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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흡입력 있는 법문을 펼쳤던 향봉 스님(익산 사자암)은 8월 17일 자신의 두 번째 법석에서 “방장의 법어를 대필하거나 과도한 해제비를 주는 등 선지식이 없고, 배출될 수도 없는 풍토가 한국불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 문중 파벌에 갇혀 지나치게 폐쇄적
조계종의 종합수도 도량인 총림사찰에는 버젓이 폐쇄적인 형태가 실존한다. 해인사 출신이 아니면 해인사 주지가 될 수 없다. 강원장, 선원장, 율원장도 될 수 없다. 어느 한 곳이라 할 것 없이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등 총림사찰 다섯 곳 모두가 부끄러운 전통의 못된 병을 앓고 있다.
총림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사찰의 어른인 방장 선출방식에 있어서도 그 사찰 문중이 아니면 모시기는 커녕 후보명단에도 끼지 못한다. 제발 마음을 열어라. 한국불교가 변화해야 하고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다.
# 앵무새 같은 법어는 내지 말아야
결제ㆍ해제 때마다 발표되는 총림 법어를 보자. 교계 신문들에 실리는 방장스님 법어를 보면 아직 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느낀다. 온통 짜집기 투성이다. 한 쪽에는 호랑이가 나오다가 다른 쪽에는 쥐 그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법어의 흐름이나 법어를 통해 일러주고 싶은 메시지가 활자 속에서 이미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방장 법어가 왜 저런지 물어봤다. 놀라운 대답을 들었다. “방장스님이 쓴 것이 아니라 시자스님이 썼다”는 것이다. 구술을 하고 받아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써라”하니 “알겠다”라는 것이 문제다.
법문도 마찬가지다. 교계 언론에서 산중의 어른이라는 분들이 짜깁기식 법문 아닌 법문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애잔함이 느껴진다. 세상에 가짜가 넘치니 실력 없는 선지식, 선지식 아닌 가짜들이 불교를 흔든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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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아있는 선원, 변해야 산다
선원 대부분이 짜여진 정진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로 앉고 서기를 반복한다. 한국의 선원은 좌선의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혀 있다. 앉아있는 선원에서 움직이는 선원으로 전환해 가야 한다. 새로운 시도와 출발이 있어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은 불가침의 성역에 가깝다. 그러나 <육조단경>의 본문에 ‘화두’나 ‘공안’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땅에 구산선문을 열었던 시절에도 화두정진의 중요성을 제창한 조사는 없었다. 간화선의 화두정진에는 허물이 있을 수 없지만, 정진수행의 방법에는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육조혜능 선사는 좌선에만 집착함을 경계해 다음과 같은 게송까지 남기지 않았나?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生來坐不?)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死去?不坐)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뼈덩이에서(一具臭骨頭) 어찌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하랴(何爲立功課).”
# 도 넘은 해제비 지급 막아야
안거 해제비도 문제다. 해제비는 선원에서 한 철을 지내고 나면, 소속 사찰에서 지급하는 돈이다. 최근 충청도 어느 사찰에서 해제비를 750만원 줬다. 자기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선수행 했는데 그 돈을 준 것이다. 90일 안거에 1인당 750만원을 줬다면 하루 임금으로는 7만원 이상이 된다. 그 돈이 누구 돈인가?
더 큰 문제는 해마다 기록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적은 사찰도 물론 있다. 대중공양도 비구니스님 사찰에는 별로 없다. 비구니스님 도량 가운데 해제비를 많이 지급하는 절은 50만원, 보통 20~30만원 수준이다.
# 법거량 사라지면 죽은 선원
선지식이라 일컫는 해인사 성철 스님이 입적하고, 스님을 능가하는 제자가 배출됐는가? 그 반의 반이라도 도인이 출현했는가?
‘닭이 천 마리면 봉(鳳)이 한 마리’라는데 왜 한국불교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는가?
전국 100여 선원에서 2500여 명이 수행하는데 도인이 안 나온다. 1년, 2년, 10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사미에서 비구 된 지 7~8년이 되면 타성이 생긴다. “몸과 마음을 던져서 부처님 말씀과 하나를 이뤄야겠다” “나는 왜 돈, 여자, 명예를 보면 흔들리는가” “나를 바로 잡기 위해 주력, 참선, 사경, 간경을 해야겠다” 하는 등 고뇌하는 모습이 없다.
그러다보니 선원에서 선문답의 법거량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왜 한국 선불교의 아름다운 전통인 선문답과 법거량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스님이 1만 명, 2만 명이냐는 숫자가 불교 발전을 좌우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저명 인사들을 보자, 가톨릭 신자가 많다. 가톨릭 신자 아니더라도 가톨릭에 대한 신뢰 높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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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방의 패거리 문화 청산해야
고불총림 방장 서옹 스님이 계실 때다. 서옹 스님이 광제 스님에게 인가를 내렸다. 스님은 <방함록>에 수록될 법어를 광제 스님에게 쓰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광제 스님의 법어는 실리지 못했다. 광제 스님의 법어를 받은 측이 광제 스님의 법어를 안 싣기 위해 법을 고쳐 나이 제한까지 만들었다. 선방의 의식이 사회의 패거리문화보다 못하게 닫혀 있다. 이런 선방에서 어떻게 대승불교와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 스님의 생일과 장례 검소해야
49재는 죽은 영가가 부처님 위신력을 통해 업장소멸해 왕생극락하기를 기원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스님이 죽으면 제자들이 49재를 지낸다.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조촐하게 지낼 수는 있다. 요즘 스님의 49재는 인연 있는 사찰, 스님들이 번갈아 7개 사찰에서 옮겨 다니며 지내지고 있다.
