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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라지나이트 입니다.
드디어 이번주면 4월도 끝이네요… 정말 시간이 미친듯이 흘러가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번주는 이달이 다 가기전에 지난번에 약속드린 열차포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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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320 mm 열차포(Railway gun 또는 Railroad gun)은 기차 선로에 놓이도록 설계된 대포이다. 여러 나라에서 열차포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크루프'(Krupp)에서 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에서 쓰인 것이다. 열차포 중 어떤 것은 너무 커서 대포를 받치기 위해 두 개의 평행한 선로가 필요하기도 했다.
열차포는 바다에서의 전함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발전에 의해 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거대한 크기와 한정된 기동성으로 공격에 취약했고, 비슷한 하중을 항공기, 로켓, 미사일로 나를 수 있게 되었다.
[열차포는 침략 야욕에 불타던 일본도 제작하였다 사진은 일본군이 제작한 90식 240밀리 열차포로 단 1대만 제작된걸로 알려져 있다]
역사
크루프 K5 열차포열차포를 처음 제안한 것은 1860년대의 앤더슨(Mr Anderson)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유나이티드 킹덤》지에 '국가 방어'라는 제목으로 소책자를 발행하여 철갑의 열차 탄약통의 계획을 제안하였다. 러시아인 레베듀(Lebedew)는 열차 차량에 박격포를 장착한 것으로 보고된 1860년에 최초로 열차포를 고안했다고 주장된다. 전투에 사용된 최초의 열차포는 남북전쟁에 제작, 사용된 것으로, 페테스부르그 공성(Siege of Petersburg)에서 대포와 박격포가 무개화차에 장착되었다. 프랑스 또한 1870년의 '파리 공성(Siege of Paris)'에서 급조된 열차포를 사용하였고, 영국은 제1차 보어 전쟁에서 '프레토리아' 주변의 항구를 포격하기 위해 수 문의 6인치포를 열차 차량에 탑재하였다. 하지만, 프레토리아는 이들이 배치되기 전에 점령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장교 Col Peigné이 1883년에 처음으로 열차포를 설계한 것으로 종종 언급된다. Mougin 사령관은 1870년 열차 차량에 대포를 놓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프랑스의 무기 제작자인 슈나이더(Schneider)는 1880년대에 몇 가지 유형의 열차포를 제안하였고, 국경 방어를 위해 120 mm 대포를 제작하여 1890년도에 그 일부를 덴마크 정부에 판매하였다. 또한, 1910년에는 200 mm 형을 페루에 판매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는 대형 야전포가 부족하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수의 대형 고정 국경 방어 대포와 해군 함포가 최전선으로 이동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적으로 노지에서 사용하기엔 불안정했고, 어떤 종류의 포가가 필요했다. 열차포는 명백한 해결책을 제공하였다. 1916년까지, 양측은 열차포를 운용하였다. 대전 중의 가장 유명한 열차포는 '파리 대포(Paris Gun)'일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열차포가 마지막으로 사용되었고, 육중한 구스타프 800 mm 포는 독일에서 사용한 가장 큰 대포였다. 전함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육중하고, 비쌌으며, 항공기에 의해 파괴되기 쉬워 전투기의 발달과 함께 열차포는 무력해졌다.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97%B4%EC%B0%A8%ED%8F%AC
SPECIFICATIONS
Calibre 28.3 em (283 mm)
Overall Length of Barrel 21.539 m (21,539 mm)
Overall Length including projecting rear Bogie 31. 1 m
Maximum Elevation 500
Weight in Action 218, 000 kg
Weight of Carriage and barrel 209,550 kg
Muzzle Velocity 1, 120 m/s
Range 59 - 62 km
Firing Interval 8 shells/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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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필살병기 열차포
열차포는 1차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무기로 당시에 불었던 대구경 화포 중심의 전술에 따른 방챌중 하나 였습니다.
