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학교 급사에서 하루아침에 선생님으로 변신하셨군요. 의사가 되셨으니 의당
병원에서 일해야 할 것 같은데요.
노구치: 내가 병원에서 실제 경험을 쌓고 싶다고 하니 지와키선생님이 도쿄에서 가장 유명했던
순천당병원에서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병원에는 훌륭한 의사들이 많아 나에게는
청진기도 잡지 못하게 하고 대신 병원잡지 만드는 일을 시키더군요.
필자: 아니 의사에게 청진기도 못잡게 하다니...세상에 그런 인간들이 있단 말입니까?
노구치: 그래서 의사보다는 의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세균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필자: 미국에 가시게 되었는데요.
노구치: 세균연구소에 있을 때 미국의 대학교수인 프레키스나 박사가 우리 연구소에
들렀습니다. 영어와 독일어를 잘했던 내가 그분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틈이 있을 때
그분에게 “저는 꼭 미국으로 가서 세균학연구를 더 깊이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 오게 되면 힘이 되어주겠소.”하고 그분은 흔쾌히 말씀하시더군요.
필자: 정규대학을 나온 의사들의 텃세 때문에 미국으로 떠난 것은 아닙니까?
노구치: 그것은 내가 미국으로 떠난 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와키 선생님에게 통사정을 하니 그분이 미국행
(배편) 여비를 마련해 주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고향에 가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니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시면 서도 잘 갔다 오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절에서 예불을 드리는 어머니, 노구치 히데요. 고바야시선생님.
노구치 히데요가 있기까지에는 어머니와 고바야시선생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 미국에서의 생활을 어땠습니까?
노구치: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물어물어 펜실베니아대학의 프레키스나박사를 찾아가니
어떻게 왔느냐며 깜짝 놀라더군요. 그분 밑에서 뱀의 독 연구 일을 임시로나마 도왔습니다.
연구실에 가보니 연구원들이 죽여서 말린 뱀의 독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성과가
미미했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뱀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살아 날뛰는 독뱀의 머리를
꽉 잡아 누르고 날카로운 이빨 속에 유리를 물려 생독(生毒)을 받아내니 다른 연구원들이
기겁을 했습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온 내가 가진 것이 뭐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빽이 있습니까? 학벌이 있습니까? 달랑 젊은 몸뚱아리 하나 밖에 더 있습 니까?
온 정성을 다해 목숨을 다바쳐 열성적으로 일했습니다.
뱀의 독에 대한 싱싱한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프레키스나박사는 아주
놀라워하시고 만족해하면서 연구비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대학의 도서관에 가서 엄청난 양의 책을 밤새도록 읽었습니다.
많은 의사들 앞에서 발표할 기회가 많아져 미국에 온지 채 1년이 되지않아 내 이름이
의학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때가 25세였습니다.
필자: 오로지 정열과 맨주먹으로 미국생활을 시작했군요. 미국생활이 외롭지 않았습니까?
노구치: 많이 외로웠습니다. 일본친구들이 놀러 와도 만나지 않고 연구소에서만 살다시피
했습니다. 하얀 가운 주머니 속에 항상 실험용 쥐 한 마리를 넣고 다녔는데 그 쥐와
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필자: 미국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노구치: 뱀독 연구의 성과가 인정되어 당시 세계 최고로 알려진 록펠러연구소에서 나를
받아주었습니다. 1911년 ‘스피로헤타’라는 매독의 원인균을 세계최초로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의 성공으로 매독의 새로운 치료방법과 약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의학이란 병의 원인만 정확하게 밝혀내면 치료방법은 쉽게 나오는 분야입니다.
필자: 미국에서 결혼하셨지요?
노구치: 1912년 36세의 나이에 미국여성 메리 다지스와 결혼했습니다.
필자: 왜 일본여성과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노구치: 연구실에 틀어박혀 온종일 세균만 만지는 사람을 어떤 일본여자가 좋아하겠습니까?
