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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이경옥 이야기
1.
이경옥을 만나기로 했다. 궂은날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하다. 어젯밤 왜 그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왜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경옥. 첫사랑처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니 잊고 싶지 않은 이름이라 전화를 걸었는지 모른다.
기억하고 싶은 일보다는 잊고 싶은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잊으려 할수록 더욱 또렷이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잊히지 않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 잊어서는 안 될 사람. 망각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있듯이.
이경옥. 만나면 뭐라 부르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경옥은 2007년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숱한 이의 기억에 자리 잡은 사람이다. 그해 7월,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다 질질 끌려 나갔던 그는 이랜드일반노조 부위원장이었다.
‘부위원장 이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왜 이리 가슴이 아린지 모르겠다. ‘이어야’ 하는데 ‘이지’ 못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니 가슴이 아리다 못해 찢기는 것 같다.
이경옥은 ‘디아스포라’다. 온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처럼, 고향을 떠나 흩어져 떠돌며 살아야하는 사람처럼, 이경옥은 ‘노동자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까르푸가 이랜드에 넘어가면서 홈에버 노동자가 되었던 이경옥은 홈에버가 홈플러스에 매각되면서 이랜드 노동자도 홈플러스 노동자도 될 수 없게 되었다. 해고노동자지만 복직 싸움을 할 수 없고, 홈플러스 조합원이지만 법적으로 조합원이라 불릴 수도 없다.
그 기막힌 사연을 들으려고 이경옥에게 전화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잊고 싶지 않아서 만나는 거다. 이경옥의 얼굴을, 이경옥의 이름을, 그리고 이경옥이 디아스포라가 되기 전까지 한 노동자로, 한 노동조합의 간부로 살았던 소중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궂은날 그를 만나러 나섰다.
이경옥을 만나자 비가 쏟아졌다. 서둘러 구로동의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건물 로비에 조용히 앉아 이야기 할 휴게실이 있다. 이경옥은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오는 길이란다. 이랜드에서 징계해고를 받아 실업급여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홈플러스와 협상이 타결되면서 권고사직으로 사유가 변경되어 신청 자격이 생겼단다.
마주 앉았지만 딱히 물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불쑥 튀어나온 말이 “홈플러스와 협상이 타결되었을 때 마음이 어땠어요?” 다.
파업 지도부의 ‘아름다운 희생’이었다고 말들을 했다. 핵심 지도부가 복직을 포기한 조건으로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복직시켰기에. 간부라는 직책을 빼면 이들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하루하루 빠지지 않고 일해야 한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다. 자식들 학비도 챙겨야 하고, 아픈 이의 병원비도 챙겨야 한다. ‘아름다운’이라는 말보다는 이들이 감내해야 할 ‘희생’에 내 마음은 멈춰 있었다.
“홈플러스와 타결되었을 때 진짜 너무너무 좋았어요. 타결을 해서 조합원이 현장에 돌아갈 수 있어서……, (간부들이 한) 약속을 사실로 확인시켜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내 마음이라도 읽기라도 한 듯 이경옥은 타결이 되어 ‘너무너무 좋았다’고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내 이경옥의 눈은 촉촉이 젖으며 충혈이 된다.
“너무 좋았죠.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맞댔던 조합원을 보지 못하면서, 오백 날을 울며불며 부둥켰던 조합원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니까……, 타결하고 한 일주일 정도는 거의 공황상태였어요. 조합원을 보지 못하니까……. 글도 쓰고 이러면서 뭔가 정리하고 새롭게 하고 그러고 싶었는데, 앉아 있으면 울고 이랬어요.”
동료들이 기쁘게 현장으로 복귀하는 모습에 너무너무 좋았지만 집에 홀로 남았을 때 쏟아지는 눈물은 참을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하였을까? 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을까?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볼펜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이경옥이 말을 잇는다.
“타결하면서도 제일 아쉬웠던 것이, 우리가 복직을 포기하고 권고사직 받아들이면서, 하여튼 활동을 해야 할 현장이 없다는 거, 현장이 없으면서 어떤 활동이 가능할까, 어떻게 조합원을 만날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현장이 없다는 거, 현장이 없다, 아…….”
