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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이가 1등으로 수기를 냈군요.
좀 수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일단 올립니다.
읽어보시고 의견이나 문제점이 있으면 과감하게 지적해 주세요..
현준이와 대원들 수기가 중복되는 문제에 대해 상의했었는데,
그 문제는 모든 수기를 받은후에 편집을 하거나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께요.
저도 수기 마무리 단계이니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수고하시고, 좋은 글 기대할께요^^
헐...글이 안올려 지네...준호야 어케 된거야,,,이게?
일단 붙이기로 올릴테니 읽어보시길....엄청 길군요...
젊은이라는 이름으로.. 2004 만리행 남경에서 북경까지
먼저 이런 귀중한 경험을 하게 도와주신 맹주억 교수님과 만리행 여러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2004 만리행 좋은 경험 과 좋았던 추억으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한참 여름에 접어들던 6.24일 이문동 에서의 맹 교수님과의 만남 뒤 우리는 급하게 학교로 돌아왔다. 내일이 출국 일이라 우리의 자전거를 미리 서울로 옮겨놔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버스 아저씨의 따가운 눈총까지 받아가면서 힘겹게 그 크고 무거운 자전거를 실고 서울 행 막차에 타는데 겨우 성공했다.
작년에도 만리행 여행을 해봤던 태준이 말대로 정말 힘든 날이었다. 어떻게 서울에서 밤을 꼬박 셀 생각을 했는지.. 지루하게 밤을 지세고 아침 일찍부터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길을 나섰다.
모두들 피곤했던지 잠이 들고 말았지만 외국여행이 처음인 나로선 긴장이 되어 잠도 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하고 나는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그때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반년 동안 우리가 나름대로 준비했던 계획이 이제 실행에 옮겨져 드디어 중국으로 가는 순간이었다.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두들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다. 구름들 사이로 고국이 멀어져 갔다. 말로만 듣던 비행기 기내식을 받고 타면서 받은 신문과 잡지를 뒤적거리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 시간여의 비행 후 밖으로 넓은 대륙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지이자 만리행의 출발지 인 남경에 도착한 것이다.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공항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무뚝뚝한 입국심사관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뭔가를 퉁명스럽게 묻기 시작 하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고 말았다. 중국말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겨우 1시간 거리 떨어진 곳에서 전혀 다른 말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대충 물음에 얼버무리면서 대답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넓은 땅 이 펼쳐져 있고 익숙하지 않은 말들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때서야 나는 우리가 중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 앞에 펼쳐질 일들은 우리가 개척하고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남경사범대학교 기숙사에 우리의 첫 여정을 풀었다. 그곳에는 우리처럼 중국에 관심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인 유학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사실 이때 여러 한국 유학생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는 기숙사에 방이 없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다행스럽게 이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방을 얻을 수 가 있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방을 잡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여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전거 정비부터 여행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을 준비하고 구입했다. 그리고 공금은 분실 방지를 위해 은행에 카드를 만들어 보관하기로 했다. 여행의 경로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어서 어떻게 다음도시로 이동할 건지 결정했다. 밤에 저녁을 먹고 음료수를 사 먹으러 밖에 나왔는데 막상 점원에게 음료수를 요구 하려고 하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우물우물 거리는 사이 동기 태준이는 작년에 경험자답게 유창하게 중국어로 사이다와 담배를 요구했다. 우리는 그저 옆에서 와~ 하고 감탄사만 터트릴 뿐이었다. 나도 이때부터 생각을 고쳐먹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의 중국어를 활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과일을 사먹기로 해서 과일 가게 에 들렀을 때 내가 앞장서서 과일을 샀다 수박 복숭아 하미과 여러 과일들을 샀는데 사실 그 주인아저씨는 내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나도 그 아저씨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남경에서 우린 여행 준비로 중국에서의 첫 날을 보냈다.
다음날 우리는 남경의 명승고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방문한 곳은 중화민국의 초대총통 손중산의 묘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높다란 산 정사에 그를 모신 사당과 묘지가 있었으며 산 정상까지 통하는 대로와 주위의 가로수가 조화롭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큰 나라의 웅장함과 광대함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간 곳은 명나라 태조 주원자의 묘인 효능이었다. 산하나 전체가 태조의 묘 일정도로 이것 역시 규모가 매우 컸다. 특히 이 효능은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그 문화재 가치가 높은 것 같았다 곳곳에 명나라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태조의 능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으로 높은 성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주위를 잠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오후에는 시 반대쪽에 있는 남경대학살 기념관을 방문했다.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처럼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의해 겪은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30만 명의 시체가 묻혀있는 무덤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유골들이 그때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념관을 나오면서 인상 깊은 어구를 보았다. 과거는 잊지 않고 그것을 스승삼아 미래에 대비하자는 내용의 문구였다. 대륙민족의 손상된 자존심과 앞으로의 미래에 자신감이 담긴 느낌이 들었다. 그 자신감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을 테지만 분명한 것은 중국은 무섭게 성장 중이며 당분간 빠르게 변화하며 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 할 것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변해갈 그들을 공부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중국어과의 한 학생으로서 좀 더 깊이 있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다음날은 우리의 첫 베이스인 남경을 떠나는 날이었다.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자전거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설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시 외각에서의 주행은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대원 중 한 여학생이 탈진 증세를 보이면서 대열에서 뒤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갈 길은 먼데 상점은 찾을 레야 찾을 수도 없는 외진 곳이었다. 하는 수 없이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쉬면서 수박을 먹기로 했다. 이때 영찬이는 수박을 자르다가 자기 손가락을 크게 다치게 되었다. 한 순간에 두 명의 부상자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웃지 못한 일들을 겪고 도착한 곳은 진강이라는 조그마한 시였다.
