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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무비꼴라쥬 결산 스페셜톡
2012.12.27.목 / CGV압구정
이원재 프로그래머
반갑습니다. 저는 무비꼴라쥬 프로그래머 이원재입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분들과 함께 한 해를 돌아보면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김영진 평론가, 남인영 평론가, 심영섭 평론가, 이동진 평론가, 한창호 평론가를 소개하겠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2012 무비꼴라쥬 결산 스페셜톡을 시작하겠습니다.
2012 MUST SEE 영화
이원재 프로그래머
저희가 행사 전에 평론가분들께 리스트를 받았습니다. 베스트 영화, 과대평가/과소평가 영화와 더불어 MUST SEE 영화를 각각 선정했어요. 평론가마다 주제가 다릅니다. 자료를 보면서 선정의 이유 혹은 추천의 변을 듣는 것으로 문을 열겠습니다.
김영진 평론가
독립영화를 추천합니다 ▷ 남영동 1985 / 두 개의 문 / MB의 추억 / 미국의 바람과 불
올해 대중영화 쪽에서 고무적인 성장 지표가 나왔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즐긴 만큼이나 크게 자극받지는 못했습니다. 역시 자극을 받았다면 독립영화 쪽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몇 개를 추천했습니다. <남영동 1985>는 부산영화제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관객을 가둔 채 끝까지 가는 용기가 놀라웠어요. 그 안에서 컷들이 잘 붙는 것도 그렇고,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 사이의 층이 다양하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부릅뜬 두 눈을 보며 완전히 케이오 됐어요. (웃음) 올해의 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문>은 이런 소재를 다루는 다큐라면 으레 카메라가 피해자 편에서 같이 버티면서 찍어내는 미덕이 중시되는 패러다임이 있는데 그걸 완전히 바꿨어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건을 재구성하고 관객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두 감독의 총기에 감동했습니다. <MB의 추억>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통쾌했어요. 당시에 야권 후보들은 연기를 못하는 반면 그분은 연기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건 올해도 여지없이 되풀이된 것 같아요. <미국의 바람과 불>은 대한뉴스 화면을 재편집한 겁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치욕이 느껴져요. 그야말로 오랜 연구와 조사와 성찰이 만든 다큐멘터리입니다. 본 사람이 거의 없어요. 비가 쏟아지는 날 GV를 했는데 소수의 사람이 모여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회가 닿으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남인영 평론가
다큐멘터리를 추천합니다 ▷ 두 개의 문 / 간지들의 하루 / 버스를 타라 / 불안 / 아무도 꾸지 않는 꿈
저는 다큐멘터리를 추천했는데 극장에서 개봉한 것들은 방금 김영진 평론가와 대부분 겹칩니다. 거기에 살짝 제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미국의 바람과 불>은 제 또래 친구와 같이 영화제에서 관람했는데 보는 내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미국이 신화나 이데올로기를 어떤 방식으로 작동시켜서 우리를 근대화의 과정으로 몰아세웠는지 적나라하게 나오거든요. 나도 모르게 떠들다가 관객한테 야단맞았습니다. “아줌마! 조용히 좀 하세요!” (웃음) 저는 그 영화는 관객들이 다 같이 비웃으면서, 썩소를 지으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개의 문>은 성적소수자 문화운동을 하는 연분홍치마에서 만든 작품이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용산 참사라는 국가적 사건을 다뤘어요.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가슴으로 이야기하는 방법을 열심히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대중과 소통하는 스토리텔링에 대해서 아주 열심히 연구한 분들이거든요. 그 점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가 이루어낸 업적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밖에 <간지들의 하루>, <불안>, <버스를 타라>, <아무도 꾸지 않는 꿈>은 영화제에서만 상영되었고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꼭 보실 수 있길 바라고 정말 좋은 작품이니까 관심을 가져주세요.