눈물을 지우려는 듯 이경옥은 미간에 힘을 주며 눈을 크게 뜨려고 애쓴다. 그 눈동자가 참 맑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요. 아, 내가 활동할 곳이 꼭 내가 일하는 사업장만은 아니다.”
마치 흔들리는 마음을 되잡기라도 하듯, 눈물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오뚝이처럼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한다. 그랬기에 ‘공황상태’에서 헤어났겠지. 씩씩하게 홀로 울었던 날을 이야기 하겠지.
요즘 이경옥은 바쁘다. 파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협상을 타결해야 한다는, 하루빨리 조합원들이 일터에 돌아가 신나게 일해야 한다는, 부담을 탈탈 털어버린 이경옥은 푸른 하늘을 날듯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느라 바쁘다.
“나름 바빠요. 상급단체였던 서비스연맹에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라는 말도 있고, 민주노총 서울본부 북부지구협의회에서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하자는 말도 있어요. 저녁에는 용산 참사 관련하여 집회도 가야 하고요.”
이경옥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입고 있는 똑같은 조끼를 여전히 입고 있다. 권고사직을 받아들였으니 조합원이 아니라고 법적 잣대를 들이대지만 그는 여전히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사업장의 조합원이다. 아니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이경옥에게 이제는 어떤 이름이 새겨진 조끼를 입더라도 어울릴지 모른다. 홈에버 노동자에서 영원한 노동자가 된 거다. 물론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새기고 살아야 하지만.
2.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로 2007년 여름은 시작되었다. 비정규직의 눈물이 장맛비처럼 그해에는 쏟아졌다. 7월 1일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숱한 비정규직들이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월급을 올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더 편하게 일하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힘도 조직도 없는 비정규직들은 끽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밥줄을 잃어야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명은 세상의 숱한 소음에 묻혀 사라질 판국이었다.
법 시행을 하루 앞둔 6월 30일이었다. 오전 10시였다. 이경옥은 조합원들과 함께 홈에버 월드컵점 매장으로 들어갔다. 오후 2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매장을 완전히 점거했다. 하늘빛 티셔츠를 입은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이대로 쫓겨날 수 없다며 계산대 틈새에 박스를 깔고 잠을 잤고 컵라면과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 순간 그곳에는 ‘비정규직’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를 났다. 그리고 스무 날이 흘렀다. 7월 20일 오전 10시 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40분 뒤 매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점거농성이) 스무 날이 갈 줄은 아무도 몰랐죠. 1박2일을 목표로 매장에 들어간 거예요. 6월 10일이죠. 이랜드하고 뉴코아가 공동파업을 하기로 했죠. 6월 23일에 월드컵점에서 28일에는 면목점에서 점거 농성을 했어요. 6월 30일이 세 번째 점거인 셈이죠. 우리가 점거를 했다가 매장을 나오면 곧바로 영업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 조합원들이 계속 불만을 가졌어요. 저리 매장이 돌아가는데 우리가 아무리 외쳐봤자 소용이 없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30일에는 1박2일 농성을 계획하고 들어간 거예요. 조합원들은 농성 준비도 제대로 해오지 않았어요. 매장에서 조합원들이 토론을 통하여 농성을 이어간 거죠. 그게 스무 날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죠. 스무 날 농성을 하면서는 이 정도면 진짜 해결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싸웠는데 대화가 되지 않겠느냐, 조합원도 지도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1박2일 농성이 20일이 되었고, 20일을 싸우면 해결될 줄 알았던 싸움은 해를 넘겨 오백 날을 싸우게 했다. 가을이 오면 끝나겠지 했던 싸움은 추석 지나고 연말이 되어도 계속 되었다. 해를 넘겨 설날 전에는 끝나겠지 했는데 봄이 되었다. 끝나기는커녕 황사가 몰아친 듯 눈앞은 뿌옇기만 했다.
“이십일 농성을 하면서 어떤 사단이 나든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유통업체 특성상 매출이 제일 좋은 추석을 앞두고는 협상이 되어 타결을 하거든요. 그 여름, 한 여름 버티면, 뜨거운 여름 지나면 추석이니 끝날 줄 알았는데…….”
타결은커녕 이경옥은 구속이 되어 구치소로 가야 했다. 김경욱 위원장도 홍윤경 사무장도 구속이 되었다.
