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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째 날(9월 7일)
(32)
화암 주상절리
버스기사가 잘못 안내했나 내가 울산 지리에 무지한 탓인가.
태화강변 어느 지점에서 환승하라며 내리게 했는데 이후 많이 헤맸다.
어딜 걸으나 어차피 걷는 일이므로 불평거리도 되지 않는 밤길을 마냥 걸어 울산MBC
인근의 찜질방(훼미리스파/중구 복산동)을 찾아갔다.
덕분에 맛있고 저렴한 돼지국밥으로 포식했다.
정자항에 다시 선 시각은 9월 7일 8시 35분.
구득한 자료들과 불요해진 짐을 우체국택배로 보내느라 9시 넘어 출발했다.
일찍 출근했으면서도 9시를 기다려 접수하는 여직원.
원망스러웠던 스페인 폰페라다 대학교의 여직원과 한판이 된 우리나라의 시골 우체국
공무원을 시비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갈길 바쁜 나그네에게는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철 지난 해변은 석양도(어제), 아침도 지저분할 뿐 적막강산이다.
활기찬 어항과는 대조되는 정경이다.
곧, 정자동에서 산하동(山下)동으로 바뀐다.
산음(山陰)마을을 지나고 잘 자란 해송길을 걸으면 화암(花岩)마을 화암항이다.
이 어항도 어촌정주어항에서 탈락된 소규모어항이다.
어업이 부실한가 종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인가.
아마, 전자 보다 후자일 것이다.
아무리 어황이 부실해도 종사자들이 꾸준하다면 법정관리를 해제하지 않겠지만 사람이
없다면 관리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
고령 어부들의 사거(死去)에 따라 해제되는 법정항이 날로 늘어갈 것이다.
공업단지와 관계 없이 자연 도태될 어항들의 증가가 불 보듯 뻔하다.
화암항 끝 바위동산을 어렵게 돌아가면 오묘하고 신비스런 주상절리(울산시지정기념물
제42호)가 화암 해변(산하동)에 펼쳐진다.
주상절리(柱狀節理)란 마그마(magma가 냉각 응고함에 따라 부피가 수축하여 생기는
다각형 기둥 모양의 금을 말한다.
('마그마'는 땅 밑 심층에서 지열로 녹아 반액체로 된 물질)
화암 주상절리는 화암(꽃바위) 해변 일대에 분포하는 유적으로 신생대 제3기에(약 2천
만년 전)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이 냉각하면서 열수축작용으로 생성된 냉각절리란다.
"동해안 주상절리 중 용암주상절리로는 가장 오래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고 형성각도가
다양해 경관적 가치도 크다"(해설판)
마을 이름 화암(花岩)이 주상체 단면에 형성된 꽃무늬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울산광역시의, 북구의, 강동동의 마지막 동 신명동(新明)이 긴 신명해안으로 시작된다.
몽돌해변이 끝나고 신명천(심명교)을 건너 31번국도 축대지대, 신명항(어촌정주어항),
구멍이 뚫린 바위(孔岩)가 있다 하여 굼바우항(어촌정주어항/신명리의 마지막 어항) 끝
선돌바위 앞에는 선돌정이 있다.
쌍둥이 선돌바위와 소나무의 생명력이 놀랍지만 새 집 정자는 매혹적이다.
간밤에 여기까지 왔더라면 울산 다운타운 까지 가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선풍기는 물론 콘센트 시설까지 갖추어 하루 묵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정자다.
찜질방은 종일 혹사당하여 경직된 몸을 풀어주는 고마운 곳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이즈음에는 손가락으로 인해 그림의 떡에 불과한 찜질방이기 때문에 배터리
충전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곳을 애용할 이유가 없다.
서남동길에서 레드 플랙을 생각하다
바다에 밀착한 해안길은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북구와 경주 시계라 해서 지경(地境)인
마을(경북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까지 계속된다.
쪽빛 바다의 해안로인 것 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을 길인데 시각적인 즐거움 까지 많아서
신명나게 지경을 넘어 지경마을 정자 앞에 당도한 시각은 11시쯤.
