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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4일-17일 선도회 담양 하계수련회
지월(指月):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居士 法境
<무문관(無門關)>: 선종 최후의 공안집
머리말
<무문관(無門關)>은 중국 임제종의 한 분파인 양기파의 일존숙(一尊宿) 황룡무문혜개(黃龍無門慧開: 1182-1260)가 옛 조사 스님들의 공안 48칙을 평창하고, 그에 송을 붙이고 이를 참학비구(參學比丘) 미연종소(彌衍宗紹)가 편찬한 것이다. 그 편술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소정 원년(1228년), 즉 남송(南宋)의 이종황제 즉위 4년이다.
이 책을 지은 동기는, 이종황제 탄생과 즉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혜개 스님이 이종황제의 어머니 자의황후가 공덕을 위해 세운 우자선사의 주지를 지낸 인연이 아닌 가 본다. 그리고 여기 수록된 공안은 전후 순서 없이 엮은 것이라고 한다. 선종(禪宗)에서는 1,701개의 공안이 있다. 이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1,701인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 한 사람씩의 행리(行履)를 따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안은 1,701개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일상생활 전부가 공안이 아닐 수 없다. 직업에 수많은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모두 공안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1,701개의 공안 가운데서 이 <무문관>을 처음으로 친다. 공안에 전후의 순서가 있을 수 없지만 ‘무(無)’라는 관문을 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인 것이다.
선(禪)은 불교의 총부이며, 골수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이고 불급언전(不及言詮)이므로, 글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말로 이치를 캘 수도 없다. 그러기에 스스로 체인(體認)해야 하는 실제 문제에 부닥쳐야 한다. 즉 사탕은 어떤 작용에 의하여 달고, 명약은 어떤 작용이 있어서 쓴가, 이렇게 연구하는 것이 과학의 방식이라면, <선>은 사탕을 직접 먹어보고 달다고 감지하고, 명약을 직접 먹어보고 쓰다고 각지(覺知)하게 되므로, 달다든지 쓰다든지 하는 강석(講釋)은 둘째로 하고, 곧 달고 쓰고를 자각케 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선을 근본과학이라고 했다.
진리에는 둘이 없다. 사고방식 또는 분석 방법은 다를지언정 최종 도달점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그래서 <무문관> 48칙도 모두 그 원리는 같으나, 각 칙을 내놓은 사람의 성품⋅자질⋅학식⋅기풍 그리고 활용 면에 있어서는 다르다. 각 칙을 통하여 중복된 데가 많다. 그것은 어느 칙을 막론하고 원리가 같기 때문에 설명 상 자연히 불가피했던 것임을 알려둔다. 선은 원래 말로 이치를 캘 수도 없고, 글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인데, 해설한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선양하려면, 말이나 글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을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
<선>은 동양 민족이 그 긴 역사에 남긴 일대 문화적 유산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역사적 존재만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정신생활에 약동하는 현실체이다. 그러나 그 발현에는 융체 기복을 면치 못했다 하더라도 역사의 전환기에는 늘 고조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과 같이 물질적 욕망에만 얽매인 시대에 심신의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에서 더 큰 보람은 없겠다.
<선>은 설명이나 해설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소위 제창(提唱)한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체계를 세우거나 논리적으로 해설하지 않고, 일상적 삶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구체적으로 선지(禪旨)를 거양(學揚)하는 것이므로, 말이 거칠고 더욱이 사투리를 섞어 쓰는 풍습이 있다. 그 전통에 따른 점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단기 4227년(1974년) 9월
고부헌(辜負軒)에서
노사(老師)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씀
권하는 글
선(禪)은 당(唐) 시대(618~906)에 가장 창조적인 활력으로 넘쳐 있었지만 그 후 문화적 · 예술적인 면으로 발전되면서 북송 시대에는 차츰 회고적(懷古的)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남송 말기에 이르러 공안에 의한 선 수행 즉 간화선(看話禪)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권하고자 하는 이 <무문관>은 그와 같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며 나타나 이 역사적 사명을 다한 소중한 선서(禪書)이다. 무문혜개 선사의 자서에 보면 무문 선사께서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알맞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화두들을 부과해 수행시켜 오다 가 그것들이 어느덧 48개나 쌓이게 되자 1228년 남송 이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하여 이들을 한데 모아 선 수행의 지침서로써 <무문관>을 엮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선 수행자들이 여기에 담긴 48칙의 화두들을 철저히 투과하기만 한다면 무문 산사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일시에 1,701가지의 공안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되어 부처와 조사와 손을 맞잡고 생사를 여의고 더불어 살아가는 멋진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근세에 이르러 <무문관>에 관한 관심이 거의 없다가 선도회 제1대 지도 법사이셨던 종달(宗達) 이희익 노사께서 1968년 6월부터 월간 <법시>에 매달 1칙씩 연재했던 <무문관(無門關)>에 있는 20여 칙(則)의 공안(公案) 제창(提唱)을 바탕으로 매우 친절하게 풀어쓴 이 <무문관(無門關)>을 1974년에 출판하셨는데, 이 책은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고(故) 고암(古庵) 노사께서 이 책을 접하시고는 종달 노사께 너무 노골화시켜 놓았다며 극찬한 책이기도 하다.
참고로 나의 경우 1975년 10월 종달 노사께 입문한 이래 15년간 지도를 받았던 입장에서, 그리고 1990년 6월 노사께서 입적한 이 후 지금까지 지도하는 법사의 입장에서 이 <무문관>을 25여 년 간 꾸준히 내 곁에 두고 늘 무문 선사의 가르침을 언제나 새롭게 접해 오고 있으며 이런 나의 태도가 비록 내세울 것은 없으나 나름대로 치열하게 더불어 살아가려고 애쓰는 ‘오늘의 나’가 있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이 보다 지속적으로 각자의 삶을 철저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리라 확신하여 이 책을 꼭 권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동안 종달 노사께서 4판까지 내시면서 잘못된 부분들을 많이 바로 잡았으나 아직도 여러 곳에서 다듬을 곳이 눈에 띄어 힘닿는 데까지 노사 특유의 어투와 가르침의 본뜻은 그대로 살리면서 손질을 하였으며 젊은 세대의 흐름에 맞게 가로쓰기 판으로 새롭게 바꾸었다.