“저희가 구속되었던 석 달이 제일 어려웠던 시기라고 조합원들이 말해요. 왜 구속되었냐고 원망을 해요. 우리가 (구치소에) 들어가고 싶어 들어간 것도 아닌데요. 지도부가 구속이 되고나서 파업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이 줄어들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하니, 답답하니까 그런 거죠. (지도부) 공백기에 기륭전자처럼 삼사 년 가는 거 아니냐 하는 두려움이 조합원들에게 든 거죠. 11월 2일 날에 석방이 되었어요. 구치소에서 나와서 점심 먹고 집회에 갔죠. 그날 여의도에서 뉴코아하고 집회가 있었거든요. 저는 풀려나니 너무 좋았죠. 다시 힘차게 싸워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그랬어요. 이제 지도부가 다 나왔다. 다시 모였으니 의기투합해서 같이 싸우자. 대개 저는 신났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하면 결의에 찬 발언을 하고 그랬거든요.”
이경옥은 갇혀있는 동안 바깥 분위기를 몰랐던 것이다. 집회에서 발언도 하고 기자들하고 인터뷰도 하며 출소의 각오를 밝혔는데, 집회가 끝나고 나서 조합원 실정을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민주노총은 이랜드 싸움을 승리하지 않으면 민주노총 깃발을 내리겠다고 단호하게 투쟁의 결의를 밝혔었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랜드 기업과 총력투쟁을 선포하며 “노동조합을 인정치 않고, 노조와의 상생을 거부한 기업인 이랜드를 이 땅에서 기업을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도 했다.
출소한 뒤 조합의 현실은 이경옥의 결의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 여름 뜨거웠던 지지와 연대는 시들해졌고, 기세등등했던 조합원들의 사기는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는데 혼자 업(up)되어 그런 거죠. 대개 챙피하고 어색했죠. 저희가 구속되어 있어 차마 현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조합원들도 있었어요. 출소를 하면 복귀를 하겠다고 준비한 조합원들이 있다는 걸 알고……, 이게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알았죠.”
조합원들에게 서운한 적은 없었냐고 물었다. 머뭇거린다. 오백일을 싸웠는데, 어찌 서운한 게 없었을까? 이경옥도 조합 간부 이전에 사람이 아닌가. 짜증이 나는 일도, 조합원이 미운 적도, 관두고 떠나고 싶은 날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없겠는가. 서운한 점은……, 하고 운을 뗀 이경옥은 한참을 주저한다.
“……글쎄요, 저희는 조합원들이 지도부한테 서운해 했을 거 같긴 해요. 조합원들이 서운해 했겠죠. 저는 서운함은 없어요.”
이제 파업은 끝나고, 부위원장도 아닌데, 머뭇거리는 게 아직도 파업 지도부의 자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너무나……, 아니 끝까지 싸워왔던 조합원들이 저는 너무 고마워요. 그런데…….”
하지만 ‘그런데’에서 다시 멈칫한다.
“아니, 다만 그런 거는 있어요. 조합원들이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게 진짜, 솔직히 서운했죠. 오히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그랬으면……. 그런 걸 터놓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후유증도 있고 그랬었는데……, 조합원들끼리 반목도 있고는 했는데, 조금은……, 모르겠어요.”
이경옥이 울먹인다. 늘 다부지게만 여겼던 이경옥이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자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는지, 조합원들이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왜 터놓고 말하지 못했는지, 어떤 반목이, 어떤 후유증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물음표를 집어 삼켜야 했다.
이제는 이경옥을 비롯한 몇몇 간부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현장으로 돌아갔다. 새로 노동조합 집행부도 꾸렸다. 현장에 돌아가 일을 시작한 동료들은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경옥이 자신의 곁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홈플러스로 바뀐 경영체제에 적응하기도 버거울 것이다. 파업의 진통을 추스르기도 전에 새로운 문제들이 불거져 나와 혼을 빼 갈 지경일지도 모른다.
이경옥은 재빨리 심하게 흔들리던 자신의 목소리를 되잡는다.