열차포가 개발되던 당시에는 정교한 화포 제작과 전략& 전술 그리고 기술등이 발달하지 않아 무조건 큰 대포로 적의 부대를 섬멸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각 국가에서는 서로 앞을 다투러 구경이 큰 대포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이런 큰대포를 장착한 배는 전함으로 불리우고 육상에서의 운영은 이를 운반할 마땅한 차량들이 개발되지 않아 당시로는 유일하게 큰 중량의 회물을 운반 할 수 있는 수단인 열차에 대포를 실어 운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차포의 시작 이지요…
19세기부터 발달한 급격한 공업화에 이로 인한 기술의 발달 그리고 철도의 발달로 열차포는 유럽과 미국 전쟁터에서 널리 쓰이게 됩니다.
특히 유럽의 경우 유럽전체에 거미줄같이 퍼져있는 철로를 이용하는 다양한 열차포가 1차대전 전후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중 가장 강력하며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독일의 열차포 씨리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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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werer Gustav 800mm Railway Super gun"
[구스타프 열차포의 대략적인 역사]
“쉬베어 구스타프(Schwerer Gustav) 砲”는 “도라(Dora) 砲”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독일의 괴물 병기“800밀리 초대형 열차포(railway gun)”를 가리키는 것이다.
1930년대에 독일의 병기 1탄 “마우스전차” 기고문에서도 언급한 유명한 독일의 “Krupp社” 의해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철벽의 마지노선”과 같은 방어진지를 날려버리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략 무게가 1344톤에 이르는 인간이 만든 대포 중에서 가장 거대한 놈이었다. 포탄 한발의 무게만도 자그마치 7톤이며 사거리는 37킬로미터에 이른다.
[1차대전중 쓰인 독일의 파리포 이는 정확하게는 카이저 빌헬름 게슈츠로 불리웠다 -이는 1918년 3월에 개발된 열차포로 파리에서 131Km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포탄을 성층권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으며 프랑스의 파리를 공략하기 위해 만든 열차포이다]
[파리포의 거대한 포신...
파리포
파리포
- 정확하게는 카이저 빌헬름 게슈츠로 불리었음 - 는 1918년 3월 이래 극도로 먼 거리에서 파리를 포격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기에 그렇게 불리었다. 거대한 괴물인 파리포 - 많은 이들은 이것을 독일군의 V-3의 조상으로 간주하고 있음 - 는 파리에서 131Km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포탄을 성층권까지 날려보낼 수 있다.
이 대포는 독일 해군이 설계하고 운용하였으며 독일의 군수 기업인 크루프(Krupp) 사에서 제작되었다. 속을 파낸 380mm 함포을 사용하여 제작된 210mm 포 7문 각각에는 길이가 40m에 달하는 특수한 포열이 삽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용 가능한 열차 포좌는 겨우 2개 뿐이었고, 쿠시(Coucy) 숲에서 한 번에 발사할 수 있는 대포는 겨우 3문에 불과하였다.
장약 180Kg을 사용하여 무게 120Kg의 포탄을 파리를 향하여 - 종종 조준은 대충 하였다 - 발사할 경우 포열이 금방 마모되곤 하였기에, 대략 20발 정도를 발사한 뒤에는 포열의 내강을 다시 깎아내야 했다. 실제로 포탄 한 발을 발사한 뒤 그 다음의 포탄은 구경이 약간 더 커야만 했다.
파리 시내에 처음으로 중포 포탄이 날아들어왔을 때(1918년 3월 21일 오전 7시 18분)의 의심할 나위없는 충격은 처음에는 파리 시민들에게 널리 공포심을 퍼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일단 포탄을 발사하면 그 포탄이 파리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170초가 걸렸고 포탄은 지상으로부터 40Km까지 상승하였다.
이러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파리포는 전쟁의 경과에는 실질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였다. 3월에서 8월 사이에 발사된 포탄은 겨우 367발에 불과하였고 - 프랑스인들은 320발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반박한다 - 파리 시 경계 내에 떨어진 것은 고작 183발이었다.
이 대포가 사용되면서 발생한 사상자는 사망 256명에 부상 620명이었다. 이들 중 사망자 88명과 부상자 68명은 미사가 집전 중인 생 세퓔슈르(St. Sepulchre) 성당에 포탄 한 발이 명중하여 성당이 무너진 1918년의 성 금요일 하루 동안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포는 독일 본국에서는 훌륭한 선전 도구였다. 1918년 8월 독일군이 후퇴하는 동안 연합군은 종전시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이 대포를 찾아 나섰지만 헛수고였다. 비록 미군이 파리포의 예비 포좌 하나를 찾아 내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파리포는 발견되어지지 않고 있다.