끝으로 이번 상아출판사의 선의(善意)로 새롭게 개정판을 내게 된 것을 고(故) 종달 이희익 노사님을 대신해 깊이 감사드린다.
단기 4333년(서기 2000년) 3월 31일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연구실[무난헌(無難軒)]에서
선도회(禪道會) 제2대 지도법사 법경(法境) 박영재 합장
종달 노사의 <무문관> 제창(提唱)
종달 노사께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던 무문관의 정신을 되살려 1968년부터 월간 <법시>에 연재했던 <무문관(無門關)>의 20여 칙(則) 공안(公案) 제창(提唱)을 바탕으로 1974년 보련각에서 <무문관> 48칙을 모두 제창한 <무문관강석(無門關講釋)>을 출판한 후, 이를 교재로 선도회(禪道會)의 참선 법회 때마다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다시 한 칙씩 제창을 하셨다.
실로 무문혜개 선사에 의해 1228년 <무문관>이 출판된 후, 한국에는 도입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무문관>을,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제창하셨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무문관>이 간행된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는 꾸준히 판을 거듭하며 선 수행의 필독서로서 널리 유포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종달 노사 이전의 기록은 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참고로 종달 노사 이후 관응 노사와 숭산 노사께서 <무문관>을 제창하셨으며, 원로학자로서는 고 이기영 박사가, 그리고 소장학자로서는 한형조 교수가 <무문관>의 해설서를 출판하였다.
한글 세대였던 필자의 경우 1975년 갓 입문했을 때에는 비록 노사께서 <무문관> 원문을 한 구절씩 읽고 친절히 제창을 하셨으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와 돌이켜 보니 들은풍월이 지속적인 참선 수행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사실 스승의 생명은 바른 입실점검과 제창을 통해 스승의 실참실수(實參實修)를, 제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끄는 데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제 무문혜개 선사가 지은 <무문관>의 제1칙에 있는, 간화선의 완성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흔히 언급되고 있는 ‘조주무자’ 화두 본칙과 이 본칙에 관한 무문혜개 선사의 평창과 송 및 이들에 대한 종달 노사의 제창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주무자 본칙(本則)
趙州和尙 因 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조주화상 인 승문 구자환유불성야무 주운 무
역(譯): 어느 때 한 승려가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 “무(無)”라고 대답했다.
제창(提唱): 조주 스님(778-897)은 마조도일 스님의 제자인 남전보원 스님의 문하(門下)로, 조주(趙州) 관음원(觀音院)의 주지였던 종심(從諗) 선사를 말한다. 후에 진제(眞際)라고 시호(論號)했다. 어려서 출가하여 60세까지 남전 선사를 시봉하다 스승 입적이후인 60세부터 80세까지 행각(行脚) 수행을 했으며 120세에 돌아가신, 당대 선계(禪界)의 거물이었다.
불가에서는 그 지방의 지명이나 산명 또는 강 이름 등을 따서 불렀던 풍습으로, 조주 스님도 조주 땅의 이름을 따서 이름하였던 것이다.
조주 스님에게 어느 때 한 승려가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주 스님, 대답하기를 ‘무(無)’, 즉 ‘없다’고 말했다. 불교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주장하는데, 조주 스님은 왜 '無'고 했을까? 여기가 궁금한 곳이다.
일체중생이라고 하면, 생명(生命)이 있는 동물이나 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렇게 좁은 의미가 아니고, 유기물 · 무기물 할 것 없이 어떤 물체를 막론하고 불성을 지니지 않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각각 천차만별이기는 하나 결국은 똑같다는 데서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일러 내려 왔다. 그러니까 불성은 곧 진리라는 뜻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불(佛)이라면 가장 성스럽고 고원하고 또 심오한 것으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이 승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조주 스님에게 물어 보았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개를 귀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개라면 가장 천한 동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에도 불성이 있을까하고 물어 봄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주 스님이 서슴지 않고 '무(無)'라고 한 데는 까닭이 있다. 이 까닭을 캐내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무(無)’라고 대답했으니 ‘없다’는 것으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없다든가 있다든가 하는, 즉 있다는 반대의 ‘없다’라는 의미로 대답한 것이 아니다. ‘있다⋅없다’하는 것은 일반에서 하는 말이지만, 선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유(有)⋅무(無)’를 초월하여 대답한 말이다.
그 증거로서, 조주록(趙州錄)에
僧問 狗子還有佛生也無 師云 無 僧云 蠢動含靈皆有佛性
승문 구자환유불성야무 사운 무 승운 준동함령개유불성
狗子因甚麽無 師云 爲他有業識性在 又一僧問師 狗子還有
구자인심마무 사운 위타유업식성재 우일승문사 구자환유
佛性也無 師云 有 僧云 旣有爲甚麽入這皮袋裏來 師云 知而故犯.
불성야무 사운 유 승운 기유위심마입저피대리래 사운 지이고범
이라고 쓰여 있다. 개에 왜 불성이 없다고 합니까? 움직이는 동물이란 동물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이때 조주 스님의 말이 “그대에게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업식이란 몸 · 입 · 뜻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하는 것이 무명(無明)의 힘에 의하여 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풀이하면, 잡념 혹은 망상으로 알면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승려가 똑같이 물었으나, 이번에는 '유(有)'라고 대답했다. 이때 그 승려의 말이 “이미 불성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개 뱃속에까지 뛰어 들어갑니까?" 이 말은 이미 있는데, 있느니 없느니 할 것이 무엇이냐고 나무란 말이 된다. 이 말에 조주 스님은 “왜 알면서 묻느냐? 물은 그대가 잘못이 아니냐!"고 일침을 쏘아붙인 말이다. 요는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말은 선(禪)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본체론에서 볼 때의 얘기지만.