심영섭 평론가
힐링시네마를 추천합니다 ▷ 자전거 탄 소년 / 늑대 아이 / 원데이 /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 라이프 오브 파이
저는 상담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합니다. 점점 많이 하게 되네요. 여기저기서 힐링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죠. 사실 ‘힐링시네마’라는 말은 6년 전에 제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 매해 10대 힐링시네마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말을 쓰기가 싫더라고요. 힐링 뒷면에 푸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우리가 힐링을 찾을수록 그 안에 있는 푸어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생활이 빈곤해지고 가처분소득이 줄어들면서 빚어지는 살풍경 때문에 힐링이라는 말 자체가 오히려 당의정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뽑지 않을 순 없죠. 제가 선정한 것들은 실제로 영화 치료에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예요. 이 영화들은 영성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전거 탄 소년>에서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흥을 떠올려보세요. 소년이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잖아요. 누군지 모르지만 휴대폰이 울리면서. 작은 관심과 의지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감동이 있죠. <늑대아이>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아이를 기르는 것에 관한 내용인데요. 심지어 늑대의 아이를 갖는 거잖아요. 타자도 포용해야 하는 게 바로 모성이거든요. 그 모성의 눈물겨움을 잘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영화 위주로 골랐습니다.
이동진 평론가
유럽영화를 추천합니다 ▷ 토리노의 말 /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자전거 탄 소년 / 멜랑콜리아 / 파우스트
저는 제 취향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연말이 되면 리스트를 꼽곤 하는데 어떤 해는 미국영화, 어떤 해는 일본영화 위주로 구성이 됩니다. 올해는 또 유럽영화, 특히 거장 위주로 뽑게 됐네요. 그만큼 좋은 작품이 많았습니다. 올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토리노의 말>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입니다. 믿지는 않지만 혈액형의 일반적인 특징을 빌어서 얘기한다면, <토리노의 말>은 A형이 만든 걸작처럼 보이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O형이 만든 걸작처럼 보여요. 참고로 저는 O형인데 남들은 A형이라고 착각합니다. (웃음) 혼자서 막 고민을 하다가 결국 <토리노의 말>을 1위로 꼽았습니다. <토리노의 말>은 감독이 스스로 영화에 부여한 것들을 약간의 오차도 없이 만든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감독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그냥 풀어놓은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전혀 다른데 두 작품 다 좋았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을 보면서는 다르덴 형제 영화는 이제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깜짝 놀라게 됐어요. 또 다른 도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멜랑콜리아>는 이제껏 제가 본 가장 훌륭한 재난영화였고, <파우스트>는 영화 역사상 미술적으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소쿠로프의 신작인데 역시나 좋았습니다.
한창호 평론가
아트영화를 추천합니다 ▷ 토리노의 말 /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아버지를 위한 노래 / 멜랑콜리아 / 파우스트
여기 아트영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를 판가름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해 관습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보다는 무비꼴라쥬를 찾는 관객들이 봤으면 하는 것들입니다. 소위 어려운 영화입니다. 영화는 일정한 공식과 코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비교적 그런 관습에서 떨어져 있고, 자기 미학을 실현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남한테 강요하는 기분이 들죠. <토리노의 말>이 좀 그렇습니다. 벨라 타르는 과거 동구권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이 순식간에 흔들리는 격동의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롱테이크로 유명하죠. 지나치게 롱테이크를 많이 쓰는 영화의 경우엔 감독들이 대개 자존심이 센 편입니다. 자기 미학에 대한 자신감이 지나쳐서 강요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좋게 봤습니다. <파우스트>는 저도 어려웠습니다. 소쿠로프를 좋아합니다. 이 사람 또한 러시아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미학적으로는 장르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주로 회화주의를 쓰고 있는데, 미술의 텍스트와 영화의 텍스트를 서로 대화하게 만드는 솜씨가 뛰어난 것 같습니다. 비록 그게 많은 관객을 만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새로운 미학을 개척하려는 의지 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2012 한국영화 갑론을박 BIG 3
이원재 프로그래머