숙소를 잡기 위해서는 돈을 뽑아야 했다. 공금은 모두 남경에서 만든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큰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가 넣어둔 통장의 돈을 모든 은행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이지 알아보니 반드시 현금카드가 있어야만 돈을 찾을 수 있고 그 카드는 처음 통장을 만든 은행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금했다는 증거로 통장이 버젓이 있는데도 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을 찾으려면 다시 처음 통장을 만들었던 남경으로 돌아갔다 와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대장인 신영이 형과 미지 누난 힘들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수고를 하셔야 했다. 너무 형식에 얽매여 있는 관리체제가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도 있었다. 처음 통장을 만들 때 익숙한 우리나라도 아닌 머나먼 타국 땅 에서 큰돈을 맡기는데 재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불쑥 일을 처리한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일 처리를 해라시던 만리행 선배 상철이형의 말이 생각났다.
진강으로 오던 길에 많은 공사현장을 봤다. 아무래도 상해 중심의 경제 개발력이 이제 서서히 내륙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서 글로만 읽어오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개발 덕분에 우리는 자전거를 타는 중 먼지와 모래로 샤워를 헤야만 했다.
다음날 대원들은 힘든 몸을 쉬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장 신영이 형에게 울듯이 매달렸지만 신영이형은 강행군을 택하셨다. 볼멘소리로 투덜거려 봤지만 형의 따가운 눈총만 돌아올 뿐이었다. 강행군 덕분에 우씨라는 도시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도중에 동규 자전거가 또 말성을 부렸다. 중국 아주머니랑 한번 충돌 한 뒤 바퀴가 찢어져 두 번이나 펑크가 나버린 것이다. 덕분에 우린 땡볕에서 또 몇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거리는 짧았지만 힘들었던 날이었다.
한국음식이라 선전하는 음식집에서 냉면을 먹게 되었다. 중국에서 처음 보는 한국음식이라 너무나도 반가웠다. 하지만 맛은 흉내만 내었을 뿐 한국 냉면 특유의 맛을 내 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해 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대원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거리면서 잘도 먹었다. 점심식사 후 이 식당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주방에서 일하는 듯한 남자 종업원들이 나와서 외국인인 우리에게 말을 걸면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듯 했으나, 가만히 보니 말도 은근 슬쩍 우리를 깔보면서 자기 내들만의 욕으로 우리를 무시하고 있었고 행동도 계속 이상해졌다. 나중엔 칼을 꺼내더니 그걸 나무에 꽂으면서 이상한 행동을 했다. 기분 나빠서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외국에서 타국인이 문제를 일으키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빨리 그 식당에서 나온 뒤 우리는 당성이라는 곳을 관광하러 갔다. 이름그대로 당나라의 성 일부를 재현해 놓은 곳 이었다. 멋진 곳이라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고 했다. 우씨라는 도시가 우리에게 북경 상해처럼 익숙하지 않은 데 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관광할 때 패키지 에 우씨를 많이 포함시킨다고 하니 그 유명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성은 실제 당나라 후기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가 놀았던 정원이라고 한다. 고풍스러운 기와집들과 주변 환경이 한대 어우러져 멋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무척 인상 깊었다. 황제가 드나들었던 곳이라 그런지 나무 돌 하나하나 도 아무렇게 놓여있지 않았다. 무척이나 넓었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다 보지 못한 것이 약간 아쉽다. 당성을 나와 우씨가 관광명소로 이름을 높이는 또 다른 명소를 찾았는데 바로 태호였다. 이름 그대로 정말 큰 호수였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끝이 보이질 않았다. 우린 잠시 태호에서 시원한 호수 바람을 쏘이며 여행의 피로함을 잊었다. 밤이 서서히 깊어져가면서 예쁜 색깔의 등 들이 켜졌다.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알아보니 우씨에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에 다시 중국에 오는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한번 우씨를 찾아보고 싶다.