문제가 커졌다. 왜냐하면, 조주 스님이 거짓말쟁이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에 대답이 다르니 말이다. 만약에 수학자에게 하나에다 둘을 보태면 얼마입니까? 하고 물으면, 어떤 때는 셋이라고 대답하고, 또 어떤 때는 넷이라고 대답했다면, 이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주 스님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조금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有)'라는 말과 '무(無)'라는 말이 똑같다는 것일까? 선에서는 똑같이 본다. 다시 말하면 조주 스님은 ‘유 · 무’를 초월한 입장에서 대답했던 것이다. 선(禪)은 일단 하나로 뭉쳐야 한다. 즉, '무'라고 할 때 '무'라는 데서 우주를 뭉치고, '有'라고 할 때 '有'라는 데 전 우주를 뭉치게 된다. 그러니까, ‘有 · 無’라고 하는 데 한하는 것이 아니고, 일거일동 그때그때마다 하나로 뭉치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일단’이라고 한 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뭉치는 것이 선의 사명이기는 하나 사물을 뭉쳐서 뭉친 그 자리에 언제까지나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일단 뭉쳤으면 다시 그를 풀어야 한다.
이 작용을 선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로 표현했다. ‘색(色)’은 현상계(차별계)를 말하고 ‘공(空)’은 본체(평등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색’이면서 ‘공’이고, ‘공’이면서 ‘색’이다. 즉 색과 공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보통 알기로는 색과 공이 서로 다른 것으로 알지만 선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창한다.
요는 조주 스님께서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한, 그 뱃속을 알려면 ‘무(無)’자(字)를 터득해야 한다. '무'자를 터득하면 조주 스님의 뱃속은 물론 삼세제불의 뱃속까지 샅샅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무(無)'자 하나로 옛날부터 많은 영웅호걸들이 진땀을 빼고 피땀도 흘렀던 것이다.
이 책을 엮은 무문 스님도 6년간이나 이 '무(無)'자 하나로 씨름 하였다고 한다. 대발심(大發心)해서 전문 선방에서 6년 동안 겨우 '무'자 화두 하나를 봤다고 하니, 그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쉽게 보는 수도 있다. 즉, 도심(道心)이 견고하면 당장에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처음에 ‘조주구자’를 다룬 것은, ‘무’라는 관문을 통해야 하기 때문임을 알아 두라. 조주 스님은 부정(否定)의 묘용(妙用)을 개시(開示)했던 것이다. 선(禪)은 일단 부정해야 한다. 부정은 사물과 한 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즉, 사물과 한 몸이 될 때 사물도 없고 자신도 망각하게 되니, 부정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삼라만상을 언제까지나 부정하는 데만 머무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를 다시 활용하는 것을 묘용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무(無)’자 하나만 터득하면 선의 극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현상계는 모두 구체적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변이 · 변화하므로 ‘무’이며, 동시에 변화하면서 그 본체는 전혀 변화하지 않으므로 ‘공(空)’이다. 그래서 유 · 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면 ‘공’이 아니고 유 · 무를 완전히 떠나 그와 절연 상태만으로도 ‘공’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 · 무를 초월하여 있다든지 없다든지 차별적 견해를 떠나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비로소 조주 스님의 뱃속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선은 어떤 지식에 의하여 사량(思量)으로 써 이루지는 못한다. 다만 만사(萬事)를 방하(放下)하고 '무'자에 부닥쳐 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평창(評唱)
無門曰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무문왈 참선수투조사관 묘오요궁심로절 조관불투 심로부절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字
진시의초부목정령 차도 여하시조사관 지자일개무자
乃宗門一關也 須目之曰 禪宗無門關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내종문일관야 수목지왈 선종무문관 투득과자 비단친견조주
便可與歷代祖師 把手共行 眉毛厮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변가여역대조사 파수공행 미모시결 동일안견 동일이문
豈不慶快 莫有要透關底麽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豪竅
기불경쾌 막유요투관저마 장삼백육십골절 팔만사천호규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撕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통신기개의단 참개무자 주야제시 막작허무회 막작유무회
如呑了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여탄료개열철환상사 토우토불출 탕진종전악지악각 구구순숙
自然內外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驀然打發 驚天動地
자연내외타성일편 여아자득몽 지허자지 맥연타발 경천동지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岸頭
여탈득관장군대도입수 봉불살불 봉조살조 어생사안두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且作麽生提撕 盡平生氣力
득대자재 향육도사생중 유희삼매 차작마생제시 진평생기력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 一點便著
거개무자 약불간단 호사법촉 일점변착
역(譯): 무문 선사 가로되, “참선(參禪)은 반드시 조사(祖師)들의 관문(關門)을 투과(透過)하지 않으면 안 되며, 오묘(奧妙)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분별심(分別心)을 끊어버려야만 한다. 따라서 조사관을 투과하지 않고 분별심을 끊지 못하는 자들은 초목에 기숙(寄宿)하는 정체(正體)를 알 수 없는 혼백(魂魄)들이 될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 조사관이란 어떤 것이냐? 다만 이 일개(一箇)의 ‘무(無)’라는 자(字) - 이것이 종문(宗門)의 유일(唯一)한 관문인 것이다. 그러한 연유(緣由)로 이것을 일러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한다. 이 관문을 투과한 자는 비단 가까이에서 조주 선사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대(歷代) 조사들과도 손을 맞잡고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며 얼굴을 맞대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경쾌(輕快)하지 않으리오! 이 관문을 투과하려 하지 않겠는가! 360개의 뼈마디와 84000개의 털구멍으로, 즉 온몸으로 의단(疑團)을 일으켜 밤낮으로 ‘무(無)’자(字)를 참구(參究)하라. 이 ‘무’자를 ‘허무(虛無)의 무’라고 헤아리지 말며 ‘유무(有無)의 무’라고도 헤아리지 말라. (이것은) 마치 빨갛게 달군 쇠구슬을 삼킨 것과 같아서 토해내려 해도 토해낼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쁜 지식들을 전부 탕진(蕩盡)하여 수행이 무르익게 되면 자연히 안과 밖(모든 차별상)은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수행자가 멋진) 꿈을 꾼 벙어리와 같아서 다만 자신만이 알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뭉쳐졌던 이 의심덩어리가) 대폭발(大爆發)을 일으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관우(關羽) 장군(將軍)의 대도(大刀)를 빼앗아 손에 넣은 것과 같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것과 같고,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 섰을 지라도 자유자재를 터득하여,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든지 마음대로 행하여도 해탈무애(解脫無礙)한 참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겠는가? 평생(平生) 동안 온 힘을 다하여 이 ‘무(無)’자(字)를 참구하라. 끊임없이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마치 등불을 켤 때처럼 법등(法燈)을 밝히게 될 때 주위의 어둠은 일시(一時)에 광명(光明)으로 빛나리라.
