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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1876년 독일 고고학자 H.슐리만이 발견 ·발굴하고, 뒤이어 영국인 A.웨이스 및 그리스인이 조사하였다. 미케네문명의 중심지로 BC 1400∼BC 1200년경까지 번영을 누렸다. 유적은 BC 16세기∼BC 12세기의 것으로, 삼각형의 작은 산에 동서 약 300m, 남북 약 150m의 견고한 성벽이 있고, 그 북서쪽 구석에 사자문(獅子門)이 있다. 성벽 안에 왕궁 ·신전 ·원형묘역(墓域) ·창고 등이 있고, 창고 안에서는 간단한 기하학무늬 도기(陶器)가 많이 발견되었다.
분묘(墳墓)는 대대로 여러 사람을 매장하게 된 구덩식[竪穴式]의 분묘와 왕가(王家)에서 소수의 사람을 매장하게 된 둥근 천장의 큰 분묘가 만들어졌다.
미케네의 귀족들은 원형무덤과 같은 구덩이식 무덤에 묻히거나 또는 톨로스에 묻혔다고 한다. 왕궁 주위로 열개의 톨로스들이 발견되었는데, 밖에서 보면 자그마한 야산 같고(우리 고분보다는 뾰죡하다) 안에 들어가면 뾰죡한 원통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이 되어 있다. 이 무덤들은 벽돌을 내쌓기로 반구형으로 쌓아올려 꼭대기에서 돌하나로 완전히 마감하여 입구를 밀폐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부장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라고 불리우는 무덤이다
흔히 아가멤논(Agamemnon)의 마스크라 불리워지는 미케네 아크로폴리스의 5번째 무덤에서 출토된 데드마스크이다. 앞의 4번째 무덤에서 출토된 데드마스크보다 좀더 유려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위엄있는 얼굴 표정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 1장에 "사람들 중의 왕", "제우스가 영웅들 가운데 구별하여 명예를 준" 묘사와 일치되는 아가멤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미케네문명시대
그리스인은 인종적으로 에게해 지역의 선주민(先住民)과 인도유럽어족(語族)에 속하는 북방 침입자와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혼합민족이었다. 이들은 그 방언에 따라 아테네인 등이 속하는 동방 방언의 그리스인과 스파르타인 등이 속하는 서방 방언의 그리스인으로 대별되는데, 이 두 파는 동시에 남하하여 정주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자만이 BC 2000년경부터 침입, 그리스 본토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BC 1100년경까지를 미케네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동부의 미케네에서 강력한 왕국이 나타나 문명의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미케네 문명의 선구자는 바로 아카이아계(系)의 초기 그리스인이었으며, 그들은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왕궁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고 BC 1500년경부터 특색 있는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과 모방을 위주로 하여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략목적의 성벽을 축조하는 등 북방적 요소가 두드러졌던 점에서 크레타 문명과는 구별된다. 즉 평화적이었던 크레타 문명과는 달리 미케네 문명은 전쟁이나 사냥 등 상무적(尙武的)인 제재(題材)와 표현이 많았던 것이 그 특색이었다. 이 시대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및 기타의 전설과 몇 가지 유적 등으로 겨우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이 증대되고, 특히 당시 왕궁에서 사용하던 문서가 출토되어 해독됨으로써 오늘날에는 그 실체를 훨씬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독일의 상인이며 고고학자인 H.슐리만이 1876년에 호메로스가 그의 시(詩)에서 묘사한 트로이의 폐허인 히사를리크 언덕을 발굴하여 경이적인 보물들을 출토해낸 사실이라든지(1870∼90), 1939년 필로스에서 새로이 왕궁터가 발견되고, 또 점토판(粘土板)에 씌어진 많은 문서가 발견된 사실 등이 있다. ‘선상문자(線狀文字) B’라고 불리는 이 음절문자를 5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B.