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
1866년 3월 7일 죄수 네 명이 짚으로 엮은 들것에 밧줄과 머리채로 묶여서
서울의 포도청을 나와 새남터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군문
효수될 참이었다.
행렬 맨 앞에는 시메온 베르뇌 주교가 가고 그 뒤를 유스티노 브르트니에르,
루도비코 볼리외 ,헨리코 도리 신부 등 세 선교사가 따르고 있었다.
시메온 베르뇌(Berneux, Simeon Francois, 장경일 시메온) 주교는 르망
(Le Mans) 교구의 샤토뒤르와르(Chateaudu-Loir)에서 1814년 5월 14일에
태어났다. 부모는 수수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으니, 아버지는 칼 만드는 직업
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은 열심히 했지만 부유하지는 못했다. 많은 동향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혁명의 혼란 중에 교우 본분을 지키지 않게 되었으나
매우 신앙심이 깊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베르뇌 부인은 칼 가게 일을 맡아 보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돌보았고 막내둥이
베르뇌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기울였는데 베르뇌의 열심을 보고 하느님
께서 그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예감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열세 살 때 베르뇌는 본당 보좌 누아르 신부에게 신부가 되겠다는 소망을
밝히고 나서 어머니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감격했을 때는 말을 하지
못하는 순박한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베르뇌 부인은 기쁨과 승낙을
나타내는 정에 넘치는 입맞춤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장애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종교적 무관심과 아들을 일의 협력자로 만들
고자 하는 그의 욕망, 집안의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것 등으로 성직에 나아
가는 데 필요한 공부를 영영 할 수 없게 될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식에 대한 계획이 다행스러운 결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마련하셨다. 베르뇌 부인은 그의
상냥한 마음씨와 강인한 정신 덕택으로 어린 아들의 지적 도덕적 소질을
자랑스러벡 생각하고 있던 남편의 승낙을 얻어냈던 것이다.
누아르 신부는 사제관에서 라틴어 초보를 무료로 가르쳐 주었고, 몇달 후에는
시의 작은 중학교 2학년에 그의 제자를 입학시켰다. 이 학교의 옛 기록에는
“그는 이 학교에서 올바른 품행과 좋은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되어 있다.
불행히도 샤토뒤르와르 중학교에는 2학년까지밖에 없었으므로 르망 중학교
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교적
애덕이 난관을 극복하게 했다. 마음씨 너그러운 사람들이 누아르 신부를
도와 이 학생의 기숙사비를 내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이 소년은 종교 교육을 등한시
하는 이 중학교의 환경이 괴로워 프레시니에 소신학교에 입학을 청했고,
마침내 1830년 10월에 수사 학급(수사학급) 학생으로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는 이내 선생들과 학생들의 존경과 공감을 얻었다. 그중의 한 사람으로
후에 르망의 주교가 된 샤를 피용은 소년 베르뇌를 열심과 규칙적인 생활
과 근면으로 덕행있는 학생들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 이듬해, 열일곱 살 반이 된 베르뇌는 르망 대신학교에 들어갔다. 철학과
1학년 때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인 교장 부부앵 신부의 지도로 완전한 발전
이 이루어진 한 해였으나, 2학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악착같이 공부하는
데다 엄격한 제도와 너무 빠른 성장으로 이 신학생의 건강이 나빠져 학업
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의 짐이 되지 않게 하려고 르망의 주교는 그를 부이르리 가족에게
아이들의 가정 교사로 추천했다. 2년 동안 베르뇌는 이 직책을 재치
있게 수행해서 학생들과 그들 부모의 애정을 얻게 되었다.
1834년 10월에 베르뇌는 르망 신학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는데
성적이 아주 우수해서 르망의 주교로 승진한 교장이 그를 철학 복습 교사로
임명했고, 그 후 베르뇌가 신품 성사(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사 중 한 가지로,
주교가 사제가 될 사람에게 사제의 자격을 인정하는 성사다.)을 받은
(1837년 5월 20일) 다음 즉시 그를 철학 강좌의 교수로 임명했다.
시메온 베르뇌 신부는 장상들을 통해 통고된 하느님의 뜻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려운 직책에 열성을 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하던 사도직에 대한 신비로운 부름의 뜻을
자문하곤 했다.
그것은 착각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선교사 성소였을까? 영적 지도
신부는 하느님께서 전교 지방으로 부르시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때부터 베르뇌 신부는 이제 오직 한 가지 뜻만을 세우기로
했으니, 그것은 이 부르심에 응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교구를 떠나려고 하는 베르뇌 신부의 가치를 의식한 그의 주교는 마지 못해,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이 철학 교수가 떠나는 것을 허락했고, 그래서 베르뇌
신부는 1839년 7월 15일 외방 전교회 신학교의 문을 들어섰다.
어머니가 이별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베르뇌 신부는 파리에 도착한
후에야 그의 결정을 알렸다.
“천주께서도 아시지만 저는 어머니께 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희생은 천주의 뜻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제 성소에 불충실한
것을 보시기보다는 차라리 천만 번 죽는 것을 보는 것을
더 낫게 여기실 것입니다.”
베트남의 코친차이나와 통킹(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지방으로 Cochin
China는 그 남부에, Tongking은 그 북부에 있다.)에서 신앙을 위해 용감
하게 피를 흘리는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훌륭한 모범과 한국 교회를
덮치고 있는 위협들은 뒤박 가(街)(Rue du Bac;파리 외방 전교회가 있는
곳이다.)의 선교사 지망자들의 마음에 열광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도 만들었으니 그 때 베르뇌가 말했다.
“자기에게 맡겨진 보물을 낭비하기를 원치 않는 선교사는
성인이여야 하며 그것도 보통이 아닌 성덕을 가진 성인이어야 한다.”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것의 그의 관심사였다. 그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어떤 것이든 그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이 무엇이든지 따르겠다고 마음먹었다. 출발하는 날짜도 언제이든 별로
상관이 되지 않았다. 동료 중 세 사람이 전교 지방인 퐁디세리(인도 동부,
마드라스 남쪽에 있는 항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좀 섭섭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사도직에
필요한 그 많은 덕행을 얻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심경으로 준비하고 있던 11월 28일, 이번에는 그가 젊은 신부 두
사람과 떠난다는 것과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채 그저 믿음과 순종으로
떠나야 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카에오 주재하는 외방 전교회 경리
신부가 각자에게 그의 전교 지방을 정해 줄 것이었다.
“만일 치명적인 참화를 빚어냈고
아마 아직도 빚어내고 있을 박해가 베트남에서 뜸해지면
우리는 사나운 멧돼지가 주의 포도밭에 입힌 큰 피해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파견될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우리는 달단이나 중국이나
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오! 주께서 내게 주시려고
하는 몫이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나는 오래지 않아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는 땅, 성덕을 전파하게 될
이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될지도 모릅니다.”
적응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미지의 땅으로
기쁘게 떠나는 그의 훌륭한 마음가짐은 이러했다.
“물구나무를 서서 가야 천주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낼 수 있을 만큼 떠나는
그의 마음가짐은 각별한 것이었다.
내 마음이 지금처럼 평안한 때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나는 영벌로 빠져 드는 영혼들을 구하고자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희생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길로 가는 것 아닙니까?
1840년 1월 15일, 베르뇌 신부는 파리를 떠나 6월 26일 마닐라에 도착했고,
주교 성성을 받기 위해 필리핀에 왔던 동부 통킹의 교구장 르토르 주교
(Mgr. Retord)를 만나게 되었다. 르토르 주교는 그 때 동부 통킹 교구의
모든 주교가 사망했기 때문에 주교품을 받으로 온 것이다.
두 선교사는 처음 만나자마자 공감했다. 그들은 둘 다 같은 불꽃으로 타고
있었다. 젊은 선교사는 선배가 해주는 그의 교회의 고통 받는 생활과 교우
들의 영웅적인 용맹과 수많은 회개 등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삼키듯이 듣고
있었고, 르토르 주교는 인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나큰 가치를 지닌
이 젊은 신부를 통킹으로 데려가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소원은 실현될 것 같았다.
1841년 1월 3일, 르토르 주교는 중국 배로 마닐라를 떠났는데 그 배에는 밀수
품처럼 주교와 베르퇴, 갈리(Galy), 타이앙 디에(Taillandier)에 신부가 몸을
맞대고 있었다. 17일에 이 배는 망망 대해 같은 홍하(紅河; 중국 운남성 중부
에서 발원해 통킹만으로 흐러 들어가는 강) 하구(하구)중의 하나인 다이 강
어귀에 닻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선교사들은 그들의 전교 지방 닌빈 성(省) 팟디엠이라는 교우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당시 그 나라의 한 신부가 닌빈 성 지사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것으로 인해 뜻밖에 겪어야 했던 몇 가지 돌발 사건이 있은 후, 선교사
들은 박해자들의 수색을 더 잘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베르뇌 시부는 베트남 엔모프(Yen-Mof)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처녀들 수녀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베트남어를 배웠다.