제창(提唱): 일반 학문은 지해(知解)와 분별(分別)로 이루어지지만 선은 그렇지 않다. 모든 지해와 분별을 끊어 버려야 한다. 추호라도 지해와 분별을 두면 선에 이르지 못한다. 즉, 지해와 분별을 하나도 남김없이 끊은 데가 묘오(妙悟)다. 이 묘오에 이르려면 심로(心路)를 궁하고 절함을 요한다고 했다. 심로란 위에서 말한 지해와 분별을 뜻한다. 즉 고하 장단 부귀빈천의 사량(思量)을 말한다. 이 사량을 초월한 때가 조사관을 터득한 때이다. 조사관이란 1천7백여 화두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무(無)’자(字)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선은 모름지기 이 ‘무’자를 터득해야 된다고 무문 스님은 강조했다. ‘관(關)’자는 한 고비를 넘긴다는 뜻도 된다. 옛날 ‘함곡관’을 넘어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터인데, 여기서 일단 정지시켜, 요즘 말로 검문이 끝난 후에 통과시킨다. 검문에 미심쩍은 점이 있을 때에는 통과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선에서는 위의 사량 분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에는 이 관을 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무’자 화두를 통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무’자니 ‘유’자니 하는 것들을 몽땅 버린 뒤, 즉 궁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관문(關門)이 열린다. 이 관문을 통하지 못한 사람은 허울만 사람의 형체이지 사실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얼굴만 예쁘면 여자냐! 마음씨가 고와야 여자지! 라는 노래가 있지 않은가! 속담에 비단 보자기에 개똥이란 말이 있다. 거죽으로 보기에는 신사이고 대장부같이 보이나 그 마음속은 도둑놈이란 말일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且道]. 어떤 것이 조사관인가? 조사관이란 별 것이 아니다. 다만 한 개의 ‘무'자이다. 이 ‘무’자 하나만 통하면 1천7백 공안이 모두 이에 함축된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선종무문관'이라고 한다. 요는 관문인 ‘무’자를 통하지 않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만약에 이 ‘무’자를 통한 사람이라면 비단 조주 스님과 똑같은 경지(境地)일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 스님 네와 손잡고 공행(共行)하리라고 했다. 그야 세상 이치는 하나이니 조사 스님 네들의 이치와 조금이라도 다를 리가 없다. 다시 말하면 ‘무’자를 통하면 성인(聖人)이요 통치 못하면 범부(凡夫)이리라. 그러니까 서로 눈을 맞대고 똑같은 눈으로 보고 똑같은 귀로 들을 것이니 어찌 경쾌하지 않으랴! 장미꽃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즉, 예쁘다고 하는 사람과 눈에 잘 돋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장미꽃 자체가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음은 물론이지만, 보는 사람의 그때그때의 심경에 따라 똑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자를 통한사람 사이에는 그 ‘무’자를 보는 법이 위의 장미꽃 보는 것과는 달리 조금도 차이가 없다. 새벽에 종소리가 들려오면 “아, 참 유창한 소리군."하고 더욱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찮게 단잠을 깨워 놨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 이는 위의 ‘무’자를 통한 사람끼리의 경지가 못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자를 통한 사람끼리가 아니고는 사물을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같은 귀로 들을 수 없다. 과부가 과부의 설움을 안다는 말도 이와 서로 통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말을 매우 평범하게 귀 흘려버리지만, 이는 자신이 과부가 되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과부가 돼보지 못하고 과부의 진정한 설움을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세상사는 모두 이와 같다. 직접 체험해보지도 않고 그 일을 시비 판단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3천 년 전 부처님께서 깨치신 도리가 ‘무’자를 통한 경지와 같다. 만약에 그것이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3천 년 전 부처님께서 깨치신 그 도리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무’자 하나의 가치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하기만 하면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와 똑같은 경지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무’자를 통해 보려는 용기 있는 사람은 있는가? 없는가? 만약 통해 보려거든 360개의 골절과 8만4천개의 털구멍을 모두 동원하여 ‘무’자란 어떤 것인가? 하고 의문을 일으켜라. 사람에게는 360개의 뼈마디와 8만4천개의 털구멍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온몸으로 ‘무’자를 참구(參究)하라는 뜻이다. 이 ‘무’자를 참할 때 우선 대의단(大疑團)과 대신근(大信根)과 대용맹(大勇益)을 일으키라고 했다. 세 가지 가운데서도 대의단, 즉 큰 의문(疑問)이 먼저 있어야 한다. 삼라만상이 모두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무’자에 대한 의문이다. 사실상 일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의문을 자꾸 캐고 들어가야 한다. 자나 깨나 일하거나 주야를 가리지 말고‘무’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일꼬? 하고. 그런데 있다든지 없다든지 차별을 두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생각한다고 해서 머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랫배[氣海月田]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머리로 이리 재고 저리 재지 말고, 무작정 ‘무’자! 해 보라. 가령, 벌겋게 단 쇳덩어리를 삼키고 토하되 토할 수도 없는 궁지에 이르러야 한다. 진퇴유곡이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선방에서 조실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는다.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보고는 이것이 아마 맞으리라고 조실 스님 방에 들어가서 경계를 제시한다. 맞을 리가 없다. (무문 스님도 6년이나 ‘무’자를 들고 씨름했다고 하니 말이다.) 조실 스님께서 아니라고 머리를 흔든다. 다시 나와서 화두를 든다. 이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되풀이 한다. 그래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몇 해를 두고 꾸준히 씨름을 하다 보면 그 나름대로 어느 정도 실력이 붙는다. 그를 지켜보는 유나(維那=선방 안을 감독하는 입승 스님)가 이때 궁지로 몰아 넣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무작정 조실 방에 몰아넣는다. 조실 스님은 거듭 쫓아낸다. 이를 1주일이고 2주일이고 되풀이한다. 그 동안 별의별 소리를 다 해보고 오만 가지 수작을 다 털어놓아 결국 할 말도 없고 수작도 할 건더기가 없어질 때가 깨치는 때다. 즉, 궁지에 든 때다. ‘궁 즉 통(窮卽通)’이란 말이 있다. 비단 선(禪)에서 뿐만 아니라 매사가 그러하다. 특히 서화나 공예는 한 고비 넘기지 않고는 극치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궁지를 벗어나야 정말 궤도에 오르게 되어 비로소 탁 트이는 법이다.