13㎞에 (어물동~신명동) 달하는 동해남부해안의 청정해역과 주상절리, 몽돌 등 수려한
해안 자연경관,"국도31번을 따라 경주·포항과 지리적으로 연계돼 신라문화권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종합관광지"(울산 북구의 홍보물)를 뒤로 하고 경주시로 넘어선 것.
'지경쉼터'라는 명판을 단 정자의 세 노인이 내게 관심을 표하며 쉬었다 가라 하나 신발
벗는 일이 번거로워 포기하고 경주 땅의 정자라는 것만 확인한 후 떠났다.
코오롱 하계휴양소에서 잠시 31번국도를 따르면 관성해수욕장이다.
임란때 수군 병영이 있던 곳이라 하여 수영포리(水營浦里)였다가 바뀐 수렴리(水念里)
관성(觀星)마을의.
휴양소 안내판의 평범한 말 "남의 말을 좋게 합시다"에 찔끔해진 늙은이.
하도 많이 비판적이며 걷고 있기 때문일 텐데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할 수 없지 않으냐,
지록위마(指鹿爲馬) 할 일 있는가 자위하며 해수욕장 해변으로 다시 진입했다.
시계가 없던 옛날, 이 마을에 별을 관찰하여(觀星) 시간을 아는 첨성대류(類)가 있었다
해서 관성이 되었다는 마을의 해수욕장이다.
거목 송림이 울창하나 쓸쓸하기 그지없는 해수욕장.
황량한 해변과 달리 숲속 긴 평상에 걸쭉한 식탁을 차린 중년남들의 한목소리 초대.
점심식사를 막 시작하는 중일 때(12시50분) 등장한 해변의 늙은 길손을 외면할 수 없었
던가 그들은 나를 앉히고 술과 음식을 권했다.
해수욕장 구역내의 어떤 공사를 마치고 철수작업 중이라는 그들의 최후의 만찬에 내가
초대된 셈이다.
별뜻 없이 걷고 있는 늙은이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보려는 이들로 인해, 만덕선원의
법장 말대로 대단한 만행(萬行)을 하는 중인 것으로 비쳐져 부담스럽다.
심지어 '살아있는 부처'라는 승려의 극단적 표현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 자리에서도 점심값을 하고 가라는 듯 한마디 해달라는 주문이니.
고백하건대, 걷지 못하는 비통했던 시절을 가진 한 직립동물이 존재감을 확인하는 중일
뿐이지만 만행은 특정신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은 한다.
평범한 덕담을 남기고 일어섰다.
긴 몽돌해변의 중간에 수렴천이 흐른다.
조금만 돌면(관성교) 되는데 신발을 벋고 건너온 한 중년의 호의를 고맙게 수용했다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아마 물속의 모난 돌을 밟은 그가 중심을 잃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기기묘묘한 돌과 바위의 연속에 정말로 신선놀음에 다름 아닌 길이다.
수렴1리 복지회관, 노인정은 지금껏 보아온 회관 중 단연 으뜸이다.
월성원전효과?
소규모어항이 있을 뿐인 135세대에 311명 주민의 회관치고는 상상 초월의 건물이다.
수렴1리의 다른 이름은 영암(靈岩)인데 해변의 '할매바우'가 주인공이다.
바위에 매년 무사고 제를 올린다 하여 영암인데 3년마다 별신굿도 한단다.
아직도 이런 일이......
할매바우 이웃으로 '무장공비 격멸 전적비'도 있다.
1983년의 사건이다.
1982년 1월 5일부터 우리 땅에서 야간통행금지가 사라졌다.
접적지역, 해안선 등 일부 취약지역을 제외하고.(당시)
통금시간을 없애면 간첩을 비롯해 온갖 범죄가 발호할 것이라던 사람들 어디 갔나.
이 사건은 해안선에는 통금시간이 아직 살아 있던 해안에서 발생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인권과 관련된 각종 집회에서 빨간색을 즐겨 사용한다.
19c말(1880년대) 영국의 노동가요 '레드 플랙(Red Flag)'에서 비롯되었으나 북한에서
애호하는 색이라 하여 빨갱이로 몰았는데 이 매도가 작년(2012)부터 슬며시 사라졌다.
권력 정당이 적색을 즐겨 사용하면서.
