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마실길:
1단계 코스: 새만금 방조제 변산해수욕장
2단계 코스: 송포포구 고사포해수욕장
3단계 코스: 성천포구 격포해수욕장
* 지리산 둘레길: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읍면 80여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 2011년까지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하여 길을 완성할 예정.
그외 모악산 마실길, 내장산 마실길, 덕유산 마실길 등을 만들 예정이라고.
매창(梅窓, 1573~1610) 부안의 명기. 여류시인. 계생(桂生)·계랑(桂娘)이라고도 함.
시인 신석정은 '송도3절'에 빗대어 매창과 유희경 그리고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3절’이라 칭함. 허균, 이귀, 유희경과 교유.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유희경(劉希慶, 1545~1636) 학자. 특히 상례의 일인자. 서얼. 40대 중반의 유희경과 18세 매창의 만남으로 매창의 시세계는 한 차원 높게 되었다고.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쓴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허균(許筠, 1569~1618) 오십 평생 여섯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나고 세 번의 유배생활을 함. 매창과 2번 만남. 1601년 7월 23일의 첫 만남(허균 32세, 매창 28세) 때에는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는데 섹스 관계는 갖지 않았다고 '조관기행'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매창은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정의가 막역하되 지나치지는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두 번째 만남은 1608년 8월 그가 공주목사에서 파직 당했을 적이다. 벼슬살이도 싫고 서울생활마저 싫어진 그는 친우의 주선으로 부안 우반동 선계폭포 골짜기에 있는 정사암(靜思庵)으로 들어와 그해 12월까지 머물렀다. 매창과 재회하는 것은 물론 서로 참선(參禪)을 익히기도 하였는데 스님들이 그들의 동거를 반기기도 하였다 했다. 허균은 정3품의 승문원 판교로 복직되어 상경한 후에도 매창에게 보내는 편지를 1609년에 두 번씩이나 썼다. 1610년에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에 애절하기 그지없는 추모시를 지었는데 매창공원에 그 시비가 세워져 있다.
매창뜸 / 이병기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衫裳(라삼상)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은 매창무덤
곰소
원래 범섬, 곰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던 섬 지방이었는데 줄포가 갯벌의 퇴적으로 항구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제방을 쌓고 바다를 매립하여 곰소 항구를 조성, 내륙의 물자 반출과 칠산 어장의 어업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곰소만의 수심 또한 낮아지고 어족의 고갈로 어항의 역할도 줄어들면서 항구의 기능은 격포 항에게 넘겨주었다. 서해 청정해역에서 잡아 올린 수산물과 간수를 제거한 곰소염전 특산 천일염의 결합, 여기에 내변산의 골바람과 외변산의 해풍 속에서 자연 숙성시키는 전통 재래식 염장법으로 40여 종의 젓갈을 만든다.
내소사(來蘇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 633년(백제 무왕 34) 백제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내소사 전나무 숲과 오색단풍 나무 어우러진 길’에 뽑힐 정도로 들어가는 길이 아름답다. 전나무 숲길 옆 등산로를 가면 직소폭포가 있다.
겨울 내소사로 / 최하림
하늬바람이 내소사 길 나무들을 날립니다
아직도 햇빛은 찬란하고 수은주가 내려가는지
12월의 시간들은 조금씩 조금씩 마르고
하늘 가운데로 소리들은 투명하게 솟아올라가
우리가 우리 그림자를 물속으로 들여다보듯이
지상에 어린 내소사 길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걷습니다 언 돌이 발부리에 채입니다
얼음의 여울이 미광처럼 흐르고, 여전히 내소사 길은 덜덜
떨면서 산 밑으로 뻗어나가고, 점점 날은 어두워가고
바람이 쇠북에 걸려 오래도록 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채석강(彩石江)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에 있는 해식절벽과 바위덩이.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주변의 백사장, 맑은 물과 어울려 풍치가 더할 나위 없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적벽강(赤壁江)
채석강의 끝인 죽막마을을 경계로 북쪽이 적벽강, 남쪽이 격포해수욕장을 포함한 채석강. 변산해변의 절경을 빚어내고 있는 적벽강은 붉은색을 띤 바위와 절벽으로 해안이 이루어져 있어 맑은 물에 붉은색이 영롱하며, 특히 석양 무렵 햇빛을 받아 바위가 진홍색으로 물들 때 장관을 이룬다. 후박나무 군락 앞 해안의 암반층에 형성된 석물상 가운데 어느 것은 여인의 유방 같고, 또 어느 것은 토끼 모양을 하고 있는 등 바위 하나하나가 만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소동파가 노닐던 적벽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소식의 <적벽부(赤壁賦)> 한 대목
객도 역시 물과 달을 아시오?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 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適
* 소식(蘇軾, 1036∼1101) 송나라 문인, 정치가,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 호는 東坡. 동파육. 서호
* 적벽대전(赤壁大戰)
중국 삼국 시대인 208년에 손권·유비의 삼만 연합군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적벽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 이로 인하여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을, 유비는 파촉(巴蜀) 지방을 얻어 중국 천하를 삼분하였다.
