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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홍 글모음 원문보기 글쓴이: 뜰못(김홍)
웃으며 가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가야만 한다면 울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웃으며 가는 것이 자신에게 더 좋지 않겠는가!
지셴린
우리는 걸어가고 있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가는 문이다. 자오푸라오趙朴老 선생께서 생전에 내게 예언 같은 말을 하신 적이 있다. 1986년 선생과 나는 반선대사班禪大師와 함께 공군 전용기를 타고 네팔에 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공항 대기실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오푸라오 선생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남들은 모두 울면서 가는데 지셰린만 웃으며 가고 있어." 지금까지도 그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웃으며 간다'는 것은 논리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강엄江淹이 지은 《한부恨賦》의 마지막 부분에 '예로부터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한탄하지도 억울해하지도 마라"는 구절이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피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하는 것이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위험이 훨씬 줄어들기도 한다. 생사처럼 피할 수 었는 것에 도전했다가는 재앙을 입게 될것이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가야만 한다면 울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웃으며 가는 것이 자신에게 더 좋지 않겠는가! 아주 간단한 이치다. 이렇게 보면 '웃으며 간다'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사람은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지닌 동물이다.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 사람의 감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길을 '웃으며 간다'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려면 긴 시간 동안 훈련과 수양이 필요하다. 자오푸라오 선생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분이셨다. 평생을 채식주의자로 사셨을 뿐만 아니라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헛된 말은 한 마디도 하신 적이 없다. 그런 분께서 내게 웃으며 간다고 말씀하셨으니 난 그 '예언'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비록 아흔다섯이나 먹었지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이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10년 후쯤이면 그럴 만한 나이가 되겠지만.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
“1970년대 말. 베이징대학교 캠퍼스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신입생은 모든 게 낯설었다. 고향에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들고 입학 수속을 밟기엔 너무 버거웠다. 마침 길을 지나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염치불구하고 가방을 잠시 맡겼다. 일 처리를 하다 보니 가방을 잊었다. 아뿔싸, 점심시간이 다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가방 생각이 났다. 급히 되돌아가 보니 노인은 땡볕 아래 아직도 가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튿날 입학식에 참석한 신입생은 깜짝 놀랐다. 그 노인이 학교 주석단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지셴린 베이징대학교 부총장이었다.”
베이징대학교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일화의 노인이 바로 책의 주인공 지셴린 선생이다. 중국에서는 ‘국학대사’‘학계태두’‘국보’ 등으로 불린 중국의 지성이다.
빛바랜 중산복을 입고 한평생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대학자. 그는 평생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빈둥거리지 않는다’‘수군거리지 않는다’는 생활상의 삼불 원칙을 지키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2009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중국의 대학자. 모든 중국 인민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말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선거가 다가오니 여기저기 학자 출신의 정치지망생들이 보인다. 그들 중 몇몇은 훌륭한 인품과 지성으로 이미 인정받은 분들도 있지만, 석연치 않은 여러 스캔들에 시달려 온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지셴린 선생의 글을 읽으며 느낀 점은 무엇보다 친 할아버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한없이 편안했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인생의 고난을 수없이 겪어온 선배의 따뜻한 이야기. 결코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한없는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의 따뜻함과 진중함을 느낀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생명을 잃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고,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지 않을 때에도,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며 혹독한 세월을 견뎌낸 지셴린 선생. 그는 학문으로 구원을 찾았고, 또한 삶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참 스승이 없다고 개탄하는 한국 사회. 하지만 모든 것이 선생님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스승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은 이곳에서, 과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에게 평등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마저 앗아가려 했던 어른들, 한 보수 정당의 선전 문구처럼 “전교조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며 고액 과외나 사설학원, 해외유학에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는 부모들. 이런 척박한 교육 환경에서 과연 지셴린 선생과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을까.
지금의 중국은 분명,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아울러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못지않은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기나긴 역사는 쉽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요란하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조용한 시냇물처럼, 따뜻한 녹차 한 잔처럼 담담하게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넌지시 조언하는 지셴린 선생의 글은 그 자체로 중국의 힘이자, 인류의 가치가 아닐까.