흐로즈니가 처음으로 해독을 시도하고, 52년 영국의 M.벤트리스는 이것이 최고(最古)의 그리스어임을 밝혔으며, 62년에는 미국의 C.H.고든이 그 해독을 크게 진전시킴으로써 오늘날에는 미케네 문명의 윤곽을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의 전설이 우리의 추측 이상으로 사실(史實)을 훨씬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발견이 뒷받침해 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케네 문명도 왕궁 중심으로 번영하였으므로, BC 1200~BC 1100년 사이에 필로스와 미케네 등의 왕궁이 완전히 파괴되자 그와 동시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 파괴를 자행한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BC 1200년경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제2의 그리스인의 물결, 즉 도리아인과 같은 서방 방언의 무리들이라는 것이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에 있다.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998. 8. 이문범 제공밧 모 섬(Patmos)지리적 배경도데까니스(Dodecanese)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밧모섬은 북쪽으로 이카리아(Icaria)와 사모스(Samos)가, 동쪽으로는 레입소이(Leipsoi), 남쪽으로는 레로스(Leros)가 자리잡고 있다. 길게 늘어진 섬은 길이가 12.5km로 약간 굽은 리본모양을 가지고 에게해를 향해 뻗쳐있다. 이러한 모양을로 인해 바닷물이 섬깊숙히 들어오면서 셀 수 없는 만(灣)을 형성한다. 꾸불꾸불한 모양의 해안을 모두 편다면 전체 길이가 65km나된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은 중간 부분으로 섬을 거의 갈라 놓을듯하다. 가장 높은 산은 남쪽에 위치한 해발 269m의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fitis Ilias)산이다. 현재의 밧모섬은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그린 책에 나오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섬 전체가 제주도와 갈릴리 바다근처와 같은 검은 회갈색의 현무암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풍화된 토양을 제외하고 섬 전체가 완만한 능선을 가진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언덕과 바다 사이에 있는 약간의 녹지는 지형을 부드럽게 만든다. 아데미의 열열한 사랑을 받던 셀레네(Selene; 그리스이 달신)의 섬인 밧모는 거의 일년내내 생명의 빛을 발하는 태양을 맞으며 그 몸을 바다에 담그고 있다. 좋은 일조량으로 밧모는 겨울 동안에도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여룸에는 북풍의 영향으로 시원하고 상쾌하다. 보다 작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동쪽에는 에게해의 검붉은 물결이 흰 파도를 일으킨다. 현대의 건축물들은 코라(Chora)와 스칼라(Skala)에 집중되어있다.성 요한 수도원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밧모섬의 주요 특징은 고요함이다. 수도원의 종소리와 승객을 태운 뱃고동만이 이따금 섬의 정적을 깬다. 밧모섬 면적은 34km2이고 주민은 약 3,000명정도이다. 교회적으로는 세계관구(Ecumeical Patriarchate)에 속하고 성 요한 수도원의 대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이다. 밧모섬에서 아테네의 항구 삐레아까지 뱃길은 163마일이고 배는 레로스, 칼림노스, 코스, 로도스, 사모스를 연결한다. 밧모섬은 지중해성 기후 영향으로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전체 섬이 얇은 풀과 다양한 관목, 크고작은 나무들로 덮혀있다. 소나무, 싸이프러스, 아루부투스(철쭉과), 유카리스, 위성류와 석류같은 과일나무들도 존재한다. 농가에서는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감귤류가 많이 재배되고 스칼라 항구와 섬 이곳저곳의 작은 정원에서 포도도 재배된다.