“글쎄 모르겠어요. 하여간 힘들었어도 투쟁을 거부할 수는 없었던 거잖아요. 저는 신나게 하려고, 즐겁게 (투쟁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라서. 내가 정확히 조합원들이 힘들었던 거를 알고 나 있었던 건가,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조합원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거. 남편과 관계가 진짜 힘들어서 집회 나올 때는 몰래 시장가는 것처럼 하고 나와서 (집회 참여하고) 있다가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들어가고 그래야 했던 조합원들의 고통 같은 거. 남편과 싸움을 제일 힘들어 해요. 그리고 투쟁한다고 자식들한테 변변한 밥도 못 챙겨주고 용돈 한 번 못 주고, 길바닥에 나와서 싸우고 있으니까, 그게 처량 맞은 거죠. 조합원들은 그래서, 그게 제일 힘들었던 거 같아요. 그건 거가 아무리 싸울 의지가 있고 그래도, 울컥울컥 하는 거죠.”
이경옥은 자신의 서운함은 눈물로 감추고 조합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한참 이야기한다. 있으나마나 하는 남편, 남편 구실도 못하는 남편 이야기까지. 그런데 정작 자신의 남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3.
올해로 쉰둘인 이경옥. 그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기혼이라면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홀로 사는지 아니면 친구나 가족과 사는지, 묻지도 않았고 물을 용기도 없었다.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그대로의 이경옥을 바라보는 일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진짜로 저의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결혼해서 애 낳고 시부모님이랑 알콩달콩 사는 게 목표였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졌어요. 저희 남편과 갑작스럽게 사별을 하고…….”
이경옥의 현모양처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기 전까지는. 이경옥은 스물다섯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선을 본지 40일 만에 결혼을 했다. 자신의 소망처럼 시부모를 모시며 ‘알콩달콩’ 결혼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아이엠에프 때 직장을 정리하고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던 남편이 갑작스레 뇌출혈로 쓰러졌다.
“석 달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어요. 집에서 티브이 보다 쓰러졌거든요. 우황청심환 가져와라. 좀 이상하다 생각하며 약을 갖다 줬는데 벌써 사지가 뒤틀려서……. 119 불러서 병원으로 갔죠. 산소 호흡기를 끼었는데 이미 늦었어요. 식물인간이 되었죠.”
그렇게 석 달 동안 남편은 말 한마디 않은 채 무심히 누워만 있었다. 의사마저 잘못하면 재산을 다 탕진한다고, 알거지가 된다고, 빨리 포기하지 않으면 가족도 다 죽는다고 했지만 이경옥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꿈꾸는 줄 알았어요. 드라마 찍는 줄 알았어요. 현실이 아니라 생각했죠. 너무 기가 막혀 가지고……. 주위에서 포기해라 그러면 난 포기 못한다, 너 같으면 포기하겠냐! 하여튼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려고 했어요. 그렇게 석 달을 살았어요. 석 달 살면서 우리가 마음에 정리를 한 거지요. 그 석 달의 시간이 없이 남편이 떠났으면 아마 제가 미쳤을 텐데……. 서로 이별의 인사를 나눈 거죠. 어느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나는 남편 상태가 좋아져서, 사람이 깨어난 줄 알고 뛰어갔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기간이 저한테도 그렇고 우리 애들한테도 그렇고, 아무튼 가족들이 편안히 남편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아직 살아있는 거예요. 겉으론 멀쩡하게 보이지만.”
이경옥의 얼굴에서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과거가 흘러 나왔다. 지난 오백일 동안 이랜드 집회에서 스치듯 봐온 이경옥은 집회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여유 있고, 평온하였다. 그는 참 행복해보였고 구김 없이 살아온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의 눈물도 예외였듯이 그의 지난 세월도 뜻밖이었다.
남편과 사별하자 이경옥은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었는지 모른다. 한참 커가는 딸과 아들, 그리고 시부모, 자신까지 다섯 명의 생계가 그의 어깨에 한순간 툭 하니 떨어졌다. 1년 가까이 남편이 하던 식당을 친정어머니의 손을 빌려 운영을 해보았지만 신통치가 않았다. 설날 추석날 이틀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열었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었다. 이경옥은 영세자영업자는 돈을 못 번다는 결론을 당시에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식당을 접고 찾아간 곳이 까르푸다. 생활정보지에 난 구인광고를 보고.