다음날 아침 다들 배탈이 나서 그런지 큰일 때문에 화장실을 교대로 들락날락 거렸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러 길거리 빵집 앞에서도 배탈 환자는 자꾸 나왔다. 결국 두 팀으로 나누어 배탈 안 난 사람들이 먼저 다음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소주로 가는 길이다. 관광 도시로 잘 알려져 있고 물의 도시라 불릴 만큼 물이 깨끗한 도시라고 알고 있었다. 몸 상태가 아직은 좋아서 자전거는 잘 나갔지만 7월에 막 들어서면서 점점 더위가 심해져갔다. 찜통 같은 더위가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시끄러운 트럭의 경적소리도 더워서 그런지 유난히 시끄럽고 짜증스러웠다. 사실 이번 여행 중 처음부터 끝까지 이 트럭의 경적소리 가 우리의 불쾌지수를 얼마나 들끓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나중엔 너무나도 짜증스러운 나머지 우리 나름대로 채면을 걸었다. 경적소리는 우리보고 힘내라고 하는 신호다. 빵~ 그래 힘내자 힘내자
소주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유명한 도시라 그런지 처음으로 도시에서 활기찬 모습을 느꼈다. 신시가지는 금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있는 곳이었다. 서울의 업무지구의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는데 금융업이 발전한 만큼 은행이 정말 많이 보였다. 높다란 빌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깨끗한 이미지를 풍기기도 했지만 사실 삭막한 분위기가 났다. 대신 구시가지는 건물들도 오목조목 하게 들어서있고 사람도 많이 보여서 정말 활기차 보였다. 우리는 여기 구시가지에 숙소를 정하게 되었다. 다들 개인정비를 하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굉장히 매운 음식을 접하게 되었다. 보통 우리는 마파두부 같은 우리가 주로 먹는 음식을 위주로 주문해서 먹어왔었는데 그날 그 식당에는 우리가 처음 보는 메뉴가 많았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영찬이의 카메라가 처음 보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찍느라 바빴었다. 그 중 하나가 그 문제의 매운 음식이었는데 닭 요리였다. 고추랑 같이 튀긴 듯 했다. 처음에 이 요리를 주문한 태욱이가 고추를 한입 입에 넣었다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기에 위험한 흥미를 느낀 우리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이 하나씩 먹기로 했다. 그리고 먹는 족족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을 본 듯한 그런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아닌가 난 너무 먹기 싫어서 게임에 내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부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나만 빼고 고추를 다 먹게 되었다. 내 집중력의 승리라고 해야 하나 모두들 억울했던지 나보고 맛 좀 바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저녁 식사 후 일부 대원들이 안마를 받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난 선뜻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다. 결국 3명의 모 대원들이 갔었는데 가서 뭘 받고 왔는지 다음날 녹초가 되어서 꼼짝도 못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소주에서 이틀째 날이다. 그날은 관광지로 유명한 두 정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처음 간 곳은 유원이라는 곳으로 청나라 때 귀족들이 썼던 정언의 형태를 옮겨 놓은 곳이라 했다. 정원의 아름다움과 귀족의 화려함이 여러 곳에 배어있었다. 최고 좋았던 것은 중국의 전통 의상과 노래 음악을 함께 볼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몇 명의 미인들이 나와서 옛날 귀족들이 들었을 법한 격조 높은 음률을 관광객들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이런 서비스 말고라도 관광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여러 곳에서 느껴졌다. 중국 정부가 관광사업을 국가의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두 번째로 간 곳도 정원 이었는데 이것은 명나라 때 인 것 같다. 처음보다 좀 더 넓고 관광객도 많았다. 처음의 것과 별 다른 차이점은 없어서 크게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소주시내를 다니면서 느낀 건데 차종이 다양하긴 하지만 고급차인 폭스바겐 차가 굉장히 많고 그 외의 고급 외제차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 만큼 중국이 아직 못 산다고 들 하지만 부자도 굉장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날 도시 이곳저곳을 밤새 다니느라 몸이 안 좋았다. 그리고 전 날 안마를 받으러 갔다 봉변을 당한 대원들까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이 좋지 않은 몸 상태는 당분간 우리를 괴롭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다음날 주행의 영향이 컸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에 힘겹게 일어났던 걸로 기억된다. 최고로 안 좋은 하루의 시작인 것이다. 호텔을 나서면서 하늘을 보니 두껍게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언제라도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소주시내를 얼마 벋어나지 못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를 잠시 피해 건물로 들어갔다 저마다 우비를 입고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잠시 비가 멎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또 비가 쏟아졌다. 그렇게 게릴라성 폭우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전 날의 영향으로 다들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비까지 쏟아지니 몸이 천근만근 이었다. 소주시내를 거의 벋어 날 때 쯤 지금까지는 소나기였던 비가 엄청난 바람을 동반한 폭우로 바뀌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무슨 오기였던지 대원들은 다음 목표인 우전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나는 또 혼자 투덜거리면서 힘들게 대열을 따라 갔다. 우전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멀리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비에 몸이 흠뻑 젖어서 몸과 자전거와 짐들이 같이 무거워지고 체온이 떨어져서 감기 증세까지 생겼다. 그리고 지금까진 목적지가 도시라서 길도 편하고 사람들도 자주 보였지만 오늘 가는 길은 정반대였다. 끝도 없는 시멘트 길이 대로처럼 지평선 끝까지 쭉 뻗어있었다. 탈진상태로 속옷까지 흠뻑 젖은 상태로 우전에 도착한 것은 오후 4~5시 사이였던 같다. 다행히 가방 안의 짐들은 젖지 않았다. 특히 일기장이 멀쩡하다는 것이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대충 짐정리를 하고 샤워 후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말할 수 없이 힘든 하루였다.
다음날 우전에서 두 번째 날이다 그날은 우전을 관광하기로 했다. 도시가 아니라 특별히 해 놓은 것은 없었고 마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형태였다. 알아보니 여기도 나름대로 관광지였던 것이다. 마을 따라 흐르는 물길과 가장 중국적인 건물들이 보였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물에 비치고 사람들은 그 강을 따라 한가로이 거닐면서 관광을 즐겼다. 건물들 사이로 그 지방 특산품인 듯한 것들을 만드는 곳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해서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천을 짜는 것도 있었고 염색공예 부채공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거기서 현석이는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부채를 샀다.
