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수지에서(16)
2005년 7월
뉴스 보니 비가 전국 곳곳에 피해를 입혔다. 내 텃밭 역시 그렇다. 밭에 나갔더니 풀은
길을 덮었고, 상추는 녹았고, 고추나무는 넘어져 있다.
땀 흘리며 잡초 뽑고 고추 지줏대 세워주면서 하나 느낀게 있다. 쌀 한 톨. 풋고추
하나도 농사한 사람들 땀의 결실이다. 식사 때 상에 떨어진 밥풀 하나 허투로 버려선
안된다.
그래도 대지는 살아있다. 쑥갓과 깻잎 싱싱하다. 채소 많이 섭취하면 위장이
깨끗해지고 정신도 맑아진다 한다. 그 싱싱한 대지의 선물 비닐봉지에 담는 기분
흐믓하다. 빌린 다섯 평 텃밭이 아내와 나 두사람 먹을 푸성귀 충분히 공급해준다.
간혹 풋고추는 옆 집 할머니한테 나눠주기도 한다.
감자꽃이 피었는데, 놀랍도록 화려하다. 평소 무심코 보던 것이 감동의 대상이다.
대만 고궁박물원에 가면 취옥백채(翠玉白菜)라 불리는 옥배추가 있다. 자세히 보면
배추 잎 부분은 푸른 옥, 뿌리 부분은 백옥이다. 잎에 여치와 메뚜기도 조각되어 있다.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감자꽃 앞에서 대만 고궁박물원 취옥백채(翠玉白菜)를 한참 생각해보았다. 그 취옥백채를 우리나라 제주도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내 텃밭에 핀 한송이 감자꽃을 대만 전체 땅떵어리와도 바뀌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수돗가에서 시원한 물로 얼굴 씻고, 밭고랑에 놓인 벚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바람 쐬니
그리 시원할 수 없다.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끼는 벗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금빛 태양
비친다.
세상 아무 것 부러울 게 없다. 부러운 게 있다면 이 수원 상광교동 텃밭 이다. 담장에
능소화가 그리 붉은 것, 심은지 3년 된 작은 사과나무에 골프공만한 사과가 열린
것이 부럽다. 나는 장관 벼슬한 사람, 강남에 빌딍 가진 친구 부럽지 않다. 볕 바르고 공기
맑은 3백 평 텃밭 가진 상광교동 땅 주인이 부럽다.
2005년 8월
장마라고 다 나쁜 건 아니다. 담배 사러 우산 쓰고 밖에 나갔다가 빗속에 더 싱싱해진
나무들을 보았다. 매화나무 수피에 앉은 녹색 이끼가 참 곱다. 땅에 하얀
버섯이 힘차게 솟았다. 신비롭다. 비 젖자 소나무 새순은 한 뼘씩 자랐고, 송글송긓 모과 위에 물방울 맺혔다. 백합은 향기로운 요조숙녀 같고, 채송화는 노랑, 주황, 붉은 빛 더 진하고, 비비추는 금방 목욕한 소녀같다.
비는 식물에게 축복이다. 톡톡톡 우산 때리는 빗소릴 들으려고 일부러 아파트 단지
한바퀴 더 돌았다. 우중산행도 해봐야겠다. 얼굴과 몸에 비를 맞으며 땀 흘리며 산속을
헤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옷 다 적셔도 좋을 것이다. 사람도 혹시 식물처럼 비 맞으면 더
싱싱해질지 모른다. 비에 불어난 물소리 듣기 좋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좋다. 돌아와서 대청에 돗자리 깔고 향 피워놓고 목침 베고 통쾌히 누워버렸다.
유령이란 사람이 술을 실컷 먹고 집에서 벌거벗은 알몸으로 있어 사람들이 그걸
나무랐다. 그러자 유령은,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이 방을 옷으로 삼는데,
그대들은 무슨 일로 나의 옷 속에 들어왔는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세신설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첫댓글 초봄에 원추리 나물과 방풍나물을 무쳐 먹으면 밥맛이 돌아오지요
거사님 부럽습니다. 어디에서
이처럼 멋진 문장이 술술 나오는지 그 재주와 솜씨에 저는 항상
기가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