성 소피아 교회(비잔틴교회로 후에 회교사원으로 사용 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국가의 중심교회로 사용되었고, 비잔틴이 무너질 때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한 건물에 공유할 수 없는 두 종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소피아의 원래 이름은 Hagia Sofia이다. 터키사람들은 Aya Sofi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의미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성 소피아 교회는 두 번이나 붕괴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세운 건물은 AD 390년에 지어졌다.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이 건물이었던 이 교회는 4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유스티니안 황제 때, 532년에 히포드롬에서 마차 경기 도중 일어난 니카 반란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같은 해에 성 소피아의 재건축을 시작했다. 현재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건물이다. 이 건축에 동원된 기술자는 100여명, 노동자는 만 명이 넘는다. 이 교회는 5년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앙 본관에 반암 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다. 교회의 개장식은 대단히 화려했으며, 황제가 내부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범죄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성화 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많은 모자이크와 프래스코들이 손실되었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된다.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이 교회의 면적은 총 7,570m²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동안 사용했다.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 (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안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아침예배를 마치고 황궁으로 향하자 황제
행차 행렬이 황제를 에워싸고 있다. 이같은 행렬은 종교 대축일이나 민중 축제날에 항상
거행되었다. 황제의 지위가 이처럼 높은 위신과 영과을 누리는 것은그가 동방교회의 수장으로서 기독교 신앙에서 신과 지상의 살아 있는 중재자로서 봉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미랍을 보면 정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미랍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교사원은 메카 방향을 향해서 지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 정자 같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예배를 보는 장소로 술탄 압둘 메지트가 지었다.
천장 그림
입구를 통해서 바깥복도를 지나 안복도에 들어서면 중앙에 황제의 문이라 불리는 커다란 문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의 문은 노아의 방주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본당 좌우에는 두개의 커다란 항아리가 있는데 버가모로 부터 가져온 것이다. 등잔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에 밑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2층 모자익 벽화
2층 모자익 벽화
2층 모자익 벽화
2층 모자익 벽화
모자익 벽화
교회 내 모자익 성화(비잔틴 시대)
2층 갤러리에 도착하게 되면,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커다란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중앙에 예수님,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 쪽에는 세례요한이다. 이 모자이크의 맞은편에는 제4차 십자군 전쟁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라틴 십자군의 사령관 단돌로의 무덤이 있다. 북쪽 방향의 본당 벽을 보면 요한 크리소스톰과 익나티우스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프래스코를 볼 수 있다.
옴파리온(원 부분)
니케아(Nicaea)
현재명은 이즈닉이다. 이즈닉(Iznik) 호수의 동쪽면에 위치한 이즈닉 마을이 고대 니케아이다. 니케아는 제 1회 세계 종교회의가 있었던 장소이다. 전설에따르면 니케아는 포도를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준 디오니수스(Dionysus) 신에의해 세웠졌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주변에 포도원을 많이 볼 수 있다. 주전 316년 리시마쿠스가 이 도시를 정복하고 그의 아내 이름을 따라 니케아라 불렀다. 아랍, 비잔틴 오토만, 20세기 그리스등 나라에의해 부셔졌던 성벽은 여전히 현 도시의 대부분을 두르고 있다. 니케아인으로 제일 유명한 인물은 니케아의 힙파쿠스(Hippachus, 주전 146-126)인데 그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108개의 별에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천문학을 하란과 에뎃사의 선생들에게서 배웠고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을 이용하여 위치를 밝히는 과학적인 방법을 발명하였다. 그는 또한 달과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기위하여 시차(視差, parallax)를 이용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성장에대하여 딜레마에 봉착했던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Pliny)는 트라얀(Trajan) 황제 때 니케아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지역 기독교인에대한 보고를 했고 트라얀은 자비와 권위에 대한 충성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플리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기독교인들은 동이 트기 전 함께 모여 그리스도가 마치 신이기가 한 것처럼 찬양하며 절도와 간음과 기타 부도덕한 범죄를 범치 않기로 다짐하는 비밀집회를 가졌고, 플리니가 이 집회를 금지하였을 때도 계속해서 '천하고 과도한 미신행위'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인에대한 법적 절차가 정립되지 않았고 죄의 성격을 볼 때 국가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면서까지 색출해야할 극악한 것이아니기에 고발이 접수되었을 때만 수사하고 그때도 신들에게 예배하지 않을 경우 처벌해야한다고 명령하였다. 