우, 앞의 글, 5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