필자: 일본으로 귀향하셨지요?
노구치: 편지 속에 붙여온 어머니의 늙으신 사진을 보니 지금 나가지 않으면 어머니를
영영 뵙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15년(39세) 15년만에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도쿄에 도착하니 수많은
환영인파가 맞아 주었습니다. 정규대학 출신이 아니라고 청진기도 잡지 못하게 했던
옛 동료의사들이 눈에 띄어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 시기에 고향에도 철도가
생겼더군요. 역에 내리니 환영 아치가 세워져 있고 “노구치 히데요박사 만세!”
나를 환영하는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습니다. 손병신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자란
고향에서 이처럼 크게 환영을 해주니 아무리 닦아도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필자: 저도 눈물이 나군요. ㅠ ㅠ.
노구치: 그후 전국을 다니며 강연회를 했는데 어머니와 은사이신 고바야시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의사로 키워주신 지와키 선생님을 모시고 오사카, 도쿄, 나라 등지를 다녔습니다.
이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습니다.
필자: 그 정도의 세계적인 연구성과라면 일본에서도 유명한 의과대학의 교수로 충분히
정착 할 수 있었을텐데요...
노구치: 미국에서는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시설과 장비부족으로
어림도 없었습니다.
필자: 누가 당신보고 연구를 하라고 합니까? 의과대학 교수가 되어 세균학분야에서
세계최고이신 당신의 지식을 의대학생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이지요.
노구치: 의대교수가 되면 또 나를 무시하는 의사들과 같이 아웅다웅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일본처럼 좁은 세상에서 정규대학을 나왔니 안나왔니 하며 시기하고
헐뜯고 하는 것이 정말 싫어 일본은 떠난 나입니다.
나는 세균학계의 최고가 되고 싶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에 오니 열병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연구 끝에 그 열병의 원인균을
발견하여 치료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어머니가 65세 나이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엎어져 울었습니다.
마음껏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 무렵 남미의 에쿠아도르에서 긴급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열병이 퍼져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이곳에 와 저희를
살려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급히 그곳에 가서 열병을 연구하여 예방접종을 시행한
결과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 후 멕시코, 페루, 브라질 등을 다니며 열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필자: 아프리카에도 가셨다면서요?
노구치: 나의 예방주사가 아프리카의 열병에는 잘 듣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현지의 열병에 맞는 예방약을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필자: 열병이 창궐하는 아프리카의 오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군요.
너무 무모했습니다. 당신의 아내, 당신의 동료는 말리지 않던가요?
노구치: 다들 결사적으로 만류하더군요.
그러나 소학교를 나온 뒤 학비가 없는 나를 누가 고등과까지 보내주었습니까?
손병신이던 나에게 누가 수술비를 마련해주었습니까?
손병신이던 나를 누가 의사로 만들어주었습니까?
누가 나를 미국까지 보내주었습니까?
그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질병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필자: 결국 손의 장애가 당신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 준 것이군요.
노구치: 손의 장애가 없었다면 아마 고향에서 농부로 지냈거나, 아버지처럼 평생
노동과 머슴살이로 보냈을 것입니다. 장애가 내겐 오히려 자기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열성적인 노력으로 운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1927년 10월말 노구치 박사는 서아프리카의 아쿠라에 도착하여 열병을 연구했다.
열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들어가 환자들을 직접 진찰하기도 했다.
그는 연구하던 열병에 감염되어 1928년 5월 21일 아프리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미국으로 옮겨져 뉴욕 교외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인류를 위하여 살고 인류를 위하여 죽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참고도서: 노구치 히데요...웅진위인전기
첫댓글 가슴이 꽉 막힙니다
이런분이 세상에 많이 있다면
눈물 흘릴사람도 훨신 줄어들텐데요
너무나 고마우신분
존경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안병남
손에 장애가 없었다면 이런 인물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구보면 장애라는 것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조현두.
왜 우리나라엔 노구치와 같은 과학자가 안 나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