이 법은 수세기동한 기독교인에대한 로마의 입장으로 굳어졌다. 이즈닉의 주요 교차로에 성 소피아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789년 제 7차 종교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폐허는 유스티안시대의 기초를 포함하고 있고 1331년 회교사원으로 되었다가 15, 16세기에 불에타서 폐허로 있다가 터키과 그리스 전쟁 때 마지막으로 불탔다. 끝이 잘라진 회교사원 탑은 매년 봄마다 찾아오는 황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제 1차 종교회의는 호수변에 있는 콘스탄틴의 궁전에서 열렸다. 궁전의 돌들은 도시의 남서쪽 모퉁이가 물에 침수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건물의 모양을 추정하기 어렵다. 16세기에 이즈닉의 도자기공들은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은 타일을 만든는 사람들이었다. 색채감과 예술성있는 디자인에 더하여 토마토 색은 특이한 것이다: 1560-1620년에 이즈닉에서 생산된 타일에서만 이 색이 나타난다. 아일렌드 학자에의하면 이 이 기술은 1580년 로도스에 가기까지 했으나 이 색의 비밀 전수가 중지되면서 이 색은 더 이상 만들어 지지않았다. 어떤이들은 그 재료가 고갈되어 전수되지 못했다고 하나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타일은 이스탐불의 토카프 궁전 벽과, 이스탄불의 사원, 에딜렌의 셀리미예 사원에서 볼 수있다. 이즈닉의 고고학 발물관에서는 동전들과 석관과 함께 이 타일들을 잘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두번째 왕궁으로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43 ~ 1856년에 걸쳐 석조 궁전으로 재건 되었다.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과 선명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방의 벽들을 보면 호화스런 생활과 화려함의 극치를 느길 수 있다. 궁은 세부분으로 나뉘는 데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졌던 공공빌딩과 왕좌가 있는 홀이 가운데 있고 홀 옆으로 하렘이 있다. 궁에는 대략 250개가 넘는 방과 43개의 홀이 있으며 각 방의 실내장식을 각각 다른 분위기로 꾸미는 화려함을 보인다. 탁트인 홀에 매달린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은 헌상품으로 무게는 4.5톤이며 750개의 촛불 챔프가 켜져 있다. 궁과 궁의 각방을 꾸미는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사실 이 궁은 오스만제국의 약화가 가속화 되어가는 시점에 서구화를 지향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할 목적으로,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건립 되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막대한 건축비는 왕궁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궁전 내의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공화제가 확립된 후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다가 1938년 11월 10일 집무중에 죽었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17세기 천하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세계 곳곳에서 거둬들인 진기한 보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헌상품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골든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의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궁전으로서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강대한 권력을 가졌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성이다.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에서 반 정도가 톱카프 궁전을 사용 했다고 한다. 궁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다. 의사당이나 술탄의 거실은 물론 왕실의 여인들이 거처했던 하렘은 더욱 흥미롭다. 제 2정원의 오른쪽에는 굴뚝이 딸린 큰 부엌이 자리잡고 있는데 천장이 돔으로 된 10개의 큰 방과 28개의 굴뚝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 했음을 알수 있다. 골든 혼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은 마치 한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그 장엄한 아름다움 외에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사상 최적의 요새임을 알수 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언덕 끝에 동서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포진해 놓았던 군사요지이다. 이때문에 "Top대포, Kap문, Palace 궁전"에서 톱카프 궁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에는 4~6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던 만큼 궁전 자체가 하나의 마을 이었을 정도로 궁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아직도 궁전을 복구중으로 미공개된 부분이 많다. 현재 각종 유물과 보물은 4개의 방으로 나뉘어 전시 되고 있다. 총 몇점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따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궁전에만 하루 정도 투자하는 것이 좋다. 아야소피아 Ayasofya 성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곧게 뻗은 길 끝에 있는 궁전 입구인 '제국의 문'의 웅대함이 멀리서도 느겨진다. 제국의 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제 1정원이 나온다. 우측의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해 들어가면 바로 제 2정원의 잘 다듬어진 화단과 푸른 잔디가 있다. 정원을 에워산 궁전 내부의 건물들은 각기 독특하고 오른쪽 끝에 또 다른 매표소가 있는 곳이 바로 하렘이다. 하렘은 독립괸 박물관으로 취급되고 있으므로 별도의 티켓을 구입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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