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서원(道源書院)에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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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읍례를 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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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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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 동복에 있는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춘향제(春香祭)가 열려 길을 나섰다. 도원서원은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선생을 수좌(首座)로 석천(石川) 임억령과 한강(寒岡) 정구, 우산(牛山) 안방준 등 사현(四賢)을 배향(配享)한 사액서원으로 동복면 연월리 마을 뒤에 나지막한 산기슭에 있다.
동복면 소재지 시장 골목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서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마을 옆길을 따라 난 좁은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도원서원. 어느새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 싱그러운 여름을 재촉한다. 하지만 서원이 주는 이미지는 마을과 떨어져서인지 황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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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공손한 예를 갖추는 상읍례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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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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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에 이르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네 분의 선비들을 기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쓰는 등 제관복을 입은 40여명의 제관이 둥그런 원을 중심으로 섰다. 집례의 진행에 따라 상읍례(相揖禮)를 행한다. '상읍례'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서로 공경하는 예를 갖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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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마주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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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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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나 다른 서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다. 수 백년째 도원서원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독특한 의식인 것이다. 읍례에는 상읍례, 중읍례, 하읍례가 있는데 상읍례는 자기가 읍례를 했을 때 답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웃어른이나 의식행사에서 한다. 손을 공손하게 포갠 채 원을 중심으로 나아갔다 물러섰다를 몇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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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을 확인하고 있는 헌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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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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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읍례가 끝나자 헌관들이, 향사에 앞서 올릴 음식을 확인하는 의식이 이어진다. 이를 '제수확인'이라 하는데 곡물과 생 돼지고기 등 익히지 않은 음식을 준비한다.
도원서원은 크게 4위를 배향하는 사당(祠堂)과 강학(講學)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이뤄졌다. 동재에는 숭의재(崇義齋), 서재에는 집성재(集誠齋)와 '도원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서재는 강의를 했던 강당이요, 동재는 원장인 도유사(都有司)와 손님들이 묵은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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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학공간인 서재. 입구에서 볼 때 왼쪽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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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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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동서재 지붕이 시멘트 기와로 이어져 고풍스런 멋이 없어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 고풍스런 지붕을 새로 이어 옛 정취가 풍긴다. 서재 앞에는 큼직한 바위가 튀어나와 있어 눈에 띈다. 서원 주변에는 바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서원을 세울 때부터 이 터에 바위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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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 뒤쪽에 있는 연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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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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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뒤쪽에는 둥그런 연못이 있다. 비록 관리가 안돼 잡초만 무성하지만 처음 서원이 세워질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후손들이 당시를 재현해 다시 가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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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원서원 묘정비. 뒤쪽에 내삼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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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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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서원은 바깥 출입문인 외삼문(外三門)과 사당으로 연결되는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두개의 문 모두 맞배 솟을 삼문으로 내삼문에는 '발일문'(撥一門)이, 외삼문에는 '건공문'(虔恭門)이란 현판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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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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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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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는 신재 선생을 비롯 전 동복현감 석천 임억령과 한강 정구, 의병장을 지낸 우산 안방준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신재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춘향대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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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 최산두 선생의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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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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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명현(己卯名賢)이자 호남도학의 사종(師宗)으로 추앙받고 있는 신재(新齋) 최산두(1483∼1536) 선생. 신재는 광양 봉강면 부저리에서 태어나 15세 때에 주자강목 80권을 지고 석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글을 읽는 등 문장과 필법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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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에서 3년 동안 글을 읽었다. 석굴 위는 학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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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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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석굴에다 '자류동학사대'(自流洞學士臺)라는 글을 손수 새겼는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석굴위에 정자를 세우니 학사대(學士臺)다.
중종 8년(1513)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기묘년(1519)에는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의 벼슬에 올랐다가 사림파의 급속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의 모함으로 기묘사화의 화(禍)를 입고 동복현에 유배됐다. 그의 나이 37세. 이때부터 14년간 동복에서 귀양살이하며 후진양성에 전념한다. 하서(河西) 김인후, 미암(眉岩) 유희춘 등은 신재의 뛰어난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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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기슭에 있는 도원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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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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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는 유배생활 중 마음을 다스리며 산천을 거닐다가 화순적벽의 빼어난 경치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푸른 강물 위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소동파의 '적벽부'에 묘사된 진경(眞景)으로 보고 이 곳의 이름을 적벽이라 불렀으니 '화순적벽'이란 이름이 처음 명명된 것.