그는 이렇게 썼다.
비록 여섯 걸음 이상은 걸을 수 없지만,
바닥에서 세 치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창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면 거적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엎드려야 햐지만 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젊은 선교사에 대한 위협은 점점 더 심해져 오래지않아 그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은신처를 옮겨야 했다. 르토르 주교는 그것이 걱정되어 베르뇌 신부
와 푹낙에 있는 갈리 신부에게 게안 성에 있는 마송 신부(P.Mosson)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알렸다.
1841년 4월 12일 부활절 다음 월요일 아침 일찍 아주 확실한 안내인들이 찾아
와서 그들을 마송 신부에게로 안내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젊은 선교사들을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게 한다는 것이 교구장으로서는 조심성 있는 처사였다.
그러나 그 선교사들이 있다는 것이 이미 남딘(베트남하노이 남쪽에 있는 도시)
에 통보된 후였다.
성토요일 밤, 군사 500명의 분견대가 두 선교사가 숨어 있는 곳을 포위했다.
그 날 저녁 베르뇌 신부는 몇 사람의 고백을 들었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베트남에서 내가 행한 성직의 첫번이자 마지막
수확이었습니다. 천주의 계획은 도저히 꿰뚫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숭배해야 마땅합니다.”
부활절 새벽에 베르뇌 신부는 여느 때처럼 회장들과 십자가를 사랑하는 처녀
들 앞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러나 제의를 벗기 시작할 무렵 포졸들이 오두막
집을 덥쳐 선교사를 붙잡았다.
그는 그 때를 술회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전에 우리의 숭배하올 구세주께서
예루살렘의 올리브나무 동산에서 끌려가신 것처럼
끌려갈 때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포박되어 군 우두머리에게로 끌려가다가 역시 체포된 갈리 신부를 만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인’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면서 평화의 포옹을 나누었다.
테 데움(Te Deum: 감사의 노래)을 막 마친 갈리 신부가 말했다.
“그렇소. 이 날이야말로 주께서 만드신 날이오.”
베르뇌 신부는 부활절 미사의 알렐루야 구절을 인용해서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전통적인 사슬에 묶이고 우리에 갇혀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남딘으로 호송되었는데 기쁘게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여기서는 사슬에 묶인 사람은
슬퍼하게 마련인데 당신들은 왜 기뻐 보이는거요?”
어떤 외교인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베르뇌 신부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예수의 종교인 참종교를 따르는 우리는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요,
이 비밀 때문에 고생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이오.
그것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온 우리는
모두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오.”
오래지 않아 공식적인 신문이 시작되었다. 관리는 밀고를 얻으려 했으나
베르뇌 신부는 그가 체포되기 전에 자기를 숨겨 주었던 사람들을 하나도
배반하지 않았다.
나이 많고 눈이 먼 통킹 출신인 신부 한 명이 재판 진행 때 그곳에 있었는데
갑자기 재판관이 베르뇌 신부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 곁에 앉아 있는 이 백발의 신부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그렇소.”
“그의 사슬을 네가 떠맡기로 동의하겠느냐?”
“내겐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 기꺼이 그러겠소.
그렇게 해서 당신을 참된 종교로 데려올 수 있다면
한층 더 기꺼이 떠맡겠소.”
그러자 눈먼 신부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내 사슬을 양보하고 싶지는 않소. 이건 내 보물이오!”
재판관이 화가 나서 말했다.
“만일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두 신부가 무섭게 매를 맞게 될 것이다.”
“나는 재판관인 당신이 정의의 법칙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
내가 말하지 않아서 고통을 당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혼자뿐이오!”
베르뇌 신부가 응수했다.
그러자 이 선교사는 단 위에 관리 세 명이 앉아 있는 법정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베르뇌 신부에게 교우들을 밀고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에게
겁을 주려고 한 신학생 옷을 벗겨 매맞은 자국을 보여 주었다.그런 다음
매질할 때 사용할 피묻은 몽둥이도 보여 주었다.
“네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으면 이렇게 당할 것이다.”
관리가 말했다.
베르뇌 신부가 대답했다.
관리들은 마침내 그와 함께 체포되어 몽둥이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젊은 베트남인 세 명을 들여보내면서 말했다.
“이 자들은 다 죽게 됐다.
너의 교를 한 달 동안만 버리라고 그들에게 권해라.
그런 다음에는 다시 믿어도 세 명은 모두 무사할 것이다.”
“관리 양반.”
베르뇌 신부가 대꾸했다.
“아버지더러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권유하지는 못하오.
그런데 천주교의 신부더러 교우들에게 배교를 권하라는 거요?”
그리고 사랑하는 교우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벗들이여, 한 가지만 권고하겠소.
그대들의 고통은 끝나 가는데
하늘에서 그대들을 기다리는 복락은
영원하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항구함으로 그것을 얻을 공을 세우시오!”
“그러겠습니다. 신부님.”
그들이 약속했다.
관리들은 비웃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물었다.
“네가 저들에게 말하는 그 네새라는 것이 대관절 어떤 것이냐?
천주교인들은 모두가 영혼이 있단 말이냐?”
“물론이요. 그리고 외교인들도 영혼이 있소.
관리 양반, 당신도 영혼을 가지고 있소.”
이런 후 관리들은 군사들에게 그들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런 후에도
다른 심문이 뒤따랐으나 관리들은 그 이상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베르뇌 신부는 그 모든 심문을 꿋꿋하고 조심성 있게 감당했다.
1841년 5월 9일, 부활 후 제 4주일에 관리들은 그를 위에(베트남 중부,
위에 강 연안에 있는 도시)감옥으로 이송한다고 했다.
그곳은 19일이나 결리는 멀고 고생스러운 길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수도에
투옥된 것은 더 한층 무서웠다. 발목에 차꼬를 채웠으므로 악취가 났고
무섭게 더운 환경 속에서도 맨땅에서 누눠 지내야 했다.
심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관리가 베르뇌 신부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를 잡고 침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사들이 못하게 막았다. 이에 베르뇌 신부가 외쳤다.
“죽는 일이라면 희광이에게 내 머리를 내밀겠소.
그러나 내 천주를 배반하라고 명령하면
나는 언제나 저항하겠소.”
6월 12일, 여섯 번째 신문 때 베르뇌 신부는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군사들
에게 끌려 땅에 놓이 십자가 쪽으로 갔다.
그가 항거했다.
그러자 앞마당으로 끌고 가 얼굴을 땅바닥에 닿게 하고 말뚝에 묶었다.
“네가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할 것이다.”
관리가 위협했다.
“마음대로 치시오.”
베르뇌 신부가 대답했다.
6월 13일에는 관리가 베르뇌 신부를 매질하라고 명령했다. 매질할 때마다
그의 몸에는 너비 10 내지 12센티미터의 고랑이 파져 피가 흘러내렸다.
6월 14일에는 그에게 더 심한 매질이 가해졌다.
“우리의 위대하신 천주를 위해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베르뇌 신부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10월 8일에 베르뇌 신부와 동료 갈리 신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러나 형 집행은 다른 세 선교사의 체포로 연기되었고
이 선교사들 역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구류 기간이 길어지자 갇힌 사람들은 공동체를 조직하고 제일 젊은 베르뇌
신부를 장(長)으로 선출했다. 그들 모두가 그의 덕행과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마침내 1842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축일에 국왕은 법원에서
내린 사형 선고를 서명해 재가했다. 이 명령으로 신앙 증거자들은 다른 옥,
즉 사형수들의 옥으로 이송되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도둑과 살인자들 사이
에서 살야야 했다. 그러나 그중 한 선교사가 이렇게 지적했다.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흉악범들과 함께 취급되셨지 않습니까”
선교사들은 최후의 희생으로 해방될 시간을 기다렸으나 헛된 일이었다.
그 시간은 다가오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 시간이 그들에게 오지
않았던 것이다.
1843년 3월 7일 베트남의 투란 항에 들어온 에로인 호 함장이 동포 다섯 명이
2년 전부터 위에의 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 총리 대신에게 편지를
보내 국왕에게 그들의 석방을 청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행동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불행한 계기를
피하게 할 뿐 아니라 폐하의 치세와 폐하에게 모든
프랑스인이 감사하고 축복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아마 투란을 겨냥한 대포의 위협이 무서워서 그랬겠지만 총리 대신은 갇힌
선교사들을 위해 개입했다. 그래서 3월 12일에 사슬이 풀리고 수인들은
투란으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을 에로인 호 함장에게 인도한다는
왕령을 통고받았다.