관광도중 뒷모습이 동기 주리랑 비슷한 여자를 봤다. 근래에 보기 힘든 미인이었다. 태준이랑 현석이는 그 여자 뒤를 졸졸 뒤따라갔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엔 그 여자가 그 들의 시선을 무시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관광 도중 화장실 갈일이 생겨 화장실에 들어갔었는데 돈을 받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할머니가 화장실입구를 지키고 앉아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을 관광 후 여관에 돌아와서 개인재정비를 한 후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후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꼬마아이 들까지 함께 모여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운동도 하고 서로의 친목도 다지고 정말 좋은 중국만의 문화인 듯 했다. 태준 현석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에 끼여 엉성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그 둘을 공개적으로 대대적으로 비웃었다 사실 이방인들이 그들을 따라하니까 묘하고 신기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두들의 얼굴에 미소로 가득한 저녁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여행의 피로가 쭉 풀려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군대에 들어가는 민성이에게 국제전화로 연락하고 길에서 마을 사람들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때리고 있었는데 아마 맞고 있는 한 사람이 도박에서 돈을 빚지고 도망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아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이 싸움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 한국 같으면 누가 끼어서 말리던지 아니면 바로 경찰을 불렀을 텐데 너무나도 무관심했다. 듣던 대로 ‘관시’가 중요한 나라 인 듯 했다. 자기와 중요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면 자기 일처럼 잘 해주지만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다음날 만둣국으로 아침을 대충 먹고 우전을 뒤로하고 다음 목표인 항주로 나아갔다. 오랜만에 땡 볕 아래에서의 주행이었다. 아침부터 동규 자전거가 말썽이다. 새로 산 앞바퀴는 잠잠 해졌지만 이번엔 뒷바퀴가 구멍이 난 것이다. 덕분에 약 1시간 가량을 길거리 위에서 보냈다. 그동안 어느 중국 할아버지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길을 지나가시다가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길래 women shi hanguo de da xuesheng 나름대로 유창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영 알아듣지를 못하신다. 너무 혀를 꼬은 것 같아서 그냥 자연스럽게 다시 말씀드렸더니 짜증을 부리신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면서 우인호 교수님이 아시면 통곡하실 것 같았다 나는 손 발 영어 다 동원해서 연거푸 한국이라고 친절히 말씀 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발음에 아무래도 이상이 있나보다 분하고 속상한 순간이었다. 아직 중국어 공부의 완성 단계가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는 말이 통해야 정상일텐데 말이다 다시 한번 나를 뒤돌아 봐야 할 것 같았다.
찌는 듯한 강남의 더위를 등에 업고 항주에 도착한건 저녁6시가 좀 넘어서였다. 항주시는 특이하게도 외국인일 경우 3성 호텔 이상에서 만 머물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누나와 신영이형에게 3성 호텔 에서 잘 것을 권했다. 하지만 속으로 내 마음은 날 고 있었다. 얼마만의 호텔인가 대원들도 모두 만족하는 듯 했다. 이 제도의 표면적 목적은 외국인의 안전이라고 한다. 물론 도시 전체 상점이 문을 빨리 닫아서 밤거리가 상당히 위험해 보이고 일부 위험한 사람들도 길거리에 많아서 필요한 제도 이긴 했다. 외국인 보호 차원도 물론 있겠지만 아무래도 본 목적은 돈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나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너무 밝히는 것 같다.
항주에서의 두 번째 날은 항주의 자랑인 서호를 관광했다. 우씨에서의 태호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역시나 멋진 곳이었다. 거기서 태준이와 나는 청나라 황제와 고위관리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지금 사진을 봐도 재미있지만 그때 많은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는 기분은 꼭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오후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대원들과 숙소 앞 허름한 가게에서 양꼬지와 맥주를 즐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기가 요리조리 헤집고 다녀 귀찮고 바로 뒤쪽으로 큰 도로라 먼지투성이였지만 서로 여행에 대한 의견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귀국 하면 뭘 할 건지 벌써부터 기분 좋게 털어놓았다.