신재는 홍문관과 사간원에 머무르며 호탕한 필봉(筆鋒)으로 이름을 떨쳤다. 후대 사람들이 유성춘, 윤구와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이라 부르며 그의 학덕을 칭송했다. 선생은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조광조 양팽손 기준과 더불어 기묘(己卯) 사학사(四學士)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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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옥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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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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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신재에게 옥홀(玉笏)을 하사했다. '옥홀'은 벼슬아치가 임금을 알현할 때 관복에 차는 부장품. 1974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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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송광면에 있는 부조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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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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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54세 나이로 이곳 동복에서 생을 마치고 고향인 광양 봉강면에 안장됐다. 순천시 송광면 이읍리에는 신재 선생을 향사하는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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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원서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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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최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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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서원은 신재가 사망한 뒤 133년만인 1668년(현종 9년)에 지역 유림들에 의해 세워져 1688년(숙종 14년)에‘도원'(道源)이란 사액을 받으면서 도원서원으로 불렸다. 이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으며 신재 선생 후손들에 의해 1975년 유허비가 세워진데 이어 1977년 사당, 1978년 동서재가 복원됐다.
도원서원은 2001년 7월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됐으며 초계 최씨 대종회장인 최철규(한국스카우트 전남연맹장)씨가 향사를 주관하고 있다.
도학(道學)의 산실로 자리매김 해온 도원서원.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선비들의 얼과 혼은 도원서원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최연종 기자 (strong21@hanmail.net)
도원서원 [道源書院]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 있는 서원. 초계 최씨(草溪崔氏)의 시조이자 조선 전기의 문신 최산두(崔山斗, 1483∼1536년), 조선 중기의 무신 임억령(林億齡, 1496~1568년), 정구(鄭逑, 1543~1620년), 안방준(安邦俊, 1573~1654년) 등 4현(四賢)을 배향하고 있다.
1668년(현종 9)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창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 ‘도원(道源)’이란 사액을 받으면서 도원서원으로 불렸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나, 초계 최씨 후손들에 의해 1975년 유허비가 세워졌으며 1977년 사당, 1978년 동서재가 복원되었다.
경내의 구성은 크게 4위를 배향하는 사당과 강학(講學)을 위한 동재인 숭의재(崇義齋)와 서재인 집성재(集誠齋)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바깥 출입을 위한 외삼문인 건공문(虔恭門)과 사당으로 연결되는 내삼문인 발일문(撥一門)이 있는데, 두 문 모두 맞배지붕 솟을대문이다. 해마다 음력 3월 10일이면 춘향대제를 지낸다. 2001년 7월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도원서원은 최신재(崔新齋) . 임석천(林石川). 정한강(鄭寒岡). 안우산(安牛山)이 네어진 선비의 영령(英靈)을 받들고 그 학행(學行)을 추모하는 곳이다.
그윽히 살피건데 신재 선생은 휘는 산두(山斗) 초계인(草溪人)이니 성종 계묘년(1483)에 나시었다. 낳기 전날 밤에 북두성의 광채가 백운산 집 가운데로 뻗치어 상서(祥瑞)를 나타낸 까닭에 이로써 그 이름을 삼았다. 선생은 무작(無勺:13세 전후)의 나이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섭렵(涉獵)하여 그 뜻을 관통치 못함이 없었고 15세에는 주자강목(朱子綱目) 80권을 지고 백운산 석굴(石窟) 속에 들어가 3년여 동안 그 수미(首尾)를 내리 읽어 통독하기를 반복하던 중 문득 국가의 흥망성쇠의 기미(機微)가 유악(唯幄:朝廷 또는 謀臣) 가운데서 나타나고 선비의 출처(出處). 진퇴(進退)의 의(義)가 심목(心目)사이에서 판단됨을 깨닫고 비로소 굴문을 나왔다.
또한 일찍이 독학을 병되이 여겨 김점필재(金○畢齋). 김한훤당(金寒喧堂) 두 선생을 사숙(私淑)하여 그 학문적 연원이 정자(程子). 주자(朱子) 양 선생에 소원(溯源)하니, 문로(門路)가 이미 바른데로 나갔고 조예(造詣)가 더욱 깊었으며, 도(道)가 원대하여 그 밖이 없었으니 지부해함(地負海涵:땅과 바다)같이 큰 것이라 궁구(窮究)치 않음이 없어 그 이치를 밝힘이 정미(精微)하였다.
