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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동탁전(董卓傳)
동탁은 자가 중영(仲潁)이고,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 사람이다.1) 젊은 시절 의로운 일을 즐겨 했으며, 일찍이 강족(羌族)이 사는 곳 까지 유력하여 그 우두머리와 사귀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들녘에서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데, 강족의 우두머리들이 그를 방문했다. 동탁은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농사짓는 소를 잡아 연회를 열어 즐겼다. 강족의 우두머리들은 동탁의 마음에 감동했고,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거두어 천여 마리의 가축을 모아 동탁에게 주었다.
후한 환제 말년에 육군(六郡)의 훌륭한 집안의 아들을 선발하여 우림랑2)으로 임명했다. 동탁은 재능이 있고 용감했으며, 완력은 비교적 적었으나 두 개의 화살통을 차고 말을 타고 가면서 좌우로 활을 쏠 수 있었다. 동탁은 군의 사마가되어 중랑장 장환(張煥)을 따라가 병주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낭중으로 임명되고 비단 9천 필을 하사받았는데, 동탁은 그것을 모두 관리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탁은 광무령(廣武令)․촉군북부도위(蜀郡北部都尉)․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로 승진했다가 면직되었다. 동탁이 면직된 것은 부름을 받아 병주자사․하동태수로 임명되고 중랑장으로 승진되어 황건군을 토벌하도록 했는데, 패배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수 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동탁을 중랑장으로 임명해 서쪽으로 가서 그들을 막게 했다. 그는 망환석(望 石) 북쪽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강족 사람들에게 포위되었는데, 식량도 거의 없었다. 동탁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여 돌아가는 길의 나루터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수십 리에 물을 가득 가두어 두고, 그 둑 아래로 군사들을 몰래 지나가도록 하고는 둑을 무너뜨렸다. 강족은 이 소식을 듣고 추격하였으나, 물은 벌써 깊어졌으므로 건널 수 없었다. 이때, 여섯 군대가 농서로 갔지만, 다섯 군대가 패하고 동탁 혼자만 모든 군사들과 돌아와 부풍(扶風)에 주둔했다. 동탁은 전장군으로 임명되고, 합향후로 봉해졌으며, 불러들여 병주목으로 삼았다.
영제가 붕어하고 소제가 즉위하였다. 대장군 하진은 사예교위(司隸校尉) 원소와 환관들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진은 동탁을 불러 장수와 병사들을 인솔하여 낙양으로 오도록 하고, 이와 동시에 몰래 상주문을 써서 명령했다.
----- 중상시 장양(張讓) 등은 황제의 은총을 몰래 얻었으며 은총을 사용하여 국가를 혼란스럽게 했소. 과거 조앙(趙鞅)은 진양(晋陽;조앙의 영지)에서 군대를 일으켜 군왕의 측근에 있는 나쁜 사람들을 내몰았소. 나는 하루빨리 북과 종을 울려 군대를 일으켜 낙양에 도착해서 장양 등을 토벌할 것이오.
하진은 상주문을 갖고 황태후를 협박하려고 했지만,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실패했다.3) 중상시 단규(段珪) 등이 황제를 위협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도주했지만, 동탁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단규를 전멸시키고 북망(北芒)에서 황제를 맞아 궁궐로 돌아왔다.4) 당시 하진의 동생이며 거기장군이었던 하묘(何苗)가 하진의 부하에게 살해되자, 하진과 하묘의 군대는 돌아가 의탁할 곳이 없어졌으므로 모두 동탁에게 의탁했다. 동탁은 또 여포를 보내 집금오 정원(丁原)을 죽이도록 하고, 그의 군대를 병합했다. 그래서 수도의 군사지휘권은 동탁 한 사람에게 있게 되었다.5)
이보다 앞서, 하진은 기도위 태산 사람 포신을 보내 각 지방의 병사들을 모으도록 했다. 동탁이 도착하자 포신은 원소에게 말했다.
“동탁은 강성한 병사를 거느리고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일찍 손을 쓰지 않는다면 장차 그에게 제압당할 것입니다. 그는 방금 도착하여 피곤에 지쳐있으니 이 틈을 타서 그를 습격한다면 사로잡을수 있을 것입니다.”