17일, 그들은 군함에 올랐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 자유는 그들에게서 순교의 여예와 언젠가는 신자들에게로 돌아가겠다는
그들의희망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피비앵 레베크 함장은 자기가 한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자 선교사들을
이 나라의 남쪽 해안이나 싱가포르에 상륙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제 2의
고향을 버릴 결심을 차마 하지 못한 베르뇌 신부에게는 이것이 참기 어려운
낙망이 되었다. 그러다가 부르봉 섬에 들렸을 때 그곳 총독에게 간청해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여행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갈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1843년 8월 23일에 베르뇌 신부는 다시 마카오로 가서 전교
지방에 배속되기를 기다렸다. 참으로 불안하고 괴로운 기다림이었다.
이 열렬한 선교사는 포르투갈 식민지에 경리 책임자로 남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통킹에 대한 향수로 시련을 겪고 있는
르토르 주교와 교우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통킹은 모든 전교 지방 중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곳입니다.”라고
쓸 정도였다. 그러나 에로인 호 함장과 한 약속을 존중했기에 통킹은
그에게 금지 구역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를 떠난 지가 오래지 않아 4년째가 되는데 그 동안 여행과 옥살이와
전교 활동의 부재(부재)밖에 체험하지 못한 그는 빨리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내 1843년 10월에 베롤 주교가 지휘하는 만주 교구에 배속되면서
평온과 기쁨을 되찾았다.
1844년 1월 24일 베르뇌 신부는 상해에 있었고, 3월 15일에는 한국 만과
페칠리 만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요동 반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24일
에는 그의 주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베르뇌 신부는 약 170만 평방 킬로미터나 되는 이 넓은 전교
지방에서 일했고 주교가 자리를 비운 동안 (1844-1848년) 부주교 자격
으로 지극히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 나갔다. 그는 그곳 교회를 지혜롭게
관리했고 1846년에는 신학교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1849년에는 주교와 부주교를 붙잡아서 재판소에 넘기기로 결심한
한 외교인이 일으킨 박해를 피하기 위해 상해로 피신해야 했다.
베르뇌 신부는 혼자서 만주로 돌아와 다시 교구를 관리하기 시작했고 장티
푸스와 콜레라 등으로 건강상 심히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많은 일을
잘 감당해 나갔다. 이들 병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베롤 주교가 교황청에서 받은 권한으로 보좌 주교를 고르려고 했을 때 자연
베르뇌 신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1854년 12월 27일 트레미트 주교
라는 명의로 그를 주교로 성성했다.
그 시대에는 서양에서 아시아로 오는 우편물은 배달이 늦었으므로 교황
비오 9세(Pius Ⅸ)가 1854년 8월 5일자 교서로 베르뇌 신부를 카프사 명의
주교 칭호를 가진 한국의 3대 교구장으로 임명해서 1853년 2월 3일에 별세
한 페레올 주교의 뒤를 잇게 한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교서는 교구장
으로 선택된 그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한국으로 떠나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관습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새로운 적응을 또 한 차례 겪어야 하고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국인의 입국은 사형으로 다스려지고 1784년에 천주교가 세워진
후로 박해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에서 위태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각오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망 앞에서 새 주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한 편지로 알게 된다.
한국, 더할 나위 없는 순교자의 땅,
그 이름만 들어도 선교사들의 심금을 울리는 한국,
그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기를 거절하겠습니까?
교회의 최고 책임자의 결정은 그에게 이 나라의 문을 열어주었으나 정부
에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닫고 있는 그대로였다. 그러므로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동행한 베르뇌 주교의 여행은 가장 위험한 모험 중의
하나였다.
1856년 1월 4일 상해에서 중국 배를 탄 그들은 한국 해안에는 일찍이 가 본
일이 없는 물길 안내자에게 맡겨져서 공기도 희박하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화물창에 숨어서 3월 14일까지 지내야 했다.
한 작은 섬에 도착해서 그들은 변장을 하고 한국으로 숨어들기 위해 상제
옷을 가지고 오는 한국 교우들의 작은 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다음
선교사들은 다시 바다로 나가서 이레 동안 항해를 한 후에 마침내 밤을
타고 서울에서 몇 십 리 떨어진 비밀 숙소에 도착했다.
여행의 피로와 불편은 잊고 해안 경비병의 감시를 피한 것만으로도 만족
스럽게 생각하며 “우리는 함께 우리에게 이렇게도 다행스러운 여행을
허락해 주신 주께 감사드렸습니다.”라고 베르뇌 주교는 편지에 썼다.
신임 교구장은 일을 시작했다. 우선 한국어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서울의
산과 들로 다니며 교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작은 성직자 회의
(1857년)를 소집했는데 그 회의에서 신학교 설립과 남학교 개설, 종교
서적 인쇄를 위한 인쇄소 설치를 결정하고 영세 지망자의 자격에 대한
새 규범을 세웠다.
베르뇌 주교는 1859년 그의 편지에 교구의 장래를 대비해서 다블뤼 신부를
후계자로 선정했다. 다블뤼 신부는 1857년 3월 25일 서울에서 주교로 성성
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1859년 그의 편지에 “교구의 중심 인물이 되어 모든
일을 추진하고 열성을 아끼지 않아 선교사들의 경쟁심을 일으키고
유지했다.”라고 썼다.
선교사들에게 깊은 주의를 기울여 그들에 대해 많은 경의와 친절을 보였던
그는 참으로 지도자요, 아버지여서 그들이 그의 애덕과 지식과 열심을 우러
러보았다. 베르뇌 주교는 교우들에게도 깊은 주으리를 기울였다. 몇몇
교우는 베르뇌 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 엄혹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격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주교는 자신이 실천하는 견실한 덕행
들을 가르쳤고 의지도 확고했다. 그러나 결코 마음이 냉혹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교우들은 교리를 가르칠 때와 고해 성사를 줄 때에 그가
보여 준 어짐과 관용에 대한 말을 자주했다.
아무튼 그가 다스리는 동안에 한국 교회는 빨리 발전했다. 숨어서 전교해야
한다는 것과 극도으 ㅣ가난이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국지적 박해 등 사도직
을 수행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조건에서도 1857년에 16,700명이었던 세례자
수가 1862년에는 25,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때 1864년 1월에 있었던 고종의 즉위와 러시아의 위협(1866년 1월)
으로 많은 수확을 약속했던 전교 활동이 중단되고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이
다시 살아났다.
1866년 2월 23일에 수많은 군사들이 주교의 집을 포위하고 포졸 여러 명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주교가 그들을 맞이했다.
“당신은 양반이오?”
한 포졸이 물었다. 그러나 주교는 대답이 없었다.
“당신 서양인이오?”
그가 재차 물었다.
“그렇소 그런데 여긴 왜 왔소.”
“국왕의 명령으로 서양인을 잡으로 왔소.”
“좋소. 밥을 좀 먹고 가겠소.”
식사를 하고 나서 포졸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주교가 물었다.
“어떤 차림으로 가야 하겠소?”
“그대로 가시오.”
포졸들은 주교를 결박을 하지도 않고 그다지 심하게 다루지도 않으면서
데려다가 포도청에 가두었다. 오후 네시쯤 포장이 주교를 불러 거적
위에 앉히고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프랑스에서 왔소.”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한 10년쯤 됐소.”
“그 동안 어디서 살았느냐?”
“한국인들 집에서 살았소.”
“그 집들이 어디냐?”
“홍(홍봉주를 말하는 것인데 그는 한 때 배교했었으나
신앙을 되찾아 3월 7일 남종삼과 함께 순교했다.)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붙잡혔소.”
“다른 집에서는 산 일이 없느냐?”
“여러 군데 다른 집에서도 살았고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도 살았었소.”
“왜 남의 나라에 왔느냐?”
“성교를 전파하려고 왔소.”
“그 성교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이와 같은 질문에 주교는 가톨릭의 교리를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심문하던 포장은 주교를 우포도청에 가두라고 명했다. 포졸들은 갇힌
그의 품위에 감명을 받아 일반 옥에 가두지 않고 그들의 초소 안 한 방에
가두고 발에 사슬을 묶은 채 여러 날 엄중히 감시했다. 주교는 다시 포도청
옥으로 이송되었고 게다가 칼까지 썼다.
2월 27일에 주교는 대신과 좌우 포도 대장이 배석한 자리에 출두해다. 그 때
그들은 어떻게 한국에 잠입했으며 어디로 해서 누구와 같이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을 나에게 묻지 마시오.”
베르뇌 주교가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라의 법에 따라
너에게 많은 형벌을 가할 수가 있다.”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무섭지 않소.”
“그렇다면, 옥으로 돌아가 있거라.”
그러자 포졸들은 주교를 일반 옥으로 다시 데려갔다. 3월 3일부터 6일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금부에서 신문을 받았다. 이 법정 한가운데에 주교는 높은
나무 의자, 즉 형틀에 발목과 무릎, 팔과 여깨가 묶여 있었다. 양쪽에는
형 집행인들이 형구(형구)를 들고 서 있었다.
