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敦煌: Tun-huang)의 지리(地理)
2006년 여름, 어머니의 강 황하(黃河)가 내려다보이는 서부의 공업도시 난주(蘭州)에 들러 이틀을 머문 적이 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기차에서 본 난주 인근의 산들에는 나무가 없는 삭막한 흙산으로 이곳은 사막 지대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이제 이곳에서 서쪽은 당(唐)대 승려 법현이 말했던 것처럼 새도 날지 않고 귀신도 살지 않는, 단지 나뒹구는 해골만이 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막지대의 연속이다.
난주에서 나는 그 옛날 흉노(匈奴)를 치기 위해 곽거병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잠시 숙영했던 5군데에서 5가지 색깔의 샘이 솟는다는 오천산(五泉山)을 둘러보고, 그 유명한 난주라면(拉面)도 먹어보고 상점에 들러 기련산 돌로 만든 술잔인 야광배(夜光盃)도 샀다.
이곳에 도착하면서 바로 돈황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려 했으나 얼마 전에 개통된 티베트 가는 하늘열차의 개통으로 기차표를 구하기가 어려워, 결국 비행기로 가기로 한 우리 일행은 간만에 여유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튿날 예정된 시간을 맞추려고 직행 버스를 타고 마답비연(馬踏飛燕)상이 날아갈 듯 서있는 난주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온다는 국내선 비행기는 4시간이나 연착되어 캄캄한 한 밤중이 돼서야 돈황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오늘을 넘기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라는 생각을 하며 무사히 착륙하기만을 기도했다.
뜨거운 열사(熱砂)의 땅 돈황 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트랩을 내리면서 맞는 명사산(鳴沙山)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밤공기가 정겹게 느껴졌다. 배낭을 찾고 비행장을 빠져 나오니 미리 연락해 놓은 숙소의 직원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어 곧 바로 차에 몸을 실었다. 차에 타서는 창문을 끝까지 내려놓고 마치 점령군인양 돈황의 밤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며 담배도 한 대 피워 물었다. 웬지 무언가가 가슴 벅차게 확 밀려오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느껴본 평화로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러시안제 짚차를 타고 며칠 동안 종일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몽골 초원을 누비다가 해지는 저녁 저 멀리 언덕 아래로 보이는 ‘언더르항’이란 마을을 향해 달려 내려갈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전쟁 중에 부하들이 다 진압해 놓은 마을에 들어가는 진주군 장교 같은 그런 느낌, 그래도 살아가면서 가끔은 이런 기분을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자동차가 불랙홀 속을 전속력으로 사막의 아스팔트를 질주한다. 뒤집혀도 부딪쳐도 결코 나는 죽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 이곳은 내 생애 2번째 밟아보는 돈황이다.
감숙성(甘肅省)의 지도를 펴고 보면, 황하의 서쪽 기련산(祁連山) 북쪽에 동으로부터 서로 무위(武威-涼州), 장액(張掖-甘州), 주천(酒泉), 안서(安西), 돈황(敦煌-沙州) 등의 오아시스가 이어진다. 돈황은 하서(河西)회랑지대의 서쪽 끝에 있으며 이곳이 중국령으로 된 것은 기원전 121년 한(漢)의 무제(武帝)가 파견한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이 지방의 흉노를 토벌한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군(郡:행정구역 단위)이 설치된 것은 기원전 93-92년 무렵이라 한다. 군에는 중앙으로부터 태수(太守)를 파견하였기 때문에 군을 두었다는 것은 중앙정부의 영향 하에 있는 직할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송(宋)대에 이르러 하서지방은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의 지배하에 들어가 돈황도 서하군에 점령되었고, 명(明)대에는 가욕관(嘉峪關)을 경계로 하였기 때문에 돈황은 새외(塞外)의 땅으로 되었다.
위치는 북위 40°, 동경 95°의 교차점으로 서안(古都 長安)으로부터 서쪽으로 거의 1,500km에 위치하고 있다. 서안에서 서쪽 변경도시인 카슈가르까지가 대략 3천km이니 돈황은 거의 중간지점이다.