하물며 선이 궁지에 들지 않고 트일 리 없다. 어떠한 지식이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다만 무작정 ‘무’자! 라고 해보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때까지 배운 지식을 일단 탕진해야 한다. 지식이란 어떤 학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소위 삼독오욕(三毒五慾)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전체를 일단 버려라. 쓰다든지 달다든지 맵다든지 짜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방해가 되니, 이것들을 탕진하되 조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마음을 굳게 먹으면 어느 때인가 터지는 날이 있다. 특히 선에서는 조급함을 꺼린다. 과일이 제 나무에서 익어야지 익지 않은 것을 따서 이불 속에서 억지로 익힌 놈은 제 맛이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급하게 굴면 도리어 통했다 할지라도 힘이 약하게 된다. 그러니까 천천히 끊임없이 의문을 일으키면 자연히 트이어 마침내 벙어리가 꿈을 꾼 것과 같이 남모르게 알게 된다. 그리고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정도의 기쁨을 얻으리라. 그 기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 역시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모르는 일이다. 천지를 움직일 정도이니 천만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고관대작의 지위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기쁨을 한 번 체험하고 실감해 보라! 말이나 글로 몇 천 번 들어봤자 소용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관우 장군의 80근의 칼, 즉 '무'자의 명도(銘刀)를 탈취하여 부처(佛)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고 했다. 관우 장군이 80근의 칼을 휘두를 때 적이 없었다. 천군만마 속에서 그 큰 칼날이 번쩍일 때 적군이 햇볕에 이슬방울처럼 사라지듯이, 일단 깨치면 부처와 한 몸이 되고 조사 스님 네들과도 한 몸이 된다. 죽인다는 말은 한 몸이 되어 부처와 조사도 없고 자신도 없는 경지를 말한다. 부처의 깨침(진리)이나 조사 스님 네들의 깨침이나 자기의 깨침이 각각 다르다면 그는 불법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무'자를 터득한) 깨친 그 경지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과연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 네들과 똑같은 경지라면 육도사생(六道四生) 중에서 유희삼매하리라. ‘육도’란 중생이 업인(業因)에 따라 윤회하는 것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 즉 지옥 · 아귀 · 축생 ·아수라 · 인간 · 천상이다. 그러니까 사람 살림의 전체를 말한다. ‘사생’은 생물이 태어나는 모습의 네 가지를 말하는데,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火生)이다. 이 역시 생물의 생태를 전부 가리킨 말이다. 그러면 결국 일상생활을 말하는데 그가 자유자재하여 어디 하나 걸릴 데가 없다. 무심(無心)히 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입고, 사장이 부르면 대답하고, 마루에 물이 떨어지면 가정부가 닦지 않는가! 어디 하나 막힐 데가 없다. 그러니 ‘무’자를 터득하여 조사관을 통하기만 하면 천지가 모두 내 것이 된다는 얘기이다.
팔만 사천의 법문도 이 ‘무’자 하나로 거뜬히 해치울 수가 있고, 1천7백 공안도 이 ‘무’자 하나로 모두 트인다. 그러고 보니 천하를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유람하는 것과 같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세계 유람이 꽤 유행하는 모양인데, 그런 물질적인 유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소위 방석위에 앉아서 천하를 주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무’자만 통하면 부처나 조사 스님들의 경지와 같아서 1천7백 공안이 모두 트인다고 했지만, 이는 대오 철저한사람을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상 깨침에도 사람의 근기에 따라 철저하고 미지근한 사람이 있다. 만약에 구구순숙(久久純熟)하지 못하고 어떤 힌트로 겨우 깨쳤다면 1천7백 공안을 각별로 하나하나씩 간신히 봐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옛날 근기가 좋은 때에 부처님이나 무문 스님 같은 이는 6년이나 꾸준히 노력하여 깨치는데 철저하였기 때문에 이 ‘무’자 하나로 1천7백 공안이 일시에 트였지만, 오늘날같이 근기가 약화된, 우리를 다양하게 미혹하게 하는 첨단과학 시대에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우선 미지근하게라도 ‘무’자를 봐놓고 볼 일이다. 그래서 지도하는 방법이 ‘힌트’를 많이 준다. 만약 ‘힌트’를 주지 않으면 평생 해 봐도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그래서 ‘무’자로 뼈대를 우선 세워 놓고, 다음에 서서히 살을 붙여보는 수밖에 없다. 두고두고 살을 붙여 놓기만 하면 결국은 완숙하게 되어 드디어 부처나 조사 스님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근기가 약화된 시대의 사정 이야기이고 언젠가 부처의 시대가 다시 되돌아오면 ‘힌트’ 따위의 번거로운 수작이 필요 없을 것이다.
