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년전인 2003년 6월8일 미국 뉴욕주 벨몬트경마장. 135년의 긴 역사를 가진 미 3대 메이저 경마대회인 ‘벨몬트 스테이크스’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경마장에 온 10만여명의 관객들의 시선은 ‘퍼니사이드’라는 거세마와 기수 줄리 크론(41)에게 집중돼 있었다. 퍼니사이드는 25년만에 ‘트리플크라운’(미 3대경마대회 우승)을 노리고 있었고 그의 파트너인 줄리 크론은 99년 은퇴한 후 4년만에 복귀를 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도 제 2의 줄리 크론을 꿈꾸는 여성기수가 있다. 80년 국내 경마사상 첫 여성정식 기수로 탄생한 이신영(24)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지난달 22일 7경주. 경주마 ‘특별관리’를 타고 게이트 앞에 선 이신영은 긴장돼 있었다.
‘1승만 더하면 이제 정식기수인데….’
그의 머리속에는 지난 3월 이후 지리하게 계속된 불운이 떠올랐다. 특히 4월4일 인기마 ‘중원마리’에 타 경주도중 다리가 부러지며 낙마를 했던 악몽도 생각났다. 그러나 잠시 후 출발소리와 함께 잡념은 사라졌다. ‘철컥’하며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먼저 선두로 나선 말은 저돌적인 인파이터로 ‘탱크’라는 별명이 붙은 임대규 기수의 ‘햇빛소녀‘. 스타트 능력이야 이신영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지만 꾹 참고 곱게 따라가며 체력을 비축했다. 이어 3코너에서 선두권에 가세한 뒤 마지막 4코너를 돌자마자 이신영은 무서운 기세로 스퍼트를 가했다. 결승선까지 불과 몇 초의 순간이 수십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함성이 들려 좌우로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80년 국내 경마 사상 첫 여성 정식기수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태어난 뒤 줄곧 경남 마산에서 살며 경마의 ‘경’자도 잘 모르던 ‘마산처녀’ 이신영이 경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98년 고3 가을때 진학담당 선생님이 지나는 말로 기수후보생을 모집한다고 말씀하더라고요. 그리곤 그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대학에 진학했었는데 선생님의 말이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과천에서 난생 처음 경마장을 구경한 뒤 다시 마산으로 내려갔지요. 물론 원서를 가져들고요,”
기수를 하겠다는 느닷없는 막내딸의 말에 부모님의 걱정은 대단했다. 그러나 시청에 다니는 아버지는 결국 딸의 고집에 두 손을 들고 조건부로 승락을 했다. 안될 것 같으면 빨리 그만두라며. 그러나 그는 5.4대의 1일 경쟁을 뚫고 99년 다른 5명의 동료 여성과 함께 제20기 기수후보생이 됐고 2001년 8월 2년간의 교육과정을 무난히 끝내고 수습기수로 데뷔했다. 첫 해 그의 기록은 44전3승·2위1회로 20여명의 동기생 중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마카오를 꿈꾸며
이신영은 데뷔초부터 여러가지 기록을 깬 ‘신기록 제조기’다. 첫 여성기수, 첫 대상경주 출전 여성기수, 첫 여성출신 외국경주 출주, 첫 여성 정식기수…. 이제는 남녀 통틀어 한국 기수로는 최초로 해외 진출을 준비중이다.
해외 진출은 아주 우연하게 다가왔다. 지난달 2일 마카오 국제수습기수 초청경주차 마카오에 갔는데 현지 경마관계자들의 눈에 들은 것.
경주 당일 이안 패터슨 재결수석은 그에게 한국에서 정식기수가 된다면 마카오에서 뛸 수 있게 임시면허를 발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신영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KRA트로피’ 경주에서 준우승을 하며 마카오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현재 한국에서 정식 기수가 된 이상 이신영의 마카오 진출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상대 경마장의 초청과 기수 본인 그리고 마사회(정확히 말하면 재결수석)의 동의가 필요한데 현재 마사회의 분위기도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사회 관계자는 “다음주 정도면 마카오경마장 시즌이 끝나고 9월 중순정도에 재개한다. 때문에 다음달에 진출 동의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현재 분위기는 매우 긍정적이다”고 밝혔다.
이신영은 현재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말을 아끼고 있지만 매일 저녁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는 등 마카오 진출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마카오에 가면 성공한다는 생각보다는 경마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기대도 하고 있다. 만약 임시기간(3개월) 동안 잘해 계속 라이센스를 연장한다면 홍콩 등 선진경마국가에서도 뛰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사실 여성으로서 기수를 하자니 힘든 때도 많았어요. 특히 올해 들어 한계를 느껴 마카오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만둘 생각도 했었지요. 물론 지금은 아니죠. 미국의 줄리 크론처럼 세계적인 기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IMF 당시 박세리 선수가 US오픈에서 우승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준 것처럼 저도 마카오에서 성공해 희망을 주는 기수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