교우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심문의 내용을 단편적으로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의 한 가지는 우리에게 주교의 침착성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참고가 된다.
“그들이 네 주인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느냐?”
누군가가 베르뇌 주교를 배반한 복사에게 물었다.
“저는 그저 이런 말만 들었습니다.
‘이제는 주교님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내 주교된 직책으로 보면 죽음도 좋고 삶 또한 좋소.
당신들은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일성록’에는 심문 때마다 주교에게 고문이 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르뇌 주교의 겨우 “고문이 열 차례나 열한차례에 가서 멈추어졌다.”
고 했는데, 그것은 의자 다리만큼 굵은 세모 몽둥이로 열 번이나 열한 번
정강이를 힘꼇 내리쳤다는 뜻이다.
주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만 매를 맞을 때마다 긴 한숨만 내쉬었다고
한 증인이 말했다. 주교는 혼자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포졸들이
감방으로 옮겨 가야 했는데 약이라고는 없었고 그중의 한 사람이 살이 떨어져
나간 주교의 다리를 유지로 처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베르뇌 주교가 이런 고초를 겪는 동안 2월 26일에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
되었고, 27일에는 도리 신부와 볼리외 신부가 체포되었다. 선교사 세 명이
모두 주교가 있는 옥에 갇혔고 신문과 고문을 같이 당했다.
3월 7일에는 주교와 그의 사도직과 옥살이의 동료인 신부 세 명이 일반 옥으로
옮겨져 그곳 맨땅 위에서 선교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날짜의 ‘일성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부에서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그 서양인 네 명에 대해서는 1839년의 전례에 따라
군당국에 넘겨 참수하고 효수해서 무리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고자 하나이다.
국왕은 윤허했다.
홍봉주가 다블뤼 주교에게 한 말은 모든 우여곡절 중에 베르뇌 주교가
가졌던 태도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주교님은 항상 품위와 성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번 순교의 기회는 앞의 경우와 달랐다. 확실한 것 같았다. 드디어 많은
일을 하고 많은 고통을 겪은 그에게 생애를 마무리할 때가 왔다. 주교와
신부 세명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향해 3월 7일에 길을 떠났다.
그들은 투박한 들것에 머리채와 바로 단단히 묶여 누워 있었다.
옥에서 나오면서 주교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한국에서 이렇게 죽으니 잘 되었다.”
성문 앞에 모여 있는 군중을 보자 주교는 여러 번 한숨을 지었다.
“아, 저 사람들이 어찌 불쌍하지 않으리오!”
그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전갈을 외면하는 사람들과 크나큰 불행을
당할 것으로 예측되는 그의 교구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행렬은 여러 번
정지되었다. 주교는 그 틈을 타서 형벌을 같이 받는 그의 동료들에게
천국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부 세 명은 모두 매우 기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교할 곳은 한강변의 넓은 모래 사장이었다. 호위 군사 400여 명이 빙
둘러선 중앙에 깃대 하나가 세워졌고, 사형 집행을 주재하게 될 관리의
장막이 세워졌다.
준비가 끝나자 관리는 사형수들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선교사들은 들것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들의 팔다리는 오랫동안 아주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군사들에게
부축 되어 관리 앞에 출두했다.
그리고 사형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옷을 벗기고 ‘사교 죄인 아무개’라는
글이 쓰여 있는 속적삼도 벗기고는 귀를 접어 화살로 꿰뚫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생석회를 뿌렸다. 이리하여 사형수들은 눈을 뜨지 못하게 되었고
생석회는 귀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엉겼다.
그런 다음 뒤로 함께 묶은 팔과 몸통 사이 겨드랑이로 장목을 끼우고 그 양쪽
끝을 군사 두 명이 어깨에 맸다. 그리고 팔방 돌이라고 하는 행진이 시작되어
군사들 앞으로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장을 돌았다.
주교가 맨 앞에 가고 신부 세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 비통한 행렬은 사형장을
여덟 바뀌 돌고 마침내 사형장 한가운데에 이르게 되었다. 흰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깃대 가까이로 와서 사형수들은 땅바닥에 내려지자 집행관은
사형 선고문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너희 모두 듣거라.
너희가 전파하는 종교는 한국에서 엄금하는 바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너희 사교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한국 국왕께서는 너희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신다.
너희는 그것을 알아라.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주교와 신부들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생석회에 눈이 타서 그들은 서로
볼 수도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교우들은 백발 때문에 알아볼 수 있는
주교를 빼고는 그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최후의 제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관리가 신호를 하자
각기 칼을 든 희광이 여섯 명이
“자아! 저 놈들을 죽이자, 쳐죽이자!”
라고 외치면서 신앙 증거자들에게로 달려들었다.
군사 한 명이 주교의 머리채를 튼튼한 바에 매고 그 한 끝은 깃대에 붙들어
매고 또 한 끝은 다른 군사의 다리에 감아 희생자의 목은 꼿꼿하고 머리는
앞으로 숙여지게 하자 한 희광이가 주교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칼을 두 번 맞고서야 떨어졌다.
군사들이 머리를 집행관에게 갖다 보인 다음 처형된 시체 주위에 말뚝
네 개를 땅에 박고 그 위를 다발로 묶어 그곳에 머리를 매달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쉰 세 살이었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주교는 형 집행을 당하는 순간에 브르트니에르 신부
에게 말을 건네면서 미소를 지었고 죽었을 때에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1866년 3월 7일,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행렬에서 나이보다는 오히려
수고와 고통으로 인해서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주교 뒤에는 키가 크고 곱슬
곱슬한 엷은 밤색 머리카락에 얼굴이 부드럽고 명랑해 보이는 젊은 신부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겨우 물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유스토 브르트니
에르(Bretenieres,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白 유스토)신부였다.
그는 진직 디종 재판소 법관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의 맏아들이었는데
어머니의 조상들은 사법계와 군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1838년
2월 28일에 디종 교구 소속인 샬롱쉬르손느(Chalon-sur-Saone)에서 태어났
는데, 브르트니에르에 있는 집안 성관(城館)은 디종에서 수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1840년 4월 27일 둘째 아들 크레티앙(Cretien)이 태어나서 브르트니에르 남작
집안을 기쁘게 했는데 남작은 아내와 함께 자식들의 교육에 헌신하기 위해
사업 관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브르트니에르 부부는 신앙심으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종교 기관에 대한
자선으로 이름난 훌륭한 교우였다. 아버지는 ‘성당 짓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당연히 들을 만했는데 여러 성당 짓는 일과 수도원들을 세우는 일과 본당
후원회와 학교 세우는 일에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수줍고 약간 쌀쌀한 성격으로 ‘가정집의 가르멜 수녀’와 같은 사람
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적인 부모로서 그들의 책임에 철저해서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 맡았다. 그리스도교적이지 않거나 또는 상서롭지 못한 영향으로
그들의 교육이 위태롭게 될까 염려해서 교육을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를 거절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아주 어린 동안은 자기들이 직접 그들의 교육관 도야를
맡았고 그 후에야 가정 교사들의 힘을 빌었으며 성직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도와 중등 교육을 시키게 했다.
그와 더불어 8년 동안 일했던 고트를레 신부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 브르트
니에르 남작은 그의 계획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택하게 될지 아직 모릅니다.
나는 아이들이 타고난 적성에 따라가는 것을 보는 것 외에
다른 계획은 없고 아이들이 장래에 세워 가질 목적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공부를 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이들이 훌륭한 그리스도 교인으로
자라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에 대한
내 유일한 야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나를 떠난 적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 교육 방식이 여러 가지로 불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 내가 직접 혹은 내가
살펴보는 가운데 교육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조차 불행히도 그들의 자녀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브르트니에르 부부는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으로 아이들의 지능을 개발하기를
원했으므로 몸을 단련시켜 육체적인 인내력에 습관을 들이고 또 성격을 도야
해서 완전한 인간과 견실하고 진실한 그리스도교인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활 제도가 소년들에게는 엄격한 것이었다. 주일을 빼고는
매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야 했고 빽빽한 학과 일정과 힘든 체육 훈련 등
으로 짜여 있었다. 체육 훈련은 특히 방학 동안에 어려웠다.그 때는 온 가족이
독일이나 스위스, 사브와 지방이나 피에몽 지방으로 떠났던 것이었다.
이런 여행은 말과 지질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방법은 그리스도교적 교육과 일반 교양, 학습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즉 1858년 두 형제가 모두 리옹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 합격증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도 위험이 없지는 않았다. 소년들이 미지의 세상과 처음 접촉
했을 때 그들이 유감스러운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염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하느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돕는 데
헌신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맏아들 브르트니에르의 경우에는 위험이 거의
없었다. 1864년 4월 12일이었다. 그가 사제직에 부름받은 것을 외할아버지
에게 알리면서 이렇게 썼다.
