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길
2023. 6. 24.
인현왕후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계비(繼妃)로서 본관은 여흥 민씨이다 인현왕후는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서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왕후였으며 유교적 이념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 국모로서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조정과 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장희빈의 계락으로 폐서인이 되었을 때 이곳 수도산 청암사에서 3년간 머물며 복위를 간절히 기원하던 중 숙종의 교지를 받고 환궁하였다. 그 후 인현왕후는 청암사에 서찰과 선물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조선시대 말에는 궁녀들의 시주로 불사를 일으켰으며 현재 승가람마(僧伽藍摩)이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시에서는 인현왕후의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인현왕후길”을 조성하였다. “인현왕후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8월의 걷기여행길”에 선정되었다. 이 길을 걷다보면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현왕후의 따스한 인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현왕후어제등록
인현왕후어제등록은 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1701)가 기사환국으로 폐서인이 되어 청암사에 3년간 은거 중에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하면서 청암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 어제(御製)이다. 현재 원본은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내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수도산 자락, 품에 안기다
인현왕후는 명성대비의 3년상까지 숙종과 함께 지내온 왕후임에도 불구하고 기사환국으로 인해 대거 숙청된 서인들과 함께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된 비련의 왕후기 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남겨진 물건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고, 또한 인현왕후를 구하려는 자 모두를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였다. 조선시대 야사(野史)를 기록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숙종은 “후비(後妃)가 투기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나 오늘같이 심하지는 않았다. 이런 행동으로는 하루도 국모 노릇을 할 수 없겠으므로 폐출(廢黜)하라고 명하는 바이다.” 라며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이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받아온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백성들 또한 인현왕후의 이러한 처지를 슬퍼하였다. 이시기에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민요가 불리어졌다 고 전해질 만큼 만인지상의 왕후였던 인현왕후와 일개 궁녀였던 희빈 장씨와의 운명은 한 순간에 바뀌게 되었다. 궁궐에서 쫓겨난 인현왕후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남인의 해코지도 두려울뿐더러. “인현왕후를 구하려는 자 모두 역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숙종의 선언으로 인해 선뜻 도우려 나서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인현왕후는 어머니인 은진 송씨 집안인 외가와 인연이 닿은 수도산 청암사(靑巖寺)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머물게 되었다.
첫댓글 사진이 아주 멋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