원소는 동탁을 두려워하여 감히 병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포신은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 매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사공 유홍(劉弘)을 면직시키고 동탁에게 그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얼마 후에 동탁은 태위로 승진하였고, 절(節)과 월(鉞) 근위병을 받았다. 동탁은 소제를 내쫓아 홍농왕(弘農王)으로 삼았다가 곧이어 그와 하태후를 살해하고, 영제의 어린 아들 진류왕(陳留王)을 황제로 세웠는데, 이 사람이 헌제이다.6) 동탁은 상국으로 승진하고 미후(郿侯)로 봉해졌으며, 황제를 만날 때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을 수 있고,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궁전에 오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헌제는 또 동탁의 어머니를 지양군(池陽郡)으로 봉하고 가령(家令)․승(丞)을 두도록 했다. 동탁은 이미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왔으며, 때마침 황실이 큰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황제를 내쫓고, 무기고, 갑옷, 각종 기물, 나라의 보옥을 차지하여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동탁은 성격이 잔인하고 비정하여 가혹한 형벌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아주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복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가 없었다.7) 동탁은 일찍이 군대를 낙양으로 보낸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 2월의 봄 제사가 있어 백성들은 각기 자기의 사(社) 아래에 있었다. 동탁 군사들은 그곳에 있는 남자의 머리를 전부 베어 떨어뜨리고는 그들의 수레와 소를 타고 여자와 재산을 싣고, 잘린 머리를 수레축과 바퀴에 매어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적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여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소리높여 만세를 외쳤다. 군대는 개양성(開陽城) 문으로 들어와 잘린 머리를 불태웠으며 여자들은 사병들에게 주어 종이나 첩으로 삼도록 했다. 그는 심지어 궁녀나 공주까지 간음하고 음란한 짓을 하였으니, 그의 흉악함과 반역무도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처음에 동탁은 상서 주밀(周 ), 성문교위 오경(五瓊) 등을 신임하여 그들이 추천한 한복(韓馥)․유대(劉岱)․공주(孔伷)․장자(張咨)․장막등을 임명하여 주와 군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러나 한복 등은 관직에 나간 후,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동탁을 토벌하려고 했다. 동탁은 이 소식을 듣고, 주밀과 오경 등이 내통하여 자신을 팔아먹으려고 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하내태수 왕광(王匡)은 태산군(泰山郡)의 군대를 하양진(河陽津)에 주둔시키고, 동탁을 제거하려고 했다. 동탁은 병사를 파견하여 평음(平陰)에 물을 건너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한편으로는 은밀히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소평(小平)에서 북쪽으로 건너 왕광의 배후에서 습격하도록 하여 하양진 북쪽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시키고, 왕광의 군사들을 괴멸시켰다. 그러나 동탁은 동부 지역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나자 벌벌 떨며 불안해했다.