중국의 임제종을 일으킨 임제 대사가 깨친 뒤에 그 소감을 '입지옥여유원관(入地獄如遊園觀)'이라고 외쳤다. 즉, 지옥에 떨어져서도 유원지에서 노는 것과 같다고! 지옥에 가면 모진 매도 맞고 가시밭 위로 걷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짓들이 모두 술집에서 마시고 먹고 한바탕 노래 부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지옥에서 매 맞을 때 마구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것과 철저히 한 몸이 되면 아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철저히 깨치기만 하면 매사가 모두 이러한 경지에 이른다.
그러면 어떻게 ‘무(無)’자를 공부할꼬! 다름 아니라 평생의 전 기력을 다하여 무! 무! 해 보라. 이를 끊임없이 계속하면 어느 때인가 트이는 날이 온다. 트이는 때에 법장(法藏)의 광명이 일시에 훤하게 천지를 비추니 통쾌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문제는 중단하지 말 일이다. 두 시간 앉아 보고 괴롭다고 중단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평소에는 그렇지도 않던 것이 좌선하려고 방석 위에 앉으면 어머니 젖 먹던 생각까지 떠오른다. 그러니까 괴롭기 짝이 없다. 이를 견디고 참아 나갈 때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가 된다.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좌선은 특히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굳게 명심해야 한다.
송(頌)
頌曰 狗子佛性 全提正令 纔涉有無 喪身失命
송왈 구자불성 전제정령 재섭유무 상신실명
역(譯): 송頌하여 가로되,
개의 불성佛性(이란 물음에 대한 조주의 ‘無’!)
석가의 바른 가르침을 몽땅 드러냈네.
(그러나) 조금이라도 ‘유무有無’에 걸리면
몸을 상傷하고 목숨을 잃으리라!
제창(提唱):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물음에, 없다(無)라고 대답한 것이 ‘전제정령(全提正令)’이다. 다시 말하면, 속임 없는 진짜 대답을 했다는 말이다. 결국 없으니 없다고 했을 뿐이다. 개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본체론에서 가능한 얘기다. 왜냐하면 어떤 물체를 막론하고 해부해 나가면 원자의 세계에 이르게 되고, 원자는 중심에 부피가 거의 영인 원자핵과 둘레에 역시 부피가 거의 없는 전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대부분 텅 빈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결국 ‘무(無)’에 도달한다. '무'라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을 정도의 '무'에 이른다. 이는 결국 텅 빈 공성(空性)이라는 입장에서 하나(똑같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개에도 이 본체론이 성립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무(無)’라고 하건 ‘유(有)’라고 하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즉 ‘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고 ‘유’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선(禪)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내세워도 좋다. 다시 부연해 말하면,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물음에, 시계라 해도 좋을 것이며, 잉크라 해도 좋을 것이며, 책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혹 시계가 무슨 불성을 지니고 있겠느냐고 반문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나 금강석이나 시계나 똑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으니, 의심할 것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유 · 무 어느 쪽에든 치우치면 생명조차 없어진다고 했다. 즉 ‘무’ 라고 하면 없는 것인 줄 알고, ‘유’라고 하면 있는 것인 줄 알면, 이런 견해는 선과 거리가 멀기를 천만 리의 차가 생긴다. 천만 리 거리보다 생명조차 없어진다고 했으니, 겁이 날 지경이다. 정법(正法)을 조금이라도 그르치면 자옥에 떨어지기가 화살 같다고 했으니 수선(修禪)하는 사람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본칙에서 말한 바 있지만, 차별[有]과 평등[無]을 하나로 보면서 차별은 어디까지나 차별이고, 평등은 어디까지나 평등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 소위 된장과 똥을 가려지 못하는 평등은 악평등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이 이 칙(則)의 핵심이다.
종달 노사와 조주무자
종달 노사께서 1984년에 펴낸 자서전(自敍傳)인 ‘인생(人生)의 계단(階段)’에서 나투셨던 ‘조주무자’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간신히 조주의 ‘무(無)’자(字)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쓰고 가노라!
纔得趙州無字 一生受用不盡
재득조주무자 일생수용부진
참고로 노사께서는 입실지도를 청하는 선도회 문하생들을 철저히 점검하시고, 바른 경계가 설 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다가 입문과정을 마치고 무문관 48칙을 점검받기 시작할 때가 되면, 거사호(居士號)나 대자호(大姉號)를 내리시면서 동시에 ‘무(無)’자(字)는 나의 스승’이라는 뜻의 ‘무자시아사(無字是我師)’를 손수 붓으로 써주시면서 늘 가슴 깊이 새기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노사의 ‘일생수용부진’의 경계였던 것이며 이 경계는 역시 선도회 법사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널리 전승되리라 확신한다.
<무문관>과 더불어 오늘을 사는 이들 본보기
<무문관(無門關)>
김인경/ 조선대학교 교수(미술대학)
ig824@hanmail.net
화려한 꽃 잔치가 막바지에 이르러, 5월의 산천에 솟아오르는 신록의 장엄함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나이가 조금씩 늘면서 매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면, 그 화려한 생명의 나날들이 그저 두고 보기 아까워서 부질없이 앞뒤 세월을 헤아리며 남은 생에 몇 번의 봄을 더 맞이할 수 있을까 조금씩 앓는 체도 해보지만, 계절은 내 앞에 머물러 잡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숲에 이는 바람처럼 다만 잠시 일렁이다 사라질 뿐이다.