“2001년 1월 17일 날 까르푸에 입사했어요. 까르푸 중계점이 만들어질 때요.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는데, 저는 몇 안 되는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어요. 직접식품 신선코너에서 일했고 제가 샐러드 샌드위치 담당 조장이었어요.”
이경옥은 지난 시절을 이야기할 때 연도뿐만 아니라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세세한 시간까지 말하기도 한다.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 이경옥의 가슴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거다. 아니 밤마다 지울 수 없는 순간을 자신의 마음속 서랍에서 꺼내 뒤적이는지 모른다. 일기장에 숱하게 되풀이하여 적고 있는 걸까.
우연찮게 노사협의회 빈자리가 생겨 ‘땜방’으로 노동자 측 위원이 된 이경옥은 첫 회의에 들어가서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땜방’으로 참여한 그날의 회의가 자신의 인생에 ‘화근’이었다고 회상했다.
“노측 위원 자리가 빈 거예요. 사내 총무부장이 저를 지나가다 보면서 너 노사협의회에 좀 들어와라, 이게 화근인 거죠. 그래갖고 제가 노사협의회를 들어갔죠. (회의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보니까 통보야. 맨날 노동자한테 일방적인 통보식이야. 이건 뭔가 잘못됐다. 노사협의회는 들어가 봤자 아무런 해결방법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직원들한테 계속 했죠. 직원들이 제가 위원이라고 저한테 이걸 해결해 달라 저걸 요구해 달라 해서 (그 제안을 가지고) 들어가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노동조합과 노사협의회가 뭐가 다른가를 계속 고민을 했었고. 3월 달이면 까르푸는 임금인상을 하는데, 막 소문이 나는데 올해 임금인상액이 2만5천원인가 얼마래요. 기본급 2만5천원 그랬나? 누구 맘대로 결정하나. 지들 맘대로 2만5천원이냐. 해주고 싶으면 멋대로 해주는 거야, 열이 받더라고요. 그러면 내 월급이 해마다 2만 5천 원씩 오르면 십년 되도 월급이 얼마냐? 이게 계산이 딱 떠오르니 암담해지더라고요.”
까르푸에는 이경옥이 입사하기 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있었다. 결성한지 6년이 지났건만 단체협약도, 상근자도, 조합 사무실도 없는 노동조합. 남자 직원들로 꾸려졌는데 자신들의 승진승급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었다.
이름뿐인 노동조합에 이경옥은 가입을 했고, 노동조합다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일을 했다.
“노조 만든 지 5년인가 6년 되었는데 무단협이래. 단협이 없데. (노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말발도 없고.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도 받고 했어. 민주노동당 노원지구당 찾아가서 당원 가입하고 (노동조합 하려는데) 도와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해 겨울에 투쟁기금 마련한다고 주점도 하고 별짓을 다 한 거예요. 그 다음 해에 교섭신청을 하니 회사가 콧방귀도 안 뀌죠.”
이경옥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전임 활동가로 화려하게 변신하였다. 이젠 가장으로 살아야 하는 이경옥.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고, 가족도 자신이 지켜야 했다. 당연히 자신의 일터도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일터가 아닌 희망이 보이고 신나는 일터를 만들려고 열나게 뛰었다.
이경옥은 까르푸 해운대 지부 창립식에 갔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다.
“근무 스케줄을 상사한테 보고 안하고 (해운대 지부 창립식에) 갔다는 거죠. 징계위원회에 들어가서 글쎄 무슨 말이냐? 매장에서 일상적으로 펑크만 안 내면 자율적으로 우리가 다 스케줄을 변경해가지고 일을 했었는데, 왜 나한테만 (보고할 의무가) 적용 되냐? 프랑스 점장이랑 맞대고서 눈 부라리고 싸우고 그랬어요. 저도 놀랬죠. 너무 열 받으니까 프랑스 점장이랑 맞대응하고 눈 똥그랗게 뜨고 막 부장들이 뺑 둘러 앉아있는데도. 안중근의사 같더라고요, 제가. 안중근이 취조 받을 때 그 사진이 언뜻 떠올라요. 한쪽에서 불어로 계속 통역하면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맘대로 하라고, 니가 이러면 부당징계 구제신청 할 거구, 끝까지 싸울 거라고.”