5월 21일에 저는 사제품을 받는 특별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제직은 제가 오래 전부터 열망한 것으로 26년 전부터 갈망
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과연 그는 아주 일찍부터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사제직과 먼 전교 지방으로 부르시는 소리였다.
그의 동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독일 여자인 가정 교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정원에서 형제가 함께 놀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우리는 나무깽이로 힘들여 땅에 구멍을 하나 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은 내가 구명 파는 것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구멍을 들여다보고 일어나면서 아주 기쁘게 외쳤
습니다.
“중국인들이 보인다. 중국인들이 보여.
자, 더 깊이 파자. 그러면 그들 있는 데까지 갈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나도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에 중국인들이 없다고 항의했더니 형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보인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들이 있는 데
까지 갈 수 있게 더 파야 한단 말이야…”
그러고는 그 중국인들의 말소리까지 들린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형의 자신 있는 이 태도가 놀랍고도 의외여서 감히
대꾸를 못했ㅅ브니다. 나는 이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형과 그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브르트니에르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떠나기 얼마 전 외방
전교회 신학교의 봉 신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들이 이시르물리노의
성 니콜라오 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한 소년을 보러 갔을 때였다.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그 소년에게 늘 선교사가 될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소년이 “예, 신부님.”하고 대답하자 봉 신부는 그렇게도 성소가 일찍 온 것에
놀랐다.
“오, 내 성소는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다네. 세 살 때
벌써 중국 어린이들을 개종시키러 갈 생각을 했다네.”
유스티노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이렇게 ㅁ라하면서 그 때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브르트니에르는 여섯 살 때 벌써 선교사 성소를 예측했고, 또 그것에 대한
요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아주머니 집에서 하녀로 있던 한 처녀가 형제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주인에게 일러바쳤는데 그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형은 맏아들이니까 브르트니에르 성관이
언젠가는 형의 것이 될거야. 형은 남작이 될거야.”
“아니야, 난 성관을 안 가질 거야. 그건 네가 가지게 될거야.
난 신부가 될 테니까 성관을 갖지 못할 거고 또 필요도 없을 거야.”
브르트니에르가 브르트니에르 본당을 임시로 맡고 있던 위로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도 같은 시기였다.
“저는 순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니까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신부는 브르트니에르의 이런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브르트니에르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움직이고 지배한 것은 사제직과 선교사
로서의 사도직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주보 성인(주보성인)
안나 축일에 즈음해서 지은 여러 편의 작문으로 그 비밀을 어머니에게
넌지시 털어놓았다.
한 번은 요아킴의 아내가 하늘이 주신 아이 마리아를 어떻게 길렀는지를 전설
형식으로 전개시켰다. 안나는 마리아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사무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무엘이 아주 어렸을 때였단다. 그의 어머니 한나가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대사제 엘리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이 아이는 제가 기도를 드려서, 주께서 당신 여종의
기도를 들어 제게 주신 아이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제게 주신 이 아이를 주께 도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 거룩한 어머니는 아이를 엘리에게 맡겼고,
그래서 사무엘은 성전에 남아서 대사제의 시중을 들었단다.
또 한 번은 아이를 흔들어 주면서 그 아이의 장래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
하다가 이렇게 그의 생각을 끝마치는 한 어머니를 묘사했다.
아가, 너는 관리도 군인도 안 될 거다.
다른 직업을 가지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너는 성당 그늘에서 늙기를 더 원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넓은 바다를 건너 먼 나라에 가서 진리를 전하고
네 엄마가 숭배하는 천주를 알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엄마는 얼마나 기쁘겠니!
아가, 자거라. 내 어린 선교사야, 자거라.
네 엄마가 곁에서 지켜 보며 기도한단다.
그러나 해마다 산에서 보내는 방학 때에 소년 브르트니에르는 활기차게 놀고
지질학에 열중했다. 이것을 보고 브르트니에르 남작은 가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저 아이가 이제는 신부가 될 생각을 버렸나보오.”
한편 브르트니에르는 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는 내 장래에 대한 걱정은 마세요.
내 뜻이 어떤 것인지 어머니는 알고 계시잖아요?”
신학교에 들어간 후 브르트니에르가 방학 때 등산하는 길에 옷을 벗어 몸을
가볍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대로 수단(사제들이 입는 검은 색의 옷)을
벗을 수 없는 신부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다. 내가 택하고자 하는 신분에 딸린
이 조그만 불편에 습관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지질학에 대한 그의 관심에 대해서는 그가 떠나 동생이 혼자 남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 그에게 진지한 휴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
고 싶어서 그랬다는 이유를 들었다.
1874년 4월에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음으로써 중등 교육 과정이 끝나자 브르
트니에르는 부모에게 플란비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 수련원에 들아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브르트니에르 남작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둘째 아들이 갑자기 외롭게 되는 것이 염려스러워 “크레티앙에게
세상의 유혹에 대항할 힘을 기를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그 계획을 2년 동안 미루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브르트니에르는 동의했고 아버지에 대한 공경과 복종과 그의 생활
에서 떨어질 수 없는 단짝 크레티앙에 대한 애정으로 여러 가지 일과
공부에 전심했다.
그 무렵 크레티앙은 형이 가장 즐겨 읽는 것은 전교 지방의 역사, 중국과
일본과 베트남의 박해, 그리고 여러 전기 중에서도 특히 1838년 위에에서
학살당한 갸쥴랭 신부의 전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2년 동안의 시험 기간이 지나자 브르트니에르는 드디어 자신이 생각한 생활
방향으로 출발할 것을 결심햇다. 도미니코 수도회가 그의 마음을 끈 것은
수도 생활과 선교 생활의 결합에서 완전을 발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선택에 너무 인간적인 어떤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해서 여러 신부에게 의견을 물었고, 그들은 마침내 파리의 생술피스
(St. Sulpice) 신학교 교장을 만나라고 권했다. 그래서 브르트니에르는
이 신학교에 들어가 철저하게 그의 성소를 관찰하기로 합의했다.
1859년 11월, 생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간 유스티노는 참다운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주여, 당신이 내 사슬을 끊어 주셨으니
감사의 제사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이 사슬이란 그를 매우 사랑하고 그도 참으로 사랑하는, 그러나 하느님과 영혼
들에게 자기를 완전히 바치겠다는 그의 이상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가정’
이라는 사슬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붙 초탈과 가난의 길로 뛰어들기로 결심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자질과 덕행의 결합으로 공감과 애정이 그에게 집중
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애덕과 놀라운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1860년 6월에 삭발례를 받고 그는 성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딘 것을 매우 기뻐
했다. 하느님께서 공식적으로 그의 몸이 되시고 그의 차지가 되셨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어떤 교구에서 복무한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전교 지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엇으니 그는 이 수도
회로 끌리는 것은 온전히 인간적인 성향(성향)이었으며 그는 “그에게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이는” 길을 따르고, 또 전교 지방을 위해 일생을 확실하게
바칠 수 있는 길을 따르고자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1861년 2월2일에 그가 한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외방 전교회 신학교 쪽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이 말은 절대로 하지 말게.”
그는 5월 9일에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을 찾아갔고, 15일에는 그 중대한
결정을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는 깜짝 놀랐으나 믿음으로 동의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미 아들이 결심히 굳혔다고 생각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천주께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안심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브르트니에르는 1861년 9월에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들어갔다. 그곳의
분위기는 생술피스 신학교와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활기차고
매우 명랑한 청년들이라는 외형 속에서 그를 겁나게 할 정도로 당황하게
하고 자격이 없다는 감정으로 몰아넣는 정예들을 발견했다.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열심으로 철저한 초탈과 가난과 형제적인 애덕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성화에 전념했다.
“그는 너무도 위대한 마음을 가졌기에 천주께서 그가 순교하는 것은
허락치 않으신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성인품에 오를 은혜는 주실 것입니다.”
어느날,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1864년 5월 21일에 그는 모든 목격자들을 감동시킬 준비를 갖추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첫미사에서부터 감히 순교의 은총을 청했다.
“이 은혜를 간청하는 것은 천주의 뜻입니다.
우리가 매일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언젠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함께 있게
해주십사고 청할 때 천주께 드리는 기도가 그것 아닙니까?”
그는 그들의 수고와 고통을 같이함으로써만 그들의 영광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6월 13일, 그는 자기가 어떤 전교 지방에 배속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의 덕행을 알고 있던 교장은 그것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오늘이 목적지를 알려 주는 날입니다. 어떤 전교 지방을 원합니까?”
유스토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더 좋아하는 데는 없고 모든 것을 똑같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알브랑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티벳으로 가시오, 좋소?”
“아주 만족합니다.”
“아니아ㅗ, 티벳이 아니고 통킹으로 가게 될 것이오.”