'적기가'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일본에서 아카하타노 우다(赤旗の歌)로, 북한에서는 적기가로 번역 번안되어 사용하고
있으며 나도 6.25동란때 학교(용산중학교)에 불려가서(등교) 즐거이 불렀다.
음악시간에 배운 독일민요 '전나무여'(O, Tannenbaum/Ernst Anschütz곡)니까.
한데, 이 노래 때문에 웃지 못할 사연도 있었다.
피난시절, 집시처럼 지역을 이동하며 공부하던 때 한 사찰계 형사한테 걸렸다.
나는 탄넨바움을 불렀을 뿐인데 공산주의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노래에 무식한, 레드 콤플렉스 형사를 이해시키는데는 상당한 절차가 필요했다.
요새의 화두는 어이없게도 '종북'콤플렉스(complex)인 것 같다.
나는 이미 부분적으로는 종북이라고 밝혔지만 더 많이 종북이 될 수도 있다.
옛 통금 폐지 반대자들은 이 땅이 간첩들의 천국이 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바로 그들과 그들의 신실한 후예들이 지금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단어가 종북이다.
1957년에 죽은 미국의 매카시(Joseph McCarthy)가 한국에 환생한 느낌이다.
이 매카시즘(McCarthyism) 광풍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주상절리의 압권은 부채꼴 주상절리
하서해안공원으로 이어지는 해변길은 양남해수온천랜드24 앞에서 하서천에 막힌다.
31번국도로 나가 하서교를 건너지 않으려면 물 위를 걸어야 한다.
수렴천에서 젖은 신발이 아직 그대로 이기 때문에 돌아갈 필요가 없었으나 하서천 합류
지점에서 대형 투망을 던지는 나이든 어부의 묘기에 탐닉되어 한참을 꼼짝 못했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은 왕자를 구하러 일본으로 갔다.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배가 출범했다 하여 표리(票里)라 해오다가 진리(津里)로
개명하였다는 해변은 정자의 밀집지역이다.
박제상의 아내는 어느 항구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떠났던 곳이라면 이 일대가 아닐까.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내의 망부석이 엉뚱한 데에 서있는 것 같아서.
소규모어항 하서항을 지났다.
이후의 해안길은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해안의 주상절리들을 어어가도록 경주시가 해안에 조성한 길이다.
기울어진 주상절리,누워있는 주상절리,위로 솟은 주상절리, 부채꼴 주상절리, 바위틈에
뿌리밖고 살아가는 억센 생명력의 소나무들 모두 감동적인 자연이다.
부채꼴 주상절리야 말로 주상절리의 압권이다.
경주시가 길을 낼 때 사유지 소유주들로부터 협조받는 과정에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암울했던, 군화발이 모든 법 위에 군림했던 쿠데타군사정권이 아닌 준법의 시대니까.
민통선지역에서도 사유지라는 이유로 군인 차량의 출입을 금하는 시대니까.
서-남-동 해안을 돌아오는 동안 해당 지자체와 토지소유자 또는 주둔 군부대와의 협조
분위기 여부가 해안길에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도소리길 조성에 관계된 경주시의 어느 분, 해안선 주둔부대(?)의 한 장교 등과 가진
잠시의 대화에서 늙은 해안선 나그네의 소회에 그들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부분적으로는 아쉽기도 하지만 천혜의 자연과 맘껏 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모든 분에게
감사하며 걷고 있다.
경이로운 자연에 환호하는 분들도 같은 마음이겠지.
다만, 비교되는 곳이 있다.
"본 산책로는 ******문중에서 사용 동의하여 사용하고 있는 산책로로서
문중의 귀중한 선산이므로 깨끗하게 이용합시다"(경남 고성군)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출입 및 훼손을 금합니다"(경주시)
사유지 일부의 사용에 동의한 주인의 입장에서 어느 쪽이 호감 가겠는가.
더구나 후자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금지문이다.
출입을 못하는데 왜 훼손이 있겠는가.
고성군의 지혜라면 토지 주인이 철조망을 치고 관광객에게 양해 구하는 글판을 세우지
않아도 되게 할 것이다.
경주시에 고성군의 지혜가 부족함을 아쉬워하며 읍천(邑川)의 어항에 들어섰다.