생일문화도 그렇다. 출가자라는 사람들이 해마다 생일을 기억하고, 재가자들도 생략하는 환갑을 챙기기도 한다. 신도들은 주지스님 생일을 기억해 잔칫상을 차려준다. 특히 칠순, 팔순된 분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년 수행해 온 분들 아닌가? 승가가 세속화되는 모습은 바꿔나가야 한다.
다음은 향봉 스님 법석에서 열린 토론의 일부.
질문자(우바이): 향봉 스님이 이번 법석에서 불교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알려줘,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적나라한 진단이 문제제기 수준으로 머문다면 많은 혼란이 야기될 것은 뻔하다. 뜻을 같이하는 사부대중이 모여 함께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제시돼야 한다. 잘못하면 향봉 스님 혼자만의 원맨쇼가 될 수 있다.
향봉 스님: 문제제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은 안다. 외침으로 끝내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야단법석을 펼쳤다. 재가자, 수행자 모두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하나하나 달라져야 한다.
질문자(우바새, 익산): 야단법석에 모인 스님들이 원하는 것은 바른 수행과 재가자의 적극적인 포교 참여 등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절 살림을 재가자들이 맡으면 어떤가? 스님은 법문과 수행에 전념하고 재가자들은 절 살림 살다가 모자라면 보태고, 남으면 사회에 회향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지나치게 스님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법인 스님: 실상사가 그렇게 하고 있다. 실상사는 종무실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원주스님도 없고 불전함도 종무실 직원들이 관리한다. 스님들은 수행지도에만 전념하고 있다. 서울에서도 봉은사 등이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선원 해제비 문제가 나왔다. 이 문제를 선원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한국불교의 대량생산과 소비, 업적주의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의식전환을 강조하지만 제도가 바뀌면 의식도 정착된다.
원로스님이 입적해 5일장을 치루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법과 제도를 바꾸면 된다. 법과 제도가 정립되지 않은 문제제기는 관념론에 그친다. 정착해야 한다. 법과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재가자들도 정법불교를 바로 세우고 싶다면 정법 아닌 비법을 하는 스님에게 공양하지 말아라. 신도들이 스님을 망치고 있다.
신도가 수행자에게 ‘밥’을 준다면, 수행자는 신도에게 ‘법’을 준다. 정법불교를 않는 수행자에게 재가자는 두 가지 권리를 갖는다. 법문을 듣지 않을 권리와 공양을 올리지 않을 권리.정법과 비법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면 된다. 수행은 하고 있는가, 무속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중을 현혹하고 있지 않는가 등. 신도들은 정법을 행하는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힘을 보태야 한다. 신도들의 바른 공양운동을 제안한다.
질문자(우바이, 부산): 다수의 문제가 스님들 노후보장이 돼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질문자( 우바이, 대구): 한국불교를 보살들이 망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스님들 중에는 선방 들어가면서 어디 선방 간다며 대중공양을 당부하는 경우가 있다. 또, 만행 나와서 오갈 때 없는 스님을 만나면 슬프다. 불편해도 스님은 꼭 절에서 주무셨으면 좋겠다. 토굴 등에 집착하는 모습도 안타깝다.
도법 스님: 한국불교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짚어졌다. 오늘처럼 적나라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동안 스님들로부터 “집안의 추한 꼬라지를 스님끼리 소문나지 않게 고치면 되지 왜 동네방네에 들추느냐”는 지적도 숱하게 들어왔다.
우리끼리 잘 해보자 해서 잘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안에서 치열한 자기비판을 통한 자기혁신이 이뤄진다면 바깥사람들도 뭐라 하지 않는다. 불교계 폐단이 밝혀져 신도가 떨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곰팡이는 덮어두면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없애려면 드러내서 바람을 쐬고 햇빛을 쏘이는 것 뿐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야단법석을 지속적으로 연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를 환하게 이끌어 갈 것을 확신한다.
이 법석에서 향봉 스님이 한국불교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면서 까지 지적한 것에 감사하다. 우리도 큰 마음을 보내고 힘을 보태자.
이민우 거사: 해제철 임에도 선원에서 올곧게 정진 중인 많은 수좌스님들이 있다. 잘못 생각하면 스님들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될까 우려된다. 올곧게 수행하는 스님들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처럼 우리의 인생좌표이다. 재가자로서 스님들이 모두 다같이 매도되기 보다는 보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향봉 스님: 언로가 막히면 그 집단은 썩는다. 불교계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을 남대문 시장, 길거리에서 떠든 것이 아니다. 삼복더위에 야단법석을 찾은 참가자들이 무료로 오지도 않았다. 자기 시간, 비용 내서 참가한 사람들이다. 머리를 깎았는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출가자끼리 모여 속닥거리다, 재가자가 있으면 ‘양어가추(揚於家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내다)’하지 말자고 한다. 사부대중이 모인 자리면 머리를 맞대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의식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첫댓글 一具臭骨頭 何爲立功課 (일구호골두 하위입공과)...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뼈덩이에서 어찌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하랴. _()()()_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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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희망인듯 합니다.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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