10년 고난의 세월동안 선생은 도연명의 시를 읽으며,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고 한다. 때문에 선생의 글에는 도연명의 시가 자주 인용된다. 그의 시처럼 우리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한 다음, 느긋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책이었다. 늦었지만 지셴린 선생의 명복을 빌고 싶다.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아줄까?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히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네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 기사입력 2009-07-16 오후 12:09:31 <ins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POSITION: relative; BORDER-LEFT: medium none; PADDING-BOTTOM: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WIDTH: 200px; PADDING-RIGHT: 0px; DISPLAY: inline-table; HEIGHT: 200px; VISIBILITY: visible;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PADDING-TOP: 0px"><iframe style="POSITION: absolute; TOP: 0px; LEFT: 0px" id="aswift_0" height="200" marginheight="0" frameborder="0" width="200" allowtransparency="allowTransparency" name="aswift_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ins> 지난 11일 향년 98세로 타계한 지셴린 베이징대 명예교수는 12개 언어에 능통한 중국의 대학자로 중국언론에서는 그를 '인간 국보'로 불러왔다. 특히 베이징대 동방어문학부를 창설한 그는 우리나라 문명교류학의 대가인 정수일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1952년 베이징대 동방어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지셴린 선생의 권유로 아랍어를 공부하게 됐으며 그 이후 문명교류학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정수일 선생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이끈 옛 스승을 기리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노스승 지셴린(季羨林)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순간 슬픔과 애달픔을 금할 수 없다. '국학의 대사', '학계의 태두', '국보'로 높이 추앙 받아온 선생님의 타계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학계의 크나큰 손실이다. 옷을 여미고 머리 숙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노스승과의 첫 인연은 5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 여름, 중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국가통일시험에 합격되었다는 소식만 듣고 한달음으로 베이징대학에 찾아갔을 때, 대학은 시내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사하느라 개교를 미루고 한창 기숙사를 짓고 있었다. 신입생이 기거할 곳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아득히 먼 변방 옌벤에서 마차와 버스, 기차를 번갈아 타며 나흘이나 걸려 찾아온 곳에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동방어문학부 신입생으로서 의지할 곳은 학부 주임(학장)이신 지 선생님뿐이었다. 학자풍의 인자하신 선생님께서는 사연을 들으시고 나서 무턱대고 자택에 와 지내라는 것이다. 초면에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사양하니, 친히 대학 관리부서로 이끌고 가 대책을 신신 당부한다. 결국 실내 체육관 2층에 매트리스를 깔고 임시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거기서 달포나 지내는 동안 선생님은 몇 번이고 찾아오셨다.
학기가 시작되자 동방어학 중(당시는 9개 어학) 전공어학을 선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물론 전공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최종 배정하지만, 학생들의 지망은 참고하기 때문에 사색이 필요하다. 역시 상의를 드릴 분은 선생님이시었다. 12개 언어에 달통하신 선생님께서는 한국어와의 상관성을 들어 몽골어나, 아니면 전망성으로 미루어 아랍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주셨다. 사실 한국어와 몽골어와의 관련성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아랍어의 '전망성'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결국 아랍어과로 배정되었다. 선생님의 뜻 깊은 배려였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랍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50여년간 내내 아랍-이슬람 세계와 씨름하면서 선생님의 그 탁월한 원경지명과 사려에 거듭거듭 감복하곤 한다.