다음 달이면 나의 스승이셨던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노사의 기일이다. 삼십대 초반 불안한 방황을 거듭하다 찾아들었던 스승의 문전... 그리고 그 곳에 ‘무문관’이 있었다. 매 주말 스승의 집 앞 ‘세심정’에 조금 일찍 당도하여 해쓱한 얼굴로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입실을 준비하던 때가 어느덧 이십년이 다 되었다. 스승의 지도를 받은 지 2년쯤 됐을 때부터 노사께서 우리나라 최초로 펴내신 <무문관> 책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보고 또 보고하여 한 오륙년이 되니 책모서리가 닳아서 둥글어질 정도가 되었다. 그 후 몇 번에 걸쳐 장정과 내용이 수정되어 나왔지만, 나는 내가 처음 지니고 공부했던 낡은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스스로 경책한다.
<무문관>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여 년 전, 중국 선종(禪宗) 임제종의 분파인 양기파의 ‘황룡무문혜개(黃龍無門慧開)’ 선사가 옛 조사들의 공안 48칙을 평창(評唱)하여 엮은 것을 남송의 이종황제 즉위4년 황제의 생일과 즉위를 기념하여 펴냈다고 한다. 여기에 실린 48칙은 평소 무문혜개 스님이 학인들에게 부과하며 지도했던 공안들로서 스님 자신이 두서없이 모아 편찬했다고 하였으나 그 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야말로 ‘검수도산(劍樹刀山)’, 모두가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난관들이다.
하나하나의 화두에는 일상생활중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일에서부터 인과와 계율의 함정에 학인을 밀어 넣기도 하며, 부처와 조사들의 일화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과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다그치기도 하면서 다양한 드라마가 펼쳐지는데, 이는 한번 읽어보는 책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놓고 규명해야하는 수행의 지침서다. 공안을 들고 들어가 매번 계속되는 스승과의 치열한 대면에서 제자는 용렬하고 편협했던 소아(小我)를 몰록 잊고는, 어느 날 마침내 백척간두에서 허공으로 미련 없이 발을 쑤욱 내딛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스승께서는 <무문관>말고도 <벽암록>을 비롯하여 십 수권의 선서를 펴내셨다. 모두가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보내는 주체적인 삶에 대한 노파심절의 메시지이다. 그 내용 중에 항상 머리에 집어넣는 지식이 아닌, 선의 요체인 실참실수를 간곡하게 강조하셨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만 간다. 노사가 떠나신지 13년이 되어 다시 펴드는 낡은 책 속엔 오늘 또 새로운 꽃들이 만발하였다.
* 이 글은 2004년 08월 10일에 발간된 법보신문에 실린 조선대 미대 혜정(慧頂) 김인경(선도회 광주모임 법사) 교수의 글이다.
<무문관>(상아)
선종 최후의 공안집
‘조주無字’ 등 48칙 선별해 소개
선 대중화에 기여한 종달 노사 역작
선(禪)은 흔히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알게 하는 데 있으며,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며 언어가 아닌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것(不立文字 直指人心 以心傳心 敎外別傳)’으로 일컬어진다. 그런 만큼 선은 마치 결벽증에라도 걸린 듯이 문자나 언어에 대한 극도의 기피와 혐오증 비슷한 성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선과 관련된 서적은 실로 엄청나다. 수많은 선사들의 어록을 비롯해 이들 선사들의 어록을 묶어놓은 <종경록>, <경덕전등록>, <조당집>, <종용록>, <선문염송>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수많은 선의 언어들은 마치 달을 가리키기 위한 수많은 손짓과 비슷하게 말로는 가리킬 수 없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즉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수많은 납자들을 깨우침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어록에는 불꽃이 튀는 긴장감과 파격을 곳곳에서 전개되곤 한다. <무문관(無門關)>은 이러한 선의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선서(禪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중국 남송의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쓴 이 책은 수많은 선어록 중 공안 48칙을 뽑아 상세한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제자들이 선을 올바로 참구하도록 만든 지침서다. 이런 까닭에 선 수행자들이 여기에 담긴 48칙의 화두들을 철저히 투과하기만 한다면 ‘무문 선사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일시에 1701가지의 공안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춰 부처와 조사와 손을 맞잡고 생사를 여의고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다.
특히 무문 선사는 제1칙 ‘조주무자(趙州無字)’를 종문(宗門)의 일관(一關)이라 부르고 이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조주에게 한 스님이 “개[狗子]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없다[無]”고 대답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유무 상대(有無相對)의 ‘무(無)’가 아니라 유무의 분별이 끊어진 절대적 ‘무’를 가리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문관>에는 이 ‘무(無)’자(字)의 탐구가 전편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무문관>은 지난 700여 년간 동아시아의 수많은 납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아쉽게도 근래에는 이를 주목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지난 60년대 중반 재가수행모임인 선도회를 결성해 이끌었던 종달 이희익 노사가 1974년 현대인들이 알기 쉽도록 <무문관>을 풀어쓰면서 다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고암 스님은 상세한 해석에 대해 선의 경계를 너무 노골화시켰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정진하는 ‘무문관’ 수행도 이 책의 출간과 무관하지 않다.
선종 최후의 공안집이라 불리는 <무문관>은 수행자이자 물리학자인 박영재 교수가 강조하듯 “이 책은 선수행의 입문서인 동시에 열심히 살아가려 애쓰는 모든 사람들이 보다 지속적으로 각자의 삶을 철저히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명저”라 할 수 있다.
법보신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 이 글은 2004년 9월 22일 발간된 법보신문의 ‘수행서 깊이 읽기’ 코너에 게재된 기사이다.