다음날 항주로 들어왔던 길을 잠시 돌아 항주 외각 에 있는 창환이 형님이 일하시는 공장을 견학을 하러 갔다. 가는 길에 중국의 장래행렬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처음엔 행렬의 음악과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아서 장례 행렬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결혼축하 행사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듯 했다. 현석이의 말로는 장례식도 한 마을의 잔치 중에 하나로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하는 축제일이라고 한다.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거 이왕에 기쁘게 보내자는 건지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찌 되었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항주 시내를 벗어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항주의 한 위성도시였다. 이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금방 들어났는데 그 곳은 지금 현재도 막 개발 중인 신도시였다. 도로가 쭉죽뻣어 나있고 건물들이 규칙적으로 간결하게 세워져 있었다. 겉보기로는 참 재미없고 지루한 도시였는데 우리가 이 곳에서 한국에서 조차 하지 못했던 걸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먼저 창환이 형 과 만나서 우리가 하루 밤 지낼 호텔로 갔는데 30층이 넘는 높은 규모의 최고급 4성호텔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저녁식사를 위해 창환이형이 일하시는 공장의 공장장님과 거래처 사장님이 몰고 온 벤츠 그리고 BMW 승용차를 타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가 벤츠를 타다니 믿을 수 없었다. 정신이 멍한데 우리가 저녁을 먹으로 들어간 곳은 또 다른 고급 호텔이었다. 뱀 요래 자라탕 등 이름도 모를 중국 특유의 이상한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례대로 나왔다. 영찬이 카메라가 바쁘게 플레쉬를 터트렸던 걸로 기억된다. 그 순간 우리는 중국인 공장장님들께 최고의 예우로 대접받는 귀한 손님이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공장장님은 중국인도 하지 못하는 험난한 장거리의 자전거 주행을 다른 나라 외국인 대학생들이 열정 하나만으로 뭉쳐서 해낸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저녁 식사후 호텔로 돌아와 대원들과 창환이형의 조언을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자세라는 말씀을 하셨다. 어색하고 힘들다고 입 닫고 있으면 여행을 온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와의 싸움에서 여러 번 이겨나가야 하는 여행인 만큼 자기를 돌아보고 극기 해나가는 것은 기본이고 중국어과 학생이 중국에 왔으면 배운 것을 써보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일깨워 주신 것이다. 지금도 그 날 밤 형에게 들었던 조언을 거울 삼아서 공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졸업 후에는 나도 후배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창환이 형의 공장을 견학하고 본격적으로 상해를 향해 나아갔다. 북경 들어가는 길 만큼이나 설레었던 주행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주행이기도 했다. 기대가 커서 그랬을까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상해가던 길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오직 정신력으로 대열의 꽁무니만 조르르 뒤따라 다녔다. 중간에 해변도로로 길을 잘 못 들어 한참을 해매이다 어느 으슥한 시골로 들어가기도 하고 야간 주행은 기본이었다. 거의 3일간에 걸쳐서 상해로 들어갔는데 상해로 들어가던 당일 살면서 그렇게 힘든 날은 다시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상해 인민광장에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다 일어나 썼던 일기를 보고 있는데 처음 시작이 이렇다. ‘죽는 줄 알았다’ 정말이다. 상해 근교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오전 늦게 상해로 출발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지친 상태에서 점심 같지 않은 햄버거로 가볍게 점심을 처리했다. 너무나도 더워서 거리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동네전체가 고요하게 어디론가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점심 후 상해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나선 우리 앞에 난관이 봉착했는데 그것은 바로 상해로 들어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고속도로라 자전거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길을 물어물어 어떻게든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길거리에 물을 파는 곳도 드물고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반나절을 길을 찾아 헤맸다. 어떻게 길을 찾았는지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어렵게 길을 찾아 상해로 향했을 때는 이미 저녁에 되어 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도중에 규일이 자전거가 펑크가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 때문에 다시 1시간가량 길바닥에 앉아 모기랑 씨름을 했다. 어떻게든 우리가 고치려고 해봤지만 밤이고 부품도 부족해서 일단 규일이를 상해로 택시를 태우고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때 택시를 타고 가는 규일이가 얼마나 부럽던지 상해 외곽에 도착한건 저녁 11시 가량 이었다 시외곽이라 그런지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 것 같았다. 별장 같이 으리으리한 집 들이 별처럼 모여 있었다. 오는 길에는 무너져 가는 건물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척박한 곳들이었는데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빈부차가 격심하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같았다. 도시로 들어가면 갈수록 지금까지 내가 봐오던 것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중국 제1의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밤 이라 그런지 길을 물어볼 사람이 드물었다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아저씨를 잡아 무작정 길을 물었다 규일이와 만나기로 한 인민광장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 물었더니 거기까지 언제가려고 자전거를 타고 있냐고 되물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좋아 보이는 건물들이 보이고 슬슬 도시 분위기가 나고 있는데도 이런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건지 더군다나 중국인이 멀다고 하는 뜻은 정말 멀다는 소리인데 다리가 그만 풀려버렸다. 높다란 빌딩이 밀집한 시내 중심부 같아 보이는 곳은 몇 번을 지나갔는지 모른다. 가도 가도 인민광장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는 서해바다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인민광장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인민광장에 도착하니 광장이 보통 넒은 것 이 아니었다. 