선생님은 인문학의 모든 분야를 두루 통섭하신 학계의 태두이시며 동양학의 거장이시다. 선생님의 학문적 연구분야만 해도 인도 고대언어, 토카리스탄어, 인도 고대문학, 인도불교사, 중국불교사, 중앙아시아불교사, 당사(唐史), 중국-인도 문화교류사, 중국-외국 문화교류사, 중국-서구 문화의 비교, 미학과 중국 고대 문학예술론, 독일 및 서양 문학, 비교문학, 민간 문학, 산문창작 등 실로 다종다양하며 분야마다에서 발군의 업적을 남기셨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80년대에 이미 『지셴린문집』24권이 출간되었다. 그래서 선생님께는 고문자학자. 사학자. 동방학자. 사상가. 번역가. 불교학자. 산스크리트어학자. 작가 등 근 열 가지 학문적 전문가 칭호가 따라 다닌다. 특히 산스크리트어 고전 학문분야에서는 세계적 석학으로서 명성이 높다. 해박한 고전 지식으로 동양학의 원류를 밝히시는 선생님의 강의와 논저는 구지욕에 불타는 우리 젊은 학도들의 가슴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40여년이 지나서 이순(耳順)을 훨씬 넘긴 나이에 이 제자가 감방에서 만학으로나마 산스크리트어를 익히려고 한 것은 바로 선생님이 일찍이 심어주신 학문인자(因子)의 싹 돋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자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일진대, 학문은 그래야 이어지고 살찌는 법이다. 1955년 말, 카이로대학 유학을 앞두고 선생님 댁에 들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제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축하를 보내주셨다. 한 말씀 부탁드리니, 잠시 사색에 잠기셨다가 '아랍은 고전의 보고'이니 고전부터 독파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아랍 고전에 관한 연구는 독일이 가장 앞섰다고 덧붙이신다. 학문에 달관한 스승의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고는 그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유학기간 어렵지만 고전에로의 접근만은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접근을 위해 스승이 예시한대로 독일어에도 손을 댔다. 고전은 학문의 샘이다. 샘물만이 참 물이다. 강물이나 냇물은 이미 참 물이 아니다. 뿌리 없이 휘젓기만 하는 얄팍한 학문적 세태를 탈피하는 첩경은 '고전벽(癖)'이다. '고전벽'에 미쳐야 학문의 경지에 미치게 된다.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제자의 학문적 신조다. 스승을 떠나보내는 이 순간, 이 신조가 새삼 되새겨진다. 세월은 어느새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환국을 앞둔 어느 날 인사차로 노스승을 찾아갔다. 그날도 선생님은 고적 속에 파묻혀 계셨다. 이제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찾아온 사연을 말씀드리니, 처음엔 섬뜩 놀래시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으시면서 특유의 인자함과 소탈함으로 동정을 표시하신다. 앞에서도 보다시피, 선생님은 늘 제자를 중국 경내에 사는 한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조선(한국)의 한 젊은이로 보셨기에 제자의 환국을 오히려 의젓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노스승과의 만남은 아쉬움을 감싸는 환담으로 이어졌다. 인생과 학문에 관해 또 한 차례 많은 귀중한 가르침과 당부를 주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위국효용'(爲國效用), 즉 '나라(조국)를 위해 배운 것을 효과 있게 쓰라'는 독려였다. 그러시면서 산스크리트어 번역시 한 권을 송별 선물로 주셨다. 노스승은 참으로 학문도 바닥 없이 깊거니와 도량도 한량없이 넓으신 분이다. 선생님은 높은 학덕만큼이나 인품 또한 고매하다. 늘 빛바랜 중산복 차림에 천으로 지은 책가방을 자전거 핸들에 걸쳐놓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던 그 수수하고 소탈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불의 앞에선 굽히지 않는 유약한 지식인이 아닌, 강인한 지성인의 표상이시다. 선생님의 삶의 좌우명은 도연명의 시 한 수에서 따온 "거칠고 변화 많은 세상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걱정할 것이 없으리"다. 얼마나 호방하고 떳떳한 인생관인가.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무지막지한 '문화대혁명'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맞받아 나가셨다고 한다. 당시를 회고한 책 『우붕잡억(牛棚雜憶)』(『외양간의 갖가지 기억』, 여기서 '외양간'은 '문화대혁명' 때 비판 대상자들이 갇혀있던 장소를 빗댄 말)에 의하면, 스승은 연금상태에서 낮에는 홍위병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도 밤에는 서양시를 중국어로 번역하셨다고 한다. 지성인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국무총리 원자바오(溫家寶)는 병석에 누워계시는 선생님을 다섯 차례나 방문해 치국(治國)의 가르침을 구하면서 '정신적 스승'으로 높이 모셨다고 한다. 지금 학계의 거목이 쓰러졌으니 세상이 다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문이 중히 여겨지고, 학자가 대접 받는 사회만이 진정한 문명사회이고 바람직한 미래사회다.
스승이란 자신의 삶을 일깨워주고 이끌어주는 사표이다. 스승의 가르침과 이끄심이 있기에 사람은 성숙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참 사표, 참 제자가 고갈된 사회는 병들고 썩은 사회, 무망(無望)의 사회다. '하루 스승 백년 어버이'(一日之師 百歲之父)라는 말은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하고 영원한가를 일러준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야말로 전세와 현세, 그리고 내세까지 이어지는 '사제삼세'(師弟三世)라고 하니, 인연치고는 가장 끈질긴 인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럴진대 스승이 남기고 간 유업은 제자가 맡아 수행해야 한다. 학문에 국경이 없듯이 사제 간에도 국경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노스승과 같이 덕재(德才)를 겸비한 세기의 '사건 창조적 인물'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스승이시여, 저승에서 이승의 학문개화(學問開花)를 지켜보시면서 고이 잠드시소서. 다시 한번 머리 숙여 명목을 비는 바이다. 2009년 7월 15일 불초제자 정 수 일 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