무문혜개의 <무문관>
한 승 원 <소설가>
손가락 저쪽의 달을 보게 한 책
48칙 읽고 선 세계 어렴풋 체득
이념 싸움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진 그 무렵에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때의 각박함 속에서 나는 심신이 쇠약해 있었다. 육체는 병들고 마음에는 불안과 불만족과 울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런 나에게 불심(佛心)으로 종(宗)을 삼고 무문으로 법문을 삼아야 한다는 이 책은 훌륭한 약재 구실을 하였다. 이 책은 결국 내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문 없는 문>이란 어떤 문인가. 처음 그 애매모호한 그 문이란 것은 내 의식을 아득하게 하였다.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것이냐. 어떤 조사의 말에 의하면 이러이러하고, 어떤 책에 씌어 있는 대로 한다면 요러조러하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하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우리 앞에 흔히 있는 문이고, 그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아픈 삶에 좋은 처방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바로 그 문을 거부하고 있다. 너는 자본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신 쪽이냐 악마 쪽이냐, 선 쪽이냐 악 쪽이냐, 기독교의 여호와를 믿느냐, 불교의 석가모니를 믿느냐, 노동자편에 서 있느냐, 사용자편에 서 있느냐…. 그때 내 주위의 사람들은 자꾸 어느 한 가지를 분명하게 선택을 하라고 강요하곤 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하면 회색분자라고 따돌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왜 여호와 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석가모니 쪽으로 나아가려 하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원적인 생각을 가지게 한다. 바다나 강변에 나가도 파도만 볼 뿐 물을 보지 못한다. 절이나 교회는 무엇인가. 석가모니나 예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달 그 자체는 아니다. 나는 혼미한 역사와 사회와 나의 눈뜨지 못한 미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헤매었다. 한데 그 이원적인 대립 갈등의 틀 속에서 일원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고, 파도 뒤에 감추어져 있는 물을 볼 수 있게 하고 손가락 저쪽의 달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이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의 48칙을 읽고 또 읽었다. 알듯 말듯 한 그것을 노루 뼈 삼년 고와 먹듯이 두었다가 읽고 또 두었다가 읽었다. 어느 날 나는 그 48칙들이 모두 공통된 분모를 가진 것임을 알아차렸다.
<오랑캐한테는 왜 수염이 없느냐><차나 한잔 하십시다><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한 것> <부처님은 똥치는 막대기이다>…. 우리의 삶은 자연스러워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연스러움은 차별심이 아닌 평등심의 삶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눈치 챘고, 선이라는 것도 그것과 멀지 않은 거라는 것도 어렴풋이 체득하였다. 이후로 나는 늘 내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가면서 사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곤 하는데 그때 이 책이 길잡이가 된다.
※<무문관>의 원제는 <선종무문관>으로 송나라 무문혜개(無門慧開)가 공안 48칙을 뽑고 각각 염제(拈提, 옛사람의 말을 자기의 소견으로 해석하고 비판함)와 송을 붙인 선서. 우리나라에서는 이희익 씨가 풀어서 소개했다(초판 보련각, 재판 기린원 3판 경서원, 4판 상아 간행).
현대불교신문 기사
한승원 씨가 추천하는 피서 철 불서들
<무문관> 화두 모음이다. 49칙의 화두는 사자 굴처럼 잡생각들을 잡아먹어주는 말들이다. 이 책은 욕망의 너울(미망)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것이다. (무문 혜개스님 지음 이희익 옮김)
<선가귀감> 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기초 지식들이다. 휴정스님은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대단한 선승이고 시인이며 외군을 물리친 승병장이었다. 조선조 후기에 쇠잔해가던 불교를 일으킨 휴정 스님은 속삭이는 듯 하면서도 명쾌한 논리로 선의 기초를 귀띔해준다. (휴정 스님 지음 법정 스님 번역)
불교신문 기사(2003-07-12)에서 발췌
필자가 담당했던 ‘자연과 인간’의
2008학년도 1학기 기말시험 문제 가운데 하나
문제: ‘조주구자’를 가슴에 새기면서 느낀 점을 있는 그대로 기술記述하시오.
답1) 2003학년도에 입학한 국어국문학과 수강생
내 세대는 암기식 교육을 경멸하던 세대였다. 수능위주의 교육은 한자를 경시하기 마련인데, 나도 어느덧 그런 풍조에 대한 반성의식조차 잃어버린 듯하다. 암기하는 것, 한 글자 한 글자씩 마음에 새기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이지?’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라도, 답안지를 쓰기위해 시험공부의 강박 속에서라도 이 글들을 새겨본 것은 좋은 일이었다.
사실 여기에는 ‘조주구자’와 관련된 수행결과를 보고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피상적인 이야기밖에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선생님께는 매우 죄송하다. 그러나 ‘조주구자’에 대한 참구는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 게다가 분명 새겼다고 믿었던 글자들이 새하얘졌다. 정말 마음에 새기지 않고 머리에 넣었기 때문이리라. 반성할 따름이다.
답2) 2004학년도에 입학한 신문방송학과 수강생
항상 잘하느냐 못하느냐,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등의 이분법적 분별심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분법적 사고관은 ‘조주무자’를 알기 전에는 근대적 사고방식인줄 알았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잘못이란 것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고치기 어렵기에 인간의 본질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것을 몸에 각인시키고 계속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의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직은 조주 스님의 뜻을 알지는 못하지만 고뇌하는 자만이 불성을 체득할 수 있다는 말도 있듯이 계속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련회 법문의 핵심 요약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무문관>과 더불어
자각각타(自覺覺他)를 위한 선도회의 가풍(家風)
- 귀의삼사(歸依三師): 세 분 스승, 석가세존(佛)-무문혜개(法)-의현종달(僧)께 귀의하기
- 좌일주칠(坐一走七):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부리기
- 입실점검(入室點檢): 정기적으로 참구하고 있는 화두 점검받기
==>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체득
==> 선(禪) 속에 약동(躍動)하는 인생(人生):
일상생활 속에서 무심(無心)히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行)을 전개함.
* 실천행의 점검: 매년 가계부 정리하며 연말정산 하듯이
이타 행을 그때그때마다 기록하고 연말에 스스로 1년을 성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