출처 : http://www.firstworldwar.com/atoz/parisgun.htm
[포탄의 크기.. 이는 정확도는 떨어졌지만 아군의 포격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거대한 포탄이 파리 도심에 떨어짐으로써 오는 심리적인 타격은 상당한 것이였다고 한다]
사실 이놈을 개발하게 된 배경도 1차대전 시에 프랑스가 자랑하는 “철벽의 마지노 방어선”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서 개발된 것이었지만, 실제로 프랑스 침공 시에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여 버렸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개발한 이놈은 밥값을 못하고 있었다. (注: 프랑스가 예상 외로 잽싸게 독일에 항복해 버린 것에 대하여 유럽인들은 프랑스인들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않다. 게다가 독일이 패망하자 마치 프랑스군이 승전한 것처럼 우쭐대며 폼을 잡고 다녔다고 한다.)
기다리던 보람이 있었는지 비싼 유지비만 축내고 있던 “구스타프 열차포”에게도 실전에 투입될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때가 독소전이 개시된 1942년쯤 되었다.
당시에 목표물은 크림반도에 위치한 소련의 “세바스토폴” 요새였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였는데 독일군은 이곳을 점령하여 보급거점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소련군이 방어용 철벽 요새를 구축하여 독일군으로서는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따라 독일군 지휘부에서는 비장의 “구스타프 열차포”를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철로를 통해 운송을 시작하고 약 2,000여명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자그마치 한달 반 동안 조립하여 완성시켰다.
그런데 정작 포격을 개시하자 불과 몇 발만으로 길게 늘어선 소련군의 요새는 박살 나버렸다고 한다. (사실일까?)
구스타프 열차포의 조립이 완성되고 5일간에 걸쳐 주요군사 시설 및 시가지에 대하여 무차별 포격을 개시하게 된다. 여기서 독일군은 방어진지와 벙커에서 저항하는 소련군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화학무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어쨌든 1942년 12월 17일을 기하여 다시 독일군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목숨을 건 저항은 아주 질겨서 1943년 1월 4일 역습을 받고 독일군은 다시 물러나게 된다.
3월 21일에 이르러 독일군은 또다시 대규모 비행기 공습을 시도하였고 6월 7일에는 독일군의 팬져 기갑부대가 소련군의 2차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하게 된다. 이로 인해 소련군의 수뇌부는
패배를 직감하고 중요 지휘관들을 잠수함을 이용하여 대피토록 하고 6월 29일 결국 소련군의 철옹성 “세바스토폴”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사실 “세바스토폴 전투(Battle of Sevastopol)”는 2차대전사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편인데, 당시에 독일군은 만쉬타인 장군이 이끄는 11군단의 2개 보병사단(54th & 23 th)과 루마니아의 저격여단 그리고 150대의 전차와 수백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였는데,
소련군은 흑해함대 소속의 해군과 해병대를 포함하여 2만3천명 병력으로 120문 정도의 화포, 82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보리소프(B. A. Borisov)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에 소련군은 82개의 벙커와 33킬로미터 길이의 대전차 장애물, 9천6백개의 지뢰매설, 56킬로미터 길이의 철조망으로 전형적인 러시아식의 “토치카” 방어전략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 해 11월 7일과 11월 9일에 걸쳐서 6만 대군의 독일군의 공습이 개시되었는데 소련군의 저항은 강력하였고 독일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그러나 이 중요한 군사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군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구스타프 열차포”를 사용하게 된다.
구스타프 열차포를 이송시키는데는 1942년 2월부터 분해된 부품들이 자그마치 25량의 열차가 길게 늘어서 1.5 킬로미터의 길이로서 철로를 따라 운반되었는데 1942년 3월초에 Perekof isthmus에 도착하여 한달간 현지 조립 설치 작업을 실시하였다. 목포물의 북쪽을 타격하기 위해 약 16킬로미터의 특별철로를 개설하였으며 끝부분에 반원형의 철로가 완성되었다. 1942년 6월 5일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발사준비 완료 상태가 되었고 포탄이 발사되었다. 첫번째 목포물은 25킬로미터 거리의 해안방어 포대였고 모두 8발이 발사되었다.