그럼 이제 평가가 엇갈리는 작품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많은 분들이 지지하는 영화죠. 그런데 김영진 평론가는 베스트 명단에 이 영화를 넣지 않으셨어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일단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영진 평론가
바로 그런 이유로 안 꼽았습니다! 예상한 대로 할 줄 알았지? 나도 다른 취향이 있는 사람이야. (폭소)
이동진 평론가
어제 씨네21 잡지에서 30명의 영화인이 꼽은 올해의 베스트를 봤어요. 그걸 보면서 개개인의 욕망을 느꼈습니다. 한국영화를 리스트로 세울 때와 외국영화를 리스트로 세울 때 평자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30명 중에 <범죄와의 전쟁>을 1위로 꼽은 사람이 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영화가 전체 2등입니다. 이상하죠.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웃음) 이 작품은 젊은 감독의 잘못된 혈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깨진 거울을 쳐다보는 행동을 통해서 인물의 분열을 형상화하는 장면은 유치하게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민식 캐릭터는 지금껏 한국 아니라 외국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흔히 장르의 토착화라고 말하는데, 이 영화가 그걸 이루어냈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그동안 윤종빈 감독의 작품은 디테일은 뛰어나지만 무엇을 위한 디테일인지 의문을 가졌어요. <용서받지 못한 자>는 과대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비스티 보이즈>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장르영화로서 더 이상 뭘 바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거시적인 조망 능력까지 있어요.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연기입니다. 한 명도 나쁜 연기가 없고, 연기의 앙상블에 관한 한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창호 평론가
저도 3위로 꼽았는데요. 저 아트영화만 보는 사람 아닙니다. (웃음) 우선 젊은 감독이 장르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뒤가 잘 안 보였거든요. 나홍진 감독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 외에는 특별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반가웠습니다. 나머지 감상은 다른 분의 의견과 비슷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그곳이 제 고향입니다. (웃음)
남인영 평론가
저는 그곳이 생활의 터전이라 약간 다른 시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선 이 영화는 8, 90년대 권력과 폭력, 정권과 건달이 어떻게 말단 공무원까지 연결되고 야합되는지 장르의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쾌감과 동시에 섬뜩함을 주는 영화라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조폭, 깡패, 마약 관련 소재는 전부 부산을 배경으로 합니다. (웃음) 사실 <도둑들>도 결국 부산에 와서 결판을 내잖아요. 일종의 영화적 상상력이죠. 항구가 있으니까 거친 느낌이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장르영화를 만드는 분들이 전형성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와 풍경을 찾아내면 좋겠어요. 그런 것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심영섭 평론가
부산영평상이 이 작품에 1등을 줬을 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광해, 왕이 된 남자>보다 훨씬 뛰어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미시적, 거시적 조망의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한 아비가 학맥, 인맥 등을 이용해서 어떻게 자기 가족을 지켜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거든요. 주인공은 대단한 악역인데 이상하게 미워할 수가 없어요. 일정 부분 우리네 아버지를 연상케 하니까요. 걸핏하면 나이 찾고 걸핏하면 경주 최씨 무슨 파 찾는, 총알이 없는 총을 들고 있는 아버지.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사회적인 긴장감을 놓지 않아요.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한통속이 되어 가는지 보여줍니다. 때만 되면 폭력을 이용하고 거기에 연결된 기생 집단을 배신함으로써 국가가 어떻게 국민을 기만하는가에 관한 놀라운 통찰력이 이 영화에 들어있습니다.
이원재 프로그래머
다음은 <건축학개론>입니다. 김영진, 심영섭, 이동진 평론가는 베스트인데 한창호 평론가는 과대평가로 지적했습니다.
김영진 평론가
한창호 평론가의 비평이 궁금하네요. 저는 이 영화의 로맨스 라인은 재미가 덜했어요. 설정 자체가 크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다. 과연 그럴까? 그것보다 영화가 담고자 하는 공간이 좋았습니다. 남자가 엄마한테 지겹지도 않냐 막 그러잖아요. 그럴 때 엄마가 집이 집이지 좋은 게 어딨냐고 하는데, 그게 이 영화의 알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흔적들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공간의 자취와 더불어 삶의 자취를 껴안는 태도가 진심으로 감동적이었어요.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로 나뉘죠. 어른 대목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왜들 저래? (웃음) 그런데 과거로 가면 볼 만해요. 그쪽은 말이 되든 안 되든 재밌어요. (웃음) 어쨌든 두 개를 교차한 이유가 삶의 태도에 있다면 저는 좋다고 본 겁니다.
