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교당 담장)
우연한 기회에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있는 동학교당을 돌아보게 되었다.
동학이라함은 우선 동학농민운동과 전봉준을 떠올리게 된다.
동학농민운동 : 1892년 (고종2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되어 온 군수 조병갑은 부임이래로 갖은 수단을 다 써서
농민들을 노략질 했다.
그 중 가장 농민에게 원성을 산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와 수리세(水利稅)의 강제 징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30)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1894년 음력1월10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은 관아를 습격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학교당 밖의 정원모습
※ 상주동학교당의 유래
2대교주 최시형을 이은 3대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시하여 순수교
단을 표방하고 이념에서 벗어나자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주희 선생이
탄압을 피하여 보은으로 숨어 들어 처음에는 경천교라고도 하였으나
1915년에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동학교라고 하였다. 동학교는 일
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보수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1922년에는 조선총
독부의 공인을 얻어 1924년에 현재의 동학교당을 창건하고 동학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으로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을 꾀하였다.
그 후 1936년 일제에 의하여 공인 취소 되었으며, 일제의 탄압을 계
속하여 받아왔다.
소장유물 - 유물 177종, 1,084점 (민속자료 제 111호)
남재(南齋)는 동학교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는 건물이며, 조선시대 상류층의 행랑채와 비슷하다고 생각되고,
밤에는 부교주와 남자교도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낮에는 한문과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공간으로 이용되었단다.
들어오는 길과 남재사이 지금보이는 곳 넓은 마당으로써 교도들의 만남의 장소 와 하마에 편의성을 위한공간...
남재의 건물중 우측 3칸중에 가운데 칸에 걸려있는 편액 삼성경재(三省敬齋)
솟을문을 들어서면 배향을 할수 있는 공간이 따로이 마련된듯 한데 건축물은 완공하였으나 편액등이 없는것을 보면
아직도 조성중에 있는것 같았다.
연로하신 안 노인께서 안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볼수가 있었다.
아 ~~ 해 가 서산 마루에 걸렸으니 저녁 성찬을 준비하기 위하여 돌아보시는가 보다.
명칭은 잘 모르지만 청수상 이라는 것인가 아침 저녁으로 성찬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
교주이신 김주희 선생님 한분만 모시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분을 같이 모시는 것일까?
언제 다시가볼 기회가 생기면 그 때가서 알아봐야 겠다.
북재 뒤편담장아래 자리한 장독대 옛날에 사용하던 큼지막한 독들은 자리를 작고 예쁜 그릇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경계선 밖에 나 앉았다.
주인의 마음을 읽을수 있는 그릇의 모습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북재인 안채와 동재,서재,남재등으로 건축물이 배치되 있었다.
담당아래 연산홍도 양쪽에 똑 같이 심어져 무엇인가를 낮선 객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재 대문에서 바라보면 작은 담장을 볼수가 있다. 안채격인 북재속을 바로 볼수가 없고 북재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밖에서 볼수 없도록 하고 교에 대한 엄숙함과 숭배함등을 자연스럽게 표현 할수 있도록 만들어진듯 하였다.
이 맞담을 경계로 왼쪽이 서재, 오른쪽에 동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재에는 학교당의 교주인 김주희선생이 거쳐하던
곳, 서재는 주로 남여 교도들이 거처하던 곳이란다.
골목길 양쪽의 담장이 확연히 들어난다 전통방식을 그대로한 오른쪽 담장과 인근의 보통민가인 담장의 비교.....
요즈음 보기 힘든 초가집과 토담등을 이채롭게 보았다.
(주) 이 글은 전문지식 습득용이 아닌 그냥 재미로 보는 글 따라서 언제든지 내용이 수정됨을
밝혀 둡니다.
첫댓글 기억이 다시 떠 오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