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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미타불, 옥황상제, 부처, 공자, 예수를 만나다.
노월천(시인 공주대 명예교수)
2006년 4월7일 손녀 김진희의 결혼일이다. 천안에서 예식을
마치고, 아산시 막내(현래) 내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4월 8일 오전 6시 온양 신천탕에 갔다. 원형의 탕에서 뿜어나는
온천수가 그렇게 맑고 깨끗할 수가 없다. 정화수란 이렇게 솟아나는
물을 두고 이름인가. 유리알처럼 맑디맑은 파란 물 정말로 속인의
발을 들여놓기가 아까울 정도라.
사전에 준비 없이 그 답 탕에 뛰어든 것이 화근이 되고 만 것이다.
나 (이하 ‘환자’라 칭함) 는 탕에 들자마자 무아경에 이르고 말았다.
잠시 후 막내가 와서 보니 아버지가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아버지!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몸체는 물위에 반쯤 떠있고 도시
움직이는 기색이 전연 없다. 숨도 쉬지 않는 듯하다. 거듭 아버지!
아버지! 큰소리로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부랴부랴 119 구급차를
불렀다.
아산시 당직병원(한사랑병원) 에 도착하니 시간은 6시 30분을 지나
고 있다. 의사가 황급히 진찰을 마치더니 지금 서울은 너무 멀고 천안
의 순천향대 아니면, 단대 병원으로 빨리 가란다. 다시 차를 몰아
순천향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시간은 적이 7시 30분이다. 의사와
간호사는 바삐 움직인다. 혈압을 재고 눈동자를 살피며 맥을 짚어본다.
이때까지 환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얼마쯤 지나서 의사 5~6명이
더 들어왔다. 이때다 숨이 멎은 듯 지금껏 전혀 움직이지 않던 환자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더니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머리를 내두르고
몸통을 뒤튼다. 팔다리를 정신없이 휘젓는가하면 땅땅 바닥을 치기도
한다. 의사 한분은 머리를 반듯하게 잡고, 다른 분은 각각 팔다리를
잡는다. 오체가 얼마나 강렬하게 움직이는지 의사들이 환자를 진정
시키기에는 힘이 부칠 정도다. 의사 말하기를 팔다리를 묶어 매란다.
막내가 묶으면 아니 된다고 하니 팔다리에 둘씩 매달리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환자는 이를 갈기 시작한다. 인공의 틀니를 끼웠다.
그도 잠시뿐 다시 으드득 소리가 나더니 틀니가 부서져 동강이 난
것이다. 이 때 의사들이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의사 한 분은 처음
겪는 일이라고 혀를 찬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는가. 한 분 두 분
모여든 의사가 모두 11명이 된다. 이는 환자의 상태가 위급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는가하면 맥이 뛰는가를 청진기로
살펴보기도 한다. 이렇듯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막내는 우리
아버지를 살펴주십시오 의 기도문을 외웠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제껏 저희 모든 가족과 특히 부모님의 건강을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좋은 가정에 태어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근데 하나님, 지금 이 시간 제
아버님께서 목욕탕에서 입수사고로 사경을 해매고 계시오니 상황이
급하나이다. 주님! 죽은 나사로를 4일 만에 살리신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제 아버님을 구원 하소서. 제 아버지를 살려 주시옵소서. 성한 몸으로 구원
하소서. 아직 주님께 나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나이다. 해야 할 일도
많으시며, 특히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나이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살게 하시면 아버지를 주님께로 인도하겠나이다. 도우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곡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숨이 멎은 듯 조용히 누워만 있던 환자, 일컬어 식물인간 , 그는
몸통이 산산이 부서지는 요동을 장장 30여 분간 계속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몸부림이요 용틀임이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불가사의 한 일이다. 10여명의 의사들은 처음 겪는 일이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런 극한상황의 요동이
갑자기 거짓말같이 멈추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환자는
조용하다. 이제 잠이 든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빛을 살펴보니, 조금씩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잠든 모습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님!
생명에는 이상이 없겠습니까. 지금 예판 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기다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2.