일제강점에 맞선 독립투사의 마음으로 이경옥은 노동조합을 했는지 모른다. 빼앗긴 조국을 찾는 마음으로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고 밤낮없이 노동조합을 위해 뛰었을 것이다.
이경옥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에 깜짝 놀란다.
“제가 대개 온순했거든요, 살아온 게. 진짜 온순하고 편안하게 살아왔어요. 어디 가서 큰 소리를 내거나 그런 적이 없어요. 저희 아버지는 항상 여자가 큰 소리 내면 안 된다, 잇몸을 내놓고 웃어도 안 된다, 사람은 겸손해야 된다, 느긋해야 된다, 이런 걸 주입식으로 교육해서, 저는 항상 그걸 되뇌면서 살았던 사람인데……. 그게 까르푸 들어오면서 바뀐 거예요.”
이경옥은 노동조합을 하며 자신의 몸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이경옥을 찾게 되었다. 2002년 5월 조합 간부 10명이 결의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300일을 싸워 노조가 만들어진지 8년 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파업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이경옥을 포함하여 세 명뿐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해고자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다시 까르푸 중동점이 파업에 들어간다. 물론 이경옥도 파업에 참여했다. 여기서 이름도 엇비슷한 한 남자를 만난다. 김경욱.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으며 500일 파업을 이끌었던 주역. 이경옥과 함께 ‘아름다운 희생’의 주인공이었던.
이경옥과 김경욱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2007년 이랜드 노동자의 투쟁이 가능했을까? 물론 잘못된 가정인 줄은 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지 않는 이들의 만남은 한국노동운동에 ‘비정규직’ 화두를 정면으로, 그리고 처절한 몸부림으로 던졌다.
4.
2002년 간부 파업이 한창일 때 한 통의 팩스가 날아왔다. 조합 가입원서다. 조합에 가입하려는 이유가 구구절절이 쓰여 있었다. 이경옥은 이 글을 읽는 순간 ‘차기 위원장 될 사람이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 글의 주인공이 김경욱이다. 김경욱이 누군가를 까르푸 중동점 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김경욱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중동점에서 일하던 조합원이 기절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 안 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직원들이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김경욱이 과장인데, 이 과장이라는 사람이 전보발령을 받아 왔는데 어찌된 판인지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나 파견사원만 챙긴다는 거예요. 정규직보다 더 약자인 비정규직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이러니 정규직 사원들이 이러다가 큰 일 나는 것 아닌가, 잘못하면 정규직에게 돌아올 혜택이 비정규직이나 파견사원에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합에 가입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김경욱이 조합에 가입한다니까, 놀라 자빠지려고 하는 거예요.”
중동점에서는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점장은 김경욱 과장에게 물갈이를 하라는 지시를 내린 거였다. 중동점은 까르푸가 국내에 상륙하면서 처음 문을 연 매장이다. 경영진은 “우중충하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구조조정을 준비하였다. 김경욱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고,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구조조정을 막아보려고 한 거였다.
과장이 나서서 조합에 가입을 해야 한다고 ‘설치고’ 돌아다니니 경영진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중간 관리자들은 승진승급에 누락될까 노심초사하며 몸을 사리며, 상사의 지시에 꼬박꼬박 따르는데, 김경욱은 ‘별난 인물’에 속했다.
간부파업이 끝나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때 부속합의서에 사용자 측의 요구안 중에 하나가 ‘김경욱은 위원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구를 넣자는 거였다고 하니, 김경욱의 활약상이 어떠했는지는 상상이 간다. 물론 이 황당한 경영진의 요구는 단체협약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 해 칠십일 간의 중동점 파업이 끝나고 치러진 위원장 보궐선거에서 김경욱은 ‘회사의 우려’처럼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2007년 홈에버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해고에 맞서 싸운 당당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과장 시절과 마찬가지로 김경욱은 위원장이 되어서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비정규직을 조합에 가입시키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2005년 단체협약 갱신을 할 때 노동조합은 1년 넘게 회사 측과 싸워야 했고, 결국은 비정규직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8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들의 고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단체협약에 명시할 수 있었다. 까르푸 노동조합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가입이 늘어났고, 이 힘은 까르푸가 이랜드로 넘어가면서 예고되었던 대량 해고에 맞설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이랜드로 넘어가기 직전 정규직 조합원과 비정규직 조합원 수가 반반을 차지 할 수 있었다. 처음 간부파업을 할 때 다섯 손가락으로도 꼽지 못했던 조합의 힘이 어느새 조합원 천 명이 넘는 노동조합으로 발전하였다.