여기서 규일이를 또 어떻게 찾나 하고 생각하나 하고 한숨을 쉬니 대원들 모두 길바닥에 주저앉아 골아 떨어졌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모양이다. 나도 난간에 누워서 정신없이 자버렸다. 거기서 정말 기적적으로 규일이를 만나고 호텔까지 들어가는 데는 또 몇 시간이 걸렸다. 뒤에 알았지만 상해에서 호텔잡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신영이형과 미지누나가 피곤한데도 정말 수고하신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편하게 호텔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너무 피곤해서 대원들이 처음 만난 건 저녁약속 때였다. 나도 오후까지 신나게 늦잠을 자버렸다. 저녁에 저녁식사를 위해 지하철을 타고 남경로로 갔다. TV로만 봐오던 남경로에 가보니 기분이 묘했다. 리포터가 길 중앙에 서서 길 끝에 보이는 동방명주를 설명했었는데 내가 거기에 서 있었다. 푸동쪽 높은 빌딩들의 숲 야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 뒤쪽으로는 아직 건설 중인 빌딩들이 많았다. 반대쪽 와이탄 쪽에는 100년 정도 된 상해 개항기 당시의 서양인들이 지었던 건물들이 남아있었다. 강가에 서서 실컷 야경을 감상했다. 어제의 피로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활기차고 거대한 도시의 중심가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성취감에 사로잡혀 모든 걸 잊고 그 순간을 즐겼다. 첫 날의 이 기쁨과 감동처럼 상해에서의 우리는 가장 즐거운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대 동문회 선배님들도 만나 뵈었는데 모두 그 곳 상해에서 상당한 기반을 중심으로 큰일을 하시는 듯 했다. 선배님들께서도 우리가 대견스러워 하시는 듯 했다. 나는 그때 외대인 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창환이 형님을 뵈었을 때도 그랬지만 우리 선배님들이 머나먼 타국 땅까지 와서 일을 하시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고 나 자신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불어 넣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상해에서의 기억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최종 목적지인 북경으로 향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만 했다. 상해에서 3명의 대원을 먼저 귀국시켰다. 모두 개인사정으로 인해 먼저 귀국 하게 되었는데 보내는 우리도 먼저 가는 그 들도 아쉬워했다. 그들을 귀국시키고 우리도 서둘러 북 쪽으로 자전거를 돌렸다. 상해는 들어올 때도 힘들었지만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도시가 분명히 도시가 크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갈 때는 사고가 발생했었다. 미지누나가 철로 길을 못지나고 옆으로 넘어져서 머리를 다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처음엔 위험한 상황이었다. 평소 담이 큰 누나라 애써 우리가 걱정하지 않게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110(우리나라 119)에 전화를 하고 앰뷸런스를 불렀다. 하지만 중국 공안들은 상황이 위험한걸 알면서도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 이었다 오히려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에 너무 화가 났다. 우리는 좀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지만 도리어 그 쪽에서 생 짜증을 부리니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주위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긴급조치를 해서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급히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이니 하루 이틀 정도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니 우리 일정도 미뤄져 그 날은 상해에 머무르기로 했다. 다음날 포기 할 것 같은 미지누나가 끝까지 북경까지 우리와 여행을 하기로 했다. 처음엔 솔직히 걱정했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정도 늦춰지고 해서 다 못 가봤던 상해 명소를 찾아 다녔는데 상해 박물관을 다녀왔다. 우리가 처음 길바닥에서 잠을 잤던 인민광장 정 중앙에 있는 원형 4층 건물로 1층부터 4층까지 6천년 중국의 유구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주제별로 전시관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유물들이 너무 많아서 다 돌아보는데 꽤나 진땀을 흘렸다. 많기도 많았지만 유물 하나하나의 가치가 상당한 것 같았다. 또 유물들도 굉장했지만 자기네들의 전통의 것들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많은 관심을 보이는 중국인들도 대단했다 그날이 주말이 아닌 금요일이었고 낮 날씨가 너무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박물관을 관람한 후 남경로 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남경로의 마지막 모습이라 어느 정도 익숙하던 남경로가 새롭게 보였다. 작은 것 하나도 잊지 않으려 부단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상해를 나와서 장강을 건넜다. 강남에서 드디어 강북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강북의 길은 강남보다는 편했다. 길도 대체적으로 넓었고 길도 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간이 산이 있어서 주행 자체가 재미가 있을 때도 있었다. 산을 타고 자전거를 타는 건 어떻게 보면 힘들지만 자전거 주행을 더 재미있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연청이라는 도시를 들어갈 때는 예외였다 그 날은 약 150킬로미터를 달렸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약 3시간을 달렸는데 사람, 상점 하나 보이지 않고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그야 말로 넓게 퍼져있는 평야지대를 달릴 때는 앞이 캄캄했다. 중국에 와서 그런 길은 정말 처음이었다. 주변에는 논 밭 간간히 보이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다. 기적적으로 길 가에 있는 목욕탕을 찾아 들어가 마실 것을 사먹었다. 논 밭 가운데 목욕탕이 왜 있는지 황당했지만 얼마나 반갑던지 거기서 팔고 있는 마실 것은 우리가 거의 다 사먹어 버렸다. 힘들었지만 사고 없이 연청까지 힘들게 잘 들어왔다. 하지만 여기서 상해를 연상케 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호텔도 아니고 여관을 잡는게 왜 그리 힘든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시 전체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했다. 원래 중국의 밤거리는 인기척이 드물다. 하지만 축제 때문이라 그런지 밤 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길 마다 가득가득했다. 그리고 모기도 그 도시에 아무래도 모기 공장이 어디 있을 것 같았다. 어찌나 모기가 많은지 여관 잡으러 다니면서 울 뻔했다. 이리저리 힘든 상황에서 신영이 형이 어렵게 방을 잡았는데 잠깐 사이 방이 없다고 여관 직원이 말한다. 알아보니 여관 사장이 그사이에 와서 먼저 예약한 우리에게 방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중국 사람도 독하고 모기도 독하고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 적응하려면 정말 힘들 것 같은 곳이었다.
