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리아인의 법이라는 것이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은 자신이나 제삼자가 위험에 빠지지 않는데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는 구조불이행(Failure to Rescue)를 처벌하는 법규를 통칭한다. 구조 거부 죄 혹은 불 구조 죄라고도 부른다.
신약성서 중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유래했다.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핀란드, 폴란드, 스위스, 러시아, 중국 등 많은 나라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으로 구조거부죄를 처벌하고 있다. 구조불이행 시 프랑스에서는 징역 5년 이하, 폴란드에서는 징역 3년 이하의 형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같은 상황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에 해당하는 구조 거부 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백과사전에서 인용)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익히 알고 있는 본문을 살펴보기 전 몇가지 질문을 해보자. 1.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한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질문과 행동속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다.(25절)
그가 예수님을 왜 시험하고자 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바래새인이나 서기관들 처럼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곤란하게 만드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율법교사의 물음에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답하시자
율법교사의 인격과 품성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자세가 바로 눅10:29절이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율법교사의 자세는 바벨탑을 쌓던 시날 평지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옷도 잃고 거의 죽을 정도로 때리고서는 버려두고 강도들은 현장을 벗어났다.
강도 만난 이 사람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그를 보았음에도 피하여 지나갔고
잠시 후 레위인 역시 못 본 척 하며 지나가게 된다.
그런데 강도 만난 현장을 마침 여행중이던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응급치료 하게 된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타고 온 짐승에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운 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부탁하며 두 데나리온을 간병비로 주면서 만일 돈이 더 들면 나중에 자신이 갚겠노라며 현장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시던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문답이 36-37절이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돌보지 않고 피해 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을까 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왜 유대인이라 표현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으로 등장시키셨을까 라는 점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제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라고 예수님께 책망 받을 정도로(마21:13) ,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제사의 내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사의 형식에 치우쳐 있던 이들이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이렀다.
그러했던 이들이기에 강도 만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제 갈 길을 갔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이웃에게 도움을 준 사람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에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예수님께 되묻는 여인의 답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교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하겠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책에 상관없이, 아니 모두가 미천하다 여길지라도 그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고통당하는 이웃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사랑의 사도라는 별칭을 얻은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4:16-18)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모진 고난과 고통을 겪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경험한 사람은 내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음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