다음은 스탈린요새(Fort Stalin)였고 6발이 발사되었다. 6월 6일 몰로토프 요새(Fort Molotov)에
7발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하얀절벽(The White Cliff)이라고 부르는 Severnaya Bay에 위치한 탄약저장고는 해수면아래 30미터의 깊이로 10미터 두께의 콘크리트로 건설되어 있었으나 열차포에서 발사된 9발의 관통탄이 결국 이것을 날려버렸고 이 때 인근의 많은 소련해군의 함정들이 파손되었다.
[열차포의 문제점은 항공공격에서 거의 무방비였다는 점으로 이는 2차대전 당시 엄청나게 발전한 항공기로 인해 제대로 운영이 힘든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독일군의 항공우위가 사라진 대전중반 이후에는 이런 쉘터에서 숨어있다 기어나와 한두발 쏘고 다시 들어가는 소극적인 공격에만 주로 쓰였다.]
6월 7일에는 도심 외곽의 Sudwestspitze에 위치한 방어진지에 7발을 발사하였고 이때는 보병부대가 동시에 투입되었다. 6월 11일에는 시베리아 요새(Fort Siberia)에 5발이 떨어졌고, 6월 17일에는 막심고르키 요새(Fort Maxim Gorki)의 해안포대가 5발의 포탄 세례를 받았다. 결국 7월 4일까지 모든 화포를 동원하여 3만톤의 집중 포격으로 세바스토폴의 소련군의 철옹성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구스타프 열차포는 모두 48발을 발사하였다. 구스타프 열차포는 테스트 기간 중에서 260회를 발사하였고 여기서 48발의 실전 사격을 하였기 때문에 포신 내부가 마모되어 예비 포신으로 교체되었고 마모된 포신은 Essen의 Krupp社에 보내져서 내부가공(re-lining) 처리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전투는 독일군이 “구스타프 열차포”를 이용하여 1달(?)만에 손쉽게 점령한 것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으나, 실제 관련 기록을 보면 독일군은 독가스까지 사용하였고 병력과 장비면에서 훨씬 우세하였으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이는 고립된 소련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이 1942년 11월부터 1943년 6월말까지 반년동안 얼마나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는가를 알 수 있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구스타프 열차포”는 요새가 함락되자 해체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포들은 전쟁말기에 포획을 우려하여 파괴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화포의 역사기록을 보면 독일군의 “구스타프 열차포”가 800밀리로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2위는 미군의 “36-inch Little David 포”로 알려져 있다.
세바스토폴 공략에서 나름대로 “밥값”을 한 구스타포 열차포는 분해되어 북동부 전선으로 이송되었는데, 여기서 “레닌그라드” 공략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레닌그라드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타이지(Taizy) 열차역 근처에 조립되었는데, 막상 조립이 완성되어 포격 준비가 될 쯤에 “공격취소” 명령이 떨어졌다. 어쨌든, 구프타포 열차포는 1943년 겨울까지 레닌그라드 부근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했는데 독일군이 레닌그라드에서 철수하고 다시 서쪽으로 이동 배치되어 1944년 Warsaw Ghetto 전투에서 30발을 발사하게 된다. (“Warsaw Uprising”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1944년 폴란드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그리고 친독일진영의 폴란드군의 배신과 역습이 뒤죽박죽이 된 대규모의 전투이다.)
그 이후에 독일군은 구스타포 열차포를 소련군에 노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폭파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잔해가 1945년 4월 22일 쯤에 Auerbach에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숲속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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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언릉 BR52랑..레오폴드 들어가야 하는데..엄한 스타워즈에 빠져서..ㅠㅠ..암튼 리뷰 짱~!
역시 리뷰를보면 않지를수 없게 만드시는군요!!!!!
허거덩,,, 드뎌 시작하셧군요. 정말정말 기대만빵입니다. 흐미 이 많은 자료를 으찌 ..역시 미라지님입니다.ㅎㅎㅎ
크허~ 역시나 재미있는 리뷰. 레오폴드 지름신이 다시 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