그 다음날 북경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영찬이와 미지누나의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어떻하나 망설이고 있던 사이 대장인 신영이 형이 도시를 둘러보고 오시더니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주시며 하루 더 있자고 하셨다. 그 사실은 바로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인 기아의 공장이 이 연청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공장에 견학 신청을 하고 공장에 견학을 가기로 했다. 전 날 에는 저녁에 도착해서 눈치 채지 못했었는데 가만히 보니 이 도시에 다니고 있는 택시 거의 모두가 기아의 프라이드 종이었다. 의외로 공장 전체가 깨끗하고 보기가 좋았다. 우리나라와는 다리 공장라인의 모든 공정을 인력에 의존하는 것 같았다 설비투자 보다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 하는 것이 생산 비용에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한 라인에 3차종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동화시설이 아니라 인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이 공장만의 능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공장은 우리나라 한 TV프로그램에 대대적으로 소개 될 만큼 성공한 케이스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견학을 가능하게 해준 부장님도 굉장히 유명인사 였다. 1800명 중 한국인은 8명이라고 나머지 몇 천 명을 이끄는 사람이니 대단한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한민국의 이름을 높이는 자랑스러운 분이 아닐 수 없었다.
공장에서 꽤 많은 관리직 중국인을 보았다. 그 만큼 중국인의 능력수준도 발전하고 있는 경제처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장님도 그들의 능력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우리의 경쟁상대인 그들을 누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나를 닦자고 마음속으로 나와 약속하는 순간이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갈 길이 굉장히 멀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와서 하루에 달린 거리로는 이날이 최고였다고 기억된다. 연운항 이라는 시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날까지 영찬이와 미지누나는 몸이 좋지 않아 하루를 여기서 더 쉬고 다음날에 연운항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오후 4시에 벌써 100킬로미터를 넘을 만큼 순조로운 주행이었다. 가는 길에 쉬엄쉬엄 수박도 사먹고 쉬면서 그렇게 가도 충분히 다음날에는 연운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해가 지고 있을 무렵 이제 슬슬 잘 곳을 찾고 다음날에 연운항으로 여유롭게 가기로 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지도에는 있지 않은 강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분명히 숲길이었는데 갑자기 강이라니 멍하게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파악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홍수가 나서 근처의 둑이 무너져 물이 잠시 범람한 것이라고 했다. 잠시 범람한 것 치고 우리가 보기에는 물이 너무나 깊어 보였는데. 큰 트럭들도 지나가기를 꺼려할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길이었다.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잘 곳은 마땅치 않아 발을 굴렀다. 어떡할 수 없이 트럭을 얻어서 타고 가기로 했다. 우리의 모든 짐과 천리마들을 태우고 트럭 뒤의 짐칸에 우리도 올라탔다. 기사아저씨께 거금150원을 건네고 연운항으로 가기로 했다. 트럭위에서 흐르는 물 위를 지나가니까 기분이 묘하기도 한쪽으론 솔직히 겁도 났다 갑자기 트럭이 물 속으로 푹 빠져버릴 것 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긴장 속에서 트럭이 물을 건너려는 찰라 트럭 뒤로 중국인 두 명이 무임승차를 했다. 우리는 150원이나 주고 탔는데 우리가 내려가라고 무섭게 노려봤다. 그런데도 그들은 태연하게 우리에게 대화를 걸어왔다. 어디서 왔는지 학생이냐는 등 우리도 기분이 안 좋았지만 그 들 바로 옆에 있던 신영이 형은 금방이라도 그들을 물로 밀어 버릴 것 같았다. 뻔뻔한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사이 트럭은 무사히 강을 건너고 연운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로 이동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트럭 위에 우리 모두 누워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구경했다. 시골길이라 그런지 별이 정말 많이 보였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별을 구경하니 날아가는 기분이었고 입에서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진 순간이었다.
연운항에서 우리는 다시 모여서 산동성을 향해 달렸다. 산동성은 이제껏 길들과는 달리 산이 보였다. 덕분에 산길도 여러 번 타게 되었다. 우리가 중국에 온지 꼭 한달 째 되는 날에는 정말 깊숙이 산을 타기도 했는데 중간에는 공사 때문에 길이 끓긴 곳을 만나기도 했다. 자전거를 들고 개울을 건너면서 색다른 재미를 맛보았다. 그리고 산 풍경이 정말 아름다워서 자전거를 밞는 피로함은 잊어버릴 정도였다. 기분 좋은 내리막을 만나면 두 팔을 벌리고 산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내려오는 그 스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재미였다. 그렇게 산동성에서의 주행은 재미있는 반면에 다른 성에 비해 안 좋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먹는 문제였다. 다른 곳에서는 밥을 먹는데 반해 여기서는 밥을 주지를 않았다. 면 만 먹는 것이었다. 맛없는 맹물 국수를 먹는 것이 여간 곤욕이 아닐 수 없었고 밥 먹는 것 보다 자전거를 탈 때도 체력보충이 안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가 빨리 달렸는지 모르겠다. 강남에서 지체되었던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산동성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제남 바로 밑의 태안시에 들어갔다. 태안시에는 중국인들이 천하제일의 명산이라 부르는 태산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제남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태산 같은 곳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서 이 곳으로 오고 말았던 것이다. 기분 좋게 호텔에 들어가서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동규에게 문제가 생겼다 호텔 측에서 다짜고짜 동규를 머무를 수 없게 한다. 사실은 동규 여권비자 기간이 만료되어서 불법체류자로 몰릴게 된 것이었다. 비자의 기간이 한달 밖에 되어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큰 일로 형들 누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끔직했다. 동규의 얼굴은 거의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정말 다행히도 알아보니 가까이에 비자기간을 연장해주는 기관이 있다고 했다. 