한창호 평론가
다 좋다고 하니까 긴장이 좀 되네요. 저는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 별로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아직까지 저는 한국영화가 대학 캠퍼스를 주 배경으로 하는 데 약간의 거부감이 있습니다. 거기서 첫사랑 이야기하는 것도 그래요. 김영진 평론가는 그런 부분으로 잘 보신 것 같은데, 저는 계속해서 너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대학이라는 공간은 이제 많이 가는 곳이긴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선택받은 자들의 공간이죠. 본인의 노력보다 운명적인 조건에 좌우된다고 봅니다. 그런 것은 별로 영화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보편적인 사랑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젊었을 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영섭 평론가
사랑에 관한 영화는 많지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는 드물어요. 저는 이 영화가 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진솔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한국영화가 건축을 담론화하는 부분입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는 사랑이 지진 같은 거라고 하고, <건축학개론>에서는 매일매일 건물을 개축하듯 인생도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한다고 하고, <말하는 건축가>에서는 건축이 굳이 시선을 끌지 않아도 그 속에 담겨 있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참 이상하죠. 나라에서는 토목 사업을 하면서 건축이 뭔가를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건축을 삶이나 사랑과 연관시켜서 사유합니다. 저는 이런 게 흥미로워요. 국가와 대중의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거죠. 그것을 영화가 정확히 이야기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게 2012년 안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또 한 가지,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워요. 한가인이 쌍년이 된다는 거. (웃음) 여자들은 자기가 힘들 때 첫사랑을 찾아가고 싶어 하고, 가요. 그런데 남자들한테는 그게 너무 치명적인 거라서 쌍년이 되는 거거든요. 남녀의 불협화음과 동상이몽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재밌었습니다.
남인영 평론가
심영섭 평론가와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달라지는 게, 저는 감정이입이 잘 안 됐어요. 이 영화는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고 세월이 흘러 삼십대 중반이 된 남자가 찌질하게 살면서 갖는 로망을 다루고 있거든요. 그래서 수지가 뜰 수밖에 없고 한가인이 쌍년이 되는 거죠. 그러면서 남자가 나머지 인생을 튼튼하게 살기 위해 그다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강화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요. 그래서 제가 들어가서 공감할 자리는 없었어요. 그런 집은 갖고 싶더라고요. (웃음)
이원재 프로그래머
이제 <피에타>를 얘기해볼까요? 베니스에서 상을 받은 이후로 워낙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역시나 재밌습니다. 남인영, 한창호 평론가는 베스트로 꼽았고 김영진, 심영섭 평론가는 과대평가라고 지적했어요. 먼저 남인영 평론가부터.
남인영 평론가
솔직히 그동안 제가 김기덕 감독 영화를 지지하거나 좋아해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인류를 야만의 세계로 몰아넣고 여성을 도구로 쓴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일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감독의 세계가 넓어졌어요. 이번에 <피에타>를 보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그것을 질문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이성이나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요즘 세상엔 이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영화 속 이미지가 그냥 야만스러운 게 아니고 의도된 야만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베니스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한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런 문제는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로 질문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게 영화의 화두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심영섭 평론가
말하기가 너무 조심스러워요. 베니스에서 상을 받던 날 새벽 6시에 기자가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믿어지세요? 그것도 일요일이었어요. 예전에 허문영 편집장이 저한테 ‘김기덕 저격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다 부담스러워요. 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서 <빈집>을 좋아해요. 사실 홍상수 감독에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김기덕 감독한테는 관심이 있습니다. 다만 보기가 두렵고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새로운 비평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영감을 주는 감독이었습니다. 일단 전제할 말은 <피에타>가 상을 받은 것이 한국비평계의 실패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김기덕 감독에 관한 비평이 한국영화계의 자장을 풍성하게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거기에 제가 조금이라도 기여를 했다면 기쁘겠어요. 그런데 누구의 전용 평론가로 언급되는 건 싫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공식 석상에서 하는 첫 언급입니다. 일단 김기덕 감독의 영화 안에서 <피에타>는 초창기로 되돌아간 듯해요. 김기덕 감독의 시각적 이미지는 물로 시작해서 종이로 갔다가 유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다 그것이 후기 작품으로 가면서 다 사라지고 초월적인 경지가 됩니다. 그런데 <아리랑>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서는 다시 분노, 증오, 원한 등이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유리가 강철로 변한 것 같아서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심리적으로 힘든 여정을 거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김기덕 감독을 직관적으로 이해합니다. 그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이 다시 여성에 관한 증오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여자 그림에다 칼을 딱 던지는 장면. 그 모든 게 마리아 코스프레라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이미지의 변용 자체는 대한민국에서 천재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냉장고 박스가 결국 관의 이미지로 이어지잖아요. 그런 건 타고난 축복인 것 같아요. 그러나 한편으로 아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김영진 평론가
이야기보다 이미지로 끌어당기는 게 중요하지만, <피에타>는 그게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취향을 많이 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아리랑>과 <아멘>을 너무 안 좋게 봤어요. 기분이 나빴어요. 스크린 바깥의 정보를 아는 것도 안 좋거든요. 그 영향도 있을 거예요. <아리랑>을 보면 감독이 자문자답을 하잖아요.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하죠. 서구의 국제영화제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거라고 얘기할 때,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두 작품이 활시위를 뒤로 당기는 역할을 해서 다시 극영화를 내놓았죠. 저는 김기덕 감독 영화가 말이 없을 때 좋았거든요. <빈집> 때 내가 너무 심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다시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상징과 구체적인 대사가 많아요. 청계천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좋은데 다른 독립영화에 비해서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녜요. 여러모로 감흥이 안 왔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피에타>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상을 받은 건 축하할 일이죠.