초평 원년(190) 2월에 동탁은 천자를 장안으로 옮겨 수도를 정하고8) 낙양궁을 불태웠으며, 능묘를 모두 파헤치고 진귀한 물건들을 탈취했다. 동탁은 장안에 도착하여 태사9)가 되어 상부(尙父)라고 불렸으며, 천자나 황태자가 타는 푸른 색 덮개와 금꽃으로 장식한 수레를 탔으며, 양쪽의 번(轓;수레에 흙이나 먼지가 튀거나 앉는 것을 막기 위한 것)에는 조(爪)로 묘사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간마거(竿摩車)’라고 불렀다. 동탁의 동생 탁민(卓旻)은 좌장군이 되었고 호후(鄠侯)로 봉해졌으며,10) 형의 아들 동황(董璜)은 시중과 종군교위가 되어 군대를 통솔했으며, 동씨 종족의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조정의 높은 관리가 되었다. 공경이 동탁을 만나려면 이름을 밝히고 수레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으나, 동탁은 예의로써 답하지도 않았다. 태위․사도․사공 등 삼공과 상서 이하 관료들은 동탁의 거처로 와서 업무를 보고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동탁은 미오(郿塢)를 세웠는데, 높이를 장안 성벽과 똑같이 하고, 30년간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비축하였다. 그는 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지배하고, 성공을 하지 못하면 이곳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겠다고 말했다. 동탁이 일찍이 미오로 나가자 공경 이하 관리들은 횡문(橫門;장안성에서 북쪽으로 나가는 문 가운데에서 서쪽에 있는 문) 밖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동탁은 먼저 장막을 설치하도록 하고 술을 마셨는데, 북지군(北地郡)의 항복한 반란군 수백 명 속으로 들어가 앉더니, 그들의 혀를 자르고, 손과 발을 절단하고, 눈을 뽑아 큰 가마솥에 삶았다. 또 죽지 않은 자는 땅에 엎드리게 하여 술잔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하니, 모인 사람들은 벌벌 떨며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 놓았는데도, 동탁은 태연하게 계속하여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태사가 하늘의 기운을 보고, 대신 중에서 살육을 당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태위였던 장온(張溫)은 그 당시 위위(衛尉)로 있었는데, 평소에 동탁과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동탁은 내심 그를 증오했다. 동탁은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 장온이 원술과 내통했다고 말하게 하고는 마침내 그를 매질해 죽였다. 동탁의 법령은 가혹했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따라 형벌을 어지럽게 적용했고, 사람들이 서로서로 무고했으므로, 죽는 이가 천 명이나 되었다. 백성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단지 눈빛으로만 호소했을 뿐이다. 동탁은 구리로 만든 사람 형상11), 종과 종가(鍾架)를 전부 부수고, 오주전(五鑄錢)12)을 훼손시키고 다시 작은 동전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다섯 푼이고, 문자나 무늬가 없었고, 동전 가장자리와 동전 중앙에 윤곽이 없어 닳거나 갈아지지 않았다. 때문에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상승하여 곡물 한 석이 수십만 전에 이르렀다. 이 이후부터 동전 화폐는 유통되지 않았다.
초평 3년(192) 4월에 사도 왕윤(王允), 상서복야 사손서(士孫瑞), 동탁의 대장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공모를 했다. 이때 천자는 병세가 막 나았으므로 미앙전(未央殿)으로 신하들을 모두 모이도록 했다. 여포는 같은 군 출신 기도위 이숙(李肅) 등에게 명하여 친위병사 10명을 인솔하여 위사(衛士;호위병)의 의복을 입고 변장하고 궁전 옆문을 지키도록 했다. 여포는 조서를 품고 있었다. 동탁이 도착하자, 이숙 등이 동탁을 쳤다. 동탁이 놀라 여포는 어디에 있냐고 소리치자, 여포가 말했다.
“조서가 있다.”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주부 전경(田景)이 동탁의 시신 앞으로 달려가자, 여포는 그를 살해했다. 여포가 3명을 죽이자,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은 감히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장안의 선비와 백성들은 모두 서로 경축하고, 동탁과 영합했던 자는 전부 감옥으로 잡아넣거나 처형시켰다.