“그것도 역시 좋습니다.”
“그럼, 코친차이나로 가시오.”
“아주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신부님.”
“자, 이제는 진지하게 말하겠소.”
브르트니에르는 서 있는 교장 신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교장 신부가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은 한국으로 가시오.”
브르트니에르는 조용히 대답했다.
“신부님께서 저더로 고르라고 하셨어도
저는 다른 데를 고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발하는 다른 세 젊은이 볼리외, 위앵, 도리 신부도 같은 곳을 배정받았다.
도리 신부는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같이 떠난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며
그것을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동료들이
“아니, 대관절 어디로 가는데 그러나?”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몰라. 내가 아는 건 브르트니에르와 함께 간다는 걸세.
내게 필요한 건 이것뿐이네.”
파리 출발은 7월 15일로 정해졌다. 서둘러 출발 춘비를 하는데도 브르트니에르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을 뿌리칠 힘과 항구한 평온을 기도에서 얻었다.
마지막 식사를 간단하게 마치고 신학교의 문을 나서려는 순간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호주머니에 아직 동전 다섯 닢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도리 신부에게 주면서 말했다.
“참 좋네! 내가 가난하게 되기를 원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이제 정말 가난하게 됐네.”
홍콩에서 한국을 향해 가기로 되어 있는 네 명의 선교사들은 나머지 여정에
대해 상세한 지시를 받았다.즉 상해에서 여섯 달을 지내는 대신 만주의 베롤
주교에게로 가라는 것이었고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리한 시기가 올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잠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주에서 선교사들을 싣고 오는 배와
그들을 반도로 인도하기 위해 한국에서 보낸 배가 한국 서쪽에 있는 메린도
(지금의 백령도 근처의 섬으로 보이나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섬은 없다.)에서
만나는 것임을 베르뇌 주교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1864년 10월 28일 만주 해안의 요하 어귀에 도착해서 한국으로
들어갈 네 명을 메린도까지 데려가고, 또 필요하다면 마지막 기한인 5월 20일
까지 그곳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한편, 베르뇌 주교는 한국 교우들의 배 한 척을 보내기로 했는데 그 배는 5월
10일과 20일 사이에 메린도 앞바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첫번 한국 배는 도중에 발각되어 압수되었고, 두 번째 배는
정해진 기한의 마지막 날 밤 자정에야 겨우 도착했다.
풍랑과 한국 군사들의 경계와 줄어드는 식량 때문에 시련을 겪은 젊은 선교사
들은 약속 장소에 제때에 닿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극도의 불안과 기약 없이
만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근심으로 한층 더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5월 20일 토요일 자정과 한시 사이에 배 한 척이 베르뇌 주교의 이름을
대는 선원들을 태우고 그들의 배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서둘러서 한국에서 온 뱅 옮겨 타고 짐을 옮겨 싣고는 메린도를 빠져
나갔다.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타서 위험을 벗어났다. 그러나
한국 배는 형편없는 배로 돛이며 밧줄이며 갑판까지도 짚으로 짜서 만든 것
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배에서 큰 곤궁을 맛보았다.
그들은 깊이 2미터 너비 1미터의 은신처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들은 다리를
쭉 뻗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일 주일 내내 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거적을 덮고 지내야 했는데, 이 거적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는 해주었으나 비를 막아 주지는 못했다. 식량이 줄어들었고 오래지
않아 틈으로 스며드는 바닷물로 배가 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항해는 오래 계속되었다. 중국인들과 연락을 했다는 혐의를 받은 배
두 척이 당한 엄혹한 운명에 겁을 집어먹은 선원들은 그들의 ‘밀수품’을
싣고 서울로 가기를 거절하고 그보다 300리 더 남쪽에 있는 그들의 고향인
내포에 배를 댔다.
1865년 5월 27일 오후 여섯 시에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동료들은 한국 땅을
밟았다.교우들은 친절과 놀람과 공포가 섞인 감정으로 그들을 맞아 들였다.
그러나 교우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자 온 신부들을 보고 기쁨
또한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의 한국 입국에 가담한 자들이 당하는 사형이 두려웠다.
선교사들을 데리고 온 배 주인조차도 감히 그들을 돌보려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는 계약을 이행했고 따라서 책임을 벗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베르뇌 주교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서울로 갈
방법을 찾았다. 다행히도 섭리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집이 불에 타 버린 다블뤼 주교는 피난처를 찾아 내포 지방에 와 있었는데,
그곳은 선교사들이 상륙한 마을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다블뤼 주교는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있는 곳을 달려왔다. 그리고
그와 선교사들은 이튿날까지 머무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안전하지
못한 그곳에서 빠져 나왔다.
5월 28일, 다블뤼 주교는 한 교우를 시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서울로 인도
하게 하고 자신은 그가 거처하던 교우촌 거더리(지금의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지역)로 다른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다.
베르뇌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기쁘게 맞이하고 그를 계속 서울에
머물게 했다. 주교는 남대문 밖 자암에 있는 회장 정의배의 집에 그의 거처를
정해 주었다. 브르트닝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오랫동안 살았던 9평방 미터
쯤 되는 좁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이 그의 사무실이었고 침실 겸 경당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1866년 2월까지 살면서 시간을 쪼개 말도 배우고 기도도 드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례와 견진을 주느 일과 밤에 주교를 만나는 일로 중단이
되었던 참된 피정 생활을 했던 것이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선교사의 생활을 자각했다.
그 무렵, 생술피스 신학교의 영적 지도 신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런 생활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아무리 되풀이해 주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즉 그들이 찾아가는 순교가 피의 순교인 때는 드물겠
지만 언제나 좋건 싫건, 즉 공로가 있건 없건 자기의
모든 경향과 자기의 취미와 뜻을 버리는 순교일 것이며
대단히 심한 육ㅊ적 고행 외에 그보다 더 한 정신과
마음의 고행이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후, 거의 완전한 은둔
상태에서 풍토 순화(순화)와 적응과 말공부를 하던 힘든 시기에 쓴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훌륭한 사도 베르뇌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실제적인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는 80여 명의 고백을 들었고 어른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견진 성사를 몇 번 주었고 병자 성사를 여러 번 주었다.
1866년 2월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가 혼배 성사를 집전하고 견진 성사를 줄 때인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소식을 다블뤼 주교와 거처를
아는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2월 24일 하루는 조용히 지나갔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미사 성제를 드렸다.
그것이 마지막 미사가 되었다. 25일에 그가 살던 집주인 정의배가 붙잡혔고,
그는 그 날 종일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26일에는 그가 체포되었다.
그 때 그가 포졸들에게 말했다.
그는 결박은 당하지 않고 그저 옷소매만 붙들려 포청으로 끌려갔다.
신문을 당하자 그는 이렇게 똑똑히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한국에 왔소.
나는 천주를 위해 기꺼이 죽겠소.”
그리고 한국어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 포도청에서 하루 낮 하루 밤을 지낸 후 금부로 이송되었다. 그의 목에는
칼이 씌워지고 발에는 사슬이 채워졌다. 포도청에서 그는 심문은 당하지
않고 고문만 당했는데 형벌을 할마디 말도 없이 견뎠다.
그는 주교와 운명을 같이해서 3월 6일 주교와 둥시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은 절차에 따라 형장으로 끌려갔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형장에 도착했을 때 목이 몹시 말랐다. 그래서 군사들
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으나 그들은 듣지 못했거나 혹은 못 들은 체했다.
그것을 목격한 증인 박 베드로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물 한 바가지를
떠가지고 와서 형벌을 받는 사람에게 마시게 하라고 관리에게 청했다.
집행관은 한 군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 군사는 분개해서
물을 땅에 쏟아 버렸다.
“금방 죽을 죄인들에게 마실 물은 줘서 뭘합니까?”
그러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머리 위에 늘어져 있는 바 끝을 움켜
잡고 씹었다.그로 인해 생긴 약간의 침을 한숨을 쉬며 삼켰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구경꾼이 외쳤다.
“너희 나라에서는 멀쩡하던 네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죽으니 후회가 되지 않느냐?”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신부가 대답했다. 그리고 “좋다”는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팔방 돌이를 하는 동안 신부의 허리띠가 끊어져 바지가 흘러내렸다.
집행관은 한 군사에게 명해 바지를 추켜서 매죄게했다.
신부는 그 때 주교의 눈길을 맞추고 미소 지으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그는 주교가 참수당하는 것을 본다음 희광이의 칼에 목을
내밀었다.
그는 너댓 번 만에야 머리가 떨어졌다.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1866년 3월 7일의 순교자들 가운데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 옆에 겨우
스물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주 젊은 선교사가 있었다.그는 보로도 교구
출신인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Bernard Louis 서 루도비코)신부로
1840년 10월 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한 지 열다섯 달만인 그해
5월 18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그 때 그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이었지만 꿋꿋하고 온순하고 착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기를 난 그 날로 바로 세례를 받게 하고 다섯 살
때까지 동정 성모의 빛깔(흰 빛깔과 파란 빛깔)의 옷을 입히기로 약속했다.