4월 8일 오전 10시경 순천향병원 중환자실에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라기보다 숨 쉬는 기색이 거의 없고 의사의 정밀진단에서
겨우 맥이 도는 듯 했다고 한다.
한 낮이다. 허공에서 외치는 소리가 낭랑할 수가 없다.
‘아미타불 납시오’ ‘아미타불 납시오’ 를 두 번 반복한다. 아미타불이
오십니까? 예 그러하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미타불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근엄한 표정의 아미타는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옷은 도포를 입었다. 아미타는 서방정토에 있다고 하는 부처의
이름이다. 무량불 또는 무량광불 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내 앞 책상에
나를 마주하고 있는 아미타는 한지로 꿰맨 두꺼운 책을 펼치더니,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넘기는 책장에 무슨 글자가
쓰여 있는가를 살폈으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옥황상제 납시오’ 란 말이 반복된다. 내가 말하기를 ‘상제’
는 제가 알겠습니다만 ‘옥황’이란 무슨 뜻이옵니까? 예. ‘옥황’이란
하늘 땅 우주에서 한 분 밖에 없다는 존엄한 뜻이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옥제가 내 앞에 나타났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옥제는
얼굴보양이 좀 크고 긴 편이며 역시 도포를 입고 있다. 옥황상제는
도가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다. 그도 아미타와 마찬가지로 한지로 꿰맨
책을 한 장한 장 넘기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무슨 글자가 쓰여 있는가를 살폈으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부처님 납시오’ 란 말이 반복해서 낭랑하게 들려온다.
부처는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불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는 평소
그림에서 불상에서 익히 보아온 바라 낯이 익은 편이다. 자비심이
넘쳐나는 미소 띤 둥근 얼굴에 옷은 도포를 입고 있다. 부처가 내
앞에 와서 상제와 나란히 앉아 있다. 부처 역시 한지로 꿰맨 두꺼운
책을 꺼내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무슨 글자가 쓰여 있는가를 살폈으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공자님 납시오’ 를 두 번 반복한다. 공자는 유가의 비조다.
평소 사진에서 그림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익숙한 모습이다.
인자한 표정에 사각형에 가까운 웃음 띤 얼굴 모양이다. 역시 도포를
입고 있다. 공자 역시 책상 앞에 나와 마주 앉았다. 한지로 꿰맨
두꺼운 책을 꺼내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마찬가지로 넘기는 책장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으려 했으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납시오’ 를 두 번 반복한다.
예수는 기독교의 개조다. 예수 역시 사진에서 많이 보아 낯이 익은
편이다. 평화로운 얼굴 모습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했든가. 예수 역시 공자 옆에 나와 마주하고 앉았다. 한지로 꿰맨
두꺼운 책을 꺼내어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마찬가지로 넘기는 책장에 무슨 글자가 있는가를 살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아 읽지는 못했다.
3.
아미타불, 옥황상제, 부처, 공자, 그리고 예수 이렇게 다섯 분이 차례로
나와 나를 중심으로 내 앞에 타원형으로 앉아 있다. 이들은 옆에 있는
분과 서로 무슨 이야기인가 주고받기도 하고 또 나를 쳐다보기도
한다. 나와의 대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기술한 바와 같이 다만 이들이 한 결 같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무슨
글자가 쓰였는가 살폈으나 끝내 읽지 못했다. 그것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때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꿈에서
다섯 분을 만난 것이다.
잠에서 깨어 시간을 보니 오후 6시가 적이 넘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 집 곧 평소 내가 잠을 자던 침실이 아니다. 아하!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상한 일이다. 오늘 아침 6시에 온양의 신천탕에 간 것만
생각나고 그 후로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러니까 장장 12시간을 잠에
빠진 것이다.
둘러보니 가솔들이 모였다. 나를 보더니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아마도 내가 죽었다고 파발 한 것이다. 옆에 지켜보던 보살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내가 왜 죽어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이것이
깨어나서의 제 일성이었다.
저녁 식사가 올랐다. 밥이 아니고 미음이다. 이렇게 중환자실에서
4일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겼다. 안마사를 부르려고 하니 병원 측에서
아니 된단다. 이제 정신은 또렷하다. 그러나 몸체는 움직여지지
않는다.