또 그 안이 없어 명주실이나 쇠털과 같이 미세한 것이라도 분변(分辨)치 않음이 없어 그 경지가 지극히 오묘한 데 들었다. 문장은 여사(餘事)로 하였으되 한번 붓끝을 움직이면 문득 문장을 이뤄내니 그 문예(文藝)가 웅호방일(雄豪放逸)하였고 그 지은 바 강목부(綱目賦)는 일세(一世)를 널리 회자(膾炙)하였다.
선생은 갑자년(150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중종 계유년(1513)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에 제수되었고 이어 박사(博士)에 오르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다시 홍문관에 들어 교리(校理)가 되니 이해에 임금께서 옥홀(玉笏)을 내사(內賜)하시었다. 얼마 안있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옮겼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호당(湖堂)에 드시었다. 기묘년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직하였고 이 해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겸 경연(經筵) 시강관(侍講官)으로 있던 중 사화(士禍)를 입으시었다.
선생은 조정암(趙靜菴:光祖). 김충암(金沖菴)선생 등 기묘제현(己卯諸賢)들로 더불어 조정(朝廷)의 사표(師表)요, 임금의 직신(直臣)으로서 지치(至治)의 이상을 실현코자 진력하여 마침내 요순 때의 임금과 백성처럼 그 지극한 다스림의 세상이 펼쳐질 날을 아침 저녁 사이로 기약케 되었더니 오호(嗚呼)라 하늘이 어찌 돕지 아니한다 말인가!
저 간악한 무리들이 독(毒)을 풍겨 어진 선비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니 선생 또한 동복(同福)에 찬축(竄逐)되어 이에서 14년간을 적거(謫居)하시었다.
선생은 적소(謫所)에서 강당(講堂)을 열고 도학(道學)을 강(講)하며 후진을 양성하시어 김하서(金河西) . 유미암(柳眉巖) 제현(諸賢)이 다 그 문하에서 나왔으니 아 실로 호남도학이 이에서 발원(發源)하였다 할진저!
병신년(1536)에 졸하시니 후에 유논(儒論)이 크게 일어 유림에서 문절(文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봉정(奉呈)하였다.
석천선생은 휘는 억령(億齡)이요. 선산(善山)이 그 본관(本貫)인데 선세(先世)에 해남(海南)에 옮아 살았다. 연산군 병진년(1496)에 탄생하시어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의 명으로 박눌재(朴訥齋) . 박육봉(朴六峯) 두 선생의 문하에 나가 수학하였다. 중종 병자년(15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유년(152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강원,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여러 요직과 의정부 사인, 승정원 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계사년에 모부인을 봉양하기 위해 동복현감을 자임(自任)하였고, 임인(1542)년에는 선위사(宣慰使)로서 영남(嶺南)에서 왜국(倭國) 사신을 맞이하였으며 병오년에는 금산군수, 갑인(1554)년에는 강원감사, 정사년에는 담양부사를 각각 배명(拜命)하였다.
선생은 그 품부(稟賦)가 기위(奇偉)하고 고결(高潔)하여 세속(世俗)을 따라 구차히 영합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여러 차례 간사한 무리들의 미움을 받아 늘 낙척불우(落拓不遇:불우한 환경에 처함)가운데 계시었다. 을사(1545)년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더욱 세사에 뜻이 없어 한결같이 염퇴(斂退)에만 뜻을 두시니 간간이 외직(外職)과 서반(西班:武官)에 등용(登用)되었으되 다 오래 머물지 않고 고사(固辭)하여 전리(田里)로 돌아와 임간(林間)을 소요하며 고서를 탐구하다 마침내 이로써 세상을 마치었다.