이 힘에 이랜드 그룹은 굴복하였다. 노동조합을 ‘사탄’으로 여긴 이랜드 그룹은 까르푸 인수로 유통업체의 공룡으로 도약하려했던 꿈을 버리고 홈플러스에 홈에버를 팔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거리에 쫓겨날 뻔했던 홈에버 비정규직들은 고용이 보장되어 2008년 11월 소중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까르푸에서 이랜드로, 그리고 이제는 홈플러스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노동조합과 함께 자신의 일터를 지킬 수 있었다. 그것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아름다운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그 뒷면에는 보이지 않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지만.
이경옥은 이 시간의 중심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시간을 이경옥과 함께 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선명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5.
이경옥과 이야기를 마치고 함께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그 사이 비가 한바탕 쏟아져 내려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어찌나 씩씩하게 걷는지 쫓아가기가 힘들다.
김경욱 위원장, 아니 이제는 위원장이 아니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신세가 된 김경욱을 만난다고 구로역으로 간다고 한다.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뒤돌아서는 순간 이경옥이 부른다.
“사실은 저 남편과 사별하고 새로운 사람과 결혼 했어요?”
“네? 아, 네에.”
“누군지 아세요?”
머리를 긁적였다.
“노동조합하고 결혼해서 함께 살아요. 정말 잘 결혼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노동조합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처지를 비관만 했다면 이제껏 살아 있지 못할 거예요. 아마 미쳐 버렸을 거예요. 내가 힘없는 존재잖아요. 힘없는 사람들이 자기 힘없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어떻게든지 혼자 살아보려고 바동거리잖아요. 그러다보니 치사하게 살며 버티려고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버티기도 살아남기도 쉽지 않잖아요. 힘없는 사람은. 전 내가 힘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산 거예요. 노동조합을 만났고, 노동조합이 있었기에, 힘없는 내가, 비겁하고 치사하게 살아남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 수 있었던 거예요. 매번 무모한 투쟁과 파업을 했지만 내 삶에서는 한 번도 지지 않고 승리한 거예요. 그래서 전 노동조합과 결혼한 게 너무 행복해요.”
이경옥만이 이 시대의 디아스포라는 아닐 것이다. 쫓겨남이 일상화되고 떠도는 걸 상식처럼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국가는 있는 걸까? 국민은 있는 걸까? 또 의문이 든다. 과연 정규직이 있는 걸까? 자신이 현재 정규직이라고 해서 지금 자신이 안정된 일터에서 일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모두가 비정규직이다. 모두가 보장되지 않는 땅에서 보장되지 않는 노동을 하며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하루아침에 파산신고를 하고 자본을 철수해버린 쌍용자동차, 십년을 죽어라 다닌 일터가 자신도 모르게 하룻밤사이에 이사를 가버린 자티전자, 단체장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난 국립오페라단 단원들. 지금 꼬박꼬박 월급이 나온다고 맘 편히 일하는 걸까.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안녕한 사회일까. 대학생들은, 청소년은 미래에 자신이 안주할 땅이 있을까?
자신이 디아스포라임을 이미 깨달은 이경옥이 정말 ‘행복’한 사람일지 모른다. ‘내가 힘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인정한 이경옥. ‘나름’의 생존법을 찾아 당당하게 살려는 이경옥이 말이다.
이경옥이 지금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쑥 빨려 들어간다. 숱한 디아스포라들이 이경옥과 같은 방향으로,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이경옥과 등을 지고 발길을 옮긴다. 순간 사람들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땅이 사라졌다. 아니 땅이 사라진 게 아니라 땅을 딛고 걸어야 할 실체가, 존재가 사라졌는지 모른다. 가산디지털단지역 퇴근시간, 지금 사라진 존재들의 허상들이 바쁘게 걸어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