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이로구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그래서 주인공 이름이 "미자"로구나.
이창동 감독은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어했다.
영화 "밀양"에서 고통과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거창한 교회나 종교가 아니라 허름하고 불완전하며 한편 속물스럽기까지한 평범한 인간의 온기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밀양은,... 은밀한 햇살은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 작품 "시"에서는 그러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불완전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손을 내미는가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거나, 선의가 본의아닌 생의 잔혹함으로 해서 악의로 둔갑할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그렇게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미자가 그러한 생과 타인에 대해서 자신의 의무와 예의를 다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독히도 여성적 관점, 어떻게 이창동 감독은 그런 시선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것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캐랙터 60대 중반의 허름한 여성을 한 인간으로 완전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정희는 완전하게 미자를 연기한다.
...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한다.
이 비루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와 노래와 소설과 영화와 연극과 그림이 없다면 우리 삶은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을까?
이창동 감독은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 안을 수 있는 고통으로 단련되었으나 너무도 연약한 존재의 존엄함, 그 존재가 구원임을...
나이먹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갖추어야 하는 의무와 예의에 대해서도...
소멸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미자.
사랑하는 손자를 지키기 위해서 모멸을 견디기, 감히 치졸해지기, 손자에 의해 성폭행당하고 자살한 여중생 아이와 그 어머니에 대해서 죽음으로 속죄하기, 그리고 차마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생에 대한 마지막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한편의 시가 쓰여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의 댓가를 치뤄야 하는가?
여중생의 자살을 마음 아파하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미자 밖에 없다. 직접적 가해자인 자신의 손자와 친구들은 여전히 오락실에서 히히덕 거리고, 학부모들은 돈 3000만원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의 입을 막으려 하고, 사건의 진상을 캐내려 하던 지방지 기자도 돈에 매수된다. 오직 가해자 아이의 외할머니인 미자 만이 아파한다. 소녀가 떨어진 다리를 찾고 그 시신이 흘러간 강물을 따라 걷고, 성당 추도식에 가서 앉아있다 그 아이의 사진을 훔쳐와 자기 집 식탁 위에 올린다.
그런데도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가 떨어진 살구가 짖밟혀져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움, 시상으로 너스레를 떤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이었던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아름다움이니 순수니... 시상이니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잔인한 짓이었는가?
그렇게 돌아서고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를 기억해낸 미자는 참담해진다. 그 순간 아마도 그녀는 그런 속죄를 각오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소녀와 그 가족의 불행을 고통스러워했지만, 한순간 그토록 잔인해진 자신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었던 할머니, 속죄하지 않는 손자, 속죄하지 않는 세상... 오로지 미자만이 아파한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것도 축복이라 했던가? 예민한 영혼만이 고통을 느낀다. 고통을 직면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미자만이 이 속된 세상에서 깨어서 서성인다. 감독은 더 이상 타인의 고통에 눈감아 버린 이 세상에 대해서 미자를 통해서 말한다. 더 이상 눈 감고 살지 말자고...
그 고통을 온몸과 마음으로 끌어안고 묵묵히 나아가는 굳센 침묵 속에서 가녀린 언어가 피어난다.
아름다운 언어와 기억을 앗아갈 알츠하이머 병의 선고, 생은 모든 것을 앗아갈지라도 그 생에게 야네스는 차마 아무도 눈물흘리지 않기를 않기를 바란다고 고백한다. 야네스는 손자와 그 친구들에게 성폭행 당해 자살한 여학생의 세례명이다. 미자가 최후에 완성한 시는 그 소녀의 노래이다.
아주 착한 마음이 드는 영화...
영화관을 나오면서 세상 모든것을 연민의 눈으로 보고 싶어진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싶어진다. 과거 모든 기억들에게조차 사랑했다고 수백번도 홀로 속삭였으나 식상해진 고백을 다시 한번 하고 싶어진다. 그러한 나 자신을 회복하고 싶어진다.
고통스러울 수록 영롱한 진주 하나를 잉태하는 조개처럼 무의미한 고통을 감히 끌어안을 수 있을것 같아진다.
이창동 감독의 인간과 생에 대한 시선...
그 것이 아름답다. 우리 나라에 이런 예술가가 있고 그의 작품을 그저 잠깐의 외출 끝에 만날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이창동 감독은 거장이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의 세월 끝에 삶에 대한 담담하고 원숙한 깊이를 지니고 스크린으로 돌아온,
배우의 마음을 오래도 홀로 간직했어야 했을 윤정희의 노년의 연기가 눈부시다.
그리고 오늘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다. 그의 고통에 우리는 눈감았다.
그리고 오늘 민노당에 당원으로 가입한 전교조 교사 190명을 해임, 파면한다고 한다.
순수한 영혼의 고통에 눈감은 우리 모두는 언제가는 더 큰 고통으로 되갚음 해야 할 날이 올것이다.
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인가?
그런 무조건적 사랑을 요구하기엔 너무도 염치가 없지 않는가?
양미자의 마지막 시, 유서같기도 한 최초이자 최후의 시가 된, 야네스의 시(이창동 감독의 시이다.)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