선생은 문장이 굉방준일(宏放俊逸:넓고 분방하며 뛰어남)하며 특히 시에 뛰어났고 붓을 한번 휘두르면 즉석에서 시를 이뤄내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선생의 시를 옮겨 읊고 외우기를 마지않았다. 일찍이 창평(昌平) 성산(星山)의 수석(水石)의 빼어남을 사랑하여 그 승지(勝地)을 가려 집을 짓고 기거하며 그 당(堂)을 『서하당(棲霞堂)』,『식영정(息影亭)』이라 편액(扁額)하고 문학에 잠심(潛心) 하시어 여기에 기(記)와 문(文)과 또 여러편의 제영시(題詠詩)들을 남기시었으며 해남(海南)으로 돌아온 뒤에도 오히려 이곳을 잊지 못하여 왕래하며 머무시기를 즐겨하시었다. 송강(松江) 정상공(鄭相公:澈)도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어 그 주옹(主翁)을 찬미하였으니 그 글이 지금에 이르도록 여러 악부(樂府)에 실려 전해 오다. 무진(1568)년에 졸(卒)하시니 후에 박현석(朴玄石)선생이 지은 묘표(墓表)에 기록하였기를 「당시 일세의 어진 선비들이 다 선생을 호남 명현. 일사(名賢.逸士)의 거벽(巨擘)으로 여기었다」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선생을 안 사람의 글이라 할진저
한강선생의 휘는 구(逑)요 청주인(淸州人)이니 중종 계묘(1543)년에 나시었다. 12세 때에 역경(易經)을 오덕계(吳德溪)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제자들에게 그를 칭찬하기를「鄭生은 너희들의 스승이다」고 하였다. 후에 이퇴계(李退溪:滉) . 조남명(曺南溟:植) 두 선생의 문에 나가 배우기를 힘쓰니 도(道)가 이미 정통하여 원근(遠近)의 선비들이 다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임금께서 특별히 불러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 보주(補註)를 완성하였다. 후에 창녕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 덕을 기렸다. 선조께서 불러 보시고 하문하시기를「이황과 조식은 어떠한 사람인가」하니 대답하기를「이황은 덕이 높고 학문이 순수하여 학자들이 길을 찾아들기가 쉽고 조식은 특별히 우뚝서서 홀로 감으로 학자들이 그 요체를 찾아들기가 어렵습니다」하였다.
선조5년 임금께서 널리 학자들을 불러 소학(小學), 사서(四書), 구결(口訣) 등의 책을 교정케 하였는데 선생께서 또한 부름을 받아 이에 참여하시었다. 또 선생께서 일찍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역경(易經)을 진강(進講)하신데 임금께서 묻기를 「程子의 易傳(주역해설서, 주로 그 뜻을 밝힘)과 주자(朱子)의 역본의(易本義:주역해설서, 주로 占說을 말함)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할것인가」하시었다. 선생께서 대답하여 아뢰기를 「역(易)의 도(道)는 소장영허(消長盈虛)의 이치를 밝혀 시중(時中:그때의 사정에 알맞음)을 잃지 않는 것이 먼저요, 한갖 점술(占術)로 제일을 삼는 것은 말(末)입니다」하였다. 경자(1540)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께서 돌아가시어 장사를 지내는데 요언(妖言)이 일자 선생께서 소(疏)를 올려 산릉(山陵)의 일을 논하였다.
그 2년 뒤에 부름을 받고 경서(經書)의 뜻을 교정하였고 오선생(五先生) 예설(禮說). 심경발휘(心經發揮) 등의 저술을 완성하였다.
특차(特次)로 대사헌을 배명(拜命)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고 임해군옥사(臨海君獄事)가 일어나자 차(○)를 올려 전은(全恩:부자.형제 간에는 죄가 있어도 은혜를 베풀어 생명을 온전히 해야 함)을 청하였다. 계축(1553)년에 정신(廷臣)들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논죄(論罪)하여 자전(慈殿:仁穆王后)을 별처(別處)에 유폐키를 청하자 선생께서 이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주선하고 또 글을 올려 대군의 무죄함과 자전을 별처에 유폐함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니 말이 심히 격렬하여 임금(광해군)의 뜻을 크게 거슬렸다.
경신년(1620)에 졸하시었고 계해(1623)년에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어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정유(1657)년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시었다.
우산선생은 휘는 방준(邦俊)이요, 본관은 죽산(竹山)이시다. 선조 계유(1573)년에 선생을 낳으니 기우(氣宇)가 출범(出凡)하고 기국(器局)이 원대하였다. 어려서 박죽천(朴竹川:光日). 박난계(朴蘭溪:宗挺) 두 어진 선비에게 수학하였고, 16세 때에 일찍 과거를 위한 공부를 버리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에 정진할 것을 결심하였다.
19세 때에 예를 갖추어 우계성선생혼(牛溪成先生渾)의 문하에 나아갔다. 선생께서 심히 중대(重待)하시고 글을 보내 권면(勸勉)하여 말씀하기를 「선비가 학문을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에 진실됨이 있어야 하니 힘써 공부를 하고 또 스승과 벗의 도움을 얻어서 안팎을 기르고 난 후에야 거의 얻음이 있다 할것이다」하니 이를 깊이 마음에 새겨 힘쓰시어 평생 힘을 얻음이 다 이에서 나왔다 한다.