새만금 개발사업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를 연결하는 방조제 건설.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굴곡진 100㎞의 해안선이 비응도~고군산군도~변산반도 사이를 연결하는 33㎞의 직선 방조제로 바뀌게 되어 그 방조제 안쪽으로 새로이 4만 100㏊(땅 28,300 ha, 호수 11,800 ha)의 용지가 생김으로써 그만큼 국토가 확장. / 국토확장, 대규모 우량 농지 조성, 수자원확보, 수해상습지 해소, 육운개선 및 종합관광권 형성.
그러나 새만금 갯벌은 한반도 전체 갯벌의 10%를 차지. 갯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플랑크톤에서부터 각종 조개류, 게, 등의 저서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 사업으로 다양한 생물종이 살아가는 터전이 없어지며 결국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끊어지게 되고 어족 자원은 줄어들어 그 영향은 서해안 전체에 미친다. 도요새와 같은 새들이 멸종될 수도 있다고.
‘새만금'이란 명칭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고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예부터 김제·만경평야를‘금만평야'로 불렀는데, 여기서‘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단어이다.
새만금 사업만큼 시작부터 중요 고비마다 정치권이 직접 개입한 사업도 드물다. 최초 사업검토는 5공 말인 1987년을 전후해 이뤄졌다. 대선에 나선 노태우 후보는 전북지역 유세에서 지역 소외를 극복하는 공약으로 이 사업을 내세웠다. 집권 이후 예산 문제와 타당성 검토로 표류하던 이 사업은 91년 여야 영수회담에서 노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총재가 사업에 전격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노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건너뛰고 이를 정치적으로 무마해달라는 ‘당근’으로 김 총재에게 ‘선물’을 건냈고, 김 총재는 정치적 기반 가운데 한곳인 전북에 ‘선물’을 준 셈.
환경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97년을 전후해 갯벌의 가치와 관련한 활동을 본격화했다. 98년 시화호 오염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이며 국내 최대의 간척사업인 새만금사업에 대한 관심과 반대여론도 퍼져나갔다. 99년 정부 차원의 재검토가 시작돼 민·관 공동조사단이 활동에 들어가 ‘갯벌의 경제적 가치가 농지보다 훨씬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환경부는 수질에 대한 비관적 경고도 제출했다.
그러나 2001년 5월 정부는 공사 강행 결정을 내렸다. 이에 환경단체들은 시대착오적인 사업을 중지, 취소하라며 소송 제기했으나 법원은 환경 보호가 중요하지만 공익을 위한 개발도 양보할 수 없으며, 마무리 구간에 들어간 공사를 포기할 수 없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 방조제([防潮堤): 높이 밀려드는 조수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바닷가에 쌓은 둑.
* 간척지(干拓地): 바다나 호수 따위를 둘러막고 물을 빼내어 만든 땅.
* 간석지(干潟地):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개펄.
* 개펄: 갯가의 개흙이 깔린 벌판. 간조와 만조의 차가 큰 곳에 발달.
* 갯벌: 바닷물이 드나드는 모래사장 또는 그 주변의 넓은 땅. 개펄보다 더 넓은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