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면
대한민국은 라면의 천국이다. 국민 1인당 연간 74개 이상을 소비하는 대한민국은 세계 라면소비 1위 국가이다. 대한민국처럼 라면의 종류가 많고 전 국민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나라가 없다. 대한민국 라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사실은 전 세계인이 공감한다. 어느 집이라도 비상용 라면을 구비하지 않은 집이 없고, 1주일에 몇 번씩 라면을 먹지 않는 집이 별로 없을 지경이다. 야외활동을 할 때도 라면을 구비하는 일은 필수 중의 필수이다. 상대적으로 나이든 어른들이 젊은 층에 비해 떨어지는 선호도를 보이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 국민이 즐겨 먹는다.
제조사가 많은 만큼 라면의 종류는 부지기수로 많다. 맛도 재료도 각양각색이다. 순한 맛, 얼큰한 맛을 기본으로 쇠고기 맛, 닭고기 맛, 해물 맛 등 일일이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다. 짜장면, 비빔면, 칼국수, 곰탕면 등과 같이 한국인에게 인기 좋은 음식들을 응용한 라면의 종류도 즐비하다. 그러다보니 특정 계층을 공략하기 위한 라면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끓여먹는 일반 라면과 더불어 용기에 담아 포장해 끓는 물만 부으면 즉석요리가 가능한 컵라면과 사발면도 종류가 넘쳐난다. 그러면서 라면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라면시장은 지난 5년간 40% 성장해 시장규모는 2조 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국내 라면 총 생산은 59만 톤으로 2조 124억 원어치를 기록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한국 라면 맛은 세계 각국에 소문이 나서 수출의 효자 품목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식품점에는 한국산 라면이 진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라면의 인기가 치솟으며 각국에서는 한국의 유명 상품을 모방한 짝퉁라면을 생산하고 있다. 외국여행을 할 때 느끼한 음식에 지친 입맛을 달래려면 얼큰한 한국라면 몇 개를 챙겨가는 것이 필수 중의 필수이다. 나아가 외국인들에게 한국라면을 선물하면 최고의 인기를 실감하게 된다.
라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일치하는 것은 라면의 종주국이 한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을 종주국으로 보는 견해가 상치된다. 그러나 대개 중국에서 출현해서 일본을 거쳐 인스턴트화 됐고 한국이 세계화에 성공시켰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라면이란 단어의 어원은 중국어 라몐(拉麵, 랍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랍면'은 송나라 때 수타 기술이 개발되면서 나타난 국수로 '당겨서 만든 국수'라는 뜻이다. 보통 알려진 '수타면'이 라면의 원형인 셈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라면은 건조 상태로 포장된 인스턴트 라면이다. 이 인스턴트 라면은 일본 닛신식품이 시판한 '치킨라멘'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면을 기름에 튀겨 건조하는 방법에 착안해서 1958년 일본의 기업인 닛신식품이 닭뼈로 육수맛을 낸 '치킨라멘'을 시판하면서 인스턴트 라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렇듯 중국군이 개발의 동기부여를 했고, 일본기업이 개발과 시판에 성공하면서 라면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라면의 변방이었다.