우계선생이 돌아가신 후 정인홍(鄭仁弘). 기자헌(奇自獻)의 무리가 우계를 모함하여 죄를 씌움이 구천(九泉)에까지 미치니 이로부터 선생이 더욱 세사(世事)에 뜻을 두지 않으시었다.
신해년에 가족을 이끌고 서울 옛집으로 돌아오니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듣고 장차 선생과 결탁코자 하여 사람을 보내 뜻을 비치고 또 말을 내기를 「우산이 만약 나를 찾아 온다면 내가 우계 선생을 신원(伸寃)해 주겠다」하니 선생이 그를 피하고 보지 않다가 드디어 뜻을 정하여 향리로 돌아왔다. 식자(識者)들이 다 선생을 높이 우러렀다.
후에 관학다사(館學多士)들이 율곡(栗谷) . 우계 양선생을 문묘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자 바른 것을 더럽히기를 일삼는 무리들이 그 공의(公議)를 비방하고 무고하니 선생이 듣고 개연히 만여언(萬餘言)에 이르는 장문(長文)의 소를 올려 그 무고를 극력 변정(辨正)하니 선생의 소가 우뚝하여 여러 소들이 다 미치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이 소로써 백세의 한 공안(公案)을 삼았다. 경진(1580)년에는 소를 올려 화의(和議)의 그릇된 바를 지척(指斥)하고 이로 인해 화(禍)가 생겨나는 연유를 논단(論斷)하시니 그 언사가 통박(痛迫)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읽는 이마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였다.
기축(1613)년에 효종께서 즉위하여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시고 곧 장령에 승배(陞拜)한 후 계사년에는 다시 공조참의를 제수하시었다. 갑오년(1594)에 졸하시니 유시남(兪時南)선생이 지은 행장 가운데에 기록하였기를「선생의 높은 지절(志節)은 오늘날에 유례(類例)가 없을 만큼 희한하고 옛 사람도 따르지 못함이 있다 하였으니」이는 참으로 선생을 잘 알고 한 말이라 할진저! 무술(1658)년에 특별히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순조 계유(1873)년에 다시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신사(1881)년에 문강(文康)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상이 대개 네분 선생의 행적의 대강이요 선생들께서 한 당(堂)에서 제사를 받으시는 까닭이다.
대저 이 서원은 처음 현종 무신(1668)년에 창건되어 홀로 신재 선생을 향사(享祀)하여 오다가 그 10여년 뒤인 숙종 기미(1679)년에 석천. 한강. 우산 세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동왕(同王) 무진(1688)년에 임금께서 사액하고 제문을 내려 치제하시었다.
그후 고종 무진(1868)년에 이르러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정사(1977)년에 신재 후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이를 중건(重建)하고 원답(院畓)을 마련하였으며 다시 기사(1879)년에 신실(神室)이 비좁은 까닭으로 이를 헐고 대창(大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또 묘정(廟庭)에 그 비(碑)를 세우기로 하고 원임(院任) 기세은(奇世殷). 고운석(高云錫). 김행곤(金行坤). 위계도(魏啓道) 제유(諸儒)가 나란히 불령(不伶)을 찾아와 글을 구하므로 정복(丁○)이 늘 이들을 앙모해 오던 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여 이 글을 쓰고 이에 명(銘)하길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학문은 몸에 갖추었고 이름은 온 나라에 드러났네
백성을 기를 재주와 세상을 기울 덕으로
국가의 동량이요 유학(儒學)의 우익(羽翼)이셨어라
큰 도(道)를 품고서도 야속히도 배척받아
하향(遐鄕)에 머물며도
강당(講堂)을 크게 열고 영재(英才)를 길렀었네
사람마다 가르침 외고 도 펴서
고을에 예속(禮俗)이 전해내리니
자유(子游)의 무성(武城) 현송(絃誦) 다시 들리고
관녕(管寧)의 요동(遼東) 강학(講學) 다시 봄 같네
두 기둥 사이는 요전(○奠)이 끊이지 않으니
백세토록 풍운(風韻)이 그치지 않으리 」
서기1998(무인)년 3월 상순
후학파평(坡平) 윤정복(尹丁○) 글을 짓고
신재선생후손 문학박사 최길용(崔吉容) 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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