의사 말하기를 이런 경우 10~20%는 걸을 수 있지만, 80% 정도는
식물인간이 된단다. 더구나 70대의 고령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식이다. 절망에 빠져 있기를 장장 12시간. 나의 몸이 따스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눈도 한번 떴다 다시 감았다. 그래서 꿈도 꾸었나보다.
따라서 다시 생명을 찾은 것이다. 기적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랄까. 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는 기적과 같은 일은 믿을 수는
없을까.
아산시 배방 경희한의원 김흥관 목사는 부활(復活)의 기적, 너무도
희귀한 일이라고 놀라는 표정이다. 사람이란 호의호식하고 벼슬자리를
탐내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선물해 준
것은 아닐까.
삶과 죽음! 이는 어찌 뜻대로 되는 일인가. 공자 역시 죽음에 대해
묻자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焉知死)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태어난 후 삶에는
백퍼센트 나의 뜻에 따라 내 삶을 내가 살아 나간다. 삶에는 어떤
공식이나 방법이 없다. 다만 그것을 내가 찾아 내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강점이요 특장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가지고 생활하는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요 살아있는
동안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한다.
나라고 하는 이 몸체도 정말 내 것이 아니다. 이승을 떠날 때는
버리고 가는 것이다. 부귀, 명예, 사랑, 권력 그리고 여타의 모든 것,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 빌렸기 때문에 언젠가는 되돌려 줘야 한다.
따라서 너무 가지려고도 하지 말아야한다. 많이 가지려 욕심 부리다
가진 것 마저 잃을 수도 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마음이 비워지면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빈 마음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오늘 일은 오늘 생각하고 오늘 기획하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내일 기획하자. 이런 평범한 생활철학이
새삼 떠오른다.
2006년 병술년. 내 나이 73세 갑술생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얻은 작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생각하니 마음은 편하고 가뿐하다.
君師父一體
노 월천
<예산향교 고문>
군사부일체란 임금∙ 스승∙ 아버지는 격(格)이 같은 한 몸체라는 말로,
이 세분의 은혜는 모두 같다는 뜻이다. 임금이 먹여주지 않으면 내가
자라지 못하였고, 스승님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내가 도(道)를 알지 못
하였고, 아버지 아니면 내가 태어나지 못하였으니, 이 세분은 한결 같
이 섬겨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은 국부(國父)요 스승은 위대한 분이지만, 아버지는 농사꾼에 불
과한 보잘 것 없는 촌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가 임금과 스승의
대열에 나란히 놓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은 나라에서 한분 밖에 없는 지존한 인물이다. 따라서 임금은 자
기자랑 이나 가문자랑 등을 하지 않는다. 또한 임금은 백성이나 신하
들을 높이 평하거나 칭찬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다만 나라에 큰 공헌
을 했거나 과거 특히 중시(重試)등에서 장원했을 때 이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정도다.
스승도 마찬가지다. 만인의 교사나 인류(人類)의 스승일수록 자기자랑
이나 가문자랑 등을 일체 하지 않는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스승은 제
자 들이 많은데도 칭찬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임방이 예
의 근본을 물었을 때 크도다 물음이여“! (林放 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八?>라고 크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논어 전편을 통해서 질문 했
을 때의 이런 칭찬은 흔치 않은 대목이다.
아버지는 글자 한자 배우지 못했고 농사일은 천직으로 알고 땅만 일구
는 존재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 일망정 자기자랑 가문자랑 등을 하지
않는다. 설사 아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있어도 자랑이나 칭찬을 하지
않는다. 마누라 자랑은 말할 것도 없다. 예부터 자식자랑은 칠부에 속
하고 마누라 자랑은 불출(不出)이라고 했다.
이렇듯, 임금은 먹여주시고, 스승은 가르쳐주시고, 아버지는 낳아주신
그 위에, 이들 세 분은 하나같이 자기자랑을 비롯해서 가문자랑 자식
자랑 칭찬 등을 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 서로 교감(交感)되는 공통점
에서 군사부일체라고 명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출전):<國語晋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