기차로 하서회랑지대를 여행하다보면 차창 너머 동쪽에는 이 하서지방 오아시스의 원천인 기련산의 만년설이 계속 쫓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산(天山)아래의 오아시스 도시처럼 이 기련산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이 이곳 하서지방의 오아시스를 윤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기련산 덕분으로 난주에서 주천까지는 어쨌든 오아시스가 이어지지만 주천을 지나면 갑자기 주변은 폭염이 내리쬐는 사막지대로 변한다. 옥문시와 옥문진, 안서(安西) 등의 오아시스가 있을 뿐, 안서로부터 돈황까지는 또 130여km의 사막을 넘어가야 한다.
현재의 돈황현성(縣城)은 한대(漢代) 돈황군이 있었던 위치와는 같은 장소가 아니다. 사막 속에 있는 시가지는 시대에 따라서 이동했다. 전란과 재해로 시가지가 황폐해지면 다른 곳에 시가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대의 돈황 시가지는 그 근처 어딘가 모래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의 돈황 현성에는 옛날 역사의 실마리가 될 유적은 거의 없다.
돈황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막고굴(莫高窟)」에 의해서이다.
돈황에 가서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은 우선 돈황 동남 약 25㎞지점에 위치한 막고굴(莫高窟)천불동(千佛洞)이다. 막고굴은 대천하(大泉河)에 의해 침식된 명사산(鳴沙山:바람이 불면 모래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우는 것처럼 들린다는 모래 산) 절벽에 조성되어 있는 6백여 개의 석굴로 그 중에서 벽화와 소상(塑像)이 있는 것은 492굴이다. 석굴이 있는 단애(절벽)의 총연장 길이는 1,618m이며 대부분 남쪽 단애 약 1㎞에 걸쳐 있다. 북쪽 600m에는 주로 이 막고굴을 만든 장인들이 머물러 거주했던 굴이 있다.
이 명사산의 암벽은 자갈이나 토사가 응고된 역암(礫岩)이기 때문에 조각에는 적합지 않다. 때문에 돈황의 불교미술은 용문석굴이나 운강석굴과는 달리 동굴 내부를 흙으로 덧칠한 위에 회반죽을 한 화장벽에다 벽화를 그리고, 점토로 만든 목심소상(木芯塑像)의 불상을 모시는 방법을 취하였다. 소상은 보존이 완전한 것이 약 1,400여체(体), 불완전한 것이 70여체, 보수한 것이 720여체로 전부 약 2,200여체에 달한다. 벽화의 총 면적은 약 45,000㎢으로 이것을 1m 폭으로 나란히 놓으면 45㎞에 이르는 수치이다. 그 점수(點數)는 1,045폭이며 내용에 따라 1)불교 경전을 회화한 것 2)本生故事(석가의 전생을 그린 그림) 3)만다라(曼茶羅) 4)공양자 상 5)천정과 장식문양의 5종류로 나눌 수 있다.
몇 년 전에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과 쿠차의 키질 천불동, 투르판의 베제크리크 천불동에서도 결코 이 정도의 것은 남아있지 않다. 막고굴 천불동의 불교미술은 서역과 중국을 통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가장 풍부한 내용과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돈황!!!! 저의 어머니께서 인도의 불교 성지 순례를 끝내시고 사스가 맹위를 떨치던 2002년 여름에 중국여행을 계획하시고는 가을에 다녀오신 곳이 돈황과 차마고도 일부구간이어서 그런지 교수님의 글을 읽으니 새삼스레 생각이 더 납니다. ^^*
교수님 만큼은 아니겠지만 저의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중국과 몽고에 산재해 있는 불교와 관련된 유적지를 여행하시면서 많은 공부를 하셨는데 그 아들은 게으름과 공부의 부족으로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글을 읽고 또한 절실히 느낍니다. ㅡ,,ㅡ;; 배움에 호불호는 있다하나 노소는 구분치 않는다 한 어른말씀이 요철처럼 맞아 떨어지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