어머니는 큰 용기를 가지고 남편이 하던 곡물과 사료 장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장사 일로 자주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어머니
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 없었기에 1843년에 장사를 그만두고 시의 수위인
뒤푸르씨와 재혼했다. 뒤푸르 씨의 부인은 딸 알리스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꼬마 볼리외’라고 불리던 그는 이렇게 다시 이루어진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이 되자 이웃에 있는 면립학교에 들어갔는데 그의 종교 교육
에는 해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선생이 수업 전후에 기도문을 외게 하고
아이들을 주일미사와 예절에 데리고 갔다. 그의 일반적인 독본 중 저학년용
은 플뢰리의 ‘역사 요리 문답’이었고, 고학년용은 ‘레몽의 성경’이었다.
볼리외는 일곱 살 때 복사가 되어 복원되고 증축된 아름다운 성당에서 무리
없이 성장했다. 그는 본당 출신 신학생들과 신부들의 유쾌한 만남의 자리인
사제관 정원도 좋아했다. 랑공은1800년부터 1840년까지 신부 스물한 명을
배출했다.
이 어린 복사가 사제직을 꿈꾸고 있었던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소신학교의 어느 교사가 예의 바르고 기도를 잘 드리는 영리한 이 소년에게
성소의 조짐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849년 10월 새학기에 소년
볼리외를 보르도의 소신학교로 보낼 허락을 부모에게서 얻어냈다.
볼리외는 초급 5학년에 입학했다. 그는 기꺼이 소신학교의 규율을 지켰다.
그는 공부도 할 줄 알고 놀 줄도 알았다. 루도비코는 불안한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어떤 때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용감한 열망을 보였고, 또 때로는
‘세기병(世紀病)’인 내성(內省)을 앓기도 했으며 의부의 딸 알리스와 결혼
하겠다는 마음의 투쟁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볼리외는 중등 과정 최고 학급 때 급전환해서 성직에 들어가
모든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 해 중국 사천성(四川省;양자강 상류의 사천 분지와 티벳 고원 동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선교사 한 사람이 보르도에 들렸는데 이 선교사가
중국에서의 선교와 그곳에서 겪은 시련과 기쁨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강연이 끝난 후, 볼리외는 동창생 한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학생들 중에 이 성소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여럿 있니?”
“그럼! 넌 어떠냐?”
친구가 되물었다.
“나도 그런 축에 껴.”
“그럼 너의 어머니는?”
그 때 볼리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내 어머니는 말이야….
난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은
그 말을 어머니한테 할 용기가 없을 것 같다.”
볼리외가 침통하게 말했다.
1857년, 볼리외는 보르도의 대신학교에 들어가 지혜로운 영적 지도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사제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1858년에 그는 절친한 친구 아멜리앵 비락을 잃은 것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에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1년 후에 볼리외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그 친구가 임종할 때 저는 기도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 가는 날
제게 선교사로 죽는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천주께 청해서 그의 진정한 우정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너무도 사랑하는 이 아들을 고향에 묶어 놓았던 끈을 그 이듬
해에 끊어 주셨다. 남편의 불운과 그의 죽음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던 뒤푸르
부인이 11월 7일에 병사한 것이다.
이제 볼리외는 외방 전교회에 들어간다는 그의 유일한 소원을 마음대로 실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그의
영적 지도 신부가 그의 선교사 성소를 시험해 보고자 해서였다.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보르도의 추기경이 그가 교구
에서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볼리외는
1859년에 청원을 했다. 그러자 추기경은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대가 중국인들, 미개한 그들을
회개시키고 싶다고 했는가?
우리 베노주와 랑드에도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네.”
추기경의 이런 재담도 볼리외를 가로막지 못했다. 그른 이듬해에 세 번이나
다시 청원을 했던 것이다. 추기경은 격렬한 편지로 답했다.
그는 자기 교구의 필요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볼리외는 낙망하지 않고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만일 천주께서 내가 파리로 가는 것을 원하신다면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교장은 그에게 ‘선교사 지망자’의 자격을 주었다. 이 신학생은 매우 감사하며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나는 데 주요한 장애가 되는 것이
나의 무자격임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주 앞에서 나의 수련장이라고 생각하는
신학교 생활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이 장애를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가 “신학교 생활을 거룩하게 한다.”라는 것은 양심적으로 공부하고 전례
적인 경건심과 성체 공경심을 발전시키며 선교사 문제에 더욱 관심을 쏟는
것 등이었다.
1861년 2월에 있는 네롱 신부와 베나르 신부의 순교 소식으로 외방 전교회
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원은 더욱 간절해져서 그는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그와 같은 죽음을 당할 자격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그저 미신자 몇 사람의
구원을 위해 천천히 고생스럽게 다 타 버리기를
청할 뿐입니다.
나이가 어려 신품을 받을 수 없었던 볼리외는 고회법에서 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소신학교의 1862~1863학년도 교사로 임명되었다. 3월에 패충혈로
쓰러진 그는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다만 신부가 되기 전에 죽는다는 것 한가지 뿐입니다.”
그는 선교사로서의 계획은 오랫동안 위태롭게 된 것같이 보였다.
도네 추기경은 볼리외의 건강상 이유를 들어 더 기다리게 할 수 잇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1863년 8월에 쓴 편지로 추기경은 즉시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래서 이 선교사 지망자는 그 날로 파리에
편지를 보냈다.
기운이 빨리 회복되는데 기쁨으로 인해서
기운이 배가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에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반대와 눈물로 인해 이내
슬픔이 섞이게 되었다. 이들은 4년 전부터 고아 신학생들을 맞아들여
친아들같이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8월 27일에 출발할 것을 알렸을 때
볼리외는 아저씨가 이렇게 호통 치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떠나고 싶어하니 떠나라.
네가 우리 아들이 아니니 붙잡을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네가 죽는 걸 보는 것이 더 낫겠다.”
이 냉혹한 말에 떠나는 사람의 가슴을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8월 27일, 미사 후에 그는 역으로 갔다. 그는 가장 오래 된
친구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친구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망설이자 볼리외가 재차 말했다.
“자, 어린애들같이 굴지 말게.
자네들은 강복을 주려고 신부가 된 것이 아닌가?”
그는 보르도에서 저녁 시간을 대신학교의 이전 선생들과 함께 보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희생이라는 것이 내 천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지요?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말로 그는 그의 약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863년
8월 말에 외방 전교회 신학교 문을 들어선 씩씩한 마음을 가진 신학생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발견한 ‘강한 신앙심과 끝없는 애덕과 비상한 명랑’을
감탄하며 빨리 적응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성인들의 분위기 속에서 삽니다.
우리 중에는 베트남의 박해를 모면한 살아 있는
유해들이 있습니다…. 또 신앙을 위해 죽은 사람들의
진짜 유해들도 있습니다….
매일 저녁 우리는 순교자실에 가 그들의 거룩한 유골
앞에서 하는 짤막한 묵상 중에 필요한 빛과 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숭고함이 전부 보인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택하려는 지금 이렇게 안심이 되고,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 태연하고 이렇게 기쁘기까지 할 수 있는가?’
하고 자문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다음 곰곰이 생각하고는 내가 어떻게 하는 아십니까?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 천주께서는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계시다.
네 길을 곧장 나가라. 그분께서 너에게 지금 요구하
시는 것은 이 것뿐이다. 그리고는 천주께 모든 것을
맡겨 드려라!’”
사제직에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리면서 그는 ‘자만심
없는” 신부가 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서품되었는데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한 만족”
을 느꼈다.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배정을 기다리던 중
6월 15일 한국에 배정되었다.
그는 그의 장래 선교 활동의 터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외교인 800만 명이 진리를 찾아 움직이고,
18,000명의 천주교인이 60년째 박해와 싸우고 있는 반도,
선교사 여덟 명이 그들의 머리에 현상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어른 900명에게 세례를 주는 전교 지방.
결코 돌아올 수 없고 일년에 한 번 어둠을 틈타서나
들어갈 수 있는 유배지(流配地).
볼리외 신부는 7월 15일 파리를 떠나 다음해 5월 27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가
위험의 마지막 단계를 넘기 전에 "저 불쌍한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사탄의
그 무서운 방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바다의 별이신 성모께 기도해 달라"
고 친구들에게 청했다.
"나는 곤궁을 겪을 것을 예상한다네. 그러나 한꺼번에 신부 네 명은 마귀
로서는 참기 어려울 걸세. 더구나 그놈은 지금 한국에서 약간 궁지에 몰려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네(1864년에는 어른 1,000명이 세례를 받았다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떠나네. 성령께서는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신다네."