당초 동탁의 사위이며 중랑장이었던 우보(牛輔)는 군대를 인솔하여 따로 섬(陝)에 주둔하면서, 교위 이각․곽사․장제를 나누어 파견하여 진류․영천의 각 현을 공략하였다. 동탁이 죽은 후, 여포는 이숙을 섬(陝)현으로 보내 우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우보 등은 오히려 이숙을 맞아 싸웠고, 이숙은 싸움에서 지고 홍농으로 달아났다. 여포는 이숙을 주살했다. 이후 우보 진영에는 한밤에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하는 병사가 있었으며, 진영 안은 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우보는 병사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에게 금과 보옥을 나누어 주었는데, 평소에 깊은 정을 나누었던 호적아(胡赤兒) 등 5,6명만이 담을 넘어 북쪽으로 가서 황하를 건넜다. 호적아등은 우보의 금과 보옥을 탐내어 그의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이각 등이 우보에게로 돌아온 것은 우보가 이미 실패한 이후였으므로, 병사들은 의탁할 거처를 잃고 각자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면장이 없었고, 또 장안에서는 양주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이각은 가후의 계책을 받아들여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갔으며, 도착한 곳에서 병사들을 모았다. 장안에 도착했을 때, 이각은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각 등은 동탁의 지휘하에 있던 번조(樊稠)․이몽(李蒙)․왕방(王方) 등과 연합하여 장안성을 포위하였는데, 열흘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그들은 여포와도 성안에서 싸웠는데, 여포는 싸움에 지고 도주했다. 이각 등은 병사들을 풀어 장안성의 백성들을 겁주고 그들을 모두 죽였으므로,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각 등은 동탁을 죽인 사람을 처형하고, 왕윤의 시체를 저자에 널었다. 동탁을 미현에 매장했는데, 거센 바람과 사나운 비가 동탁의 무덤을 진동시키더니 물이 무덤 안으로 흘러 들어가 관을 뜨게 했다. 이각은 거기장군․지양후(池陽侯)가 되었으며, 사예교위 벼슬을 담당하고 부절을 받았으며, 곽사는 후장군․미양후(美陽侯)가 되었고, 번조는 우장군․만년후(萬年侯)가 되었다. 이각․곽사․번조는 조정을 생각대로 움직였다. 장제는 표기장군․평양후(平陽侯)가 되어 홍농에 주둔했다.
초평 13년에 한수와 마등 등이 항복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장안으로 갔다. 조정에서는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임명하여 양주로 돌아가게 했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하여 미현에 주둔시켰다. 시중 마우(馬宇)는 간의대부 종소(種邵)․좌중랑장 유범(劉范) 등과 모의하여 마등에게 장안성을 습격하도록 하고, 자신이 내부에서 호응하여 이각 등을 죽이려고 생각했다. 마등이 군대를 이끌고 장평관(長平觀)까지 도착했을 때, 마우등의 계획이 발각되어 괴리(槐里)로 달아났다. 번조는 마등을 공격했고, 마등은 패하여 양주로 도주하여 돌아왔다. 번조는 또 괴리를 공격했으며, 마우 등은 모두 죽었다. 이 당시 삼보(三輔;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각 등이 병사를 풀어 약탈하고 마을을 공략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받았고, 2년간 서로 잡아먹어 거의 죽었다.
여러 장수들은 각기 주도권 쟁탈전을 벌여 번조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병합하였고, 곽사와 이각은 서로 의심한 나머지 장안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각은 천자를 진영 안에 잡아두고, 궁전과 성문을 불태우고 관부를 공략하였으며, 수레․의복 등 황제의 물품을 전부 몰수하여 자기 집에 갖다 놓았다. 이각은 공경을 곽사에게 보내 화해를 요청했으나, 곽사는 그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몇 개월간 싸웠으며, 죽은 사람의 수는 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각의 장군 양봉(楊奉)과 군리(軍吏) 송과(宋果) 등이 이각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일이 누설되자 곧 군사를 이끌고 이각에게 모반을 했다. 이각은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점점 세력이 쇠약해졌다. 장제가 섬현에서 나와 이각과 곽사를 화해시키니 천자는 장안성을 나와 신풍(新豊)과 패릉(霸陵) 사이에 도착했다.13) 곽사는 또 천자를 위협하여 미현을 수도로 정하려고 했다. 천자는 양봉의 진여응로 달아났고, 양봉은 곽사를 공격하여 격파시켰다. 곽사는 결국 남산(南山)으로 도주하고, 양봉과 장군 동승(董承)이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각과 곽사는 천자를 출발시킨 것을 후회하고 다시 서로 화해했으며, 홍농군의 조양현에 있는 천자를 따라갔다. 양봉은 하동에서 원래 백파적(白波賊)의 대장이었던 한섬․호재(胡才)․이락(李樂) 등을 급히 불러 합류하여 이각․곽사 등과 크게 싸웠다. 이 싸움에서 양봉의 군대가 패했으므로, 이각 등은 병사를 풀어 공경 백관을 살해하고 궁녀를 약탈하고 홍농에 난입했다. 천자는 섬현으로 도주하여 북으로 가서 황하를 건넜다. 천자는 군수품을 잃고 도보로 갔는데, 황후와 귀인(여관의 지위)만이 따라왔다. 대양(大陽)에 도착하여 여염집에서 머물렀다.