한창호 평론가
저는 좋게 봤습니다. <아리랑>과 <아멘>은 김영진 평론가가 말한 것 이상으로 안 좋게 봤는데, 이번 작품을 보면서는 한 작가가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나라든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정체성이 겹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건 학습이나 이성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운명처럼 오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김기덕 감독에겐 운이 있다고 봅니다. 직관이나 본능으로 하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효과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외국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볼 때 칠레와 유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독재 속에서 성과가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과속하는 바람에 영혼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은 나라. 칠레에는 파블로 라라인이라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 사람 영화를 보면 비슷한 역사를 살았던 한국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많이 느낍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들, 웬만한 외부의 충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괴물처럼 변해가는 사람들. 제3세계에서 산업국가로 급성장한 나라의 뒷면을 보여주는 거죠. 저는 이 영화가 한국 사회를 쇠붙이로 표현하는 데서 놀랐습니다. 다른 나라들에겐 한국이 차가운 금속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거든요. 영화에서 그 금속을 다루는 공간도 비인간적이죠. 그렇게 첫 장면부터 한국사회의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점이 좋았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반가웠어요.
이동진 평론가
저는 <피에타>가 흔한 김기덕 감독 영화 중 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장점이 있고 안 본 척할 수 없는 단점이 있어요.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를 둘러싼 현상입니다. 며칠 전에 어머니를 만났는데 블로그에 올린 한국영화 베스트를 보셨다는 거예요. 영화를 안 보는 분인데 10위 안에 왜 <피에타>가 없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러면서 살살하라고. 영화를 거의 안 보는 어머니도 그럴 정도이니 정말 현상은 현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 평단에서 홀대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일관된 톤이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것은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인데요. 올해만 해도 그래요. 청룡영화상도 받았고 부산영평상도 받았어요. 영화 나올 때마다 씨네21에서 특집을 해요. 제 생각에 한국에서 비평적으로 가장 많이 서포트 받은 감독은 홍상수 감독이고 두 번째로는 김기덕 감독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프레임은 이상한 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문학동네 겨울호를 보다가 쇼크를 받았는데, 천명관 작가가 김기덕 감독론을 썼더군요. 그 글의 핵심은 한국 주류사회가 김기덕 감독을 껴안지 못한다는 겁니다. 작가도 이렇게 본다는 거죠.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 흥미로운 글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12 한국영화를 떠나보내며
이원재 프로그래머
모든 영화를 개별적으로 말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2012년 한국영화를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동진 평론가
“2012년 한국영화는 OO이다”에 저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관객이 1억 명을 넘고 천만 영화가 두 편이나 나왔죠. 얼핏 봐서는 풍성한 한 해처럼 보이는데, 사실 베스트 10을 꼽으려고 보니까 이런 영화까지 넣어야 하나 싶은 거예요.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합쳐서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10편 가운데 한 편도 안 들어갈 것 같아요. 도대체 누구를 위한 1억 명이란 말이냐,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에 <타워>를 봤어요. 영화를 기획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게으르고 자존심이 없을 수 있나 싶더군요. 명확한 의미에서 표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타워>가 <타워링>을 베낀 것도 아니고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데이브>의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유명한 레퍼런스가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2, 30년 전에 성공했던 영화에서 가져오는 것이라면 비참할 정도로 얄팍한 기획이죠. 지금으로부터 9년 전으로 돌아가면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등이 나왔습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실패했지만 나머지는 흥행 면에서도 성공했거든요. 그 영화들은 지금도 보잖아요. 그런데 올해 성공한 영화들은 5년 뒤에 누가 볼까 싶어요. 한심스럽습니다.
