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주유천하(43)혼맥(婚脈)과 반란
입력.2020-06-25.
1728년 무신란에 적극 가담한 거창 동계 정온·나주 나씨 끈끈한 혼맥으로 이어져 거창에서 병력 동원한 정희량 나주 제일 부자와 혼맥 통해 노비·소작농 용병 1000명 움직여 무신란의 주역 이인좌도 나씨집안과 인연 깊어
같은 산(山)이라도 동쪽에서 보면 반란이고, 서쪽에서 보면 혁명이다. 동전의 앞뒤 면이다.
박정희의 5·16도 혜택을 많이 본 쪽에서 보면 굶주림을 해결해준 혁명이지만, 패가망신의 탄압을 받은 쪽 사람들이 보면 군홧발로 짓밟은 군사반란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명언을 남겼다.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빛을 받아 역사가 되지만, 패자의 기록은 달빛의 조명을 받아 신화와 전설이 된다.’
조선시대 반란사건에 같이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 혈연·지연·학연이라는 연줄로 엮여 있다.
그중에서도 혈연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혈연 가운데서도 혼맥(婚脈)을 주목해야 한다. 전혀 다른 지역 사람들이 혼맥으로 연결되면 목숨을 거는 거사에 같이 행동을 했다.
1728년 무신란(戊申)을 보면, 경남 거창의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년) 집안과 전남 나주 나씨(氏)집안이 세월을 두고 겹겹이 혼사를 맺은 관계다. 두집안 다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고려 이래로 전라도에서 가장 부자들이 살았던 고장이 나주다. 나주에서도 가장 부자였던 집안이 나주 나씨집안이다. 인물도 많이 나왔다.
다산학(茶山學)의 전문가이자 유신 반대 투쟁을 하다가 해직돼 광주 동구 충장로 골방에서 문집을 번역하며 먹고살았던 박석무 선생. 이 양반이 호남지역 명문가의 족보에 밝다. 박 선생은 호남 유학의 발원을 전남 해남지역과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년)로 본다.
최부 밑에서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됐다. 최부의 사위 가운데 하나가 나질이다.
나질의 아들이 나사침이고, 나사침 다음 대에 6명의 뛰어난 아들들이 나왔다. 학문과 인품 모두 뛰어났다.
덕명·덕준·덕윤·덕현·덕신·덕헌이다. 이 6명의 덕(德) 자 돌림 아들들을 당시 호남에서는 ‘6덕’이라고 불렀다.
이 6덕 가운데 둘째 나덕준 밑으로 세아들이 있었다. 찬소·계소·위소다.
이 세사람이 각기 1만석을 하는 부자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만석꾼이면 지금 돈으로 조(兆)단위의 부자라고 봐야 한다. 삼형제 재산을 합해서 3만석이면 재벌급이다.
이중에서 나위소의 사위가 정기수다. 정기수가 누구냐 하면 동계 정온의 손자다. 거창의 명문가 동계 집안과 나씨집안의 혼맥이다. 거창의 정기수와 결혼한 나주의 나씨집 따님이 시집올 때 친정으로부터 받은 논이 500석이라고 전해진다. 시집간 딸에게 혼수로 500석을 준 것이다.
매년 가을 추수가 끝나면 거창에서 사람이 나주로 가서 500석을 돈으로 바꿔 가져왔다고 한다. 동계 집안에서는 이를 ‘작전(作錢)’이라고 불렀다. 수확한 쌀을 돈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매년 사돈 동네인 나주에 가서 500석값을 가져왔던 것이다.
정기수의 아들이 정중원이다. 나위소의 외손인 셈이다. 정중원의 아들이 그 유명한 정희량(鄭希亮·?~1728년)이다. 정희량이 무신란 때 거창에서 병력을 동원했다. 무신란은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모두 참여했는데, 경상도의 거병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정희량이다. 정희량이 동원한 병력은 1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반란사건에 1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서양사에서 보면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 용병(用兵)이 많다. 돈을 주고 동원하는 전통이 있다.
정희량 집안도 당시 영남의 수부(首富·제일 부자)라는 평판을 받았을 정도의 부자 집안이었다.
사돈 집안이 당시 전라도 부자 동네였던 나주의 ‘수부’였으니 그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1000명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우선 식량과 무기, 의복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1000명이 먹을 식량 조달만 해도 간단치 않다. 거기에다가 이 1000명 대부분이 정씨집안에 소속돼 있던 노비와 소작인들이었을 것이다.
거창의 정씨집안에는 최소한 1000명 이상의 노비와 소작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로마식으로 보면 정씨집안이 ‘파트로네스’이고, 1000명의 노비와 소작 집단이 ‘클리엔테스’였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는 결단을 내릴 때 가장 신뢰했던 부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와 행동을 같이하지 않고 반대파인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한 이유도 대대로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 집안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거는 군사행동에 참여하는 것은 그만큼 끈끈한 관계여야만 한다. 요즘 재벌 대표가 검찰조사를 받을 때 부하직원이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갈 정도면 클리엔테스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지시는 재벌 대표가 했다’로 진술하면 클리엔테스 관계가 아니다. 이제 한국사회도 가신은 없어진 것 같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거창 정희량의 병력 동원에 전라도 사돈인 나씨집안의 돈도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뿐만 아니라 나씨 집안도 무신란에 가담해 그 뒤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나씨들은 무신란 주역인 이인좌 집안과도 혼맥이 있다. 나위소의 형님이 나계소다.
나계소의 손자가 나만서이고, 나만서의 아들이 나숭곤이다. 나숭곤이 이인좌의 매부가 된다.
이인좌의 막내동생인 이기아가 나만서의 동생인 나만규의 사위가 된다. 나숭곤의 입장에서 보면 막내 처남이 종매부가 된 것이다. 나숭대·나만치·나두동 모두 무신란의 주역들이었다. 조선 역사의 이면에는 혼맥이 작동했다.
조용헌은…▲강호동양학자, 불교학자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 ▲저서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휴휴명당>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