양봉․한섬 등은 천자를 안읍(安邑)으로 옮기도록 하고, 천자를 소가 끄는 수레에 태웠다. 태위 양표(楊彪), 태복 한융(韓融) 등 측근 신하들 10여 명이 따라갔다. 천자는 한섬을 정동장군으로 임명하고, 호재를 정서장군으로, 이락을 정북장군으로 삼아 양봉․동승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도록 했다. 한융을 홍농으로 파견하여 이각․곽사 등과 강화를 맺도록 했으며, 그들은 궁녀, 공경 백관과 어가(御)․거마 몇 대를 반환시켰다. 이때 병충해가 들끓었고, 가뭄으로 곡물의 수확이 없었으므로 천자를 따르던 관리들은 대추와 야채를 먹었다. 각 장수들은 신분이 달라 서로 통솔할 수 없었고, 상하 관계는 혼란하였으며, 식량도 다 떨어졌다.
양봉․한섬․동승은 천자를 낙양으로 모시고 갔다. 그들의 기관(箕罐)을 나와 지도(軹道)에 도착했을 무렵, 장양이 식량을 갖고 길에서 맞이하였으므로 대사마로 임명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장양전〉에 보인다. 천자가 낙양으로 들어가서 보니, 궁전은 불타 없어졌고 도로에는 잡초만 무성하며, 백관들은 가시나무를 꺾고 폐허가 된 성벽 사이에서 머물렀다. 주나 군은 각자 병사를 거느리고 자신들을 보호하느라고 낙양으로 달려오는 자가 없었다. 굶주림과 곤궁함은 점점 심해졌고, 상서랑 이하 백관들은 직접 나가 땔 나무를 꺾고 야채를 뜯었으며, 어떤 이는 성벽 사이에서 굶어 죽기도 했다.
조조는 천자를 영접하여 허현에 수도를 정했다. 한섬․양봉은 왕법(王法)을 받들 수 없었으므로 각각 나가서 서주․양주 사이에서 소란을 일으켰는데 유비에게 살해되었다.14) 동승은 조조를 1년여 동안 모셨는데, 처형되었다.
건안 2년(197)에 조조는 복야 배무(裵茂)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관서지역의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도록 했으며, 이각을 처형하고 삼족을 멸했다. 곽사는 그의 대장 오습(五習)의 습격을 받아 미현에서 죽었다. 장제는 굶주림으로 고통받아 남양에서 약탈하다가 양현(穰縣) 주민들에게 살해되었고, 조카 장수(張繡)가 그의 군대를 거두어 통솔했다. 호재와 이락은 하동에서 주둔했는데, 호재는 원수에게 살해되었고, 이락은 병들어 죽었다. 한수와 마등은 양주로 돌아와 서로 침공하였다. 후에 마등은 조정에 들어가 위위가 되었고, 아들 마초가 그의 군대를 통솔했다.
건안 16년(221)에 마초와 관중의 각 장수들 및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조는 그들을 정벌하여 격파시켰다. 이에 관한 일은 《무제기》에 보인다. 한수는 금성으로 달아났으나 부하 장수에게 살해됐다. 마초는 한양을 점거하였고, 마등은 그의 죄에 연좌되어 삼족이 모두 몰살당했다. 조구(趙衢)등이 의병을 일으켜 마초를 토벌하였으므로, 마초는 한중으로 도주하여 장로를 따랐지만, 후에는 유비에게로 달아나 촉나라에서 죽었다.
첫댓글 윗첨자가 더 보기 좋은데....윗, 아랫 첨자 또 까먹었네...(<sub><sup>?)
음... --; 수정하기 귀찮은데... 한글 문서에 적어놓은 것이라서 어쩔수 없어요^^; 윗첨자하면 윗부분이 잘려보여서 제가 일부러 아랫첨자 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