심영섭 평론가
'숨 막히는 등장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 대중의 욕망을 끌어안은 영화는 분명히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근 <26년>을 보고 뭉클했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돈 모아서 영화를 만들까. 역사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문제를 영화로라도 어떻게든 소구하려는 몸부림이 느껴지지 않나요?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26년> 등 사회파 영화들이 나오고, 그 안에 대중의 발언이 있고, 그게 다시 SNS로 퍼져나가고. 만듦새를 떠나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광해, 왕이 된 남자>, <도둑들>, <화차>, <돈의 맛> 등을 보면 너무 균질적이에요. 장르적 쾌감만 이어지거든요. 이미지의 변용이든 줄거리의 파격이든 캐릭터의 변화든 이물감이 있는 영화가 좋다고 봅니다. 그게 독립영화를 보는 이유죠. 배우가 풍성해졌다는 것도 말하고 싶어요. 김고은, <범죄와의 전쟁>의 조연들, 조정석, 수지 등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성이라는 자의식을 도저히 못 버리겠어요. 더 많은 여성이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올해는 김희정 감독의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신수원 감독의 <순환선> 등이 있었죠. 여성 감독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원재 프로그래머
하고 싶은 말씀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남인영 평론가
저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갈수록 배급 구조와 상영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낍니다. 거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게 바로 오늘의 행사를 주최하는 CGV라고 생각해요. (웃음) 영화는 이윤 창출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유산이자 공공재라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습니다. 우리가 욕망을 균질하게 만들어서 그렇지 사실 사람들은 다 다른 걸 보고 싶어 하거든요. 그걸 소구할 수 있는 게 바로 다양성영화인데, 환경이 여의치 않아서 얼마 전에는 상영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죠. 이건 관객들이 같이 요구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다행히 무비꼴라쥬에서는 극장을 확장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반가운 일이죠. 이제 퐁당퐁당 상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한창호 평론가
남인영 평론가와 동일한 입장입니다. 상영이 너무 제한적이라 답답합니다. 그런데 극장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봐요.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죠. 유럽이라고 해서 독립영화가 극장을 쉽게 잡는 건 아니거든요. 투자, 제작, 배급, 상영을 한 군데서 다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작년도 마찬가진데 올해도 한국영화 베스트 10개를 꼽기가 어려웠습니다. 타자들과 같이 본다고 생각했을 때 민망한 작품이 제법 많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방금 표절이 아니라고 했는데, 글쎄요. (웃음) 정말 민망하죠. 심지어 제목까지 비슷하게 만드는 걸 보고 있으면 참. 다른 나라는 이렇게 메뉴가 편협해지기 시작할 때 독립영화를 키우는 쪽으로 얘기가 나오거든요. 우리도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영진 평론가
사실 이런 문제는 국가가 개입을 해야 하는데 참여정부 때도 못 했어요. 지금 그런 마인드를 요구하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 내적으로 스태프의 수준은 여전히 훌륭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술적인 퀄리티도 좋아요. 요즘은 다들 촬영도 잘하더군요. 비과학적인 느낌인데 저는 2, 3년 안에 올 거라고 봐요. (웃음) 시간이 지나면 상업영화의 웰메이드 하향평준화는 바뀔 거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친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무비꼴라쥬 직원들은 진짜 열심히 일합니다. 정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아마 지금보다 더 잘 될 것 같아요. 여러분도 지지를 해주십시오.
이원재 프로그래머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주인입니다. 다 함께 호흡하면서 보다 나은 영화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뼈아픈 얘기도 해주십시오. 추운 날 늦게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모든 행사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