이 문제는 벌금도 어떻게 면하고 잘 해결되었지만 여행 처음의 사전 준비상태에서 빚은 문제라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각자 자기 재정비를 해야만 했고 또 다시 이런 큰 문제를 재발 시키지 않도록 자신들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최고의 위기를 잘 넘기고 다음날 우리는 태산 관광을 했다. 돈이 별로 남아 있지 않던 나는 다른 교통수단을 전혀 쓰지 않고 산 밑에서부터 끝까지 도보로 올라가기로 했다. 중국의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이기도 한 태산 황제들이 황제로 인정받기 우해 꼭 한번씩 찾았던 중국 최고의 명산이 바로 태산이다 그 태산을 나는 그 날 올랐다. 명산답게 산 경치가 매우 좋은 것은 기본이었다. 특이한 것은 처음부터 끝가지 길이 계단인 것이었다. 1학년 규일이는 그 많은 계단을 첨부터 세면서 산을 올랐다. 처음엔 계단이라 편했는데 올라가면 갈수록 계단 때문에 산을 오르기가 더 힘들어졌다. 특히 내려올 때는 발이 아프기 까지 했다. 중간의 중천문을 지나 폭포를 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큰비를 만났다. 빗물 때문에 계단이 미끄러워 지고 바람이 많이 불고 고도가 높았던 곳이라 춥기까지 했다. 내려가고 싶었다. 체력도 바닥이 나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 조금 과장되기도 하지만 거기서 내가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왠지 앞으로도 내 의지대로 자신감 있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다. 그래서 난 그대로 비를 뚫으면서 산을 계속해서 올라다 남천문을 지날 즈음에 다행히 비가 멎어 정산에 올랐을 땐 먼 곳 까지 볼 수 있었다 산을 정복하고 그렇게 벅차고 보람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정산에 오르니 가족생각이 나서 크게 사랑하는 우리가족을 불러 보았다. 은은한 절의 종소리와 함께 메아리로 오래도록 태산을 울렸다.
다음날 바로 제남으로 향했다. 산동성의 성도답게 큰 도시였는데 가는 길에 방송국의 사람인듯한 사람들이랑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인터뷰를 청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중국 TV에 소개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대학생인데 남경에서부터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중국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 이렇게 여행 중이라고 성실하게 답했다. 그러자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저번의 공장장님 들처럼 분명히 대단한 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만리행의 대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산동성을 지나 하북성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최종목표인 북경이 있는 곳이었다. 북경이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의 속도도 올라갔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북경인가 가는 길이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북경으로 들어갔고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려있는 천안문 광장을 마주했을때의 그 감동은 세상의 모든 것을 내가 가진듯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우리는 해내었던 것이다 자전거 두 바퀴로 중국 대륙의 동쪽을 정복한 것이다. 대원들과 그 기쁨과 감동을 서로 나누면서 한동안 광장에 서있었다. 우리 모두가 하나로 서로 아끼고 격려하면서 왔기때무에 가능했으리라 그 감동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단체사진을 찍었다. 북경에서의 몇 일은 아쉬움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성공적인 여행을 마침으로서 우리 모두 기뻤지만 막상 귀국하려고 하니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귀국길에 다짐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다시 학교에 복학할 때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단지 중국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맘으로 시작한 만리행 여행 이번 여행으로 나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추억을 남긴 것 같다. 그리고 평소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할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것 같다. 가장 큰 수확은 여행 중 다져진 우리의 우정일 것이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그 어려움들을 극복했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많은 자극제가 된 여행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동기가 되었던 여행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여행에 참석할 때 이번처럼 중국 사람과 대화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것 때문만 아니더라도 나를 아껴주시는 우리 가족 그리고 내 주위의 분들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언제나 보여드리고 싶다. 그 동안에 나는 현실을 너무나 좁게만 보고 살았었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나 목표없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 특히 후회되는 대학교 1학년과 2학년 때의 생활은 너무나도 아쉬운 시간이다. 뒤늦은 후회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니 뒤늦은 후회는 절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 시작이 바로 군대라는 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빠르게 변화해가는 사회에 자기도 거기에 발맞추어 변화해가야 하는 것 같다. 고인 물이 썩듯이 사람도 현실에 안주하고 시각을 좁게 하고 살다보면 뒤쳐지게 마련이다. 변화라는 것은 우리 에게 익숙하지 않은 현상일 거라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나오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을 떨치고 변화에 편승해서 자신도 변화하다 보면 최선을 다하는 자기 모습을 볼 것이고 어느새 성공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난 이번 여행으로 세상은 넓고 변화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젊음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 같다. 뭐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젊음을 무기로 남들에게도 꼭 여행을 권하고 싶다. 물론 우리와 함께하는 여행도 꽤 괜찮을 것이다.
만리행 선배님들 대원님들 모두 사랑합니다
첫댓글 잘 썼다! 감동적이다! 군생활 열심히 하거라!
졸라 길게썼다........존경
잘썼네...그냥 놀고 있는게 아니었어..^^
허걱! 감탄!! ㅋㅋㅋ 길이에 놀랐음;; 글 안올려지는거 확인하겠음 +_+;;
아; 이게 게시판 형식이라 -..-;; 자료는 안올려 집니다; 붙이기 기능을 이용해서 글을 올려 주세요;;!! 수고 스럽지만;; ... 하하 모두들 쓰고 계신거죠?
군대에서 만리행 갔다온 정신으로 하면 사랑 받을 거야..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