마을 서쪽의 대나무밭으로 인해 죽전(竹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는 국가어항이다.
당초에는 해변에 바위가 너무 많아 항구역할이 힘드는 곳으로 평가되었다지만 지금은
어엿한 국가어항으로 자리잡았다.
육상교통이 편리하고,북동쪽 해상에 울릉도 근해 어장이 있어서 지리적 여건이 좋다나.
읍천은 코앞에 월성원전이 있어도 양남면 최대의 마을(660여세대, 2.200여명)이다.
세대수와 인구수가 면 전체의 4분의 1이 넘으며 원전으로 인해 커진 마을일 것이다.
원전 주변마을들의 주거환경이 우리나라 최고수준인 것은 방사능피해를 명분으로 하여
실리를 챙기기 때문 아닌가.
방사능 공포만 아니면 현대판 여의주 마을이다.
하긴, 그 공포가 바로 이들에게 여의주가 되고 있지만.
탈핵시대의 도래를 갈망하는 단체들을 맥빠지고 공허하게 하는 현실일 것이다.
디카에 담은 읍천항~나아해변의 사진들이 뭘 잘못 조작했는지 송두리째 달아나버렸다.
벽화들에 시종 불만을 토하며 찍어댔기 때문에 아예 보지 말라는 뜻일까.
월성원전측은 나아의 많은 삶터를 징발한 것이 미안했던가.
방사능 공포의 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나.
거리의 벽화작업을 시도했단다.
많은 벽을 채운, 애써 그린 그림들을 논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지나치게 쉽다는 느낌이다.
걸음을 붇들어 놓고 생각 좀 하게 하지 않고 그냥 일별로 끝나게 하는데 불만이었을 것.
무작정 난해하라는 뜻이 아니다.
황당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S F 만화가 차라리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걸었으니까.
여기뿐 아니라 동피랑을 거쳐왔으며 전국의 많은 벽그림을 보며 늘 같은 생각이었다.
지방 따라 차이는 있으나 스페인 사람들은 건물과 담벼락의 빈 공간을 뇌두지 않는다.
그들과 우리는 소위 문화가 다르며 그들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시선을 끌어가고 생각을 이어가게 하며 자꾸 아른거리는 힘을 나는 인정한다.
우리의 벽화에는 그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두 번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이 독서의 잠언으로 그림을 보면 무리 또는 억지일까.
나아리(羅兒)는 원전에 많이 뺏겼지만 생활환경은 보다 많이 좋아진 마을일 것이다.
예전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교해볼 수는 없지만 이국적이라고 느껴진다.
경주시는 원전의 경제효과를 잘 아는 지자체다.
그래서 부안(전북)을 큰 수렁에 빠지게 한 로또 방폐장(방사능폐기물처리장)을 기꺼이
받았으며 천년 고도(古都)의 후광보다 큰 실리를 택한 것이리라.
원전6기의 위험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나 큰 웃돈이 얹혀있는 시설이니까.
바로 이웃에 원전(영광)을 두고 방폐장으로 박터지게 싸운 우매자 덕에 절로 온 횡재.
양북온천 김민수가 기다리고 있었던가
원전에 막혀버린 나아리의 몽돌해변에서 원자력공원을 산책해 도로로 나갔다.
민초에게 봉길로 가는 최단길은 국도 외에는 없다.
나아에서 31번국도를 따라 봉길로 가는 도중에 봉길터널 구간을 한 승용차에 편승했다.
편승(hitch-hiking)에 관한한 나는 늘 운이 좋은 늙은이다.
마을 개척 당시,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것 같다 하여 '鳳吉' 이라 부르다가 이조
말기 부터 '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 양북면 봉길리(陽北奉吉)
봉길교차로(원전이 없다면 해안을 타고 왔을 위치)에서 해변으로 내려섰다.
철 지났고(9월), 석양이고(17 :20), 밀물 땐데 대왕암해변이라 해서 다르겠는가.
을씨년스런 횟집거리와 문무대왕릉(文武大王水中陵/사적제158호).
봉길해수욕장 긴 해변에 나 외의 외래인은 한 젊은 부부와 두 꼬마가 전부였다.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 신라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장사지내라 유언했다는 왕.