베르네 주교는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위험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산골에
있는 교우촌으로 흩어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볼리외 신부와 도리 신부는
이웃한 교우촌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서로 찾아가 고백도 하고 열심을 북돋아 주기도했다.
그 때의 상복은 그들의 얼굴을 가려 주었고 외교인들과 포졸들에게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볼리외 신부는 주교와 동료들이 오직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 전교 지방에
있게 된 것을 체제가 잘 조직된 것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고 기뻐하면서 열심
으로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흥분한다면 모든 천주교인을 학살하기에
충분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운명을
마련해 두고 계시지? 그것은 그분만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특히 내가 우리 처지를 감당할 능력이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가 우리 목숨보다 천주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천주를 미친듯이 사랑하는 큰 성인,
성인품에 오를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1866년 2월경 볼리외 신부는 서울에서 몇 십 리 떨어진 경기도 광주 묘론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곳에 숨어 있으면서 성직 수행을 할 수 있을 만큼 한국
말을 익혔다.
그 무렵 본격적인 박해는 없었는데 베르뇌 주교를 볼리외 신부가 묵고 있던
지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첫 담당 구역을 정해 주었다. 떠날 준비
를 마친 볼리외 신부를 그의 새 관할지로 안내할 교우 세 명이 묘론리에 도착
할 때쯤에 베르뇌 주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우선 그 교우들을 돌려보낸 후에 더 자세한 소식을 알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박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교우들 중 몇 사람이 볼리외
신부에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볼리외 신부는 묘론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답리의 이여습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볼리외 신부는 2월 27일 그의 먼젓번
집주인이던 장제철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튿날 볼리외 신부는 용인 손곡리(손곡리 또 손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도리 신부와 함께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 후, 옥에 갇혀 동료들과 같이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 선교를 받았다.
그는 3월 7일에 브르트니에르 신부 다음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머리는 세 번째 칼에 떨어졌다.
그는 하느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그렇게 증명했던 것이다.
도리 신부님
동료들이 ‘꼬마’ 또는 ‘뱅데(Vendee)의 작은 꽃’이라고 부르던 헨리코 도리
(Dorie, Pierre Henri 金 헨리코) 신부는 뤼송(Lucon) 교구 생틸레르드탈몽
(Saint Hilaire de Talmont)의 르포르라는 마을에서 1839년 9월 23일,
즉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한국에서 순교한 이틀
후에 태어났다.
그는 베새(Bessay)백작의 소작인인 아주 수수한 농부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세례 대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부, 아기의 사촌 형, 대모, 아기의 손윗누이, 아버지 등
참석자 모두가 필요한 사항에 서명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비록 도리 비뇨노 집안은 지적으로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신앙심으로는
높이 평가를 받고 있었고 부모의 많은 자녀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육은
확고했다.
어린 복사 도리의 신앙심과 겸손은 온순하고 한결같은 성격을 관찰하고
있던 본당의 보좌 신부는 1852년에 그에게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제안했다.
보좌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도리는 이렇게 할 수 잇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송원은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뜻을 부모에게 알렸더니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배세 백작에게 동움을 청했더니 기숙사비를
내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백작의 자선심 덕택으로 도리코는 1852년 10월에 소신학교에 입학해서
8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고 졸업할
때에는 ‘성교회에 훌륭한 제목이 될 소년’으로 소개되었다. 중등부 1학년인
열다섯 살 때부터 극동에서 전교하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삼았고 잡지
‘유년’을 즐겨 읽었다. 그는 복권으로 이 잡지 전질을 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1860년에 뤼송의 대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도리는 뛰어
나지도 못했고 재주는 보통이었지만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들을
구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지탱된 근면 덕택으로 착실하게 공부를 했다.
그는 공부와는 반대로 순진하고 너그러운 성격과 고상한 생각과 열렬한
신앙심, 그리고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뤼송 교구의 요청에 의해 1861년 12월21일에 삭발례(사제나 수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소품을 받기 전에 머리를 깍는 예식)를 받고, 이듬해 6월14일에
소품(小品;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신품을 준비하는 중에 제일 먼저 받게되는
시종품, 구마품, 강경품, 수문품을 말한다.)을 받은 후 그는 그해 학년말로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다.
출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족과 교구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던 은인을 떠나야 했는데 이들의 반대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뼝 사무
치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도리가 그의 결심을 알린 사람들 중에 하나는
베새 백작이었다.
백작의 반발은 심했다. 그가 후원하는 학생의 병약한 체질이 그에게는 선교사
성소에 금기(禁忌)로 보였고 교구를 떠나는 것은 경망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은인은 신학생의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결심에 손을 들고야 말았다.
“자네가 그렇게 원하니 떠나게.
그리고 천주께서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그 다음 도리 신학생은 본당 신부와 과감하게 맞서야 했다. 역시 본당 신부도
똑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도리 신학생은 순수하고 열렬하게 반박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더 건강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선교 생활의 피로를
감당해 낼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이 작은 몸으로
천주의 마음에 드는 선교사가 되고,
또 누가 압니까? 순교자가 된다면 신부님은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해서 마음속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 본당 신부는 이 말에 완전히 끌려 들어가 자기가 직접 그를 교구 주교에게
추천하겠다고까지 했다. 주교는 떠나는 그를 친절히 맞이해서 격려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강복을 주었다.
이 강복은 마지막 이별로 생각해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가족에게 가는
그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몇 주일 동안의 방학이 그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그는 파리로 출발하기로 정한 하루 전날까지도 부모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신부는 되어라. 그렇지만 교구에 남아 있지
외방 전교회는 생각하지도 말아라.”
어머니가 애원했다.
“어머니, 외방 전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계획을 세운
것이 8년이나 됩니다. 천주께서 제 마음에 말씀
하셨으니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하고 같이 있으면서도 천주를
심길 수 있지않니? 제발 어미를 버리지 말아다오.”
“어머니께서 원하시니 어머니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전교 지방도 그만이고 신부가
되는 것도 그만입니다. 어서 바지와 작업복과 곡괭이
를 주세요. 동생 베드로 있는 데로 가서 같이 밭일을
할테니까요.”
도리의 이 말에 어머니의 반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눈물이 마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저녁 내내 고집을 부려 생틸레르로 아들을
데려다 주지도 않았고 짐도 옮겨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 뭣 좀 먹고 쉬어라. 몇 시간 후 생틸레르로 데려다 주마.”
새벽 두시에 아버지는 수레를 말에 메고 아들을 생틸레르 역으로 데리고
갔다. 때는 1861년 8월 11일이었다.
부모는 양보햇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도리는 부모를
자기 성소의 수준에 올려 놓으려고 애정을 가지고 노력했다. 그는 부모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신품 받을 사람의 기쁨을 알렸다. 그러나 부모는 여전히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고 아들을 다시 보는 기쁨을 은총 모양으로 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저는 세상없어도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그의 약한 마음이 두려워서였고 무엇보다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1864년 5월 21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그의 선교 활동 지역에
대한 장상들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6월 3일, 그는 어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얼마 후에 배를 타고 가라는 곳으로 가야 하네.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네.
티벳에서는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고,
한국인들은 수없이 입교 한다네.
그곳이 건 다른 곳이 건 상관이 없네.
내가 떠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생각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네. 이 평온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도록 기도해 주게.
6월 15일, 한국에 배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도리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만세!
내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전교 지방을
주신 것을 천주께 감사드립니다.
이 전교 지방이 그에게는 두 배로 아름다웠다.
그곳이 하느님께서 그를 보내는 땅, 그의 꿈과 기도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즉 복음을 위해 피 흘리기를 원하는 땅이었고, 또한 그의 친구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함께 있게 될 땅이었던 것이다.
7월 19일, 그는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위앵 신부와
함께 길고 위험한 항해를 해서 1865년 5월 27일 한국에 몰래 들어왔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착한 뜻만으로 만족하셨다.
도리 신부는 작은 교우촌인 용인 손곡리에 자리를 잡고 한국어를 배우고 있던
중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아직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그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통지는 받았으나 교우들에 체포되지
않았기에 참으로 박해가 시작되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교우들에게 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그를 돌보고 있던 교우 이군옥까지
피신시킨 후 2월 27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볼리외 신부와 함께 투박한 들것에 실려 압송되어 서울 옥에서 동료들을
만났다. 그 후, 동료들과 같이 고문을 당했다. ‘승정원 일기’에 보면 김(도리
신부의 한국식 성)은 고문을 당했는데 곤장을 아홉차례 맞았다고 한다.
그는 크나큰 용기를 보였다. 새남터의 형장에서 그는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고 한 증인이 말했다. 그리고 이 증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분이 순교에 대한 마음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네 명 중에서 도리 신부는
맨 마지막으로 참수되었다. 그의 머리는 두 번째 칼에 떨어졌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