일본에서 라면이 개발된 1958년보다 2년 뒤인 1960년 삼양식품이 '삼양라면'을 만들어 시판하면서 한국 땅에 최초로 라면이 보급되었다. 당시까지도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던 한국은 고질적인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라면 보급을 확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면이 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라면은 그리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대가족제도가 일반적이었던 당시에는 큰 솥에 라면 서너 봉지를 넣고 소면 국수를 잔뜩 넣고 함께 끓여야 많은 식구들이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국수 없이 끓인 온전한 라면을 먹는 것이 당시 어린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양의 라면을 먹었다. 평상시에도 라면을 즐겨 먹었고, 집 밖으로 나가 하루나 이틀 혹은 며칠 간 머무를 때도 반드시 챙겨갔다. 밥맛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체 식사는 누가 뭐래도 라면이다. 식사할 인원수에 비해 남은 밥이 부족할 때도 라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서 라면은 찬밥과 환상의 궁합이다. 더불어 김치와는 최고의 찰떡궁합이다. 한국이 라면의 종주국을 제치고 세계 라면시장의 주인이 된 것은 김치와의 궁합이 뒷받침이 됐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나서 자란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 하숙과 자취생활을 이어갔다. 하숙은 2년 남짓 했을 뿐 결혼을 하기 전까지 학생과 직장인 신분일 때를 합해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자취를 했다. 연탄불과 석유풍로를 거쳐 가스레인지에 이르는 시대까지 망라했으니 퍽이나 오랜 시간 자취생활을 했다. 그러니 오죽이나 많은 라면을 먹었겠는가. 흔히 하는 표현으로 내가 먹은 라면의 면발을 한 가닥으로 길게 늘어뜨리면 지구와 달을 오가고도 남을 길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울서 부산을 수십 번 오고갈 길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그토록 많은 라면을 먹었지만 아직도 나는 라면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도 라면을 즐겨 먹는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라면이 건강에 이롭지 못한 음식이라는 사실에 대해 하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적당히 익은 김치만 곁들여 준다면 라면만한 음식도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다만 면발 익은 정도의 선호도는 몇 차례 바뀌었던 것 같다. 생라면에 가까운 덜 익은 면발을 좋아하던 때도 있었고, 제대로 익은 면발을 좋아하던 때도 있었다. 다양한 라면 중 특정 제품을 좋아하다가 다른 제품으로 입맛이 변한 적은 있지만 라면 자체를 싫어한 적은 없다. 참으로 대단한 라면 애호가이다.
아비의 이런 식성을 닮았는지 두 아들의 라면 사랑도 대단한 지경이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빠짐없이 사오는 품목이 라면이고, 적지 않은 라면을 구매해 집안에 두면 금세 없어질 정도이다. 특정 제품을 한 박스 사다두어도 그러하고, 여려 제품을 고르게 사다두어도 그러하고, 아비를 능가하는 두 아들의 라면 사랑 때문에 집안에 사다둔 라면은 이내 종적을 감춘다. 평소 매운 음식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지만 라면을 먹을 때만큼은 아무리 매운 맛도 투정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라면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영락없는 부전자전이다.
어린 시절 라면을 몹시도 먹고 싶어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취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세계 각국 주요도시의 마트 진열장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라면을 보고 가슴 뿌듯함을 느낀 기억이 난다. 기인들을 소개하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세끼 라면만 먹고사는 사람이야기를 시청하고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도 난다. 그동안 각종 매체를 통해 소개된 수많은 라면 광고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참으로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음식이다. 간편하고 맛이 좋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애용할 것 같다.
라면은 중국인들이 처음 만들었고, 일본인들이 인스턴트화 시켜 제품으로 탄생시켰고, 한국인들이 특유의 맛을 통해 세계화를 실현했다. 그래서 라면의 진정한 강자는 대한민국이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라면을 바라보며 라면에 얽힌 많은 추억들을 하나 둘 떠올린다. 모방에 창의력을 보태 세계시장을 휘어잡은 한국인들의 저력을 생각해본다. 세상 그 많은 음식 중 라면과 최고의 궁합을 이루는 김치가 있었기에 한국은 진정한 라면의 강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해 라면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기름져서 느끼한 맛도 싫어지고, 쌀에 비해 밀가루 음식의 소화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트륨을 많이 함유한 식품이라서 건강을 해칠까 우려해 기피하게 된다고 한다. 탈모가 심각한 수준이고, 노안이 찾아온 지도 오래고, 피부도 탄력을 잃어 몸뚱이 여기저기서 노화가 바르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라면을 좋아하는 걸 보면 입맛은 노화가 덜 진행된 모양이다. 미각,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의 오감 가운데 으뜸인 미각이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탱탱한 면발에 짭조름한 국물이 좋아서 아직 라면 맛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라면을 좋아하는 입맛을 보니 난 아직도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