신라의 30대 문무왕은 외세(당)를 빌어 동족(고구려와 백제)을 친 왕이다.
그 업보로 당과의 7년(670 ~ 676) 전쟁을 치루면서 당의 힘을 빌어 굴복시킨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싸움에 앞세운 매우 부도덕한 왕으로 내게는 호의적일 수 없다.
그의 능 앞에 수차 서기는 했으나 모두 일행에 대한 봉사차원일 뿐 자의는 처음이다.
대종천(대종교)을 건너 이견대(利見臺/사적제159호) 해안으로 틀었다.
이견대는 문무왕의 수중릉(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그의 아들인 31대 신문왕
(神文王)이 세웠다(681년)는 건물이다
이 곳에서 신문왕이 용(문무왕?)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옥대와
만파식적'(피리)을 받았다고도 하나 왕은 재위 12년에 사망했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며 그 후 용이 나타난 곳이 이견대라나.
신라 동쪽 바다의 입(新羅東海口).
지리적으로 서라벌의 동쪽 관문이 이 지역이었음을 의미하는 표석이다.
장대한 돌을 세워 무게 잡고 있지만 너절한 해설 없어도 금방 감이 잡히는 위치다.
수중왕릉과 이견대, 감은사의 삼각구도 운운하나 거리 개념이 지금과 다른 예전에도 이
세 곳은 대종천을 따라 거의 일직선상이었으며 대종천이 없다 해도 그러하다.
억지 미주알고주알이 필요없다는 말이다.
여광에 해안과 도로(31번 국도)를 들락거리며 가곡항(지방어항)을 거쳐 나정항(지방어
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사람 구경할 수 있겠는가.
저녁의 작은 어항은 어디나 늘 쓸쓸하기 그지없다.
나정교를 건넌 후 전촌삼거리에서 마감하고 감포항으로 갔다(버스)
냉면을 먹는 식당의 TV가 알맞게 방송하는 일기예보에 비가오겠단다.
감포항에는 정자가 없다기도 하지만 비가 내리겠다는데 굳이 정자를 고집하겠는가.
정자 대신 찜질방을 물어 찬아간 곳은 양북면소재지.
경주행 버스기사에게 신신당부했건만 십여리나 지난 후에 생각난 듯 하차하라는 기사.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이다.
칠흑의 밤길, 무작정 반대방향으로 걸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시골에서 밤 9시는 깊은 밤이다.
차가 거의 없거니와 세워줄 차도 기대할 수 없다.
경주~감포 구간이라면 버스가 아직 있을 법 하지만 시간도, 정류장 위치도 모른다.
터벅거릴 수 밖에 없는 밤길이지만 저녁식사 후라 걸을만 했다.
버스기사 탓이 아니고 내 잘못으로 돌리니까.
미지의 초행 밤길인데도 자주 묻지 않고 태평하게 있었으니까 내 잘못이다.
뒤에서 오는 차가 버스 같아서 손을 들었다.
정류장이 아닌데도 세워준 기사는 내게 무책임했던 기사로부터 부탁을 받았나.
내 사연을 듣고 동정인가.
차비를 받지 않고 내리란다.
양북대왕온천(경주시 양북면 어일리/魚日)
면단위 복지회관으로는 대형인 건물에 들어선 찜질방이다.
비록 저가품 시설이라 해도 산간의 재래식 참숯찜방이 아닌 대중찜질방이 면소재지에
있기는 드문 일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최고의 탄산나트리움 온천이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내가 자랑할 대상이 따로 있음을 아직 모르고 들어갔다.
손가락 때문에 탕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늙은이로 하여금 풍진과 피로를 씻어내고 찜질
맛을 실컷 즐기게 한 사람, 김민수.
나이 지긋한 찜질방 관리인이다.
그는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고무줄로 묶고 씻게 한 후 찜질하고 달걀 간식을 하게 했다.
이에 더하여 추석 벌초하러 왔다는 어느 3형제 중 망내중년(차동준)의 능숙한 드레싱은
시골 의사나 보건소를 능가했다.
아마, 서남동길에서 최고로 안식하는 밤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그의 근황이 궁금하여 전화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지 그는 자기 전화가 무료전화라며 송수화자를 바꿨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